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9회 우승의 금자탑을 쌓은 해태타이거즈 구단. 해태 신화의 두 주역인 김응룡과 선동열이 최근 삼성라이온즈 구단의 사장과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올드팬들은 잔잔한 향수에 젖어들었다. 전설 속의 ‘호랑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삼성라이온즈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은 돈을 쏟아 부음으로써 어느 정도 전력 향상을 이뤘는지는 모르지만 그만큼 적(敵)을 만든 것도 사실이다. 삼성라이온즈 마니아를 제외한 프로야구 팬 대부분은 “어디, 돈으로 우승 할 수 있나 보자”며 2005년 시즌을 벼르고 있다.
돈이 우승 보장하진 않는다
100년 역사의 미국 메이저리그 팬은 좀 심하게 표현하면 26차례나 우승한 뉴욕 양키즈와 비(非)뉴욕 양키즈 팬으로 나뉜다. 뉴욕 양키즈를 제외한 29개 구단은 다들 자신의 프랜차이즈에서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뉴욕 양키즈 팬은 뉴욕뿐만 아니라 전국에 분포해 있다. 거액을 투자해 우승도 여러 번 했고, 그만큼 스타플레이어도 여럿 배출했기 때문이다.
60년 안팎의 일본 프로야구 역사를 봐도 그렇다.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일본시리즈에 29차례 진출해 20차례나 우승을 차지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응원하는 팬은 다른 11개팀 팬을 합한 수에 필적한다. 그래서 일본 프로야구 팬을 요미우리 자이언츠 팬과 비요미우리 자이언츠 팬으로 나눠야 한다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
삼성라이온즈가 명문팀으로 도약하기 위해 우승을 많이 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은 맞다. 그리고 좋은 선수들을 데려와 전력을 향상시키는 지름길을 택한 것도 틀리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때와 정도가 있는 법이다. 지금 나라의 시장경제가 외환위기 이후 최악의 상태로 빠져들었고, 민속씨름의 LG씨름단이 한 해 20여억원의 운영비가 부담스러워 해체되는 판에 불과 세 선수에게 160억원을 쏟아부은 것은 아무래도 지나쳐 보인다.
그렇다고 돈이 반드시 우승을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다. 단체 스포츠에서 돈의 위력은 삼성라이온즈의 경우처럼 팀 전력 보강을 위해 우수한 선수를 영입하는 데서 발휘된다. 선수단 이동이나 숙박, 훈련비 등 팀 운영에 따른 일반 비용에서는 재력 있는 구단과 없는 구단 간에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몸값이 비싸고 우수한 선수가 많아도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한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돈으로는 살 수 없는 다른 전력 요소가 성적에 더 크게 작용한 사례가 많은 것이다. 2004시즌 메이저리그의 뉴욕 양키즈와 2004~2005시즌 스페인 프로축구 프리메라리그의 레알 마드리드, 2003시즌 미국 남자프로농구의 LA레이커스 등이 좋은 예다. 이 팀들은 모두 막대한 자금력으로 세계 최고의 야구, 축구, 농구 선수를 끌어 모았으나 우승에 실패(뉴욕 양키즈, LA레이커스)했거나 시행착오(레알 마드리드)를 겪고 있다.
해태, 19년간 9차례 우승
한국 프로야구 기아타이거즈의 전신인 해태타이거즈는 많은 돈을 투자하지 않고도 우승을 밥 먹듯이 거머쥔, 세계 프로스포츠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표적 성공사례다. 해태타이거즈는 전체 선수의 연봉 합계가 프로야구 팀 가운데 중위권이나 중하위권에 머물렀다.
그런데도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시즌부터 기아타이거즈로 바뀌기 전인 2000년 시즌까지 19년 동안 무려 9차례나 우승을 차지했다. 우승확률이 50%에 가까웠던 것이다. 이는 뉴욕 양키즈(약 26%)와 요미우리 자이언츠(약 30%)에 비해 엄청나게 높은 것이다.
더구나 1986년부터 1989년까지는 정규리그 4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깨지지 않을 불멸의 기록을 세웠는데, 바로 한국시리즈 승률이다. 해태는 9차례 한국시리즈에 진출해서 9번 모두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시리즈 진출만 놓고 따지면 우승 확률이 100%인 셈이다.
삼성라이온즈 감독 선동열, 삼성라이온즈 사장 김응룡, LG트윈스 감독 이순철
이런 요소들이 우승을 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었다면 불세출의 선수들, 즉 김봉연 김성한 김종모 김준환 김용남 이상윤 선동열 한대화 이종범 김정수 김일권 주동식 김무종(재일교포)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은 충분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 가운데 몇몇 선수는 지금의 ‘삼성라이온즈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수십억, 수백억짜리 선수다. 선동열은 전성기에 방어율 0점대를 기록했다. 지금 식이라면 삼성은 선동열을 데려오는 데 200억원도 아까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4할 가까운 타율에 도루 80개 이상을 기록하던 이종범은 또 어떤가. 아마 150억원이라도 투자했을 것이다. 타율은 높지 않았지만 한 수 높은 인사이드 워크로 투수를 이끌던 김무종 포수에게도 100억원 정도는 어렵지 않게 쏟아 부었을 것이다.
최근 삼성라이온즈가 김응룡 감독과 선동열을 각각 구단 사장과 감독에 임명하면서 야구팬들 사이에 한국 야구를 제패한 전설적인 구단 해태타이거즈에 대한 향수가 되살아나고 있다. 그야말로 ‘스포츠 투자의 원리’를 거스르면서 한 시대를 풍미한 ‘광야의 호랑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해태타이거즈 ‘V9’의 전설을 쓴 주역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해태가 프로야구에서 처음 우승한 1983년을 기점으로 1986년부터 1989년까지 리그 4연패를 이룰 때의 주역들과 1990년대 이후 기아타이거즈로 바뀌기 직전인 2000년까지의 멤버들이다. 해태는 1990년 이전에 5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에는 1991년, 1993년, 그리고 1996년과 1997년 2연패를 포함해 4차례 정상에 올랐다. 1990년 이전 멤버들은 거의 모두 은퇴했고, 1990년 이후의 선수들은 대부분 현역으로 뛰고 있다. 여기서는 주로 1990년 이전의 선수들을 다루려 한다.
‘하와이 반란’의 주역들
1990년 이전의 멤버들을 포지션별로 살펴보면, 투수로는 이상윤 김용남 강만식 선동열 조계현 방수원 신태중 엄평제 김현재 이강철 김대현 김정수 이광우 신동수 송유석 등이 있다. 포수로는 장채근 조종규 김무종 유승안 박전섭 정회열 등이 손꼽힌다. 내야수에는 김성한 서정환 차영화 김봉연 한대화 백인호 이순철 조충열 박철우가 있었고, 외야수로는 김종모 이호성 김준환 김일권 정성용 송일섭 김종윤 등이 활약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듯이 이들의 90% 이상은 프로 또는 아마추어 리그에서 현역 야구지도자로 남아 있다. 5%만이 야구 외의 일을 하고 있다.
해태 출신 프로야구 전·현직 감독은 4명. 시즌 중반에 총감독으로 물러난 김성한이 가장 먼저 감독이 됐고, 올 시즌을 끝으로 한화이글스 감독에서 물러난 유승안이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지난해부터 LG트윈스 감독을 맡고 있는 이순철과 2004시즌이 끝난 직후 삼성라이온즈 감독으로 승격한 선동열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고려대를 나온 선동열과 연세대 출신의 이순철은 투수와 타자로 팀 우승에 기여한 동기생으로, 누구보다 가깝게 지내면서도 항상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었다. 물론 현역 시절엔 국보급 투수로 불리던 선동열이 더 각광을 받았지만, 이순철은 내심 ‘후반전 승부’를 노렸다. 지도자로는 반드시 선동열을 이기겠다는….
과연 2003년 이순철이 선동열보다 먼저 감독에 올랐다. 그러나 1년 늦게 감독이 된 선동열은 감독 연봉에서 다시 이순철을 앞섰다. 이순철이 삼성을 이겨야만 하는 이유는 또 있다. 선동열뿐만 아니라 김응룡 사장에게도 받아내야 할 빚이 있는 것이다. 사연은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6년 2월, 해태타이거즈의 하와이 전지훈련 때였다. 코칭스태프의 강압적인 지휘에 불만을 품은 선수들이 단체행동으로 반기를 들었다. 주역은 이순철, 송유석 등. 당시 김응룡 감독은 산전수전 다 겪은 승부사답게 불이 더 번지는 것을 막았다.
1996년 시즌 해태는 선동열이 일본으로 떠난 후 전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한국시리즈에서 현대를 물리치고 V8을 이뤄냈다.
비록 우승을 차지하긴 했어도 감독과 선수들 간 앙금은 지워지지 않았다.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 김응룡 감독은 송유석을 LG로 트레이드했다. ‘하와이 반란’ 당시 앞장선 선수들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극동대 교수 김봉연, 삼성라이온즈 수석코치 한대화, 군산상고 감독 김성한
1997년 해태는 전해에 이어 또다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그후 이순철 조계현 정회열 등 ‘하와이 반란의 주역’들은 쫓겨가듯 삼성으로 옮겼다. 이순철은 이듬해인 1998년 삼성에서 은퇴하고, 1999년 삼성 코치가 됐다.
이순철과 김응룡의 관계는 2000년 말 김응룡이 삼성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한번 더 꼬였다. 이순철은 더 이상 삼성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결국 또 한번 짐을 꾸려 LG트윈스 코치로 옮겼다. 이순철은 3년 동안 LG에서 지도자로서 입지를 굳혔다. 그리고 2003년 말 LG의 감독이 됐다. 이제 LG트윈스가 2005년 시즌 한국시리즈에서 삼성라이온즈를 꺾고 우승을 차지하면 이순철은 한 개의 돌을 던져 두 마리의 새(선동열과 김응룡)를 잡는 셈이다.
그러나 초보 선동열 감독이 이끄는 삼성라이온즈의 전력은 겉보기에도 막강하다. 내야에는 1루수 김한수, 2루수 박종호, 유격수 박진만, 3루수 조동찬이 있다. 만약 김한수가 자신의 원래 포지션인 3루를 본다면 양준혁이 1루를 맡는다. 심정수 박한이 강동우 신동주 김종훈으로 구성된 외야진은 8개 구단 중 최고다.
투수진도 막강하다. 한국 최고의 투수로 떠오른 배영수를 비롯해 김진웅 권혁 권오준 김현욱에 외국 투수 2명이 가세했다. 가히 넘볼 수 없는 사자왕국이다. 선수 면면만 놓고 볼 때 선동열 감독의 부임 첫해 성적은 첫술에 배부를 여지가 충분하다.
김성한은 기아타이거즈 감독으로 있다가 2004년 시즌 도중 경질된 뒤 모교인 군산상고 감독으로 부임했다. 해태타이거즈가 최고 명문팀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일등공신이 누구였냐를 따진다면 단연 김성한이 꼽힌다. 김성한은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에는 투수와 타자로 활약했다. 그 해 10승 고지에 올랐으며 타점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김성한은 또 한국 최초로 한 시즌에 홈런 20개,도루 20개 이상을 기록하는 20-20클럽에 가입한 만능선수였다. 해태가 9차례 우승을 차지하는 동안 김성한은 무려 7차례나 현역으로 뛰었다. 프로야구 원년부터 14년 동안 활약하면서 1137경기에 출전해 1경기에 1개가 넘는 1389개의 안타를 쳤고, 통산 0.286의 타율에 홈런 207개, 781 타점을 기록했다.
그밖에도 숱한 기록을 세우며 화려한 선수생활을 했지만 감독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김성한, 유승안 감독이 도중하차하고, 2004년 시즌 이순철 감독의 LG가 정상등극에 실패함으로써 해태선수 출신 감독의 최초 우승은 아직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환의 저주’
해태타이거즈는 두 차례 성공적인 트레이드를 통해 강팀이 되는 발판을 마련했다. 삼성라이온즈에서 유격수 서정환을, OB베어스에서 한대화를 2대1 트레이드로 데려온 것이 그것이다.
서정환은 원래 삼성라이온즈 선수였다. 그러나 호화군단 삼성에는 천보성 오대석 배대웅 등 기라성 같은 유격수가 있었다. 물론 서정환도 국가대표 출신이지만 이들보다는 공격력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었다. 서정환은 프로야구 첫 시즌이 끝난 직후인 1982년 12월7일 겨우 1600만원에 해태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됐다. 프로야구사상 첫 트레이드였다.
그때부터 ‘정환의 저주’가 시작됐다. 서정환을 싼값에 트레이드한 삼성라이온즈는 이후 한국시리즈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고, 해태타이거즈는 단 한번도 실패하지 않았다. 서정환은 유격수로서 빼어난 수비와 알토란 같은 공격력을 발휘해 해태 우승에 톡톡히 기여했다. 서정환은 자신을 해태로 보내준 고 서영무 감독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실제로 삼성과 경기할 때마다 서 감독을 찾아가 인사를 했다. 서정환은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도 기아 코치로 남아 있다. 이제는 완전히 호남사람이 된 것이다.
한대화는 결정적인 순간에 한 방 날리는 해결사로 야구팬들의 뇌리에 남아있다. 그런데 그에게는 남모르는 지병이 있었다. 간염이었다. 그러니 아마추어 시절에 비해 엄청난 체력이 요구되는 프로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도 해태 김응룡 감독은 1986년 시즌을 앞두고 한대화를 데려왔다.
김 감독은 다른 선수들을 대할 때와는 달리 한대화에게는 각별히 관심을 기울였다. 오전 9시까지 자게 해주고 훈련에서도 세심하게 배려했다. 덕분에 한대화의 간염은 크게 호전됐다. 피로감이 사라지고 특유의 장점인 근성이 살아났다. 한대화는 해태에서 8년간 뛰었는데 그 기간에 해태는 여섯 차례나 우승을 차지했다. 물론 한대화는 고비 때마다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또 3루수 부문 골든 글러브상을 7차례나 받을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펼쳐 친정인 OB베어스를 속상하게 했다.
한대화 이상윤, 후배 선동열 밑으로
한대화는 팀에서 선동열과 가장 가까워 형, 동생 사이로 지냈다. 선동열은 삼성 수석코치로 취임한 후 동국대 감독으로 있던 한대화를 삼성의 타격코치로 추천했다. 곧이어 감독에 오르자 한대화를 수석코치로 승격시켰다.
초창기 해태 마운드는 ‘원자탄’ 이상윤 투수가 이끌었다. 이상윤은 시속 145km를 넘나드는 강속구에 제구력도 뛰어나 선동열이 입단하기 전까지 해태의 에이스 노릇을 했다. 이상윤은 부리부리한 눈매와 운동선수 같지 않게 뽀얀 피부의 잘생긴 얼굴로 역대 해태타이거즈 선수 중 최고의 ‘얼짱’으로 꼽힌다. 현역에서 은퇴한 후 줄곧 해태의 투수코치 노릇을 해온 이상윤은 삼성 선동열 감독의 부름을 받고 삼성 투수코치로 활약하게 됐다.
해태타이거즈 후신인 기아타이거즈에는 아직도 ‘호랑이’가 많이 남아 있다. 포수 출신의 노지심 장채근은 2005년부터 수석코치로 승격해 유남호 감독을 보좌하게 됐다. 또 김종윤 백승호 김만후 백인호 박철우 조계현 이광우 정회열 등이 팀에 남아 후배 호랑이들을 조련하고 있다.
그밖에 기아팀이 아닌 다른 팀에서 코치로 활약하는 해태 출신으로는 삼성라이온즈 조충열, 한화이글스 김정수, LG트윈스 이건열 코치가 있다. 그리고 아마추어팀 지도자로는 원광대 김준환 감독과 포철공고 정성용 감독, 충장중학교 차영화 감독 등이 있다.
해태 출신 가운데 가장 특이한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은 프로야구 원년 홈런왕 김봉연이다. 1루수 혹은 지명타자로 출전했던 김봉연은 현재 극동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그는 연세대 시절 노히트노런을 기록할 정도로 뛰어난 투수였고, 한국화장품과 국가대표팀에서는 부동의 4번타자였다. 이후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해태에 입단했다. 당시 각 프로구단은 선수의 연봉을 책정할 때 투수는 메이저리그 밀워키 브르어스 더블 A팀에서 활약한 박철순, 타자는 김봉연의 연봉을 기준으로 삼았다.
김봉연은 첫해 22개의 홈런을 쳐 홈런왕 자리에 올랐다. 여세를 몰아 1983년에도 펑펑 홈런을 쳐댔는데, 전기 리그 막바지에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선수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큰 사고였다. 그는 사고 후 넉 달 만에 다시 그라운드에 나타났다. 상처 부위를 감추기 위해 가수 김흥국처럼 콧수염을 기른 채.
1983년 한국시리즈의 분수령이 되었던 3차전. 결정적인 순간에 김봉연은 현재 SBS 야구 해설위원으로 있는 MBC 청룡 이광권 투수의 초구를 받아쳐 3점 홈런을 기록했다. 이것으로 그해 한국시리즈의 승자는 사실상 결정됐다. 해태 신화의 출발은 김봉연의 방망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김봉연은 이듬해인 1984년부터는 그다지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자신의 별명인 ‘촌놈’처럼 힘만 앞세운 공격적인 배팅을 하다 보니까 점점 발전하는 기교적인 투구에 번번이 속아 넘어가면서 힘을 잃었던 것이다.
인기 캡, ‘김봉연 교수’
김봉연은 운동하는 틈틈이 공부를 했다. 비록 배팅은 무식해 보일지 몰라도 야구장을 떠나서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당시 선수로는 드물게 대학원도 다녔다. 원광대에서 운동생리학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따냈다. 그때 따둔 학위로 나중에 교수의 길로 들어서게 될 줄은 그 자신도 몰랐다.
현역에서 물러난 후 해태 타격코치마저 그만두고 쉬고 있을 때인 2000년 12월, 극동대에서 겸임교수를 제안했다. 그때부터 이듬해 3월 첫 강의가 시작될 때까지 3개월 동안 김봉연은 하루에 10시간 이상 책과 씨름했다.
2001년 3월2일, 김봉연은 오후에 예정된 첫 강의를 앞두고 점심도 먹지 못할 정도로 긴장했다. 교양체육 첫 강의 때 ‘프로야구 원년 홈런왕’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지만 1980년대에 태어난 학생들은 홈런왕은커녕 그가 프로야구 선수였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당연히 학생들의 반응은 싸늘할 수밖에 없었다.
김봉연은 순간 프로야구 경력은 물론 홈런왕도 교수생활에는 전혀 프리미엄이 되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리고 오로지 실력으로 승부를 걸겠다고 다짐했다. 그 후 누구보다 열심히 수업준비를 하고그라운드 경험담을 섞어가며 나름의 강의 비법을 터득해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김 교수의 강의는 재미도 있고 들을 것도 많다고 입소문이 나면서 다음 학기에는 학생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학교측도 김봉연 교수의 자질을 높이 사 이듬해인 2002년 3월 조교수로 정식 발령했다. 그와 함께 ‘극동대학 홍보실장’이라는 타이틀도 달게 됐다. 그 덕분일까. 극동대학은 지방대학이라는 불리한 여건에도 2003년에 97%라는 높은 신입생 확보율을 기록했다.
꽃집, 호프집, 트럭운전사…
투창선수 출신의 투수로 유명한 송유석은 1987년 해태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LG트윈스, 한화이글스를 거쳐 2001년 은퇴했다. 현재는 광주 쌍암동에 위치한 (주)루빌코리아 사장이다. 국제 특허권을 받은 ‘회전식건물 건축기술’로 3년 전 사업을 시작했다. 남산타워 전망대처럼 내부 바닥만 회전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 전체를 회전시키는 기술로 건물 내의 배선이나 배관시설을 전혀 훼손시키지 않고 건축하는 신기술이다. 특허권의 유효기간은 10년인데 이 기간에 사업을 전국 규모로 확대하겠다는 것이 송 사장의 꿈이다.
역대 해태팀에서 가장 힘이 센 선수를 고르라면 거의 모든 사람이 이호성 선수를 꼽는다. 마치 차력사처럼 나무에 박혀 있는 못을 맨손으로 뽑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는 2001년 은퇴한 후 예식사업에 뛰어들어 현재 광주 ‘호성 웨딩문화원’ 사장이다. 연매출액이 한때 70억~80억원에 달했고, 직원이 70여명에 이를 정도로 사업이 번창했다. 또 국민체육생활 광주지역 야구협회장에 뽑히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해 무리하게 사업확장을 해 고전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린다.
그밖에 외야수로 활약했던 왼손 타자 출신의 박재벌은 ‘재벌’답지 않게 꽃집을 운영하고 있다. 또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 불편을 겪으면서도 지명타자 부문 골든 글러브상을 받아 화제를 모았던 왼손 타자 박재용은 중앙고 코치로 있다. 신동수는 경기도 구리에서 호프집을 경영하고 있고, 올 시즌을 끝으로 삼성라이온즈 코치에서 해고된 김종모와 김일권은 새로운 일을 모색하고 있다.
1983년 한국 프로야구가 재일동포 선수에게 문호를 개방한 후 첫 케이스로 활약했던 언더핸드 투수 주동식은 일본으로 돌아가 야구해설가로 활약하고 있다. 또 히로시마가 고향인 김무종 포수는 트럭운전사로 변신했고, 내야수였던 전성길은 아마추어 야구팀 주무 겸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해태 선수 출신으로 유명을 달리한 이로는 교통사고로 숨진 투수 김대현과 위암으로 사망한 김상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