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만과 중국이 국지전에 돌입한다면 한반도에는 어떤 일이 생길까. 미국은 대만을 사수하기 위해 개입할 것이고, 지리적으로 가까운 주한미군·주일미군이 가장 먼저 투입대상으로 검토될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반응은? 최악의 경우 인민해방군이 선양군구에 배치해둔 장거리 미사일이 오산 미 7공군기지를 향해 날아올 수도 있다.
2004년 11월 일본 방위청 산하 방위력검토회의는 새로 개정하는 ‘방위계획 대강’에 반영하기 위해 중국이 일본을 침략하는 세 가지 시나리오를 마련한 바 있다. 그중 제1 시나리오가 ‘대만해협에서 분쟁이 발생할 경우 일본이 주일미군을 지원할 수 없도록 국지적으로 공격’하는 설정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중국이 이러한 ‘가능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장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12월11일 일본의 이러한 시나리오에 대해 “평화와 안정을 바라는 양국민의 열망을 저버린 것”이라며 강도 높게 비판하고 나섰다. 이를 한국상황에 적용해보면, 주한미군이 대만해협 분쟁에 참여하는 방안에 대해 한국 정부가 어떠한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향후 한중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최근 신문지상에 자주 오르내리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혹은 ‘지역적 역할’이라는 말은 모두 이러한 상황과 관계가 깊다. 쉽게 말해 이제까지 한반도 방어 즉 북한의 남침을 억제하는 것이 주목적이던 주한미군이 ‘동북아 지역 내의’ 전략적 목표를 위해 움직일 수 있도록 ‘보다 유연해진다’는 의미다. 다른 지역에 일이 터지면 주한미군이 즉시 투입되었다가 상황이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이른바 ‘in and out’) 제반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바로 ‘전략적 유연성의 증대’라고 보면 된다.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주한미군의 역할변화’나 ‘한미동맹의 성격변화’라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주한미군·한미동맹의 역할과 성격이 ‘한반도 안정’에서 ‘동북아 지역안정’으로 바뀐다는 의미다. 이러한 방안을 한국이 양해할 경우, 앞서 설명한 극단적인 상황이 왔을 때 한국은 주한미군의 참전에 따른 위험부담을 고스란히 나눠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겉보기에는 추상적인 용어에 불과한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말 속엔 이처럼 긴박하고도 심각한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이다.
주한미군 재배치의 의미
미국이 경기 북부에 있는 2사단과 용산의 사령부 등 흩어져 있던 주한미군 기지를 오산과 평택 지역에 통합하려 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2003년 4월부터 18개월 동안 한미 양국은 미래 한미동맹정책구상(FOTA) 회의를 열고 관련 협의를 진행했다.
이러한 기지 재배치에는 여러 가지 목적이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유사시 한반도 이외지역에 주한미군을 투입하기 쉽도록 공군기지와 항구를 낀 오산·평택 지역으로 병력을 모으는 것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또한 몸이 무거운 기존의 2사단을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스트라이커 부대로 대체하는 등 체질을 바꾸고, 그간 미군이 맡고 있던 대북억제임무를 상당부분 한국군이 맡도록 하는 조치도 이러한 목적과 관련이 깊다.
미국이 이렇듯 주한미군의 성격을 바꾸려는 상황에서 한국은 과연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중국과의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는 이른바 ‘지역적 역할’을 그대로 수용해야 할까. 그 경우 한국이 감수하게 될 위험은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칫하면 한반도의 운명을 가를 수도 있는 이런 중대한 문제는 어떤 과정을 통해 결정해야 할까. 공개적인 토론이나 국민적 합의과정 없이 정부 관계자들이 ‘조용히’ 결정해도 상관없는 것일까.
노회찬의 ‘폭로 3부작’
11월 중순 이래 국방부를 곤혹스럽게 했던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의 ‘폭로 3부작’과 일련의 사건은 대략 이러한 상황인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1월11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있었던 노 의원의 첫 폭로는 “미 2사단의 재배치는 북한에 대한 선제정밀타격능력을 갖추기 위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같은 달 30일 기자회견에서는 “미국이 추진해온 ‘주한미군의 지역안정 역할’은 북한과 중국에 대한 ‘선제군사개입’을 위한 전략”이라는 주장과 함께 2003년 7월 열린 FOTA 3차회의의 한국측 준비자료를 공개했다. 주한미군의 한반도 이외지역 투입 시나리오를 저·중·고강도로 분류한 이 문서는, ‘중국과 대만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면 주한미군이 참여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대책마련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어 12월3일에는 “정부가 이미 주한미군의 지역역할에 합의하고도 국민에게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주장이 이어졌다. 노 의원이 이날 공개한 자료는 정부 협상팀이 작성한 FOTA 4차회의(2003년 9월 개최) 준비자료. 문서에는 ‘주한미군의 지역안정에 대한 기여증대를 지지환영. 다만 현 단계에서 그러한 변화방향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공론화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으므로, 당분간 정보 비공개를 유지’하는 것이 옳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렇듯 중요한 사안을 “국민들 몰래 정부가 은밀히 합의해줬다”는 게 노 의원측의 주장이다.
사실 이러한 주장에는 다소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다. ‘주한미군의 지역역할’ 개념이 중국이나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을 위한 것이라는 부분이 특히 그렇다. 이 개념은 오히려 앞서 예로 들었던 대만해협 등 군사적 긴장이 팽팽한 지역에서의 국지전 발생에 대비한 개념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일반적이다. 선제공격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지역적 역할=선제공격’이라는 등식은 사실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정부의 반응은 당혹감 그 자체였다. 국방부는 노 의원의 첫 폭로 직후 “군 비밀자료를 공개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며 수사의뢰를 검토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폭로가 이어지자 “이렇듯 민감한 내용이 계속 터져나오면 외교관계에 악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국방부(發)발 기사가 쏟아져나오기도 했다.
정부의 당혹감은 이 문제에 대한 논의 자체가 수면으로 떠오르는 것에 대한 부담감 때문인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특히 한국정부가 이미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증대 혹은 지역적 역할 수행에 합의해 주었다는 주장에 대해 협상관련 부서들은 극도의 경계심을 보이고 있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이 11월13일 미국 국제문제협의회(WAC)에서 언급한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노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미국이 전략적 필요에 의해 주둔군 수를 줄이고 늘리는 문제를 융통성 있게 운용할 수 있도록 한국이 협력해야 한다”면서도 “내가 말한 융통성은 동아시아에 있어서 주한미군 역할의 유연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못박았다. 국내언론들은 일제히 “노 대통령이 주한미군의 지역적 역할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분명히 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관계자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노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지역적 역할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지역적 역할에 협력하기로 확정하지 않았다’는 것에 가깝다. 즉 ‘융통성’과 ‘유연성’이 모두 영어로는 ‘flexibility’로 번역될 수 있는 까닭에 앞서 얘기한 ‘융통성 협력’이 ‘전략적 유연성 협력’으로 오해받을 소지를 없애기 위해 부연한 것이, 거꾸로 ‘대통령이 전략적 유연성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언급했다’는 식의 보도를 낳았다는 설명이다.
정부가 이렇듯 단어 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전략적 유연성’도 부담스럽지만 이에 ‘협력’한다는 개념은 더욱 위험하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협력한다는 것은 단순히 주한미군이 동북아 지역의 분쟁에 개입할 수 있도록 ‘양해’한다는 차원을 넘어, 한국군 역시 주한미군과 함께 해외 분쟁에 참가할 수 있다는 의미로 비칠 수도 있다. 이런 인식이 확산될 경우 한국은 중국의 ‘잠재 적국’으로 분류될 수도 있으므로, 앞서 가정한 것처럼 대만해협에서 국지전이 발생하면 중국의 미사일은 오산·평택의 미군기지가 아니라 한국군 기지를 향해 날아올 수도 있다.
어긋나는 말들
노회찬 의원은 12월3일 보도자료에서 FOTA 4차회의 회의록을 인용해 “당시 한국측 협상대표였던 차영구 전 국방부 정책실장은 ‘주한미군의 지역역할 자체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게 우리의 기본 입장이다. 유사시 주한미군이 한반도에서 ‘인 앤드 아웃(in and out)’하는 문제는 연합사령관의 권한사항이고 그 과정에서 한국 합참의장과 협의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국방부는 이날 곧바로 반박자료를 발표했다. “전략적 유연성의 필요성은 FOTA를 통해 간헐적으로 제기되어 왔으나 현재까지 양국간에 구체적인 협의나 합의는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같은 날 NSC 고위관계자는 비공개 브리핑을 통해 “이 문제와 관해 그간 단 하나의 합의도, 공식적인 협의도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미국이 강하게 요구해왔지만 우리측이 그간 공식협의를 연기해왔고, 새해부터 단계적으로 개최되는 한미안보정책구상회의(SPI)를 통해 협상에 들어가기로 했다”는 설명이었다.
“단 한건의 합의도 없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미국측의 입장은 달랐다. 다음날인 12월4일 미 국방부 관계자는 워싱턴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양국은 2002년부터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증진돼야 한다는 원칙에 합의했으며, (현재는) 그 절차를 협의하는 단계”라고 못박았다(‘중앙일보’ 2004년 12월 6일자). “이미 양국이 원칙에 합의했기 때문에 미국이 주한미군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 한국의 허가를 받을 필요는 없지만 협의는 반드시 할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러면서 이 관계자는 “한미동맹 개편협상에서 자신들의 의견이 무시된 데 대해 분노한 사람들이나 외교부·국방부·NSC 일부에 대해 적개심과 야심을 품은 사람들이 계산적으로 공격하고 있다”며 한국에서 벌어진 논란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사실상 합의한 것이나 마찬가지”
이렇듯 어긋나는 양측 정부 관계자들의 설명 중 진실은 무엇일까. 가만히 들여다보면 타당성이 있어 보이는 것은 “이미 ‘원칙’에 합의했다”는 미국측 입장이다. 먼저 한국과 미국의 국방장관이 만나 군사관련 의제를 논의하는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을 살펴보자. 2003년 11월 열린 35차 SCM에서 양국 국방장관은 공동성명을 통해 “서울내 주한미군의 이전, 연합군사능력 증강, 군사임무전환 및 주한미군 재배치 등이 이행되면, 한미동맹은 세계 안보환경의 변화에 보다 잘 적응하게 될 것 … 양 장관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지속적으로 중요함을 재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내용은 이듬해 열린 36차 SCM 공동성명에도 거의 똑같이 들어 있다.
더욱이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간 FOTA를 통해 양국이 합의한 용산기지 이전이나 2사단 재배치, 주한미군의 특정임무 한국군 이양 등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증대를 위한 실행조치 성격이 강하다. 전략적 유연성이 총론이라면 이들 조치는 이를 위한 각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실행조치를 언제, 어떻게 해나갈지 구체적으로 합의했으면서 총론인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하지 않았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맥락이 닿지 않는다.
FOTA를 통해 한국측 협상팀이 여러 차례에 걸쳐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만한 발언을 했던 것 또한 사실인 듯 하다. 노회찬 의원이 공개한 4차 FOTA 회의록에 따르면 당시 한국측 대표였던 차영구 전 국방부 정책실장은 “주한미군의 지역역할 자체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 이것이 우리의 기본 입장이다. 다만 현재 지역역할을 부각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 것으로 돼 있다. 이에 앞서 2003년 2월 FOTA 예비회담에서 차영구 실장과 리차드 롤리스 미 국방부 아태부차관보는 “미래 한미동맹의 역할은 지역안정에 기여해야 한다”고 합의한 바 있다.
한편 2004년 1월27일자 ‘중앙일보’는 이 문제와 관련해 흥미로운 기사를 실었다. “한국이 지역적 역할을 양해했다고 외교소식통이 전했다”며 “미국의 대한(對韓) 방위공약 확약, 주한미군의 한반도 밖 전개시 전쟁억지력 유지, 한국과의 사전협의 등이 조건이었다”는 내용이었다. 문제의 양해 합의문은 계속되는 미국의 대화요구에 부담을 느낀 외교부 북미국에서 작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협상과정에서 논의된 내용을 외교부와 미 국무부가 서로 문서화하는 ‘교환공문(Exchange of Note)’을 통한 시도였다고 알려졌다.
문제는 이 같은 북미국의 문서화 작업이 대통령은 물론 NSC의 승인도 받지 않은 것이었다는 점이다. 전략적 유연성 문제가 조약의 개정이 거론될 정도로 중대 사안인 만큼 이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월권 행위였다. 이는 이른바 ‘부적절한 발언’ 파문으로 널리 알려진 당시 북미국의 ‘청와대 비하’ 분위기가 반영된 결과라는 평가다. 결국 이 시도는 사전에 ‘들켜’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지만, ‘중앙일보’ 보도가 암시하듯 문안내용이 초안형태로 미국에 전달됐다는 설도 있다. 사실이라면 미국이 ‘이미 합의했다’고 말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되는 셈이다.
비공식적으로는 상당수 정부 관계자들 또한 ‘원칙적으로 이미 합의에 이르렀다고 보는 게 옳다’는 데 동의한다. 장기적으로 주한미군이 해외 분쟁에 투입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게 정부 내부의 공통된 인식이라는 것. 이러한 인식이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2사단 재배치 등의 ‘각론’ 협상을 진행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다만 남아있는 것은 주한미군이 한국을 나갈 때 어떤 절차와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한국과 어떻게 협의해야 하는지 등에 관한 협상이라고 관계자들은 말한다. 이에 대해 올해부터 SPI에서 논의하겠다는 것이다.
상황을 이렇게 정리하고 보면 몇 가지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우선 법적인 문제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양국이 ‘상대방의 행정지배 하에 합법적으로 들어갔다고 인정하는 영토에 있어서 … 공통한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행동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미군이 대한민국 영토에 배치되어 있는 것 또한 이러한 목적에 근거하고 있다. 전문가들에 따라 의견이 다르기는 하지만, 한국이 대만해협 사태 같은 해외분쟁에 개입하라고 주한미군에게 기지를 제공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한미군이 한국을 발진기지로 사용하려면 조약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앞서의 ‘중앙일보’ 기사는 “5차 FOTA를 앞둔 2003년 9월말 미국측이 방위조약 가운데 ‘태평양 지역에 있어서의 무력공격’이라는 표현을 들어 조약을 개정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전하고 있다. 이에 한국측은 ‘조약상 이를 인정하는 내용은 없다’는 외교부 조약국의 논리를 들어 맞섰다는 내용이다.
잃어버린 정당성, 잃어버린 레버리지
실제로 외교부 조약국에서는 2003년 여름 ‘전략적 유연성의 인정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개정이 필요한 사항’이라는 요지의 보고서를 NSC에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해 10월 무렵에는 청와대 참모진도 유사한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해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반면 일부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는 “기지는 한반도 방어를 위해 제공된 것이지만 주한미군이 이를 발진기지로 삼는 것은 조약과 별개의 사안으로 볼 수 있다”는 의견도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절차적 정당성’의 문제다. 한국정부 관계자들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대해 2003년부터 ‘잠정적으로만 합의해주었다’고 해도, 이를 누가 승인해주었느냐는 질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국가 안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의 경우 국회의 동의를 얻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안은 국회의 동의를 거치지 않은 것은 물론 제대로 검토된 적도 없다. 일부 전문가들만이 그 중요성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 관계자들이 ‘원칙적으로 합의’해줬다면 적절한 절차를 거쳤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를 보면 이는 보다 분명해진다. 약 10년 전 일본에서도 ‘미군의 역내 안보활동을 지원하는 병참기지 역할을 맡을 것인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 역시 중국을 의식한 고민이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한국이 현재 안고 있는 딜레마와 흡사하다. 정부와 전문가들은 물론 의회와 언론이 대대적으로 논쟁에 뛰어들어 수년간 격론을 벌인 결과, 일본정부는 1990년대 후반 ‘신미일안보공동선언’과 ‘신미일방위협력지침’을 발표해 주일미군의 해외참전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들 문서는 의회의 검토 및 승인을 거쳤다.
더욱이 청와대 사정에 정통한 인사들 사이에서 “대통령이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지침을 내린 적이 없고, 2003년 말 이전에는 사안의 중대성에 대해 상세히 보고받은 적도 없다”는 이야기까지 흘러나오는 상황이고 보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최고결정권자의 지시도 없이 일부 실무자들이 원칙적인 합의 혹은 그에 준하는 발언을 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간 우리 정부가 유지해온 ‘잠정적 인정 및 정식협상 연기’라는 자세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가진 전문가들은 “협상을 주도해온 NSC와 실무협상을 맡은 국방부·외교부가 지나칠 정도로 이 문제가 이슈화 되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다”고 말한다. 북핵문제를 비롯해 외교안보 현안이 산적해 있는 데다 주한미군과 관련해서도 다양한 의제들이 테이블에 한꺼번에 올라오는 것을 감당하기 어려워 가장 민감한 전략적 유연성 부분을 미뤄온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다.
이러한 비판이 사실이라면 절차적인 정당성 부족 외에 실리적인 차원에서도 비판받을 대목이 있다. 다름아닌 협상전술의 문제다. FOTA 협상이 각론에 먼저 집중하게 됨에 따라, 결과적으로 전략적 유연성, 기지 재배치, 감축, 임무전환, 지휘체계, 전시 작전통제권 등 주한미군과 한미동맹의 미래에 관해 서로 긴밀히 연동되어 있는 제반 사안들이 각각 별도의 사안인 것처럼 다뤄지게 되었다. 정부 관계자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용산기지 이전과 미국의 GPR(해외주둔 미군재배치 검토)은 무관하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따라서 용산기지를 이전해달라고 먼저 요청한 한국이 이전비용을 부담하는 것이 옳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만약 총론에 해당하는 전략적 유연성 혹은 지역역할에 대한 합의가 먼저 논의됐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수 있다. 한국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하게 됨으로써 감수하게 되는 안보상 위험을 강조하면서 그 하위조치에 해당하는 기지 재배치 비용을 미국도 분담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재배치 비용의 분담 없이는 전략적 유연성을 양해해줄 수 없다’는 식의 레버리지 효과도 생각해볼 수 있다.
“고육지책에 가깝다”
FOTA 협상에 간여했던 관계자들은 이러한 비판을 일정부분 수긍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고 말한다. 우선 전략적 유연성에 원칙적으로 합의해준 것이나 잠정적으로 인정해준 것은 이미 십수 년 전부터 진행된 관련논의 때문에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1992년 미 랜드연구소와 한국국방연구원(KIDA)은 양국 국방장관의 합의에 따라 ‘한미동맹은 장차 지역방어의 목적으로 변화돼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공동 작성한 바 있다. 이 권고는 1996년 28차 연례안보협의회에 제출된 안보대화 결과보고에서 ‘북한의 위협이 소멸하는 단계에서 한반도 방위는 한국군이 주도하고 미군이 지원하며, 지역방위는 미군이 주도하고 한국군이 지원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발전했으며, 이후에도 꾸준히 재확인되었다.
2003년과 2004년 SCM에서 ‘전략적 유연성이 중요하다’는 내용이 포함된 것도 이러한 논의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NSC 관계자들은 설명한다. 참여정부 들어 갑자기 ‘국민적 합의를 거치지 않았다’는 논리로 이를 백지화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반문이다. 실제로 NSC는 ‘지역방위는 미군이 주도하고 한국군이 지원한다’는 기존 논의내용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군이 지원한다’는 내용이 자칫 해외분쟁에 한국군이 미군을 지원하기 위해 나선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 이전 정부에서 이렇듯 민감한 내용까지 합의해준 상황이다 보니 협상 담당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은 극히 좁았다는 해명이다.
이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면, 장기적으로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해줄 수밖에 없다는 정부 관계자들의 인식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미국 입장에서 볼 때, 주한미군이 지역분쟁에 개입하는 방안이 실현되지 못할 경우에는 한국에 남아 있을 필요성이 크게 줄어든다. 발진기지 역할은 일본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고 대북억제력 또한 유사시 지원으로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한국이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나서면 미국은 협상전술상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는 카드를 꺼내들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관계자들은 말한다.
총론과 각론이 뒤바뀌어 레버리지가 상실되었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NSC 관계자들은 “결과론에 불과하다”고 일축하고 있다. 만약 FOTA에서 전략적 유연성 문제부터 본격적으로 다뤘다면 실질적인 협상이 불가능했으리라는 반박이다. 정부 관계자들은 GPR 스케줄을 갖고 있던 미국이 재배치와 관련된 실무사안부터 다루기를 원했을 뿐더러, 전략적 유연성 같은 총론부터 논의를 시작했다면 서로 밀고 당기느라 아직까지 기초적인 마무리도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협상 관계자들이 가장 흥분하는 대목은 “대통령도 사안의 심각성에 대해 충분히 보고받지 못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FOTA에서 이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보고서에 반영했고 2003년 SCM을 앞두고는 별도 보고서도 작성했다는 것. 협상 담당자들 가운데는 앞서 언급한 미 국방부 관계자의 “외교부·국방부·NSC 일부에 대해 적개심을 품은 이들의 공격”이라는 인터뷰를 거론하며 공감을 표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공론화의 효과
그러나 이러한 설명을 감안해도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논의를 미뤄온 지난 2년 동안 정부 안에 이 사안에 대해 정밀한 대응방안이나 구체적인 합의문안, 세부 협상전략 등을 고민해온 파트가 없었다는 점이다. 방향설정을 담당한 것은 NSC였지만 정책결정 수준의 논의는 진행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고, 국방부나 외교부, 산하 연구기관도 마찬가지였다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국방부의 경우 2003년 초여름 무렵 KIDA 연구원들에게 이와 관련한 간략한 보고서를 작성토록 하는 것에 그쳤다. 11월30일 노회찬 의원이 폭로한 ‘고강도-중강도-저강도’ 자료가 바로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KIDA 관계자들은 이후에는 이 주제를 다루는 보고서가 작성되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는 외교부는 물론 NSC도 마찬가지였다. 실무차원에서 몇 차례 보고서가 작성되었지만 ‘논의를 연기한다’는 방침에 따라 본격적인 고위급 토론은 이뤄지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주한미군이 드나드는 절차문제만 해도 일본식 ‘사전협의제’에 문제가 있다는 정도의 공감대만 형성되었을 뿐, 그 대안으로 어떤 제도를 마련할 지에 대해서는 정밀한 결과물이 없다는 것. 이는 SPI를 목전에 두고 있는 현재까지도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고 관계자들은 전한다.
노회찬 의원의 폭로가 과장되었다고 평가하는 전문가들도 그 긍정적인 파급효과에 대해서만큼은 인정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간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어 제한적으로 논의되던 사안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한국이 전략적 유연성과 관련해 구체적으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 만약 이를 인정하려면 미국으로부터 어떠한 보장을 받아야 하는지, 중국 등의 예민한 시선은 어떻게 누그러뜨려야 하는지 등에 대해 광범위한 토론과 국회에서의 검토가 있어야 한다는 공감대다. 이는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사항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