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호

20대 리포트

“모두 내가 죽기만 바라는 듯”

전자발찌 찬 사람들

  • 입력2017-08-27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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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출 수 없는 양말 속 불룩한 것” “아내도 딸도 외면” “직장에서 쫓겨나기 일쑤” 잦은 오작동, 생체 칩 대안 거론 시민 안정감 느끼는 순기능 의견 많아
    한동안 악몽을 꿨다. 두 시간마다 잠에서 깨고, 긴장감에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 20대 여자인 나로선, 자주 보는 사람이 전자발찌 착용자라는 것이 불안하고 찝찝해서다. 

    친척 할머니 집으로 이사를 왔다. 이 할머니는 남자 교도소 출소자들만 모아 교회를 운영한다. 나는 할머니를 따라 매주 일요일 교회에 나갔다. 교회에 오는 남자들은 도둑 전과자부터 살인 전과자까지 다양하다. 나와 할머니를 빼고 일반인은 없다. 

    잠을 편하게 자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내게도 시간이 필요했다. 몇 개월 동안 나는 정신분열을 앓는 살인 전과자와 밥그릇을 함께 나르고 수저를 놓았다. 도벽이 있는 할아버지가 주는 목 캔디와 아이스크림을 받아먹었다. 전자발찌를 찬 어떤 아저씨는 내 방의 가구 배치를 바꿔줬고 고장 난 옷장을 고쳐줬다. 그러고 나서야 이들의 죄명 뒤의 인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 전 주말에 나와 매주 밥을 먹고 인사하던 한 중년 남성이 교회 옥상에서 자살했다. 출소 후 가족에게 버림받고 교회에서 지내는 처지를 비관해서다. 출소자 한 명이 지나가듯 말했다. “다음 차례는 누굽니까?”

    여기 있는 거의 모든 출소자는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거나 이혼 소송 중이다. 같이 지내는 출소자들 외에 만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자살한 중년 남성의 경우도 자식이 없고 형제들과 교류가 없었다. 물론 특별한 직업도 없었다. 그는 “이렇게 살아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어?”라고 말했었다.



    나는 ‘살인’ ‘강도’ ‘강도강간’ ‘강간’ 죄목으로 각각 복역한 뒤 출소해 ‘전자발찌’를 찬 채 지내는 4명의 남성을 교회 밖에서 만났다.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취재했다.



    “아니오, 범서방파요”

    서울 영등포의 한 카페에서 박모(51) 씨를 만났다. 무스로 쫙 넘긴 머리, 다부진 체격, 구릿빛 피부, 또렷한 눈동자가 위압적이었다. 화장기가 없는 얼굴에 머리를 질끈 묶고 간 나는 순간 후회했다. ‘세게 보이게 하고 올 걸.’

    박씨가 먼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어눌하게 인사했다. 박씨는 아래 앞니가 빠져 발음이 샜다. 그는 모든 질문에 경어를 써가며 성실히 답했다. 그는 조직폭력배 일을 했다고 말했는데, 내가 “서방파셨다고요?”라고 재차 묻자 “아니오, 범서방파요”라고 고쳐줬다.

    전과 4범인 박씨는 범서방파 조직원이었다. 그의 조직 생활은 영화 ‘범죄와의 전쟁’ ‘신세계’ ‘비열한 거리’와 다르지 않다. 폭력으로 호적에 빨간 줄이 그어질 때마다 조직 내 그의 직급은 높아졌다. 서른이 갓 넘은 나이에 전과 3범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사무실이 주어졌고 ‘동생’ 여럿을 거느린 부두목이 됐다. 유명한 술집의 마담과 결혼도 했다.

    그러다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나이트클럽 양도 문제로 다른 파와 마찰을 빚었다. 형님의 명령으로 상대 파 두목을 ‘손만 봐주려고’ 했던 박 씨는 그만 그를 죽이고 말았고 징역 20년을 받았다.

    2010년부터 살인범에게도 전자발찌를 부착하도록 법이 개정됐다. 박씨는 19년 복역 후 감호 9개월을 남긴 상태에서 전자발찌 부착 3년 명령을 받고 지난해 퇴소했다.

    “이제 제 눈에 살기가 없어졌다고 하더라고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것이 믿기지 않게 그는 선하게 웃으며 말했다. 출소 후 ‘조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지만 그는 평범하게 사는 길을 택했다고 한다.

    교도소 들어가기 전엔 검은 세단을 타고 다녔지만, 지금은 700만 원이 전 재산이다. ‘보증금 500만 원, 월세 30만 원’에 원룸을 얻고 당장 닥치는 대로 일을 구했다고 한다. 원룸 근처 고깃집에 주방보조 및 설거지 담당으로 들어갔다. 오전 11시부터 다음 날 오전 2시까지 하루 15시간 동안 불판과 접시가 수북이 담긴 큰 대야 앞에 쪼그려 앉아 설거지를 했다. 그러나 급여는 최저시급에도 못 미쳤다.


    바지 밑단 들려 올라가자…

    일을 한 지 4일째 되던 날이었다. 설거지를 하다 보니 바지 밑단이 들려 올라간 줄 몰랐다고 한다. 맞은편에서 함께 일하던 아르바이트생이 박씨의 발목에 있는 전자발찌를 봤다고 한다. 그 길로 아르바이트생은 주방을 뛰쳐나갔고 곧이어 사장이 들어왔다. 사장은 상냥하게 그를 해고했다.

    “아, 박씨. 이거 어쩌지? 성실하고 일도 잘해서 참 좋았는데 말이야. 알겠지만 같이 일하는 건 무리일 거 같네.”

    이것은 시작이었다. 1월 박씨는 경기도 평택의 S반도체 회사에 취업됐다. 하루 동안 직원교육을 받았고 숙소까지 배정받았다. 이사 날짜를 작업반장과 조율하던 중 박씨는 전자발찌를 보여주며 “재택 감독 장치를 숙소로 옮겨야 한다”고 말했다. 친절하던 반장의 표정이 순간 변했다. 작업반장은 함께 생활하는 다른 직원들이 거부감을 느낀다는 이유로 박씨의 고용을 없던 일로 했다.

    3월 박씨는 서울 당산동의 한 상조회사에서 일하기로 하고 이틀 동안 직업교육을 받았다. 17만 원의 작업복을 구매하고 정식 출근 날짜를 기다리던 중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다. 업무에 지장이 없을 거라는 박씨의 간청에도 상조회사는 전자발찌와 보호관찰을 이유로 박씨를 해고했다. 에어컨 배송, 영화관 경비 등의 구직활동을 계속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인터뷰 중 박씨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로 “형님”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싸한 마음이 들었다. 박씨는 “거기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살지 막막하다. 그는 “밥벌이를 할 수가 없으니 차라리 교도소로 보내달라”고 보호관찰소에 요청하기도 했다. 

    다른 전자발찌 착용자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올해 40세인 강모 씨는 23세 때 강도강간 죄를 저질러 16년을 복역했다. 2015년 출소하면서 전자발찌 착용 3년을 명령받았다. 정상적인 직장을 가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그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다. 지인의 소개로 대기업 계열사 사장의 운전기사로 취업하게 된 것이다. 늦은 나이지만 차근차근 돈을 모아 홀어머니를 잘 모시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직업 특성상 금속을 탐지하는 보안 검색대가 설치된 건물을 통과해야 할 일이 많았다. 상사에게 전자발찌 때문에 금속 탐지기에 자꾸 걸린다고 말할 순 없었다. 강씨는 고민 끝에 일자리를 포기했다. 사장에게 “갑자기 어머니가 많이 아프셔서 못 나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한 달도 안 되어 퇴사했다.

    김모(62) 씨는 빈집털이 2범, 강도 2범이다. 2004년 마지막 강도로 13년을 복역한 후 출소하면서 3년 전자발찌 부착 명령을 받았다. 출소 직후 머물 곳이 없던 김씨는 출소자들을 위한 갱생보호소에서 지내면서 일자리를 구했다. 매일 벼룩신문을 보고 연락을 취했지만 전과자에다 전자발찌 착용자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었다.

    결국 구직 활동을 포기한 채 6년 감호생활 동안 모은 근로수당 1800만원과 형·여동생의 도움으로 기계제작 사업을 시작했다. 김씨는 “나 같은 사람은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결국 범죄의 길로 다시 들어서기도 한다”고 말했다.



    왼쪽 다리 엑스레이는…

    김씨는 “우리 딸이 정말 예쁘다”면서 휴대전화에 저장된 딸의 셀카 사진을 보여줬다. 출소 직후엔 자신을 본 척도 않던 딸이 이제는 셀카 사진도 보내준다고 한다. “힘들었다. 한번만 만나자고 아무리 문자를 하고 전화를 해도 안 받아주더라. 그래서 ‘아빠의 죄는 아빠가 받을게. 언제까지든 기다릴 테니 한 번만 기회를 줘’라고 문자를 보냈다.”

    3개월이 넘게 답이 없던 딸은 최근 연락을 주고받으며 만난다고 한다. 김씨는 아내와도 가끔 만나 얼굴을 본다고 했다. 이혼을 하지 않았고 딸과의 관계도 좋아지고 있지만 합가(合家) 얘기는 엄두도 못 낸다고 했다. “성범죄가 아닌 강도이기는 하지만 전자발찌를 차고 있으니 아내도 나와 밤늦게 함께 있거나 단둘이 있는 걸 피하는 것 같다.”

    얼마 전 김씨는 거래처 사람들과 함께 식당에 갔다. 모두 신발을 벗고 좌식 좌석으로 가는데 순간 김 씨는 아차 싶었다. 신발을 벗을 때는 물론이거니와 양반다리를 하면 양말 밑 불룩한 전자발찌가 보이기 때문이다. 식사 내내 안절부절못하는 김씨에게 “거, 김 사장. 어디 불편합니까? 안색이 안 좋습니다”라고 사람들이 걱정스레 물었다. 급한 일이 있다며 바지를 붙들고 후다닥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박씨도 여름이 괴롭다. 아무리 더워도 당연히 반바지는 못 입는다. 신발 뒤꿈치를 거의 덮을 정도로 길고 두꺼운 바지만 입는다. 얇은 천으로 된 바지를 입으면 발목의 불룩한 윤곽이 쉽게 드러나 보일 수 있다. 그는 “가리려면 어쩔 수 없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도 앉지 않는다. 누가 내 발목 근처를 본다 싶으면 마음이 조마조마해진다”고 말했다.

    강씨는 얼마 전 형네 가족과 어머니를 모시고 한강공원에 갔다. 그러나 들뜬 마음도 잠시, 다른 사람은 돗자리 위에 편하게 자리를 잡고 치킨을 먹거나 드러누웠지만 강씨는 그럴 수 없었다. 눕기는커녕, 앉기만 해도 발목의 발찌가 보인다. 초등학생 두 조카가 발찌를 보고 “저게 뭐냐?”고 물을까봐 겁이 났다. 지나가는 시민들이 자신의 발찌를 보고 자신의 가족까지 안 좋게 생각할까 걱정이 됐다. 강씨의 조카들은 강씨에게 같이 자전거를 타자고 졸랐다. 그는 “자전거를 타면 발목이 보이니 그럴 수 없었다”고 말했다.

    최근 강씨는 극심한 복통에 시달렸지만 병원에 가지 않고 참았다. 2주를 견디다 죽겠다 싶을 지경에 이르자 응급실에 가 진통제를 맞았다. 그러나 의사가 자세한 검사를 해야 한다고 말하자 강씨는 주사를 다 맞지도 않고 중간에 나왔다. 병원에 대한 정신적 외상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운전 중에 맞은편 차량이 그의 차를 들이받으면서 그는 왼쪽 다리를 크게 다쳤다. 응급실에서 멀쩡한 오른쪽 다리 엑스레이만 찍고 그는 도망치듯 병원을 나왔다. 엑스레이를 찍으려면 금속 물질이 있으면 안 되는데 그는 왼쪽다리에 고무로 덮인 금속발찌인 전자발찌를 차고 있었다.

    그는 “병원 치료를 위해 전자발찌를 잠시 풀어달라”고 보호관찰소에 요청했지만 노골적으로 귀찮아하는 느낌을 받았다. 결국 고민 끝에 담당의사에게 전자발찌를 보였다. 친절한 의사는 매번 간호사 없이 강씨의 다리를 치료해줬다. 그러나 이후 강씨는 아무리 아파도 병원을 가지 않는다.



    “제 차로 태워다 드릴게요”

    강씨는 가족이 아닌 사람과 솔직하게 대화하는 건 처음이라고 내게 말했다. “모두 제가 죽기만 바란다고 생각했는데…고맙다”고 했다. 오후 늦게 인터뷰가 끝났다. 그는 “같은 방향이네요. 제 차로 댁까지 태워다 드릴게요”라고 제안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본능적으로 나는 주춤했다. 나는 20대 여자고 그는 강도강간 범죄로 전자발찌를 차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차를 얻어 타고 귀가했다.

    이모(71) 씨는 강간 범죄를 저질러 전자발찌를 차고 있다. 기초생활수급자 대상인 이씨에게 무료 건강검진 안내장이 오지만, 그는 한 번도 검진을 받지 않았다. “가운만 입고 맨다리를 내놓고 다닐 수는 없다”는 게 이유였다. 특히, 이씨는 전자발찌 오작동으로 인해 고통을 겪었다고 말한다.

    전자발찌 시스템은 세 개의 기기로 한 세트를 구성한다. 발목에 착용하는 전자발찌, 보호관찰소의 연락을 받고 위치 추적을 가능케 하는 휴대용 추적 장치, 집에 설치하는 재택 감독 장치가 그것이다. 한 세트 비용이 172만 원인데, 오작동이 자주 일어난다고 한다.

    5월 12일 오전 2시쯤 이씨는 고압전류에 감전된 것 같은 충격을 받아 잠에서 깼다. 전자발찌 오작동이었다. 이후 오전 6시까지 알람과 강한 진동을 동반한 5번의 전기충격이 전자발찌에서 이씨의 신체로 전해졌다.

    오전 6시 30분 이씨는 보호관찰소에 가서 다른 전자발찌로 교체했다. 그러나 당일 오후 1시쯤 교체된 전자발찌에서도 오작동이 일어났다. 휴대용 추적 장치에선 위치 추적이 되지 않았고 교체된 전자발찌에선 다시 전기충격이 느껴졌다. 오후 1시부터 2시까지 8번의 전기 충격과 알람이 반복됐다고 한다.

    결국 오후 2시 30분 보호관찰소 직원이 이씨의 집을 방문해 기계를 다시 교환했다. 이런 일은 이씨에게 처음이 아니었다. 부산, 광주에 있을 때도 위치 추적이 안 되는 오작동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마다 왕복 두 시간 거리의 해당 지역 보호관찰소를 방문해 기계를 교환해야 했다. 이씨는 “기계 교환을 너무 자주해 일일이 기억하지도 못한다. 고장 나는 기계를 발목에 채워놓고는 보호관찰소를 오라 가라 한다. 하소연할 곳도 없고 답답하다”고 말했다.

    기기 오작동은 이씨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터뷰한 모든 전자발찌 착용자는 최소 3회의 기계 오작동을 겪었다고 말한다.

    두툼한 전자발찌의 크기에 의한 낙인 효과와 오작동 문제로 인해 2008년부터 생체 칩이 전자발찌의 대안으로 거론됐지만 법제화되지 않았다. 낙인 효과가 시민들이 안정감을 느끼는 전자발찌의 순기능이란 의견이 많았다는 이유에서였다.  

    ※ 이 기사는 고려대 미디어학부 ‘탐사기획보도’ 과목 수강생이 박재영 교수의 지도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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