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적 논란이 제기될 때 언어학적 접근은 매우 유용하다. 흔히 역사에서 언어가 간과되는 경향도 있지만 사실 인류사는 언어와 무관할 수 없다. 인간과 사회의 모든 영역은 언어로 이루어지고 언어로 기록되어 전래되기 때문이다. 역사는 어느 한 순간도 언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고구려사 논란은 근본적으로 민족 문제로 귀착된다. 모든 민족은 언어를 소유하고 있다. 민족과 언어는 불가분의 관계다. 때문에 고구려의 국어인 고구려어는 고구려를 세운 민족의 언어와 일치한다. 그런데 고구려는 여러 민족이 연합해 세운 국가가 아니었다. 고구려는 단일 민족인 부여족이 세운 나라이며 부여족의 언어를 단일어로 사용했음이 분명하다.
단일 언어인 고구려어의 특성은 어떠한가. 중국어와 동질적이었던가, 아니면 백제어 및 신라어와 동질적이었던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곧 고구려사를 구명하는 횃불이 될 수도 있다. 이 문제를 객관적으로 검증하려는 것이 이 글의 핵심 과제이다.
역사는 잃어버린 언어를 찾게 하고 반대로 언어가 역사적 문제를 풀어주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고구려인들이 저술한 책이 현대에 전래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현재 고구려어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은 없다. 따라서 광개토대왕비,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일부 남아 있는 고구려어를 연구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고대어에서 성명과 관직명은 언어의 성격을 밝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고대국가에서 국왕과 지배계급이 정치, 경제, 문화, 종교를 주도했기 때문에 이들의 성명, 관직명은 해당 국가와 민족의 정통성을 밝히는 길라잡이가 된다. 또한 이웃 나라와의 상관성을 가리는 증거자료가 될 수 있다.
고구려 왕의 성명과 관직명이 신라 및 백제의 그것과 닮은꼴이고 중국의 그것과는 전혀 무관하다면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는 것은 분명 억지가 된다. 백제사와 신라사가 틀림없는 한국사이기 때문에 이 두 나라와 언어적으로 결속되어 있다고 했을 때 고구려사 역시 한국사라고 해도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구려 시조는 그가 세운 나라이름 ‘고구려’에서 ‘고’를 취하여 성을 ‘고(高)’씨로 삼았다. 그러나 이 ‘고’씨는 시조 ‘고주몽’ 1세대에서 끝났다. 왜 그랬을까. ‘삼국유사(고구려조)’는 주몽의 본성이 ‘해(解)’씨(本姓解氏也)라고 세주(細註)를 달았다. 이후 고구려 역대 왕들의 성씨는 ‘해’씨였다. 이런 점에 미뤄 고구려 왕족의 정통적 성씨는 ‘해’씨임에 틀림없다. ‘해’씨는 중국인에겐 없는 성이었다. 반면 부여 왕의 성명에선 ‘해부루(解夫婁)’ ‘해모수(解慕漱)’ 등 ‘해’씨가 등장한다. 이는 고구려가 부여(扶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다.
‘해’는 한국어 ‘해(日)’와 동일하다. 일본어의 ‘히(日)’도 이 말에서 유래된 듯하다. 그러면 ‘해’씨의 어원을 밝혀보자. ‘광개토대왕비문(414)’은 고구려 시조 주몽을 북부여 왕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명기했다. 이 내용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는 건국 후 오래지 않아 동부여를 통합하였다.
주몽이 부여 왕족 출신이기 때문에 ‘삼국유사’는 그의 본성을 ‘해’씨라 한 것이다. 이후 고구려 왕들은 ‘대해주류(대무신왕)’ ‘해색주(민중왕)’ ‘해애루(모본왕)’ ‘소해주류(소수림왕)’(제3, 4, 5, 17대) 왕 등 모두 ‘해’씨다. 나머지 왕들의 성씨는 전해 내려오지 않는다. 그러나 고구려는 단일 혈족으로 왕위가 계승됐고 비(非) 왕족이 정권을 찬탈한 적이 없었으므로 다른 고구려의 왕들 역시 ‘해’씨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를 들어 고구려 제2대 유리명왕의 성씨는 비록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그의 아들이 ‘해명’(解明) ‘해우’(解憂)였던 것으로 보아 ‘해’씨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