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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 성폭행 피해가족들의 그 후

남자만 보면 숨는 민지, 이름 바꿔달라고 매달리는 윤아

  • 글: 강지남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layra@donga.com

아동 성폭행 피해가족들의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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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폭행을 당한 뒤 경찰과 검찰, 법원에 차례로 불려나가 끔찍한 기억을 몇 번씩 끄집어내야 했던 아이. 가해자가 법의 처벌을 받는다 해도 아이는 그 무서운 ‘사고’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지 못한다.
  • 몇 년이 지나도록 고통스런 후유증이 피해 어린이와 그 가족을 괴롭히는 것. 그러나 이들을 위한 사회적 지원체제는 믿기지 않을 만큼 열악하다.
아동 성폭행 피해가족들의 그 후
“범인은 잡혔어요. 하지만 우리 가족은 여전히 고통 속에서 살고 있어요.”

지난 5월 딸 하늘이(가명·10)를 성폭행한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 40일 동안 경기도 일대를 뒤진 김모(47)씨의 사연이 보도돼 화제가 됐다. 많은 이들은 ‘S빌라’ ‘B마트 광고전단지’란 단서만 갖고 기어이 범행장소를 찾아낸 모정에 감동했고, 마침내 범인이 잡혔다는 소식에 안도했다. 그러나 김씨 가족은 여전히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씨는 5월28일 아동성폭력피해자가족모임(대표·송영옥) 회원들과 함께 국가인권위원회를 찾았다. 피해 가족들은 ‘피해아동이 여러 차례 진술을 반복해야 하는 현행 법 체제가 아동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진정서를 냈다. 홀로 범인의 흔적을 찾아헤매느라 얼굴엔 잔뜩 기미가 끼고 입마저 왼쪽으로 약간 돌아간 김씨는 진정서 접수를 마치고 서둘러 서울 강남의 한 병원으로 향했다. 하늘이의 심리검사 결과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얼마 전 하늘이와 함께 TV를 보고 있었어요. 여자아이가 성폭행당했다는 뉴스가 나오니까 하늘이가 이래요. ‘또 하나 터졌네. 엄마, 저거 별거 아냐.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아주 흔해.’ 하늘이는 점점 냉소적으로 변하고 말씨도 험악해져요. 어떻게 해줘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담당의사는 “하늘이는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되고 불안한 상태라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지만, 본인이 치료를 완강히 거부하니 좀더 지켜보다가 문제가 커지면 다시 오라”고 권했다. 심리검사를 위해 두 차례 병원을 찾았던 하늘이는 “병원에서 그런 얘기 하는 거 너무 창피하다”며 울부짖었다. 병원 문을 나선 김씨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김씨는 아이가 사라진 3월19일부터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하늘이는 성폭행을 당한 뒤 다니던 보습학원을 그만뒀다. 요즘에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방에 처박혀 컴퓨터에만 매달린다. 시험을 치면 늘 90점 이상 받을 만큼 공부를 잘했던 하늘이는 며칠 전 80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와서는 “이게 뭐야, 이럴 순 없어…” 하며 속상해했다. 그러나 김씨는 그 일 이후 하늘이가 공부에 집중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며칠 전에는 느닷없이 검도를 배우겠노라고 선언했다.

“남편이 ‘왜 아저씨를 따라갔냐’고 다그치니까 아이가 힘들어합니다. 남편과 제 사이도 나빠졌어요. 남편이 부부관계를 요구할 때마다 자꾸 하늘이가 생각나서…. 하늘이는 점점 말수가 줄어가는데, 전 요즘 아무나 붙잡고 쓸데없는 얘기를 늘어놓는 버릇이 생겼어요. 범인은 우리 가족을 모두 죽인 거나 다름없어요.”

후유증 평생 지속되기도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발생한 성범죄 사건 중 피해자가 만 12세 이하인 사건은 599건에 이른다. 피해자가 만 6세 이하인 사건도 105건이나 된다. 그러나 이 수치는 실제로 발생하는 아동 성폭행 사건 중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해 전국 104개 성폭력상담소의 집계 결과 4만8112건의 성폭행 상담 중 피해자가 13세 이하인 경우는 5598건으로 11.6%에 달했다. 어린이 스스로 입을 다물거나 부모가 성폭행 사실을 공개하기 꺼리는 정서를 감안한다면, 대한민국에서 아동 성폭행은 교통사고처럼 언제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흔한 ‘일상사’ 가운데 하나인 셈이다.

아동 성폭행을 심각한 사회문제로 봐야 하는 것은 사건 자체의 흉악할 뿐 아니라 피해 어린이가 두고두고 고통스러운 후유증을 겪기 때문이다.

피해 어린이들은 대개 심각한 후유증을 앓는다. 전문가들은 “성폭행에 노출된 기간과 강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불안, 공포, 위축, 퇴행, 성의식 장애 같은 증세가 나타난다”고 말한다. 후유증은 ‘사고’ 후 몇 개월 이내에 사라질 수도 있지만, 심한 경우 몇 년간 혹은 평생 지속된다.

윤아(가명·9)는 성폭행을 당한 지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공포와 불안을 떨쳐내지 못하고 지낸다. 2001년 가을, 초등학교 1학년이던 윤아는 같은 동네 6학년 남자아이 9명으로부터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 맞벌이하는 부모와 학원에 간 오빠가 집을 비운 사이에 놀이터에서 만난 남자아이들이 윤아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칼을 들이대고 위협했던 것이다.

경찰에서 울다 실신해가며 사건을 진술한 윤아는 “이사 가자”고 부모를 졸랐다. 이듬해 2월 경기도 수원으로 이사하자마자 윤아는 “내 이름 싫어. 바꿔줘”라며 매달렸다. 가족들은 윤아가 새 이름표를 달고 새 학교로 전학하고 집안 가구까지 모조리 바꿨으니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올 초 윤아의 증세는 다시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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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지남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lay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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