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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아버지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결국 내 삶의 연출자는 아버지였다|윤은기

  • 글: 윤은기 서울과학종합대학원 부총장·방송인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결국 내 삶의 연출자는 아버지였다|윤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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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군이 이 지역을 점령한 뒤 공무원이라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고 수감된 것이다. 하루하루 초조함 속에 사형 집행 날짜만 기다리던 아버지는 당시 인민위원회 간부로 있던 외할아버지 친구의 아들을 만나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한밤중에 몰래 풀어주는 바람에 허겁지겁 집으로 오다가 검문에 걸려 다시 잡혀 들어가게 됐고 천신만고 끝에 살아나셨다 한다. 그러나 갇혀 있던 동안 아버지는 모진 구타와 고문을 당해 지금까지도 곳곳에 흉터가 남아 있다. 불행히도 아버지를 살려주었던 사람은 수복 이후 좌익활동을 이유로 처형됐다고 한다.

이처럼 우파라고 죽이고 좌파라고 처형하는, 지옥 같은 전쟁을 겪고 난 후 아버지는 직업을 바꿨다. 지금은 한전으로 통합된 ‘남한전기’에 들어가 평생 봉급생활을 한 것이다. 대학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하위 관리자로 근무하면서도 아버지도 성실하게 집과 직장을 오가는 시계추 같은 생활을 하였다.

지금도 어렸을 적 아버지 출근시간이 생각난다. 아버지는 항상 우리 4형제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5부자 출동’이었다.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앞서 나가시면 아들 4형제가 까만 교복차림으로 그 뒤를 따랐다. 가난하게 살던 시절이었지만 5부자가 함께 걸어나가다 보면 왠지 모를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나는 체격 좋고 괄괄한 성격의 형님들 덕분에 항상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었다.

퇴근 후에도 아버지는 언제나 뒤도 안 돌아본 채 곧장 집으로 오셨다. 이런저런 약속도 있으셨을텐데 희한하게도 다 뿌리치고 집으로 오시는 것이었다. 일찍 들어오셨다고 해서 집안일을 돕는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마당 화단에 물을 뿌리는 정도였고, 그 밖에는 늘 조용히 앉아계셨다. 술은 원래 즐기는 편이 아니어서 취해서 집에 돌아오시는 날은 일년에 몇 번 정도로 손꼽을 정도였다. 집에 와서 자식들에게는 늘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씀만 하셨다.

낭만도 희망도 없어 보이던 분



지금 생각해 보니 아버지에게 집은 가장 안전한 피난처였던 것 같다.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었던 그일 이후 아버지는 사람들을 가려서 사귀셨고 경계심 또한 다소 커졌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어려서 아버지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일 중의 하나는 친구들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이유를 충분히 알 만하다. 6·25전쟁 중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나 믿고 지낸 사람들이 서로 밀고하고 죽이는 것을 생생하게 체험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이러한 생활습관 또한 전쟁이 남긴 비극인 것이다.

아버지의 생활 철학은 ‘안전하게 살자’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복잡한 일에는 끼여들지 않았고 아무하고나 사귀지도 않았다. 그뿐인가. 무엇이든지 불확실한 것은 건드리지도 않았으며, 공짜를 바라는 것은 사고의 지름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에게는 그것이 살아남는 길이었다. ‘내가 살아남아야 처자식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분명했던 아버지는 부정부패가 일상화되었던 그 가난했던 시절에도 돈봉투 한 번 들고 오는 법이 없었다.

처자식 잘 먹이고 입히고 싶은 마음이야 없었겠는가만 돈에는 누구보다도 엄격했다. 한창 자라나던 시기의 우리 형제들이 보기에 아버지는 한마디로 재미도 없고 낭만도 없고 희망도 없어 보이는, 그런 분이었다.

이런 아버지가 나에게는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었던 것 같다. ‘나는 결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 것이다. 돈도 없고 ‘빽’도 없는 데다 부부간에 애정표현도 안 하는 것은 물론, 친한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도 없고 고스톱도 안 치고 담배도 안 피우는 아버지. 어린 내 눈에는 차라리 머리에 포마드를 바르고 백구두를 신는, 겉멋이 든 건달 같은 아버지가 부드러워보였다.

공부를 해서 출세를 하든지, 장사나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든지, 아니면 친구들하고 화끈하게 놀든지, 그것도 아니면 마누라와 자식 데리고 놀러라도 다니면서 사는 듯이 살아야지 왜 저렇게 소심하게 기계적으로 살아갈까 하는 것이 청소년 시절 내내 나의 불만사항 이었다. 오늘날까지 내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봐도 이 시절 아버지가 보여준 반면교사 효과가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의 反面敎師 효과

나는 공군장교로 군 생활을 마친 후 당시 최고의 인기 직장이던 종합무역상사 기획실에 근무하다가 일찌감치 사표를 내고 지식산업에 뛰어들었다. 평생을 봉급쟁이로만 살았던 아버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친구들 일이라면 발벗고 뛰어다녔고 사교모임에도 자주 나갔다. 남이 뭐라고 하든 간에 아내 자랑을 하고 다녔고, 적극적으로 애정 표현도 하면서 살고 있다. 아들 딸에게는 싫은 소리를 잘 안 하는 편이고 유머와 농담도 자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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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은기 서울과학종합대학원 부총장·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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