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남 이유는 ‘한국이 싫어서’
- 유흥업소 떠도는 탈북女들
- “명절 때 北 다녀오기도”
그는 한국에 거주하는 탈북민이다. 1997년 탈북해 한국엔 2008년 입국했다. 10대 때 북한을 탈출해 어머니와 동생을 구출하는 데 10년 넘는 시간을 바친 탈북 여인의 사연을 듣다 보면 사무치는 감정이 일어난다. TED 강연 동영상의 영어 액센트처럼 한국어 발음이 또박또박하다. 세계를 돌면서 북한 인권 실태를 알리고 있다.
“나 돌아갈래”
“한국 생활은 바라던 것과 달랐죠. 중국 교포라고 말해야 일자리 구하기가 수월합니다. 그래서 신분을 숨겼어요. 강원도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중국에서도 신분을 숨겼는데, 한국에 와서도 그래야 하는 게 싫었습니다. 중국은 내 나라, 내 땅이 아니지만 한국은 다르잖아요. 상하이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죠.‘고향이 강원도’라고 하면 ‘강원도 어디예요?’ ‘학교는 어디 나왔어요?’라고 묻습니다. 거짓말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거죠. 지금은 ‘북한에서 왔어요’라고 곧바로 말합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불평할 게 아닌 것 같아요. 남북이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살다 보니 멀어진 것뿐입니다.”
그가 한국에 살면서 겪은 가장 힘든 일은 2010년 어머니와 함께 북한에서 탈출시킨 남동생이 한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탈남입북(脫南入北)을 결심한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고 그는 회고한다.
“남동생이 북한으로 돌아가겠다면서 북중 국경지대까지 갔습니다. 국경도시에서 전화를 걸어왔어요. 하늘이 노랗더군요. 한국 여권 가진 애가 북한에 가면 두 나라에서 다 범죄자가 됩니다. 죽을힘 다해 설득했습니다. 남동생은 한국에 다시 돌아와 잘 적응했어요. 저를 잘 따라줬고요. 너무나 고맙죠.”
남동생은 2016년 2월 미국 ◯◯대학(⁎신분 노출을 막고자 대학 명을 밝히지 않는다)으로 유학을 떠났다. ◯◯대는 미국의 명문 사립대다.
“직장 못 잡아 탈선”
전혜성(25·방송명 임지현) 씨는 올해 6월 탈남입북했다. 평안남도 안주 출신인 그는 19세 때 가족을 두고 혼자 탈북해 중국에서 살다 2014년 태국을 거쳐 한국에 입국했다. 방송 ‘애정통일 남남북녀’ ‘모란봉 클럽’에 출연해 얼굴을 알렸다.전씨의 탈남입북은 북한 대외선전용 매체 ‘우리민족끼리’가 7월 16일 ‘반공화국 모략선전에 이용된 전혜성이 밝히는 진실’이라는 제목의 27분 50초 분량 동영상을 게시하면서 전해졌다. 우리민족끼리가 공개한 동영상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2014년 1월 탈북했고, 6월 조국(북한)의 품에 안겼다. 돈을 벌 수 없을까 하는 생각에 괴뢰 TV에 출연해 임지현이라는 가명을 썼다. 한국에서 돈을 벌고자 술집 등을 떠돌아다녔지만 돈으로 좌우되는 남조선에서 육체적·정신적 고통만 따랐다. 남조선 생활은 지옥 같았다. 고향에 있는 부모님 생각에 하루하루 피눈물을 흘렸다.”
그는 동거남을 중국에 두고 한국으로 망명한 후 유흥업소에서 일했다. 중국에선 음란방송에 출연했다. 탈북→음란방송 BJ→한국 입국→유흥업소→방송인→탈남입북한 것이다. 그와 가깝게 지낸 한 탈북 여성은 “중국에서 촬영한 성인용 동영상이 인터넷을 통해 퍼져 압박감을 느낀 것으로 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혜성이가 우리민족끼리 동영상에 나와 한 말의 절반은 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젊은 탈북 여성이 가장 많이 일하는 데가 어디인 줄 아세요? 북한에서 왔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직장을 못 잡으니 유흥업소를 전전하는 등 탈선할 수밖에요.”
전씨의 입북 경위는 확인되지 않았다. 네 갈래 설(說)이 엇갈린다. ①자발적 입북 ②비자발적 입북 ③간첩 ④납치가 그것이다.
“너 왜 왔어?”
주 교수의 한국 생활도 녹록하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비무장지대(DMZ)를 넘어왔으나 누구도 환영해주지 않았다. 한국은 냉혹했다. 북한도 아닌 한국에서 난생처음 굶었다. 향수(鄕愁), 가족에 대한 죄책감, 상대적 박탈감 탓에 분노가 일었다. “왜 왔어?”라는 질문에 “나 돌아갈래”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정신적 좌절이 행동으로 발현해 극단적 선택도 시도했다.
그는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탈북민 정착 문제와 통일 과정에서 남북 화합 방안 연구에 천착해왔다. 최근엔 탈북민의 탈남입북과 한국 이탈 문제를 연구한다. 탈남입북과 관련한 기고문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탈남(脫南)하는 탈북민이 한때는 동유럽으로, 한때는 서구권으로 가더니 최근엔 북유럽 사민주의 국가로 발길을 돌린다. 개중엔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국제 미아로 떠도는 이도 적지 않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 와서 대학을 마치고 가정을 이룬 절친한 친구는 별말 없이 짐을 싸고 있다. 최근에는 K대를 졸업하고 반듯한 직장에서 근무하던 같은 고향 출신의 형이 두 딸을 데리고 사라졌다. 그와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이 행여 북한으로 간 게 아닐까 수군거리지만 나는 안다. 어디로 갔든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리란 사실을. 하지만 그들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 적막함과 쓸쓸함은 이곳에 남은 사람들이 지고 가야 할 묵직한 괴로움이다.”
北 돌아가려 밀항하다 붙잡혀
그는 “나는 운이 좋았다”고 했다. 2001년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탈북민으론 처음으로 국회의원 비서관을 지냈다. 대성그룹에서 일하다 2008~2010년 미국에서 연수했다. 현재는 더불어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에서 일한다. 연세대 재학 시절 만난 부인은 공인회계사(한국전력공사 근무)다. 딸 둘을 뒀다.
그가 한국에 들어온 지 1년 만에 밀항을 시도한 까닭은 북한에 있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탈북민에게 복수여권이 발급되지 않던 시절로 북한에서 망명한 이들은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할 때다.
그는 밀항 시도 실패 이후에도 합법적·공개적으로 북한에 갈 방법을 찾았다. 탈북민 최초로 당국의 허가를 받아 금강산 관광을 다녀왔으며, 주중 북한대사관을 찾아 고향 방문 신청을 했다(2005년). 전혜성 씨 일로 입길에 오른 탈남입북을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북한을 탈출하는 것보다 한국에서 적응하는 게 더 어려운 게 현실입니다. 아내와 두 딸을 낳아 가정을 이루지 않았다면 북한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나고 자란 곳이 북한이니까요. 한국에선 부모님도 볼 수 없고, 친척도 만나지 못하죠.”
이렇듯 세계가 주목한 탈북인 이현서 씨, 한국에서 밑바닥(유흥업소)과 화려함(방송)을 경험한 전혜성 씨, 탈북민 1호 통일학 박사 주승현 씨, 탈북해 성공한 것으로 손꼽히는 김형덕 씨에게도 탈남입북은 남의 얘기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탈남입북은 한때 스쳐가는 바람이 아니라 분단체제의 질곡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앞서 사연을 소개한 주승현 교수를 8월 4일 만나 ‘탈북민의 한국 이탈’을 주제로 대화했다. 그는 탈남입북 문제를 학문적으로 연구해왔다.
▼‘애정통일 남남북녀’ ‘모란봉 클럽'에 출연한 전혜성 씨가 북한으로 되돌아가면서 탈남입북이 입길에 오른다.
“그간 언론이 주목하지 않았을 뿐이다. 전씨가 방송인으로 활약한 것과 ①자발적 입북 ②비자발적 입북 ③간첩 ④납치 등 입북 경위를 두고 엇갈린 설(說)이 나와 관심이 높아졌다. 김정은 집권 이후 기자회견 등의 방식으로 북한 당국이 공개한 탈남입북자만 25명이다. 탈북민 사회에서는 150~200명가량이 북한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추정한다.
자발적 입북 사례가 생각보다 많다. 전씨의 경우도 자발적 입북인 것으로 보인다. 숙식하던 고시원을 정리했고, 남자친구에게 ‘북한에 갈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납치설이나 간첩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전씨가 2016년 여름에도 탈납입북을 시도한 것으로 탈북민 사회에 알려져 있다.”
“10명 중 6명 사라져”
▼납치나 비자발적 입북일 수도 있다.“북한의 가족에게 어떤 일이 생겨 비자발적으로 입북했을 소지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으나 드러난 정황으로 볼 때 자발적 입북이라고 봐야 한다.”
▼북한의 가족이 돌아오라고 회유하는 경우도 있나.
“북중 접경지역에 고향을 둔 탈북민은 대부분 북한의 가족과 통화한다. 중국 휴대전화나 유심칩을 이용해 북한에서 중국 통신망을 이용해 국제전화를 하는 방식이다. 한국에서 번 돈을 중국의 브로커를 통해 북한으로 송금하는 것도 일반화했다. 북한에서 걸려온 회유 전화를 받고 고민하는 탈북민도 있다. 북한 보위기관이 중국으로 유인하거나 회유하기도 한다. 다양한 방법으로 탈북민을 회유하는 것이다. 탈북민들의 페이스북만 들여다봐도 고구마 줄기 캐듯 연락할 수 있다.”
▼주 교수 주변에도 탈남한 이가 있나.
“10명 중 6명이 사라졌다. 북한으로 간 건 1명이다. 다른 5명은 북미와 유럽으로 이주했다. 고향 친구 중 생일이 가장 빠른 친구 집을 명절 때마다 모이는 ‘큰집’으로 삼았다. 큰집 노릇을 하던 친구가 한국을 떠나고 순둥이 같은 친구가 큰집을 떠맡았다. 아무것도 안 할 것 같던 녀석이 작년부터 짐을 떠맡은 것이다. 이러다가 다음에는 내 차례가 올 수도 있겠다는 마음으로 추석을 맞고 있다.”
▼북미나 유럽은 어떤 방식으로 가나.
“젊은 친구들은 유럽으로 많이 간다. 가족이 있는 사람은 캐나다나 호주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은 독신으로 사는 이들이 주로 선택한다. 과거에는 북한에서 바로 온 것처럼 위장해 난민 신청을 했다. 한국 정부가 난민 신청이 이뤄지는 나라들과 탈북민 신상 정보를 공유한 뒤로는 여행 목적으로 입국해 불법 체류하는 형태가 많다.”
“분단의 사생아 끌어안으라”
“1996년 임진강을 통해 탈북했다 2004년 북한으로 되돌아간 최◯◯씨로 인해 탈북민 사회가 술렁였다. 최씨는 한국 금융기관에서 일했는데 그곳 돈을 횡령해 입북했다. 북한이 그 돈을 최씨 것으로 인정해줬다. 평양이 탈남입북을 부추기고자 최씨를 이용한 것이다. 탈북민이 북미나 유럽 호주로 떠나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 전부터다.”
▼탈남입북했다 재탈북한 이들은 어떻게 사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교도소에 수감된다. 유◯◯씨가 유명하다. 1998년 탈북했다 2000년 북한으로 되돌아간 후 한국에 재입국했다. 유씨는 수형생활을 마친 후 마음이 또 바뀌어 북한으로 보내달라고 시위를 벌였다. 현재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으로 안다. 2013년 탈남입북 후 북한 방송에 출현해 한국을 비난하던 김◯◯ 씨 부부도 재탈북해 한국 교도소에 있다. 우산공장 지배인으로 일하던 남◯(이름이 외자다) 씨도 탈북→입북→재탈북한 사례다.”
▼탈남입북이 어렵지 않은 모양이다.
“탈북해 한국에 온 이들은 마음이 독한 사람들이다. 입북은 탈북해 한국에 오는 것보다 쉽다. 여권이 없는 상태에서 한국에 들어오는 게 어렵지, 한국 여권을 갖고 중국에 갔다가 북한으로 들어가는 것은 매우 쉽다. 북한 당국이 누가 탈북해 한국에 와 있는지 일일이 알 수 없다. 중국에서 살다 북한에 돌아온 것으로 말하면 그만이다. 한국에서 은행 대출을 받은 후 입북한 사례도 있으며, 명절 때 중국을 거쳐 북한에 가 가족을 만나고 한국에 되돌아온 경우도 있다. 2013년 연평도에서 배를 구해 북한으로 돌아간 이◯◯ 씨처럼 특이한 방식으로 한국을 떠나기도 한다.”
▼한국을 떠나는 이유는 뭔가.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이 싫어서인 것 같다. 경력 단절로 인한 취직의 어려움, 경제적 빈곤으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 북한에 남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 탈북민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올해 3월 북한인권정보센터(NKDB) 설문에서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답한 탈북민이 20.8%에 달했다.”
▼한국을 떠난 탈북민 수는 어느 정도로 추정되나.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연구자마다 다른데 탈남했거나 한국을 떠났다 되돌아온 이를 합해 5000명에 달한다는 시각도 있다. 탈남한 사람과 탈남했다 돌아온 사람을 합해 2000명 정도라는 보수적인 추정이 실제에 부합해 보인다.”
▼탈북민의 탈남은 통일학 박사로서 호기심이 생기는 연구 주제겠다.
“호기심이라는 표현은 옳지 않다. 연구 가치가 높은 사회현상이긴 하다. 탈북 양상이 변화했다. 체제 경쟁 시기에는 정치적 귀순이 많았다. 휴전선을 통해 군인이 넘어오거나 해외 공관원이 한국으로 망명했다. 1990년대 중반 시작된 북한의 경제난은 생존형 탈북을 낳았다. 생존형 탈북은 먼저 입국한 탈북민이 북한의 가족이나 친지, 친구를 데려오는 연계형 탈북으로 진화했다. 최근의 양상은 목적형 탈북이다. 한국에서 돈을 벌겠다거나 공부를 하겠다는 또렷한 목적을 갖고 탈북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바라던 목적을 이룰 수 없다는 게 자명해지면 다른 선택을 한다.”
“탈남 현상은 한반도의 비극”
▼그는 탈북민을 분단이 낳은 사생아, 조난자로 규정한다.“탈북민은 남북한 어느 곳에서도 설 자리가 없다. 북한에선 배신자로 간주되며 한국에선 북한 체제의 피해자로 여기면서도 2등·3등 시민으로 취급한다. 탈북민 3만 명도 끌어안지 못하는 대한민국이 2500만 북한 주민과의 통일을 감당하겠는가. 탈북민은 남북 공동체의 리트머스 시험지다. 둥지 틀 곳을 찾지 못해 떠도는 새떼처럼 ‘탈남’하는 무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한반도의 비극이다. 탈북민의 적응 태도나 노력은 차치하자. 분단의 사생아, 조난자를 끌어안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