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전쟁 때 38선 以北에서 첩보 수집
- 1965년 황해도 연백 침투 납치 공작
- 월남 파병 때 北 사리원비행장 감시
- 실미도 사건 거치면서 자료 소각·인멸돼
그해 10월 31일자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10월 29일 오후 4시 25분쯤 강화군 함박도 근해 개펄에서 조개잡이 하던 어부 232명이 무장한 북괴군 20여 명의 공격을 받아 그중 97명이 납치되고 135명이 무사히 탈출했다.”
동아일보는 이튿날(11월 1일자) ‘잔인한 붉은 만행…분노의 개펄 100리’ 제하 상보를 실으면서 “어부 232명이 공격을 받아 112명이 납북됐다”고 앞선 조선일보 보도 내용을 정정했다.
“이번 사건은 북괴의 만행이 가장 큰 원인인 것은 물론이지만 섬 주민의 가난한 약점을 이용해 돈벌이에 눈이 어둔 선주가 어로 금지 구역에 출어시킨 무모한 처사를 꼽지 않을 수 없다.”(동아일보 11월 1일자)
납북 어부들은 그해 11월 21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감시의 눈총 속에 낮에는 교양강좌를 듣고 밤에는 억지구경”을 했다고 한다. 1965년 늦가을, 어부 납북 사건의 ‘기록된 역사’는 여기까지다.
정영훈(87·예비역 대위) 공군정보전우회 간사는 안개가 자욱하던 그날 영락호에서 북한군을 향해 대응사격을 했다. 영락호, 영미호를 그가 지켰다. 1965년 10월 29일 NLL 이북 수역에선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국가가 지워버린 軍人
정부 공식 보고에 따르면 6·25전쟁 때부터 1만3000명을 양성했고 그중 7726명이 임무 수행, 훈련 과정에서 죽었다. 군사기밀이란 네 글자에 숨어 오랫동안 잊혔으되 베트남전쟁 때 국군 전사자(5066명)보다 많은 이가 북파공작에 동원돼 사망한 것이다.
2014년 11월 현재 육군 6030명, 해군 1243명, 공군 398명이 ‘특수임무 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국가 보상을 요구했다. 육군·해군은 신청자 대부분이 보상받았으나 공군은 신청자도 적고 인정받은 이도 소수다. 1971년 실미도 사건 때 기록이 소각·인멸된 탓이다. 정영훈 간사가 국가유공자증서를 받은 것은 2008년 9월 29일이다. 78세가 돼서야 조국을 위한 헌신을 인정받은 셈이다. ‘이명박 대통령’ 직인이 찍힌 국가유공자증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우리 대한민국의 오늘은 국가유공자의 공헌과 희생 위에 이룩된 것이므로 이를 애국정신의 귀감으로서 항구적으로 기리기 위해 이 증서를 드립니다.”
북파 공작은 1945년 분단 직후 시작됐다. 미군 극동군사령부 소속 첩보부대 KLO(Korea Liaison Office)와 민간 유격대가 38선 이북으로 넘어가 공작을 벌였다. 1·4후퇴 이후 본격화한 북파 공작에서 북한에 침투해 활약한 이들은 대부분 비(非)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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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해안 침투”
“월남 전투부대 파병이 시작되고 한일국교정상화 논의가 이뤄질 때예요. 1964년 귀순한 한◯◯, 이◯◯가 위장 간첩으로 확인됩니다. 두 사람이 ‘북한이 사리원비행장에서 AN-2기를 발진시켜 여의도와 마포나루를 타격해 월남 파병과 한일국교정상화를 방해할 계획’이라고 증언합니다.”그는 특명을 받고 영미호, 영락호 2척을 빌려 사리원비행장 감시와 북한 기관원 납치 공작에 나섰다. 당시 공군 2325부대 말도파견대장(중위)이던 유인수(77) 씨의 증언은 이렇다.
“정영훈 씨 등은 인민위원장을 납치할 목적으로 북한 연백군 해성면 용적리에 침투해 특수임무를 수행했다. 사리원비행장 정보를 입수하라는 상부 특명에 따라 정영훈 지휘하에 하길수 외 2명이 북한 청산리 해안에 침투해 그곳에서 대기 중이던 정영국과 접선한 후 본대로 귀환했다. 또한 숭어잡이 하는 북한 어민을 납치하고자 시도했으나 5~6명씩 모여 작업해 실패했다.”
정영훈 간사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말도는 1·4 후퇴 때부터 북파 공작의 요지였습니다. 말도 이장에게 독립가옥을 거점으로 알선받은 후 영미호, 영락호를 공작선으로 삼아 NLL을 넘었죠. NLL 이북으로 넘어가면 항상 만선이었습니다. 대합은 너희가 차지하는 대신 우리를 도우라고 어민들을 회유했죠. 조개잡이 어민으로 위장해 북한 기관원 납치 활동을 벌였습니다. 북한 해주 인근에 무인도가 있습니다. 정영국이 그 섬에서 망원경으로 사리원비행장을 감시했고요.”
그러던 중 1965년 10월 29일 오후 4시경 북한군 20여 명이 기관단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기습해왔다.
“5회 북파 공작 후 6회 때 눈치챈 것 같아요. 영미호, 영락호에서 김진선, 윤충광과 말도파견대 대원 김대중 병장이 나와 함께 M1 소총으로 대응 사격에 나서 북한군 접근을 막았습니다. M1 소총의 사거리가 250m인 반면 북한군 기관단총은 50m여서 어부 120명을 구출할 수 있었습니다. 어선 1척은 북한군의 수류탄 공격을 받아 침몰했고요. 어부들과 함께 말도 해병대 경비초소로 귀환했습니다.”
그와 공작원들은 AN-2기의 주·야간 비행훈련 상황과 연안 주변 동태를 감시했으나 특이 사항을 발견하지 못했다.
“한◯◯, 이◯◯가 허위 첩보를 제공한 것으로 결론 내렸습니다. 우리의 공작 활동이 베트남 참전과 한일국교정상화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데 기여했다고 봐요.”
그의 병적 기록은 1954년 9월 소위로 임관해 정보학교를 마친 뒤 특무전대 정보운영과원(1956년), 공군본부 정보국원(1957년), 미국 공군 정보학교 연수(1957년), 정보교육대 교관실장(1963년), 제23정보대 232파견대장(1963년) 등으로 복무한 후 공군본부 정보국 항공목표과원(1965년 8월)을 끝으로 전역한 것으로 돼 있다. 90특무대 경력과 북한 침투 공작은 물론 적혀 있지 않다.
“공작원 대부분 사망해”
“재판 결과가 흥미로운 게 김◯호 씨는 실제로는 미군 6006부대가 아니라 90특무대 소속이었다는 겁니다. 함흥교화소에 수감돼 있다가 국군에 의해 석방된 후 평양에 침투해 공작 활동을 벌인 대단한 분입니다. 미군 6006부대와 90특무대가 함께 공작 활동을 벌인 터라 공작원 중엔 자신이 미군 소속이었던 것으로 잘못 아는 사람도 많아요.”
실미도 대원 유족에게도 국가 배상 판결이 나온 적이 있다. 2008년 10월 20일 서울중앙지법은 실미도에 끌려가 북파 공작 훈련을 받다 동료들로부터 구타를 당해 사망한 이모 씨의 동생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이씨에 대한 위자료 1억 원 등 1억86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한 것이다. 유족이 국가로부터 이씨의 사망 사실을 통보받은 것은 2006년이다.
90특무대 제부도파견대 6명도 특수임무 수행자로 인정받았다. “제부도 교육대가 형식적으로는 미군 소속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대한민국 공군에 소속돼 공작 업무를 담당한 만큼 국군 소속으로 봐야 한다”고 2014년 11월 21일 대법원이 판시했다.
공군 기록에 90특무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자료는 다 불탔다. 근거는 이것밖에 없다”면서 서류를 내밀었다. 공작원들이 90특무대의 각 파견대 명단을 복원한 것이다. 그는 최근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변호사 없이 직접 소송을 진행한다.
“제부도 동지들은 법무법인을 통해 소송에 나서 승소했습니다. 공작원 대부분이 죽었고, 유가족들은 다들 형편이 어려워요. 변호사를 찾아갔더니 착수금만 500만 원이라더군요. 다들 나만 쳐다보고 있어요. 조국을 위한 무명의 헌신을 대한민국이 인정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