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호

어른들을 위한 리뷰

영화 ‘택시운전사’ 안에 ‘춘향전’ 있다

‘택시운전사’와 ‘화려한 휴가’ 그리고 춘향전과 레비나스

  • 권재현 기자|confetti@donga.com

    입력2017-08-27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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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고전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작품 중 하나가 ‘춘향전’이다. 교과서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묻곤 한다. 춘향전에서 제일 중요한 장면이 어느 대목이라 생각하느냐고. 열에 아홉은 ‘암행어사 출도요’ 하는 장면을 꼽는다. 다시 묻는다. 그럼 ‘이몽룡전’이어야지 왜 춘향전이겠냐고. 그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답을 묻는다. 그럼 짓궂게 답한다. “친일파인 이인직도 아는 걸 당신은 왜 모르시냐”고.

    전통 소설을 신소설로 바꿔 쓴 이인직이 춘향전의 제목으로 택한 게 ‘옥중화’다. 옥에 핀 한 떨기 꽃이란 소리다. 신임 사또의 수청 들기를 거부했다고 옥에 갇힌 춘향에게 한줄기 희망은 이몽룡이었다. 그런데 ‘백마 탄 왕자님’이 되어 나타날 줄 알았던 몽룡이 거지꼴로 나타났다. 모든 희망이 거품이 되어 사라진 것이다.

    그때 열여섯밖에 안 된 이 소녀의 반응이 어떠했는가. ‘이 길이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 할지라도 나는 나의 길을 걸어갈 터이니 사랑하는 저 사람에게 내 남은 것을 다 줘 고이 보내달라’고 오히려 어머니에게 읍소한다. ‘원나잇 스탠딩’도 마다 않고 사랑 타령만 하던 철부지 소녀가 부당한 공권력에 무릎 꿇느니 꽃다운 목숨을 버리겠노라며 민중의 영웅으로 거듭나는 장면이다. 회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인간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 당당히 그 운명의 십자가를 짊어지겠다는 일대의 윤리적 전회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야말로 니체가 말한 ‘운명을 사랑하라’(아모르 파티)의 실천이란 점에서 춘향전 최고의 명장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여기에 대고 ‘일부종사’라는 유교적 가치관을 들이대는 것이야말로 춘향에 대한 모독이다.



    춘향 만섭과 몽룡 피터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면서 춘향전이 떠오른 것은 두 작품이 모두 호남을 무대로 해서만은 아니다. 부당한 공권력이 행사될 때 인간적 위엄을 지키기 위해 가시밭길 걷기를 마다하지 않는 윤리적 전회의 진한 감동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올해 한국영화 최대 수작이라 할 ‘택시운전사’를 ‘춘향전’과 오버래핑해보면 이는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장훈 감독의 ‘택시운전사’는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카메라에 담아 세계에 알린 ‘푸른 눈의 목격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그를 태우고 서울과 광주를 오간 택시기사 김사복의 실화를 극화한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 만섭(송강호)이 춘향이라면 그의 손님인 독일기자 피터(토마스 크레취만)는 몽룡이다. 사실 만섭에겐 춘향의 모습만 있는 게 아니다. 그 어머니인 월매의 속물적 모습도 함께 서려 있다. 10만 원이란 거금이 탐나 1980년 5월 계엄령이 선포된 광주까지 왕복운행을 가로챌 뿐 아니라 광주에 도착한 뒤 그 실상을 목도하고 겁에 질려 달아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피터는 그런 만섭의 속물근성을 바로 간파한다. 몽룡이 춘향에게 접근할 때 기생 출신인 월매의 속물근성을 십분 활용한 것처럼 피터 역시 위기상황마다 지폐로 만섭을 어르고 달랜다. 만나자마자 첫눈에 반한 춘향-몽룡 커플과 달리 만섭-피터 커플은 그렇게 서로에 대한 오해와 경멸로 관계 맺음을 시작한다.

    이런 냉랭한 관계는 광주에서 벌어지는 신군부의 무자비한 만행 앞에서 돈독한 관계로 변해간다. 그것은 피터가 ‘암행어사’임을 만섭이 서서히 깨닫게 되면서부터다. 광주로 잠입한 그가 찍은 영상이 7년 뒤 전두환 군부정권의 ‘봉고파직(封庫罷職)’을 예고한다는 점에서 피터는 암행어사인 셈이고, 그의 카메라는 마패인 셈이다. 이는 집회 중인 광주시민들이 카메라를 앞세운 피터를 열렬히 환영하는 장면에서도 확인된다. 그와 함께 이 영화 속 변학도가 누구인지도 확실해진다. 영화에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전두환이다.

    하지만 돈 때문에 멋모르고 광주에 왔던 만섭은 적나라한 폭력 앞에 공포를 느낀다. 그래서 손님을 버려두고 도망갈 생각을 한다. 그것도 두 번이나. 두 번째는 손님 피터마저 이해해준다. 아내를 먼저 저세상에 보내고 초등학생 외동딸 은정(유은미)을 홀로 키우고 살아가는 가장의 선택을 누가 손가락질하랴. 그래서 새벽녘 혼자 빠져나가는 만섭을 붙잡지 않는다. 심지어 그들에게 하룻밤 숙식을 제공한 광주 택시기사 황태술(유해진)을 통해 약속했던 10만 원도 보내준다.


    만가성인의 미학

    ‘보지 못한’ 만섭과 ‘봐버린’ 만섭은 결코 같은 사람일 수 없다. 피터를 광주에 남겨두고 홀로 상경길에 오르던 만섭이 불현듯 깨달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개인을 넘어서 자신을 닮은 무수한 대한민국 사람들에 대한 생각으로 확장된다. 보지 못한 그들도 봐버린다면 달라지지 않겠는가. 그 판도라의 상자를 열 사람이 누구인가. 카메라를 들고 고군분투하고 있는 저 이방인 아닌가.
     
    ‘택시운전사’는 이렇게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성 속에서 구원의 연쇄효과를 발견해낸다. 이는 춘향전에서도 발견된다. 몽룡이 암행어사 신분을 감추고 춘향이 사건에 대한 민심을 떠보는 장면이다. 농부들은 춘향이 겪고 있는 봉변을 기생집 딸년의 스캔들로 취급하지 않는다. 힘없고 약한 민중에 대한 폭정을 상징하는 정치적 사건으로 받아들인다. 일상을 위협하는 정치 앞에 나와 너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혜안을 갖췄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춘향의 투쟁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폭정에 신음하는 민중의 투쟁으로 격상된다.

    이런 타자성의 연쇄효과는 피터에게도 적용된다. 만섭을 알기 전과 (비록 김사복이라는 가명일지언정) 만섭을 알고 난 후 피터가 대하는 한국 택시가 같을까. 저 수많은 택시 중 하나를 그가 ‘내 친구’라고 부르는 만섭이 몰고 있다 생각될 때도 여전히 심드렁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만섭과 피터의 재회라는 해피엔딩으로 영화를 마무리하지 않은 선택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다.

    만가성인(滿街聖人)이라는 말이 있다. 온 거리에 성인(聖人)이 가득하다는 뜻이다. 구원이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성과 익명성 속에 숨어 있다는 깨달음이 담긴 말이다. 지극히 평범한 제목의 이 영화에서 그 만가성인의 비범한 경지를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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