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자는 향이 진하고 영양이 풍부한 과일이다. 한때 천덕꾸러기 신세이던 유자가 요즘 들어 건강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한 줄기 바람결에도 그윽한 유자향기가 코끝을 스치는 ‘유자골’ 고흥 땅을 찾아 ‘고흥 유자’의 진면목을 살펴봤다.
운향과(芸香科)에 속하는 유자는 감귤의 사촌뻘 된다. 원산지는 중국 양쯔강 상류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에서는 유자를 인공재배하지 않는다. 경제적 목적으로 유자를 재배하는 곳은 전세계적으로 우리나라와 일본뿐이다.
고흥, 완도 등이 ‘북방한계선’
과일이 대부분 그렇지만, 유자는 특히 기후 변화에 민감하다. 연평균 기온이 13~15℃를 유지하되 평균 일교차가 15℃ 내외, 최저기온이 영하 9℃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 곳에서만 유자를 재배할 수 있다. 또한 일조량이 연간 2400시간 이상, 연평균 강수량이 1500mm 이상이어야 한다. 게다가 바람도 알맞게 불어야 한다. 적당한 바람은 유자나무의 증산작용을 촉진하고 광합성을 왕성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기후조건을 갖춘 고흥, 완도, 남해, 거제, 통영, 고성 등 남해안 지역은 유자재배의 북쪽 한계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고흥군은 우리나라 전체 유자 생산량의 30% 가량을 차지할 만큼 유자 재배농가가 많다.
지난 1980년부터 유자농사를 시작했고, 2004년 ‘농산물 가공산업 발전유공 시상식’에서 대통령표창을 받은 영우식품 신영우(60) 사장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고흥군은 유자 재배지로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우선 바다를 끼고 있어서 겨울에도 별로 춥지 않고 습도가 높아요. 그런데도 안개가 잘 끼지 않습니다. 일조량이 풍부해야 유자향이 좋거든요. 그리고 토질이 좋습니다. 황토가 많아서 땅이 기름져요. 유자 묘목을 처음 보급한 곳도 고흥입니다.”
우리나라의 유자 농사는 198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전까지는 집 주변에 한두 그루 심어놓았을 뿐, 오늘날 같은 대규모의 유자밭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유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먹는 사과, 배, 감과는 달리, 제상에 올리거나 약용으로만 쓰이던 과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1980년대 초에 유자 가공식품이 선보이고 유자가 건강식품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유자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기 시작했다.
폭발적인 수요로 유자 가격도 폭등했는데, 1986∼88년에는 유자 값이 당시 감귤의 10배인 kg당 6000원선까지 치솟았다. 그래서 유자나무 한 그루만 있으면 자식을 대학까지 보낼 수 있다고 해서 유자나무는 ‘대학나무’로도 불렸다. 1kg에 3000∼5000원을 유지하던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유자는 그야말로 ‘황금과일’이었고, 유자 주산지인 고흥군 풍양면이나 두원면 등지에서는 연간소득이 1억원을 넘는 ‘유자갑부’도 한둘이 아니었다. 당시 유자 수확기에는 ‘동네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돌 정도였다고 한다.
이처럼 유자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남해안 일대에는 유자밭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1986년에 405ha였던 재배면적이 10년 뒤인 1996년에는 무려 13배 가량 증가한 5121ha에 이르렀던 것. 마침내 1997년 유자 재배농가들은 된서리를 맞았다. 재배면적의 증가로 공급이 넘쳐난 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IMF 환란 이후 유자 수요가 급감하면서 가격폭락 사태를 빚은 것이다. 1kg에 2000∼3000원 하던 유자 값이 불과 1년 사이에 500∼800원대로 내려앉았다. 그 후로 몇 해 동안이나 약세를 면치 못하던 유자 가격은 ‘웰빙 바람’이 불기 시작한 두어 해 전부터 차츰 회복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유자는 우리나라에서 나는 과일 중에서도 향기가 가장 진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가공되지 않은 생육을 먹을 수 없는 유일한 과일이다. 생유자는 한 입만 베어먹어도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질 만큼 쓴맛이 강하다.
하지만 유자만한 ‘웰빙식품’도 없다. 몸에 이로운 성분을 꼼꼼히 따져보면, 과일이 아니라 숫제 만병통치의 명약처럼 여겨질 정도이다.
풍양면 영우식품에서 유자절임을 만들기 위해 유자씨를 빼내는 모습. 이들 제품은 전량 일본으로 수출된다.
못생겨야 上品 대접
유자는 버릴 게 하나도 없는 과일이다. 씨만 해도 예로부터 티눈이나 사마귀를 치료하는 민간요법의 약재로 쓰여왔다. 태운 유자씨를 갈아서 밥알에 버무려 환부에 붙이면 티눈과 사마귀가 뽑힌다고 한다. 또한 신경통이 있거나 목에 가시가 걸렸을 때에도 유자씨를 빻아 달여 먹었다.
유자는 껍질이 두껍고 울퉁불퉁한 것이 상품(上品) 대접을 받는다. 그래야 향이 진할 뿐만 아니라 껍질에는 헤스페리딘, 리모넨, 유기산, 섬유소 등의 다양한 영양소가 많이 함유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유산하거나 출산한 여자가 복통을 앓을 때 유자 껍질을 달여 먹였다고 한다.
유자는 껍질째로 먹기 때문에 어떤 과일보다도 철저한 잔류농약검사를 받는다. 해마다 수확기 직전에 잔류농약검사가 실시되는데, 고흥 지역도 예외는 아니다. 2004년 10월 말경 고흥읍 고소리 일대의 유자를 대상으로 한 잔류농약검사에서 농약 성분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고흥 유자의 안전성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셈이다.
“유자는 향기가 진해서 그런지, 다른 과일보다 병충해가 적은 편입니다. 농약도 꽃필 때부터 한여름까지 서너 번만 쳐주면 돼요. 그러고 나서 수확하기 90일 이내에는 농약을 전혀 뿌리지 않습니다. 그래야만 수확 직전에 받는 잔류농약검사를 통과할 수 있거든요. 사실 요즘에는 농민들이 먼저 조심합니다. 누구네 유자에서 농약이 나왔다는 말이 나돌면 그 집 유자는 내다 팔 생각을 말아야 하거든요.”
유자나무를 심은 지 17년 되었다는 고흥읍 고소리 유동마을 류익진(60) 이장의 말이다.
고소리는 마을 전체가 유자밭에 둘러싸인 ‘유자마을’이다. 한때는 채마밭이었을 농가 주변의 손바닥만한 텃밭조차 남김없이 유자밭으로 탈바꿈했고, 마을 앞의 문전옥답들도 유자나무가 빼곡이 들어차 있다. 마을 안에 유자밭이 있는 게 아니라, 유자밭 한복판에 마을이 들어선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유자를 따러 간다는 류익진씨를 만나기 위해 이튿날 새벽에 다시 유동마을을 찾았다. 서늘한 아침공기 속에 스며든 유자향기가 온몸 구석구석을 파고들어 머릿속까지 맑아지는 듯했다. 마치 유자향기로 샤워를 한 것처럼 몸과 마음이 가뿐하고도 개운하다.
매년 유자 수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11월에 접어들면 류씨네를 비롯한 고흥군의 유자 재배농가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하다. 날마다 꼭두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유자를 따고 선별해서 포장하는 일이 계속된다. 동네 전체가 유자와 관련된 일로 바쁘기 때문에 일손을 구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유자 재배농가들 중에서는 한해 예상 수확량의 일정 부분은 일찌감치 선금을 받고 유자가공업체나 도매상에 ‘밭뙈기’로 팔아버리는 경우도 많다.
류씨 내외도 11월 초부터 12월 중순, 더 늦으면 크리스마스 때까지 40∼50일을 유자 가공에 매달린다고 했다. 그래도 류씨는 “요즘처럼 유자 값이 괜찮을 때는 힘든 줄 모른다”며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다리에 올라 장대로 조심스럽게 유자를 따고 있던 그의 부인도 “우리는 논농사도 8000평쯤 짓는데, 그것으로는 1000만원도 만들기가 어렵다”면서, “그래도 유자는 따기만 하면 당장 현금을 만질 수 있고 올해같이 작황이 좋고 값도 괜찮을 때는 몇천만 원쯤 손에 쥘 수 있다”고 거들었다.
일본엔 가공식품만 250가지
류씨가 재배하는 유자나무는 500그루 가량. 오랫동안 유자농사를 지으면서 쓴맛 단맛 다 봤다는 그는 “유자농사는 도박이나 다름없다”면서 “유자 값이 너무 많이 오르는 것도 문제”라고 했다. 유자 값이 치솟으면 소비가 줄고, 소비가 줄면 가격 폭락사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류씨의 유자밭을 찾았던 전날의 유자 수매가는 상품 1kg에 1900원이었는데, 그는 “몇백 원쯤 더 내려가도 수지가 맞는다”고 말했다.
올해 유자 값이 비교적 괜찮게 형성된 것은 ‘웰빙 붐’을 타고 국내 유자 소비량이 늘어난 데다 해외 수출액이 크게 증가한 덕택이다. 10월 말을 기준으로 2004년도 고흥의 유자 수출액은 전년도에 비해 2.3배가 증가한 330만달러를 기록했다.
고흥 유자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곳은 역시 일본이다. 일본은 유자 재배 역사가 가장 길고 유자식품을 즐겨먹는 나라답게 현재 유자식품이 250가지 이상 개발돼 있다고 한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유자청(유자차)으로 가공해서 먹는 실정이다.
유자로 만든 떡이나 술, 한과 등은 유자 가공식품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유자향동주(오른쪽 위)는 유자청을 비롯해 감초·당귀 등의 약재를 넣어 만든다.
현재 고흥 지역에서 생산되는 유자가공식품으로는 유자청 이외에 유자즙, 유자술, 유자한과, 유자액 등이 있다. 그중 유자즙은 유자청의 원료로 사용할 수 없는 하품(下品) 유자를 깨끗이 씻어 씨를 빼낸 뒤 착즙해서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유자즙은 주로 각종 요리의 소스나 유자가공식품의 주요 원료로 쓰이는데, 고흥군 풍양면 보천리 영우식품에서 생산한 유자즙은 모두 일본으로 수출된다고 한다.
유자된장에 유자로션까지
유자술은 예로부터 기관지염, 천식, 기침 등과 같은 호흡기 질환을 다스리거나 위 속의 악취를 제거하는 약술로 여겨져왔다. 깨끗이 씻은 유자를 껍질째 잘라서 병에 넣고 소주를 부은 뒤 밀봉해 어둡고 차가운 곳에 두세 달쯤 놔두면 유자술이 된다. 그러나 고흥군 풍양면의 풍양주조장(061-832-4482)에서 만드는 유자술 ‘유자향동주’는 쌀 80%와 밀 20%를 누룩으로 발효시킨 곡주다. 거기에다 직접 담근 유자청을 비롯해 감초, 당귀, 계피 등의 약재를 넣기 때문에 단맛이 강하면서도 뒤끝이 깨끗하다. 그래서 고흥 지역뿐만 아니라 광주, 서울 등지에서도 이 유자술을 주문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 이 유자술을 비롯해 유자생과, 유자액 등은 인터넷쇼핑몰 고흥유자골마트(061-830-5316, www.yujagolmart.com)에서 구입할 수 있다.
유자한과는 고흥군 대서면 금마리 고흥유자한과(061-833-2075)의 송인숙(56) 사장이 개발한 전통식품이다. 유과를 만들 때 조청 대신 유자청을 사용한다는 점이 여느 한과와 다르다. 유자청 속의 유자 슬라이스는 유과 속에 직접 넣기도 한다. 그래서 송 사장이 만든 유과와 강정에서는 유자 특유의 오묘한 맛과 향이 느껴진다.
전통음식지도사이자 전라남도음식보존연구회 부회장인 그는 오랫동안 전통음식을 연구해온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유자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일에 골몰하고 있다. 고흥 지역의 주부들에게 유자로 떡, 음료, 폐백음식 등의 전통음식을 만드는 기술을 보급하는 한편, ‘유자해초탕수’ 같은 전통음식을 직접 개발해 세계음식대축제에서 개발부문 대상을 받기도 했다.
유자 가공식품의 개발과 유자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은 아직 초보단계에 불과하다. 상품화된 유자 제품도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생유자, 유자청, 유자즙을 이용해 일반 가정에서 음식이나 생활용품으로 직접 활용할 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알려져 있다. 유자잼, 유자술, 유자식혜, 유자주스, 유자시루떡, 유자된장, 유자로션, 유자소스, 유자파운드케이크, 유자젤리, 유자수정과 등을 만들어 먹을 수도 있다.
유자된장은 밥맛이 없거나 소화가 안될 때에 먹으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 만드는 방법은 의외로 쉽다. 먼저 생유자를 두 쪽으로 잘라서 속을 완전히 긁어내 껍질만 남긴다. 그리고 들기름에 버무린 된장을 빈 껍질 속에 채운 뒤 다시 짝을 맞춰서 겉껍질이 약간 탈 때까지 불에 구우면 유자된장이 완성된다.
피부미용에도 효과
그밖에 피로회복과 피부미용에 효과가 좋은 유자마사지나 유자목욕, 유자로션도 일상생활에서 쉽게 응용할 수 있는 유자 활용법이다. 특히 일본사람들이 옛날부터 음력 정월 대보름에 즐기는 유자목욕은, 유자 몇 개만 있으면 어느 집에서나 쉽게 체험할 수 있다. 깨끗이 씻은 유자 3∼5개를 껍질째 얇게 썰어 양파자루나 헌 스타킹에 담고 목욕하기 5분 전쯤 욕조에 집어넣는다. 유자 향기와 성분을 빨리 우려내려면 물 속에 잠긴 상태에서 유자가 담긴 주머니를 주물러주면 된다.
차가운 겨울에 유자목욕을 하면 유자에서 우러난 비타민 C와 기름 성분, 그리고 특유의 향기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피부를 매끄럽고 촉촉하게 만들어준다.
고흥군의 유자밭을 둘러보고, 유자에 ‘미친’ 사람들을 만나서 유자의 효능과 가치에 대해 직접 보고 듣고 배우다보니, 이제부터는 커피 대신 유자차를 즐겨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장고 깊숙한 곳에 방치했다가 오랜만에 다시 마셔본 유자차 맛이 새롭다. 그동안 잘 몰랐던 유자향이 먼저 후각을 자극하고, 신맛과 단맛과 쓴맛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유자차 한 모금이 혀끝에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