
그 세계에서 흔히 ‘피언니’ ‘피마담’으로 통하는 피미선씨는 룸살롱 업계 ‘2세대 大마담’의 대표격이다. 1970년대 중반 서울 소공동 일대에서 시작된 초기 룸살롱 마담들이 1세대라면, 강남에 터 잡은 후인 1980년대 초 ‘데뷔’한 피씨는 2세대에 해당된다.
사실 피씨는 돈 잘 벌기로 유명한 마담은 아니다. 그가 운영하는 업소 또한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룸살롱과는 분위기가 다소 다르다. 그럼에도 그가 10% 룸살롱의 ‘대모’로 통하는 것은 나름의 원칙과 상도의를 철저히 지키고, 그를 통해 신뢰할 만한 고급 단골들을 다수 확보하고 있으며, 마담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도박·사치·스캔들 등으로 구설에 오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10% 업소 치고 피마담 제자 없는 곳이 없다”는 말을 들을 만큼 수많은 ‘프로 선수’들을 배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최근 공직에서 사퇴한 남편, 두 자녀와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것도 이채롭다.
그 때문일까. 피씨의 단골 손님 리스트에는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기업인, 정치인, 고위 공직자, 군장성, 명사들이 망라돼 있다. 역대 대통령 아들들도 모두 고객이었다. 피씨는 이들과 ‘형’ ‘동생’ ‘누님’ ‘미선아’로 통한다. 국내 굴지 재벌가의 3세들도 피씨에게는 예외 없이 ‘동생’ 또는 ‘○○야’다. 매너가 엉망인 손님은 지위와 상관없이 피씨의 독한 질타와 매운 손맛을 보게 된다. 그래서 피씨에게 붙은 또 하나의 별명이 ‘변방의 무법자’다.
고위층·명사들과 “형” “동생”
피씨는 “이 세계에서 손님들과 인간적 유대를 맺고 ‘물장사’가 아닌 ‘장사꾼(경영자)’ 대접을 받으려면 속속들이 ‘남자’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리, 낭만, 인간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떻게 하면 손님들 등쳐 먹을까만 궁리해서는 진정한 大마담이 될 수 없다.” 이렇게 일갈하는 피씨에게서 1960 ~70년대 명사들의 회상에 종종 등장하는 ‘밤세계 여걸’의 이미지가 짙게 풍겼다.
-먼저 유흥업에 몸담게 된 배경을 좀 설명해 주시죠.
“저는 서울에서 1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부잣집 외아들로 태어나 평생을 한량처럼 사신 분이고, 어머니는 교육열이 대단한 여장부 스타일이었어요. 아버지는 집 앞에 걸인이라도 지나면 마당에 불러놓고 꼭 새 밥을 지어 대접할 만큼 손도 크고 정이 많았습니다. 아버지의 그런 점을 제가 많이 닮았죠. 제가 여고 3학년 시절 집안이 갑자기 어려워졌습니다. 아버지가 이런저런 것들로 가산을 다 탕진해버린 거예요. 아버지는 행방이 묘연하고, 어머니는 몸져눕고, 오빠는 입대해버리고, 언니는 선천적 장애가 있어 누군가 늘 옆에 붙어 있어야 하는 상황이고. 결국 돈 벌어올 사람이 저밖에 없었습니다.”
-그럼 여고시절부터 직업 전선에 뛰어든 겁니까.
“일단 학교는 졸업해야겠더라고요. 등록금과 최소한의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신문배달을 했습니다. ‘동아일보’를 돌렸는데, 주말이면 그 때 막 입주를 시작한 잠실 아파트에 달려가 이삿짐을 날라줘가며 부수확장을 했죠. 덕분에 학교를 간신히 졸업할 수 있었어요. 여고시절 제 꿈이 정치가였거든요. 그런데 집안 사정이 그러니 어쩝니까. 운동을 좀 하는 편이라 장학금 받을 욕심으로 체육학과에 진학했죠. 사실 사정도 안 되면서 오기로 들어간 대학이었어요. 학교에는 이름만 올려놓은 채 닥치는 대로 일거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남대문시장 좌판에서 옷장사도 했어요. 그런 제가 안쓰러웠던지 한 선배언니가 일자리를 알아봐 줬는데, 그게 바로 룸살롱에서 노래를 부르는 일이었습니다.”
-‘아가씨’가 아니라 가수로 시작했군요.
“예, 학교 축제 때 제가 노래하는 걸 보고 잘한다 싶었나봐요. 1학년 2학기 때부터 소공동의 한 룸살롱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밴드와 함께 룸에 들어가 노래 두세 곡으로 분위기를 띄워주는 게 제 일이었어요. 청바지에 티셔츠 걸쳐 입고, 노래만 부르는 게 아니라 모창이나 우스개 같은 ‘개인기’도 함께 선보였죠. 그래야 제 단골도 생기니까요. 손님들이 팁을 주면 30%는 가게 전무(지배인)에게 주고 70%는 제가 가졌습니다. 막일하던 때랑 비교하면 힘도 한참 덜 들고 수입도 훨씬 많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