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호

아리타 야키 ‘도조(陶祖)’ 이삼평

향내음으로 삭혀낸 가마터 늙은 匠人의 망향가

  • 글: 김충식 동아일보 도쿄지사장 seescheme@donga.com

    입력2004-12-27 17: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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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식민지배의 서곡이 된 을사조약 100주년, 광복 60주년, 한일국교정상화 40주년. 2005년은 여러모로 한일관계사를 더듬어보게 하는 해다. 여전히 가깝고도 먼 일본에선 오늘도 ‘욘사마’ 붐과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라는 대조적인 화제로 떠들썩하다. 이러한 시점에서 일본 열도의 한국 핏줄과 인연을 찾아보는 기행을 시작한다. 두 나라간 은수(恩讎)의 역사야말로 오늘의 연원이요 내일을 내다보는 창인 까닭이다.[편집자]
    아리타 야키 ‘도조(陶祖)’ 이삼평

    이삼평의 신사. 경내에는 도조비(碑)가 세워져 있고, 해마다 5월이면 커다란 규모의 도자기 축제가 이 신사를 중심으로 열린다.

    아리타(有田)에 가까워지자 풍경이 낯설지 않다. 언젠가 달렸던 철길만 같다. 김제평야의 한복판 같은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일본 규슈 북단 후쿠오카에서 한 시간 남짓 펼쳐지던 차창 밖 풍경과는 전혀 다르다. 사가(佐賀)현의 아리타가 가까워지면서 갑자기 낮은 산, 밋밋한 평야가 펼쳐진다. 듬성듬성 민가가 보이긴 하지만 늦가을 들판은 텅 비어 있어 황량하기만 하다.

    아리타역은 한적한 간이역 같다. 역무원이라고는 딱 한 사람뿐.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아리타 야키(도자기)의 본바닥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둘러보니 역사(驛舍) 한구석에 도자기 공방 팸플릿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아리타 도기의 역사’라는 팸플릿에 눈길이 머문다. ‘아리타 도자기 도매단지 협동조합’이 만든 홍보물이다.

    ‘1600년대 초 조선의 도자기공 이삼평(李參平)은 아리타의 이즈미야마(泉山)에서 자기의 원료인 도광(陶鑛)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으로 그는 일본 최초의 자기를 굽게 됩니다. 아리타 자기는 17세기 중반부터 무역항 나가사키의 데시마(出島)를 통해 유럽으로 대량 수출됐습니다. 유럽의 왕후와 귀족들이 이 도자기에 매료되었습니다. 독일의 드레스덴 지역 오거스타 왕은 아리타 자기를 참고해 자국 내에서 도자기 생산을 꾀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아리타에서 꽃핀 자기의 400년 전통과 기법을 지키고 갈고 닦아오면서, 젊은 작가들과 크고 작은 공방이 의욕적으로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들여다봐도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도공들을 끌고 온 내력은 적혀 있지 않다.

    역사에는 도자기 집 몇 군데의 홍보물이 더 있다. 그러나 정작 필자가 찾아가야 할 집, 이삼평의 제13대 후손의 집을 알리는 홍보물은 보이지 않았다. ‘도자기의 할아버지’라는 뜻에서 ‘도조(陶祖)’로 불린다는 이삼평의 집을 안내하는 홍보물이 없는 것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택시를 잡아타고 후쿠오카 총영사관에서 얻은 주소를 댔다. 역에서 그리 먼 곳은 아니었다. 한 10분쯤 달렸을까.

    하지만 차를 세우고 보니 영 잘못 찾아온 것만 같다. 커다란 도자기 공방이나 전시장을 상상했지만, 주변에 공방으로 여겨지는 건물은 하나도 없었다. 분명 주소지는 맞는데…. 하는 수 없이 택시를 돌려보내고 개천가에서 놀던 아이를 붙잡고 물어봤다.

    아이를 따라 골목길 후미진 안쪽으로 들어섰다. 달동네 낡은 집에나 달려 있을 법한 문을 열고 들어서니 한 젊은이가 나와 필자를 맞았다. 한눈에 조선 핏줄임을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이다. 400년을 이곳에서 살았어도 어느 한구석 일본에 동화되지 않은, 조선 머슴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재생해놓은 듯하다. 부스스한 더벅머리 하며 길쭉한 얼굴, 작달막하고 다부진 체격.

    그가 내미는 명함엔 ‘이삼평요(窯) 가나가에 쇼헤이(金が江 省平)’라고 쓰여 있다. 14대 손자다. 어두컴컴한 안방에는 아버지(13대)도 있었다. 아버지 가나가에 산베에(金が江 三兵衛·가나가에 요시토(義人)라는 이름도 함께 쓴다고 했다)씨 역시 한국 핏줄임을 금세 느낄 수 있다. 아들보다 퍽 부드러운 인상이다. 품성 좋은 노인 같다.

    쇠락해가는 도자기촌

    사는 형편부터 물어보았다. 쇼헤이씨의 아버지가 대답했다.

    아리타 야키 ‘도조(陶祖)’ 이삼평

    이삼평 신사의 도리이(鳥居)는 도조를 기린다는 의미에서 자기로 구워 세웠다.

    “10년 불경기 여파로 아리타는 예전의 아리타가 아닙니다. 자기란 생필품이라기보다 사치 장식품이니까요. 1980년대까지 흥청대던 공방, 가게도 다들 힘들어합니다. 우리라고 예외가 아니지요. 수입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고 그저 먹고 사는 정도입니다. 변해도 정말 많이 변했지요.”

    한국 사람들도 더러 찾아오냐고 물어보았다.

    “더러 관광오신 분들이 찾아옵니다. 한 해 서너 차례 정도일까. 참, 관광은 아니지만 공주(公州) 시장님도 다녀갔어요. 명함도 있습니다.”

    아마도 충청도 인연이라고 해서 각별히 다녀간 것일 게다. 이삼평은 충청 금강(錦江) 유역의 어느 고장 출신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두 사람, 13·14대 부자도 그렇게 말한다.

    “이삼평은…” 쇼헤이의 말투는 일본식이다. 한국에서라면 할아버지를 그렇게 말하지 않고 ‘이삼평공’이라든가 ‘저희 몇 대 조부’라고 했을텐데.

    “충청도 금강 유역 출신입니다. 일본에 귀화하고 이름을 짓는 게 허용되자 고향을 따서 ‘가나가에’라는 성을 만든 거지요. 삼평을 일본식으로 ‘산베에(三兵衛)’라고 했고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휘하의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부대가 조선에 갔다 철수할 때 데려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삼평은 이 지역에서 자기를 만들 원료 도석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여기서 가까운 이즈미야마에서 도광(陶鑛)을 찾아냈지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 다나카 마을이라 불리던 평범한 시골 마을이 일약 도자기산업의 중심지로 번성하게 됩니다. 아리타 자기가 전국으로 팔려나가고 나베시마번(藩)의 재정에 크게 기여하면서 이삼평을 비롯한 도공들이 좋은 대접과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멀리 사쓰마 도자기의 심수관(沈壽官)씨 마을인 나에시로가와(苗代川)와 다른 점입니다. 나에시로가와는 조선인 자치촌이지만 여기서는 전부 일본인과 결혼했습니다. 말하자면 현지에 스며들었습니다.”

    이러한 설명에는 이설(異說)이 있다. 재일 역사학자 이진희 와코대 명예교수는 이삼평이 김해에서 잡혀왔고 가나가에는 김해(金海)의 다른 발음(긴가에)이라고 주장한다. 나베시마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진을 칠 때 김해를 담당했으므로, 충청도가 아니라 남해안 지역에서 사람들을 강제로 끌고 왔고 그중에 이삼평이 끼여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일본 기록에도 ‘金江出身’이라고만 되어 있다. ‘긴가에’는 발음상 ‘김해’에 가깝다는 것이 이진희씨의 논거다.

    ‘끌려온 길’과 ‘나선 길’

    이 교수에 따르면 임란 때 도공만 잡혀온 게 아니다. 당시 왜군의 함정은 왜구의 배와 일본내 수송선을 기준으로 건조됐기 때문에, 조선에 왜군을 내리고 돌아가는 길에 너무 가벼워 난파하는 일이 잦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함정의 무게중심을 잡기 위해, 또 빈 배로 다니는 게 아까워 남해안 일대의 남녀노소를 싹쓸이하듯 배 밑창에 가두었다고 한다. 이렇게 피랍당한 조선인이 규슈 북단의 사가현 등지에 노예로 팔리기도 하고 기술자로 쓰이기도 했다.

    ‘아사히신문’이 발행하는 주간지 ‘아에라’는 이처럼 강제 연행된 사람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10년 동안 1만명에 달한다고 추산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삼평의 후손은 김해 출신설을 어떻게 생각할까. 14대 쇼헤이에게 물어보았다.

    “그건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요. 우리가 김해 출신인지 충청도 금강가에서 왔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어요. 확실한 건 ‘金江’이라는 두 글자 기록밖에 없으니 해석이 다를 수도 있겠지요.”

    흡사 금강이면 어떻고 낙동강이면 어떻냐는 식이다. 기실 이삼평 자신이 그렇게 여겼던 것 같다. 한국식이라면 어디 이씨 성을 버리고 김씨 성이 될 법이나 한 것인가. 그러고 보면 아예 처음부터 성이 없는 신분으로 일본에 끌려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기록 얘기가 나왔으니 더 착잡한 문제도 짚어야 한다. 쑥스럽더라도 후손에게 물어봐야 한다. 1990년 일본의 거품경제가 한창일 때 아리타 주민들이 거금 1억8000만엔(20억원이 훨씬 넘는다)을 거두어 이삼평의 연고지에 기념비를 세웠다(충청 출신임을 전제로 계룡산에 세웠다). 그런데 비문의 표현 중 ‘임진왜란 때 일본에 건너간’이라고 한 부분이 문제가 됐다.

    “일본에 건너가다니 제 발로 갔다는 것인가. 마음에 없이 끌려갔다거나, 포로로 잡혀갔다고 해야 옳지 않은가. 비문을 정정해야 한다.”

    예기치 못한 여론이었다. 그러자 곧바로 반론이 나왔다. 이삼평 집안의 고문서(제3대가 작성)를 보면 삼평은 임진왜란 당시 ‘길 잃은 나베시마 나오시게공(公)을 만나 안내역을 맡았는데, 전후 고향에 남아 있으면 보복당할 우려가 있어 나베시마가 설득해 데려왔다’고 적혀 있으므로 제 발로 일본에 건너간 것처럼 표현된 비문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렇듯 연행된 게 아니고 왜장 나베시마의 ‘앞잡이’ 역할을 하다 건너온 것이라면 얘기가 좀 복잡해진다. 이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14대 쇼헤이에게 물었다.

    “아, 그건 저도 들어 알고 있는데요. 사가현에서는 공식적으로 (강제)연행이라고 했습니다. 후손으로서는 행정당국의 공식적인 해석을 존중할 수밖에요.”

    3대 삼평은 무슨 생각으로 할아버지의 일을 정리했을까. 기술노예로 끌려왔다고는 하나 이젠 정착했으며 고향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됐다. 그래서 3대 삼평은 ‘살다 보면 미야코(都·서울)’라는 일본 속담 식으로, 등지고 온 조국보다 대대손손 살아갈 일본에 유리하게 기록한 것이 아닐까.

    기실 임진왜란 때 침략군의 선봉장으로 부산에 상륙해 곧 귀순한 왜군장교 김충선(일본명 沙也可, 우록 김씨의 시조)도 그랬다. ‘모하당일기’라는 기록에 따르면 그는 조선의 문물에 홀딱 반해버려 귀순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연구자들은 이 점을 의심한다. ‘어찌 유학적 기초가 없는 일본의 장교가 전투중에 갑자기 이국의 문화와 문물에 반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따라서 그것은 귀순정착자가 내건 명분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다시 삼평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백보를 양보하더라도 길 잃은 왜병이 협박하지 않고서야 안면도 없고 일본말도 모르는 터에 길잡이를 자청할 리 있었을까. 재일동포 중에는 그런 식으로 동정하는 이도 있다.

    아리타 야키 ‘도조(陶祖)’ 이삼평

    이삼평이 발견한 이즈미 야마의 도광지(陶鑛地) 기념비. 안내를 맡아 설명해준 이삼평의 14대손 가나가에 쇼헤이씨가 서있다. ‘이삼평발견지도광지’라는 비문이 보인다. 지금은 멀리 규슈 남서쪽의 아마쿠사(天草)의 도광석을 쓰므로 이곳은 폐광 상태다.

    삼평의 5대 후손까지는 자기를 구웠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6대에 이르러 폐업하고 이후에는 농사만 지었다. 아리타 기록에는 1828년 큰 불이 나 마을이 전소되다시피 하여 자기산업이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되어 있다. 어쩌면 그 무렵과 삼평 후손이 도자기 만들기를 그만둔 시기가 일치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지금의 13대 산??요시토)씨의 어릴 적 생활은 빈궁하기 짝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농업학교를 마치고 당시만 해도 선망의 대상이던 철도기관사가 되어 40년을 일했다.

    “도조 이삼평의 자손임을 가슴에 새기고 있지만 우선 먹고 사는 게 급했으니까요.”

    그는 정년퇴직 후 퇴직금을 털어 가마터를 닦았다. 1975년의 일이다.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과 더불어 요업도 번성했다. 나이 쉰여섯에 새롭게 출발한 그는 완전히 아마추어로 요업을 배우고 익혀 대전엑스포에 기념출품도 했다. 가업을 이어가려 차남 쇼헤이에게도 규슈조형단기대학의 도예코스를 다니게 했다. 쇼헤이의 아내도 그림을 배워 자기에 밑그림을 새겨 넣는다. 이렇게 가업계승의 기틀을 다지고 나니 이제 경기가 영 말이 아니라고 산베에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14대 쇼헤이씨가 유적 안내에 나섰다. 그는 손수 작은 경차를 몰아 아리타 변두리의 시라카와(白川) 냇가에 닿았다. 낡은 물레방앗간에 커다란 물레방아가 놓여 있다.

    “이즈미산에서 자기용 광석을 캐다가 여기서 빻아 분말을 만들었습니다. 돌덩이가 워낙 크고 단단해서 사람의 힘으로는 가루를 내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수력을 이용하기 위해 냇가에 시설을 만든 거지요.”

    그가 다음으로 안내한 곳은 냇가에서 올려다보이는 덴구다니(天狗谷)라는 언덕이었다. 밋밋한 오르막이었으나, 계곡이라는 이름처럼 숲 사이로 움푹 패 있다.

    “여기가 자기를 굽던 가마터입니다. 국가사적(史蹟)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가마의 불길이 위로 솟구쳐 올라가도록 오르막에 터를 잡은 것이지요.”

    이곳에 아리타 교육위원회가 세워놓은 팻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가마터는 아리타의 도자기를 창시한 이삼평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이즈미산의 자석광(磁石鑛)을 발견한 뒤 아리타를 자기생산의 주력으로 삼고 생산을 본격화했던 초기단계의 가마터다. 지금까지의 발굴조사로 4기 이상의 계단식 오름가마 및 거기서 나온 자기조각 등이 확인되었다. 조업년대는 1630~60년대로 추정된다. 일본 요업역사상 중요한 가마터다.’

    쇼헤이씨가 부연해 설명했다.

    “광석을 빻아 가루로 만들고 가마에 굽는 동선(動線)이 짧아 매우 능률적이지요. 냇가에서 이곳 가마터가 지척이니까요. 지금은 다들 장작을 태우는 가마가 아니라 가스 가마를 쓰니 굳이 덴구다니 같은 장소를 고를 이유가 없어졌지만 말입니다.”

    여러 가지 이점이 있어 요즘엔 너도나도 가스 가스만 쓴다고 했다. 우선 연기가 나지 않는다. 게다가 연료 값이 싸 훨씬 경제적이고 제조기법도 쉽다는 것이다.

    불교에 기대 망향의 한 달래다

    도자기 가마와 땔감에 얽힌 이야기가 ‘아리타 역사’라는 책에 적혀 있다. 나베시마 부대가 조선에서 납치해온 도공은 모두 예닐곱 명이었다. 이들에게 도자기를 굽게 했더니 불티나게 팔리고 인근 이마리(伊萬里) 항구를 통해 일본 각지로 퍼져나갔다. 그래서 아리타 도자기는 초기에 이마리 도자기라 불렸으며 나가사키를 거쳐 유럽에 팔리면서도 ‘이마리’ 상표가 붙었다.

    이 경이적인 돈벌이를 곁눈질하던 일본인들이 조선 도공들을 모방해 사가현 도처에서 도자기를 굽기 시작했다. 문제는 1000℃가 넘는 가마불을 지피려면 땔감이 엄청나게 들어가기 때문에 나베시마 번주의 번유림(藩有林)을 훼손하게 된다는 점이었다. 나베시마 번주는 비상조처를 발동해 조선도공을 제외한 일본 도공 남녀 800명을 추방했다. 결국 일본인 가운데 조선 도공 밑에서 배운 내력이 확인된 ‘정통파’에 한해 일부 면허증이 발급됐다. 그리하여 1647년 공식기록에 남은 도공 집안은 155가구. 당시 아리타에는 활발한 자기 생산으로 인구가 크게 늘어나 총 1300가구에 총인구는 55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삼평 묘로 가보실까요?”

    쇼헤이씨를 따라 내려가자 가마터 아래쪽 냇가 공동묘지에 이삼평의 묘비가 서 있다. 시든 꽃이 놓여 있고, 한글로도 비명이 쓰여 있다.

    ‘아리타는 도자기 창업 연대를 1616년대라고 보고 창업 300주년을 맞은 1916년 도산신사(陶山神社) 뒤편 언덕에 도조 이삼평의 비를 세워 그 공적을 기렸습니다. 1959년 이곳 시라카와 공동묘지에서 월창정거사(月窓亭居士)라는 계명의 묘비가 발견됐고, 1967년 그 이름이 이삼평이라는 것이 확인되어 마을의 사적으로 지정했습니다.’

    “월창정거사가 이삼평이라는 사실은 사찰의 기록에서 확인됐죠. 아마도 그가 세상을 떠날 무렵 불교에 귀의했던 것이겠지요.”

    쇼헤이씨의 설명이다.

    문득 달밤에 턱을 괴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월창정을 떠올려본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해지는 망향의 쓸쓸함. 실향 장인(匠人) 이삼평은 만년에 불교에 기대어 향내음과 목탁소리에 젖어 고단한 생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다시 쇼헤이씨를 따라 이즈미산으로 향했다. 차로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삼평 발견 자광지(磁鑛地)’라고 쓰인 커다란 비석이 서 있다. 흡사 돌을 다 파먹은 채석장 분위기다. 산 하나가 통째로 헐려 널찍한 운동장처럼 되어 있다. 지금처럼 전동 굴삭기도, 파쇄용 중장비도 없던 시절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정과 망치만으로 광석을 헐어냈을 것인가. 사면 한쪽에는 광석을 캐기 위해 수평으로 파고 들어간 동굴 두 개가 보였다.

    “지금은 폐광입니다. 요즘은 다들 아마쿠사(天草·시마바라 반도의 한 지명)에서 나오는 것을 쓰지요. 그게 더 희고 광택이 나서 평이 좋아요.”

    폐광의 너른 터 위로 억새가 자라고 있다. 바람에 나부끼는 억새의 서걱거림이 정적을 깬다. 억새풀의 울음에 섞여, 산을 도려내던 기술 노예들의 고통스런 신음이 번져오는 것만 같다. 그 뒤로 이곳의 돌가루로 만든 도자기를 매만지며 영화와 사치를 구가하던 유럽 궁정의 황후 귀족들의 웃음소리가 교차하는 듯하다.

    무궁화와 배용준과 ‘까치 가라스’

    가까운 곳에 있는 도산신사로 올라간다. 태풍으로 넘어진 나무 사이로 몇십 계단이나 올랐을까.

    “이 길은 봄이 되면 벚꽃이 제법 괜찮지요. 일대에서 숱한 구경꾼이 몰려온답니다.”

    신사에는 예외 없이 하늘천자(字)가 가랑이를 벌리고 있는 형태의 도리이(鳥居)가 서 있다. 멀리 도리이가 보인다. 그런데 도조를 기리는 곳답게 도리이를 구운 자기로 세워놓았다. 일본 내에서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제작자의 이름을 보니 ‘각물(角物) 세공인 金が江長作’이라고 되어 있다. 삼평의 핏줄도 참여해 만든 것이다.

    “무구게(무궁화)다!”

    신사를 내려오는 길에 쇼헤이씨가 무궁화꽃을 가리켰다. 밑둥을 덮은 흙이 축축한 것으로 보아 심은 지 얼마 안 돼 보였다.

    “누가 심었을까요?”

    “글쎄요.”

    문득 그가 무궁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한국의 나라꽃인 걸 알고 있어요?”

    쇼헤이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의 사쿠라 같은….”

    쇼헤이씨와 작별의 악수를 나누고 역으로 향했다. 역사 앞에 낯익은 얼굴이 나를 보며 빙긋이 웃고있다. 껌 선전광고 사진 속의 탤런트 배용준이다. ‘깨끗하고 상쾌하게’라는 광고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아리타의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니 새 몇 마리가 날고 있다.

    까치 가라스!

    정말 까치일지도 모르겠다. 이곳 사가 사람들은 그냥 ‘가라스’라고 부르지 않고 ‘까치’ 아니면 ‘까치 가라스’라고 한다. 그 까치들은 제 날개로 날아온 것일까, 아니면 왜구나 왜군의 배에 실려온 걸까. 그리고 누가 까치라는 이름을 이 섬나라 남쪽 지방에 남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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