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첫 전쟁이라 일컬어지는 아프간전쟁에서 탈레반 정권이 미국에 패하는 바람에 근거지를 잃었지만, 빈 라덴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최근의 잇단 폭탄테러 사건들에서 빈 라덴이 던진 메시지는 무엇일까. 이라크전쟁에서 압승한 뒤 “테러와의 전쟁에서 우리는 중요한 승리를 거뒀다”고 선언한 부시 미 대통령에게 “우리의 지하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도전장을 던진 건 아닐까.
그렇다면 좀 이상하다. 폭탄공격 대상이 왜 미국이 아니라 사우디이고 모로코인가. 빈 라덴이 추구하는 목표 가운데 하나는 이슬람의 신성한 땅에서 미국세력을 몰아내고, 친미적이고 세속적이며 부패한 이슬람 정권을 무너뜨린 다음 이슬람 신성(神聖) 국가를 세우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사우디와 모로코의 두 왕조는 타도대상이다. 사우디는 5000명의 부패하고 무능한 왕족이 모든 실권을 거머쥐고 이교도인 미군들로 하여금 예언자 마호메트의 땅인 사우디 영토 안에 군사기지를 세우도록 허락했다. 모로코 왕정도 친미·친이스라엘이란 잣대로 보면 영락없는 타도대상이다. 빈 라덴과 알 카에다 조직원의 눈에 비친 사우디나 모로코의 지배자들은 한마디로 이슬람 정신을 버린 배교자(背敎者)들이다.
전세계 지하드닷컴(jihad.com)의 회장 격인 빈 라덴의 ‘경영 마인드’로 볼 때 사우디와 모로코는 알 카에다의 새로운 요원을 모집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텃밭이다. 사우디 왕정은 정치 민주화는 물론 경제정의에조차 관심이 없는 집단이라, 사우디 국민들의 왕정체제에 대한 불만은 매우 높은 편이다. 정당과 국회도 없어 의회민주주의와 거리가 멀고, 언론출판과 집회결사의 자유도 없다. 경제사정도 험악하다. 지난날 1인당 국민총생산(GDP) 면에서 세계적 수준을 자랑했지만, 지금은 겨우 1만달러에 머문다. 그것도 5000명의 왕족을 중심으로 부(富)가 쏠려 있어 일반 국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매우 크다.
사정은 모로코도 마찬가지다. 모로코의 왕정 독재는 악명이 높다. 그러면서도 친미·친이스라엘 정책을 펴고 있다. 게다가 빈부 차이가 극심하다(미 CIA 분석자료에 따르면, 2001년 1인당 평균 GDP는 3700달러, 실업률 23%). 소수의 왕족과 그에 빌붙은 소수 기업인들만 살찌우는 기형적인 사회구조다. 제1도시 카사블랑카의 변두리 빈민촌들은 아프리카 저개발국의 전형적인 비참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바로 이런 사회적 불만이 빈 라덴으로선 알 카에다 신규요원 모집 등 세력을 키우기에 더없는 조건인 것이다.
“부패 친미왕조를 타도하라”
사우디 왕정은 알 카에다가 빈 라덴의 연고지인 사우디에 대해서는 테러공격을 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5월 수도인 리야드 외국인 주거단지에서 발생한 폭탄테러는 알 카에다의 대미 항쟁전략에서 사우디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줬다. 사우디에서 벌어진 테러공격을 알 카에다가 저질렀다는 증거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미 연방수사국(FBI) 국장 로버트 밀러 3세는 “리야드 자살폭탄공격 행태는 전형적인 알 카에다의 수법”이라고 주장했다.
서방 정보기관들은 알 카에다의 투쟁전술 목표가 미국과 유럽에서 이슬람 국가로 바뀌고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경비가 삼엄한 서방의 공공건물보다는 알 카에다가 타도대상으로 삼고 있는 이슬람 국가의 보다 수월한 목표물을 공격하는 쪽으로 공격전술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2002년 4월 튀니지의 휴양섬인 제브라의 유대인 교회(시너고그)를 폭파, 20명이 죽은 것도 알 카에다의 소행으로 여겨진다.
사우디와 모로코에서 보듯, ‘신성한 이슬람 땅을 더럽히는’ 미국인을 비롯한 서구인과 유대인을 공격하는 것은 이슬람 세계에 빈 라덴의 강력한 투쟁 메시지를 직접 던지는 효과가 있다. 이는 아울러 알 카에다 신규요원을 충원하고 세력을 넓힐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아프간-이라크 두 전쟁이 끼친 영향
이슬람권의 반미감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다. 필자는 팔레스타인, 아프간, 카슈미르 취재 때마다 현지인들이 미국에 대해 내보이는 거부감을 확인하며 새삼 놀라곤 했다. 미국은 아프간전쟁과 이라크전쟁에서의 승리로 반미의 싹이 잘려나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휴화산마냥 내부에서 타오르고 있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세계적인 여론조사기관인 퓨(Pew) 리서치사가 6월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슬람권에서 빈 라덴 지지율은 부시 미 대통령 지지율보다 높다. 모로코의 경우 빈 라덴 지지율이 49%인 데 비해 부시 지지율은 2%에 불과하다. 요르단(55% 대 1%), 인도네시아(58% 대 8%), 터키(15% 대 8%) 등 다른 이슬람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슬람권에서 빈 라덴의 지지율이 부시보다 낮게 나타난 나라는 쿠웨이트(19% 대 62%)와 레바논(14% 대 17%)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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