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시간과 공간의 문화사 1880∼1918’</b><br> 스티븐 컨 지음/박성관 옮김/휴머니스트/768쪽/3만원
역사학자 스티븐 컨의 저서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 1880∼1918’은 바로 이카로스의 후예가 만든 날개라 할 수 있다. 그 후예가 택한 방법은 일단 영리하다. 인용만으로 이뤄진 책을 쓰고 싶어했다는 발터 벤야민이 했던 것과 유사하다. 문학, 미술, 영화, 사진, 군사, 음악, 철학, 기술, 심리학, 물리학, 건축, 천문학 등 무척이나 다양한 인간의 지적, 심미적, 기술적, 사회적 활동 및 그 성과들을 자유자재로 적재적소에 인용, 배치했기 때문이다. 박사(博士)라는 말에서 ‘박’을 글자 그대로 ‘넓다’로 풀이한다면 스티븐 컨은 명실상부한 박사가 아닐 수 없다.
근본적인 구조가 바뀐 시기
그런데 문제는 ‘일이관지(一以貫之)’다. 잡다해 보일 정도로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자료를 종횡으로 주유하는 저자가 도대체 무엇을 실마리로 삼아 어떤 것을 밝히려 했느냐는 것이다. 제목에 실마리가 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1880∼1918년이라는 시기.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모든 경험은 반드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범주는 광범위한 문화적 발전 양상들, 예를 들어 입체파, 동시적인 시(詩), 그리고 래그타임 음악(당김음의 효과를 강조한 흑인음악 양식으로 재즈 음악의 시초다)은 물론이요 증기선, 마천루, 기관총까지 모두 함께 담아낼 수 있는 포괄적인 틀을 제공해준다.”
왜 하필 1880∼1918년인가. 1880년부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의 시기를 이른바 ‘벨 에포크(belle 럓oque)’, 즉 아름다운 시절이라 부르곤 한다. 사상 초유의 세계대전의 참화를 겪기 전 시대에 대한 향수가 개입된 표현이다. 그리고 4년 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저자는 이 시기에 전화, 무선통신, X선, 영화, 자동차, 비행기 등 과학기술 부문의 혁신은 물론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정신분석, 입체파, 상대성이론 등 학문과 예술 분야에서 새로운 양상이 대거 등장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요컨대 저자는 이 시기에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관념, 즉 근대적 시간과 공간 개념이 형성됐고, 이로 인해 인간이 세계를 경험하는 근본적인 구조가 바뀌었다고 주장한다.
근본적으로 구조가 변화한 구체적인 사례에 어떤 것이 있을까? 중세 이후로 모든 것은 각각에 합당한 제 자리가 있으며 그 자리는 고정불변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그런 인식을 무너뜨렸다. 전화를 한 예로 들 수 있다. 전화는 공간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라는 구분, 즉 물리적·지리적 거리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그것은 사회 계층적 구분에도 균열을 불러일으켰다. 전화번호만 알면 누구든지 누구에게나 전화를 걸어 통화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시간과 공간의 구분선과 위계질서가 흔들리는 일대 계기였다.
미술은 또 어떤가. 미술의 입체파는 여러 시점에서 바라본 대상의 내부와 외부를 하나의 화폭에 펼쳐놓았다. 전통적인 회화의 제약을 뛰어넘은 것이다. 흥미롭게도 그러한 입체파의 특징은 카무플라주, 즉 위장술에서도 볼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장에 군용 트럭은 배경과 구별하기 힘들게끔 카무플라주를 입고 등장했다. 전경과 배경, 내부와 외부의 명확한 구분은 가뭇없이 사라져버렸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제1차 세계대전을 입체파적인 은유로 해석할 수도 있다.”
문학도 예외는 아니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객관적 시간과 다른 속도로 진행되는 ‘사적인 시간’을 서술했다. 누구에게나 균질하고 동일하며 보편적인 시간이 무너지고 다양한 사적인 시간들이 갈마들고 겹치는 양상이 시작됐던 것이다.
철학적으로는 앙리 베르그송이 그러한 시간을 탐구했다. 양적이고 물리적이며 기하학적인 시간이 아니라 인간 의식의 흐름으로서 시간을 천착했던 것이다.
우리 시대를 그려보려는 노력
그밖에도 작가 제임스 조이스가 ‘율리시즈’에서 시도한 몽타주 기법은 영화 분야에서 시간과 공간을 조작하는 몽타주 기법과 상통한다. 몽타주 기법은 현실적인 시간과 공간의 연속성을 무시하고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관념들 혹은 개별 사건이나 장면, 아이템들 사이의 결합을 강조한다. 이렇게 본다면 사실 스티븐 컨의 이 저서야말로 몽타주 기법을 차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이러한 변화의 큰 흐름 속에서 파악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아인슈타인의 설명대로라면 기구의 실제 길이라든가 기구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 따위의 관념은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받을 수 없다. 그것은 다만 측정 행위의 결과일 뿐이다. 따라서 절대 공간 또한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일반 상대성이론과 함께 공간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늘어났다. 움직이고 있는 좌표계의 수만큼 공간이 있는 셈이었으니까.”
국제정치 분야에 관한 저자의 통찰도 흥미롭다. 저자는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 중 하나가 외교 실패이고, 그 실패는 당시 외교관들이 새로운 기술인 전자통신의 방대한 분량과 속도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말한다. 마치 구식 기병대 장교들이 앞뒤 사정을 헤아리지 않고 말을 타고 용감하게 적진으로 돌진할 것을 강조하는 것처럼 당시 외교관들도 직접 만나 격식을 차린 대화를 나누는 구식 외교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필자는 새삼 두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먼저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일어나는 큰 변화, 정보기술(IT) 혁명으로도 일컬어지는 이 변화의 전체적인 모습과 세부적인 양상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물론 어떤 현상이나 시대에 관한 완전한 분석은 그 현상이나 시대가 지나간 다음에야 가능하지만, 오늘날을 사는 우리는 변화의 소용돌이에 그저 몸을 맡기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즉 스티븐 컨이 시도했듯 세부적인 조각들을 맞춰가면서 우리 시대의 전체적인 변화의 모습을 그려보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강단 학문의 엄격한 제한을 뛰어넘고, 특히 멀리 떨어져 있는 분야의 것들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 역시 과거 어느 시대에 대해 스티븐 컨과 비슷한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예컨대 최근 국문학계의 근대문학사 분야와 국사학계의 근현대사 분야 소장 연구자들은 대한제국 시기와 일제강점기를 시대 범위로 하는 근대성 문제에 주목한다. 정치사와 외교사가 아니라 사회사와 문화사에 더 큰 비중을 두고자 하는 흐름이다. 이런 흐름이 계속된다면 우리 역시 한국사의 특정 시대를 주제로 하여 이 책의 저자가 보여준 스칼라십에 필적하는, 아니 능가하는 연구 성과를 거둘 수 있지 않을까.
이 글을 시작하면서 이카로스의 후예 운운했다. 그렇다면 이카로스의 후예 스티븐 컨이 만든 밀랍으로 붙인 날개, 즉 이 책은 과연 태양열에 녹지 않고 성공적인 고공비행을 했는가? 물론 보는 사람에 따라 대답이 달라질 것이다. 저자 자신이 경계했던 “억지로 연결지어 나열하는 위험에 빠져버렸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을 일관된 주제 의식을 통해 연결지어 튼튼한 매듭을 지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문화적으로 일관된 덩어리
필자는 그 어느 쪽도 아니다. 저자의 의도 자체가 무언가 결정적이고 분명하며 확고한 결론 혹은 이론을 세우는 데 있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결코 ‘억지스런 연결과 나열’이 아니며, 그렇다고 ‘튼튼한 매듭을 지어놓은’ 것도 아니다. 다만 매듭으로 이어질 수 있는 다양한 실마리를 느슨하면 느슨한 대로, 튼튼하면 튼튼한 대로 서술하고 보여줄 뿐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문화적으로 볼 때 대체로 일관된 덩어리”를 독자에게 제시한 것이다. 그 덩어리를 제 나름의 결대로 풀어보는 것이 바로 이 책을 읽는 재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