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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 밤 지배한 사이렌이요, 음악마녀

아시아의 가희(歌姬) 덩리쥔

  • 최창근|대만 전문 저술가, 한국외국어대 박사과정 caesare21@hanmail.net

인민의 밤 지배한 사이렌이요, 음악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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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콩 영화 ‘첨밀밀’(1996)의 삽입곡 ‘첨밀밀(甛蜜蜜·꿀처럼 달콤한)’과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달빛이 나의 마음을 대신하네)’은 대만 출신 가수 덩리쥔(1953∼1995)이 부른 노래다. 덩리쥔의 노래는 범중화권과 아시아를 강타했다. ‘중국의 낮은 라오 덩(老鄧·덩샤오핑)이 지배하고, 밤은 샤오 덩(小鄧·덩리쥔)이 지배한다’는 말이 회자됐다. 한국에서 최근 ‘가희(歌姬) 덩리쥔’ ‘등려군: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하죠’가 나란히 출간됐다. ‘첨밀밀’ ‘월량대표아적심’을 리메이크한 노래도 나왔다.
천커신(陳可辛) 감독의 1996년 영화 ‘첨밀밀(甛蜜蜜)’이 한국 개봉 20주년을 맞이해 다시 한 번 은막에 올랐다. 1984년 ‘중·영 공동성명’에 따라 1997년 7월 1일 중국으로 주권 반환이 예정된 1980년대 후반 홍콩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우리를 아련한 추억으로 안내한다.

영화 ‘첨밀밀’의 마지막 장면은 뉴욕 맨해튼의 전파상 앞이다. 텔레비전에서는 한 사람의 죽음 소식이 전해진다. 서로 다른 길을 걷던 리밍(黎明)과 장만위(張曼玉)는 흠모하던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를 보며 발걸음을 멈춘다. 우견(偶見)의 기쁨을 두 사람은 미소로 대신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즈음엔 동명(同名) 주제곡 ‘첨밀밀’이 배경음악으로 나온다.

리밍과 장만위의 만남과 헤어짐, 이역만리에서 재회를 다룬 영화의 ‘보이지 않는 주인공’은 한 여성가수다. 영화에서 두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결정적 순간에는 그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뉴욕 거리에서 다시금 인연을 이어준 것도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 소식이다. 생전 2000여 곡의 주옥(珠玉)을 세상에 남기고 떠난 그의 노래를 두고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의 노래를 노인들이 들으면 웃음꽃 피고, 중년이 들으면 고민을 잊으며, 젊은이가 들으면 달콤한 기분에 빠지고, 어린아이가 들으면 춤을 춘다.”

그와 동갑내기인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젊은 시절 그의 노래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듣고 또 들었다”고 고백한다.



노래로 남녀노소를 사로잡고, 목소리로 국경을 넘어 아시아인을 하나 되게 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2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사람들은 그를 그리워한다. 기일인 5월 8일 즈음이면 추모 음악회가 개최돼 동료·후배 가수들이 그가 세상에 남긴 주옥같은 명곡을 부른다. 그가 영면(永眠)한 대만 타이베이(臺北)시 외곽 신베이(新北)시 진바오산(金寶山) 묘역은 추모객들이 가득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스물두 해가 흘렀지만 추모 열기는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그는 ‘등려군’이라는 우리식 발음으로 더 익숙한 덩리쥔(鄧麗君)이다.



아시아의 밤을 노래하다

1995년 5월 8일, 4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덩리쥔은 자타가 공인하는, 명실상부한 중화권 최고 스타다. 그의 삶과 목소리는 세상을 달리한 지 2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까지 여운을 남긴다. 덩리쥔의 이름 앞에는 ‘아시아의 가희(歌姬)’ ‘영원한 연인’ ‘10억의 박수소리(十億個掌聲)’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덩리쥔은 1953년 1월 29일, 대만 윈린(雲林)현 바오중(褒忠)향의 톈양(田洋)촌에서 태어났다. 국민혁명군 장교이던 아버지 덩수(鄧樞)는 허베이(河北)성 사람이고, 어머니 자오수구이(趙素桂)의 고향은 산둥(山東)성이다. 1949년 국·공 내전에서 패한 중화민국 정부와 함께 대만으로 터전을 옮긴 외성인(外省人)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덩리쥔의 원향은 중국 본토다. 부모의 고향이자 마음의 고향인 중국은 덩리쥔의 삶을 통틀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덩리쥔의 본명은 ‘덩리쥔(鄧麗筠)’으로 ‘아름다운 대나무’ ‘대나무처럼 곧고 바른 성정’이라는 뜻이 담겼다. 아버지 덩수는 고명딸에게 좋은 이름을 지어주고자 한학(漢學)에 조예가 깊던 자신의 상관에게 도움을 청했다. 상관은 ‘리쥔’을 추천했다. 이는 청(淸)대 저명 여성작가 진단생(陳端生)의 ‘재생연(再生緣)’의 여주인공 멍리쥔(孟麗君)과도 발음이 같았다. 다만 ‘리쥔(麗筠)’은 타이완 사투리 발음이 있는 현지 사람들에게 발음하기 힘든 이름이었고, 자연 ‘리쥔(麗君)’이라는 잘못된 발음으로 불리게 되었다. 훗날 가수로 공식 데뷔할 때 예명으로 사용한 ‘리쥔(麗君)’이 본이름을 대신했다.

 어린 시절 덩리쥔의 집은 가난했다. 군 하급 장교이던 아버지는 퇴역해 장사를 시작했지만, 결과가 신통치 않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집안의 유일한 딸이던 덩리쥔은 어려서부터 노래와 춤에 재능을 드러내 가족을 웃음 짓게 했다.

덩리쥔이 여섯 살 때인 1961년 가족은 타이베이 외곽 루저우(蘆洲)로 사는 곳을 옮겼다. 이곳에서 그는 어머니 손을 잡고 대만 북부 첫 천주교회 루저우천주당(蘆洲天主堂)으로 발걸음을 했고, 테레사(Teresa)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훗날 해외 활동 시 사용한 예명 ‘테레사 덩’도 여기서 유래했다.

루저우에서 덩리쥔은 ‘새로운 인연’도 쌓았다. 그의 유일무이한 모교가 되는 루저우초등학교(蘆洲國民小學)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임청하’라는 한국식 발음으로 더 익숙한 배우 린칭샤(林靑霞)와 평생 이어지는 우정이 시작됐다.

초등학교 시절 덩리쥔은 운명의 전기를 맞이한다. 93강악대(康樂隊·밴드) 얼후(二胡) 연주자 리청칭(李成淸)을 만난 것이다. 아버지 덩수와 동향 사람이던 그는 덩리쥔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제자 삼아 노래와 연주를 가르친다. 리청칭의 지도하에 덩리쥔의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그러곤 93강악대를 따라 군 위문공연을 다니며 가인(歌人)의 길을 걷는다.


歌人의 길

‘소녀가수’ 덩리쥔의 진가를 알린 것은 1963년이다. 이 무렵 경극영화 ‘황매조(黃梅調)’가 선풍적인 인기였다. 중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인 이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대만 중화라디오(中華廣播電臺)는 ‘황매조가요콘테스트(黃梅調歌唱比賽)’를 주최했다. 만 10세, 초등학교 3학년이던 덩리쥔은 이 대회에 참가해 영화 주제곡 ‘방영대(訪英臺)’로 우승했다. 이후 각종 노래대회, 공연장을 종횡무진하며 가수로서 재능을 한껏 드러냈다.

1965년 덩리쥔은 가톨릭계 사립학교 타이베이 진링여자중학(金陵女中)에 입학했다. 공부와 노래를 병행했기에 학업에는 자연 소홀해졌고, 공부와 노래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학교 측으로부터 강요받았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던 덩리쥔은 결국 휴학을 결정했다. 언젠가 교정으로 다시 돌아올 것을 기약하고 학교를 떠났지만 그러지 못해 ‘진링여자중학 중퇴’가 최종학력으로 남는다.

 덩리쥔은 1967년 우주(宇宙)레코드사와 계약해 첫 음반 ‘펑양화고(鳳陽花鼓)’를 녹음했다. 가단(歌壇)에 선 덩리쥔은 곧 안방극장도 파고들었다. 1969년 중국방송(中國電視)이 방영한 대만 첫 연속극 ‘징징(晶晶)’의 주제곡 ‘징징’이 덩리쥔 몫으로 돌아왔다. 드라마와 주제곡은 대히트했다. 덩리쥔은 은막(銀幕)의 세계에도 입문했다. 1969년 영화 ‘감사합니다! 사장님(謝謝!總經理)’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된 것이다. 갓 입사한 대졸 여사원이 회사에서 난관을 겪으며 문제를 해결하다 젊은 사장과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의 이 영화에서 덩리쥔은 여주인공 역할과 더불어 총 10곡의 사운드트랙 전곡을 불렀다.



일본 입국 금지 처분

1970년대 들어 덩리쥔은 홍콩, 싱가포르 등 범(汎)중화권을 넘어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각국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그중 1971년 개봉한 영화 ‘노래에 빠진 아가씨(歌迷小姐)’는 ‘테레사 덩’의 이름을 해외에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무렵 각종 드라마, 영화 주제곡을 불러 인기를 끌었는데, 드라마 ‘바다갈매기 나는 곳(海鷗飛處)’의 주제곡 ‘해운(海韻)’과  ‘꽃구름(彩雲飛)’의 주제곡 ‘끝없는 말(千言萬語)’ 등이 대표적이다. 이 노래들은 오늘날까지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

1974년 덩리쥔은 ‘데레사 덴(テレサ・テン)’이라는 예명으로 일본에 진출했다. 유니버셜레코드 계열의 레이블 일본 폴리도르(Polydor)레코드와 계약한 덩리쥔은 1974년 3월 첫 일본어 싱글앨범 ‘오늘밤일까? 내일일까?(今夜かしら 明日かしら)’를 발매했다. 흥행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고심 끝에 아이돌 스타일 팝에서 엔카 장르로 바꿔 같은 해 6월, 두 번째 일본어 싱글앨범 ‘공항(空港)’을 발매했다. 이 곡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해 연말까지 75만 장 넘게 판매됐다. 제16회 일본레코드대상 신인상도 안겼다. 이후 1975년 ‘설화장(雪化粧)’ ‘여자가 사는 보람(女の生きがい)’ ‘밤 승객(夜の乗客)’, 1976년 ‘밤의 페리보트(夜のフェリーボート)’ ‘고향은 어디세요?(ふるさとはどこですか)’ 등 일본어 싱글 곡을 연달아 발표하며 인기 행진을 이어갔다.

일본에서 성공가도를 달리던 ‘데레사 덴’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1979년이다. 같은 해 2월, 덩리쥔은 인도네시아 여권을 사용해 일본에 입국했고, 이 일이 문제가 돼 일본 입국관리사무소에 구금됐다. 이후 강제 추방, 1년간 일본 입국 금지 처분을 받았다. 1971년 10월 중화민국의 유엔 퇴출, 1972년 9월 대(對)일본 단교, 1979년 1월 대(對)미국 단교로 이어지던 대만의 외교상 고립 속에서 출·입국상 불편을 겪던 터에 인도네시아 화교 여성이 마련해준 여권을 사용한 것이 화근이었다.


군인들의 영원한 연인

‘인도네시아 여권 사건’으로 덩리쥔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행을 택했다. 미국에서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면서 ‘가수로서 본분’도 잊지 않아 미국, 캐나다 순회공연을 이어나갔다. 그중 뉴욕 링컨센터 무대에 ‘중국계 여가수’로서 최초로 섰다.

1980년 9월 도미(渡美) 1년 7개월여 만에 덩리쥔은 고국 대만으로 돌아왔다. 외교적 고립 속에서 ‘자강(自强)’을 다짐해야만 했던 대만 정부는 ‘자강활동’의 주역으로 ‘국민가수’ 덩리쥔을 지목했다. 풍파를 일으킨 여권사건은 불문에 부치고, 그를 고국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다시 대만으로 돌아온 덩리쥔은 군(軍) 위문공연에 주력해 ‘군인들의 영원한 연인’이라는 별칭을 얻었고, 1981년 대만 정부는 ‘애국연예인상’ 수여로 보답했다.

1983년 덩리쥔은 일본 진출의 주역 후나키 미노루(舟木稔)가 새로 설립한 토러스(Taurus, トーラスレコード)레코드와 계약 후 일본에 재진출했다. 그중 당대 최고 작곡가 미키 다카시(三木たかし)와 ‘일본 국민 가곡’으로 불리는 ‘사계절의 노래(四季の歌)’ 작사·작곡을 한 저명 작사가 아라키 도요히사(荒木とよひさ)가 힘을 합쳐 만든 1984년 곡 ‘속죄(償い)’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이 앨범은 총 150만 장이 판매됐고, 연말 일본 간토(關東)·간사이(關西) 지역 최고 음악상인 제17회 일본유선대상과 제17회 전일본유선방송대상을 석권했다. 더불어 제10회 일본엔카대상 베스트히트상도 품에 안았다. 이후 아라키·미키 콤비가 작사·작곡한 1985년 곡 ‘애인(愛人)’, 1986년 곡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時の流れに身をまかせ)’로 일본유선대상, 전일본유선방송대상 3년 연속 수상 기록을 이어갔다. 그중 덩리쥔 최대의 히트곡으로 기록된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는 180만 장 넘게 판매됐고, 오늘날까지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곡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이후로도 1986년 ‘스캔들(スキャンダル)’, 1987년 ‘이별 예감(別れの予感)’, 1988년 ‘연인들의 신화(戀人たちの神話)’가 인기 행진을 이어가며 ‘데레사 덴’은 일본 가요계에서 신화를 썼다.



양안 해빙의 봄바람

덩리쥔은 대만, 홍콩, 동남아시아 각국과 일본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노래여왕’으로 자리를 굳혔다. 다만 그의 원향이자 대만해협 건너 중국 본토는 금단의 땅이었다. 1949년 국·공 내전에서 패한 중화민국 정부의 대만 천도, 같은 해 발포(發布)된 ‘대만지구 계엄령’하에서 중국과의 교류는 엄격히 제한됐다. 이런 가운데 덩리쥔은 부모님의 고향이자 마음의 고향인 중국 땅에는 발을 디딜 수 없었다. 더불어 그는 국민혁명군 장교의 딸이자 대(對)중국 체제 선전방송의 핵심 인물이었다. 군 위문공연에도 발 벗고 나서 ‘군인들의 영원한 연인’이라는 별칭까지 얻은 터였다. 중국 당국에 덩리쥔은 요주의 인물이었고, 경계 대상이었다.

중국 당국은 덩리쥔을 경계했지만, 인민은 그녀의 노래를 사랑했다. 1976년 마오쩌둥(毛澤東) 사망, 1979년 덩샤오핑(鄧小平) 집권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개혁·개방 파고 속에서 덩리쥔의 노래는 대만해협을 건너 중국 인민의 귀를 파고들었다. 중국인들은 덩리쥔의 달콤한 목소리를 들으며, 지난한 세월이 가져온 피로를 풀었다. 덩리쥔의 노래는 양안 해빙을 불러오는 봄바람이었다.

당국의 공식 금지에도 ‘님은 언제 다시 오시려나((何日君再來)’ ‘작은 마을 이야기(小城故事)’를 위시한 덩리쥔의 노래가 인기를 끌자 중국 당국은 경각심을 가졌다. 중국 정부는 덩리쥔의 노래를 ‘정신오염 상징물’로 낙인찍었다. ‘망국지음(亡國之音·나라를 망치는 음악)’ ‘미미지음(靡靡之音·퇴폐음악)’ ‘포르노 음악’ 등의 딱지도 붙였다. 덩리쥔의 노래는  카세트테이프라는 신기술 보급에 힘입어 퍼져나갔다. 중국 당국의 공식 추산만으로 불법복제 테이프가 2억 개에 달했다.

중국 정부의 공식 금지에도 덩리쥔에 대한 중국인의 사랑은 깊어만 갔다. 최고지도자 덩샤오핑에 빗대 ‘낮에는 덩샤오핑의 말씀을 듣고, 밤에는 덩리쥔의 노래를 듣는다’ ‘중국의 낮은 라오 덩(老鄧·덩샤오핑)이 지배하고, 밤은 샤오 덩(小鄧·덩리쥔)이 지배한다’는 말이 회자됐다. 중국 당국 입장에서 대만가수 덩리쥔은 인민의 밤을 지배하는 사이렌(Siren)이요, 일종의 음악마녀였다.


“나는 민주주의를 사랑한다”  

1980년대 중반, 중국 개혁·개방의 기수 후야오방(胡耀邦) 중국공산당 총서기 체제하에서 중국은 ‘덩리쥔 중국 대륙 공연’을 추진했다. 그의 높은 인기와 상징성을 대(對)대만 통일 전선에 활용하려 한 것이다. 대만에서도 1987년 대만지구 계엄령 해제, 1988년 장징궈 사망과 민주화로 해빙 무드가 조성됐다. 이 속에서 중국 정부는 덩리쥔 중국 방문과 공연을 추진했다. ‘덩리쥔 해금(解禁)’도 자연스레 이뤄졌다. 이는 늘 원향을 그리워하던 덩리쥔도 바라는 바였다. 그는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100만 인파가 몰려들어 자신의 공연을 관람하는 꿈을 꾸었다. 덩리쥔 중국 공연은 시간문제로 비쳤다.

1989년 봄, 덩리쥔의 꿈은 깨졌다. 그해 4월 15일, 후야오방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세상을 떠났다. 개혁·개방 정책 추진 중 당내 보수파에 밀려 실각한 그를 학생·시민들은 톈안먼 광장에서 애도했다. 이는 후야오방 명예 회복을 요구하는 시위로 번졌다. 5월 13일, 베이징대 학생이던 왕단(王丹), 베이징사범대학의 우얼카이시(吾爾開希) 등 학생운동 지도자를 중심으로 전국에서 모인 학생들이 톈안먼 광장에서 연좌 단식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 인파는 100만 명을 넘어섰다. 중국 당국은 이를 난동으로 규정하고 ‘베이징 지구 계엄령’을 선포했다.

톈안먼에서 긴장의 수위가 점차 높아지던 5월 27일, 홍콩 해피밸리 경마장(跑馬地馬場)에서는 베이징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는 ‘중화에 바치는 민주 노랫소리(民主歌聲獻中華)’ 콘서트가 열렸다. 덩리쥔은 ‘민주만세(民主萬歲)’라 쓴 머리띠를 두르고, ‘아애민주(我愛民主·나는 민주주의를 사랑한다)’ ‘반대군관(反對軍管·군 개입 반대)’이라 쓴 피켓을 몸에 건 채 무대에 섰다. 그는 ‘우리 집은 저 산 너머(我家在山那邊)’를 부르며 베이징 시위 학생들에게 힘을 보탰다.



1995년 태국에서 타계

민주화·개혁을 요구한 베이징 시위는 6월 4일 대규모 유혈사태로 마무리 됐다. 덩샤오핑은 사태를 ‘반혁명·반동사건’으로 규정했다. 6·4 톈안먼 사건은 원향 중국 방문을 희망하던 덩리쥔에게 충격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던, 그토록 가고 싶던 모국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을 탱크로 깔아뭉갰다. 덩리쥔의 중국 방문을 끈질기게 권유하던 중국 당국의 연락도 해피밸리 경마장 콘서트 이후 끊겼다.

덩리쥔은 일본 진출 15주년을 맞아 1989년 10월 28일 도쿄방송이 녹화한 ‘데레사 덴 15주년 스페셜’ 방송 모두(冒頭)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중국인입니다. 세계 어디에 있어도 어디서 살아도 저는 중국인입니다. 따라서 올해 중국의 모든 사태에 대해 가슴 아파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미래는 어디로 가는지 많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저는 자유롭게 살고 싶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유가 위협받는다는 것이 너무 슬픕니다. 다만 이런 슬프고 괴로운 마음도 언젠가는 사라지겠죠. 누군가는 반드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날이 오리라 믿으며 노래하겠습니다.”

이 같은 메시지를 전한 덩리쥔은 중의적 의미를 담은 곡 ‘슬픈자유(悲しい自由)’를 부르며 눈물을 훔쳤다.



님은 언제 다시 오시려나

1990년대 들어 덩리쥔은 의기소침했다. 그간 가수 활동이 가져온 피로가 쌓였다. 6·4 톈안먼 사건은 충격이었다. 덩리쥔은 대만, 홍콩, 일본, 파리를 오가며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방송이나 공연장에 얼굴을 내미는 것도 눈에 띄게 뜸해졌고, 1991년 12월 홍콩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추후 자선공연을 제외한 공개 공연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992년 12월 발매한 ‘잊을 수 없는 테레사 덩(難忘的 TERESA TENG)’을 끝으로 중국어(보통화) 앨범을 발매하지 않았다. 1994년 6월 대만 중화방송(中華電視)이 주최한 황푸군관학교 개교 70주년 기념 콘서트 ‘영원한 황포(永遠的黃埔)’에 출연한 것이 타이완에서 마지막 공연 참가였다. 이후 같은 해 10월, 일본 센다이(仙臺)에서 열린 자선 가요 콘서트 참가를 끝으로 일본에서 공식 활동도 접었다.

몸과 마음이 지친 덩리쥔의 몸을 병마가 갉아먹고 있었다. 지병인 천식 증상이 악화됐다. 이후 타이완, 홍콩, 태국을 오가며 요양을 했으나 증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1995년 5월 8일 태국 앙마이에서 천식 발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유해는 5월 11일 타이완으로 운구됐다. 리덩후이(李登輝) 대만 총통은 고인을 칭송하는 ‘포양령(褒揚令)’을 선포했다. “예술계에서 그 향기가 높이 받들어진다”는 뜻을 담은 ‘예원양분(藝苑揚芬)’ 만장(輓章·죽은 이를 슬퍼해 지은 글을 쓴 깃발)도 수여했다. 대만 교무위원회(僑務委員會·화교업무 담당 부처)는 ‘군인들의 영원한 연인’이라는 별칭처럼 군 위문공연에 공헌한 그를 기려 ‘삼군포장(陸海空軍褒狀)’, 위대한 중화인의 의미를 담아 ‘화하일등장장(華夏一等奬章)’을 추서했다. 5월 28일, 전 세계 팬 3만여 명이 몰려든 가운데 덩리쥔의 장례는 준국장(準國葬)으로 치러졌다. 정례식 규모가 장제스(蔣介石)·장징궈(蔣經國) 부자(父子) 총통 장례에 버금갔다. 민간인으로서는 유례없는 일이었다. 장례위원장은 덩리쥔과 오랜 인연이 있던 대만성 성장(省長) 쑹추위(宋楚瑜)가 맡았다. 그는 ‘애국예술인 덩리쥔소저 묘지명(愛國藝人鄧麗筠小姐墓誌銘)’을 친필로 썼다. 생전 모습 그대로 방부 처리해 안치된 덩리쥔의 관에는 중화민국(대만) 국기인 청천백일만지홍기(靑天白日滿地紅旗)와 국민당기인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가 덮였다.

덩리쥔은 바다 건너 중국, 홍콩, 일본이 내려다보이는 신베이(新北)시 진산(金山)구 진바오(金寶)산 자락의 ‘균원(筠園·덩리쥔의 본명 덩리쥔(鄧麗筠)의 마지막 글자에서 유래한 묘소명)’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다.

22년 전 세상을 떠난 덩리쥔은 오늘날까지 전 세계 ‘용의 후예(龍的傳人)’들이 가장 사랑하는 가수다. 화인(華人)들이 사는 곳마다 그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덩리쥔은 ‘원조 소셜테이너’였다. 중국의 민주화를 위해 목소리를 높였고, 소외받는 이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이런 그이기에 사람들은 ‘님은 언제 다시 오시려나’를 부르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님(君·덩리쥔)을 영원히 그리워한다. 그가 세상에 남긴 노래는 여전히 가슴을 울린다.




최 창 근 
● 1983년 경남 고성 출생  
● 한국외국어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대만 국립정치대 석사
● 한반도선진화재단 연구원 
● 現 한국외국어대 행정학 박사과정, 동아시아학통섭 포럼 총무이사
● 저서 : ‘ 대만 : 거대한 역사를 품은 작은 행복의 나라’ ‘타이베이 : 소박하고 느긋한 행복의 도시’ 
● 논문 : ‘대만의 원자력발전소건설은 어떻게 중단 되었는가 : 정책옹호연합모형의 적용’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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