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년 새해 벽두에 시드니 하버에서 벌어진 송구영신 불꽃놀이.
또한 그들은 안다. 사람은 태어나고 성장한 나라에서 주인으로 살아가는 게 가장 큰 축복이라는 것을. 부모형제와 친구들, 어릴 적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고향을 떠나서 평생 손님처럼 사는 것이 ‘거푸집 같은 생’이라는 것을.
그뿐인가. 물신(物神)이 온 천하를 평정해버린 시대에 대궐 같은 저택에 살고 고급승용차를 몰고 다니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다수집단의 중압감에 시달려야 하는 소수집단의 비애를 안다.
상상해보라. 호주나 미국 같은 다민족국가와는 사정이 다르지만 대한민국 땅에 와서 ‘황금빛 보리밭의 깜부기’처럼 살고 있는 네팔이나 콩고 출신 사람들의 막막한 심정을.
개의 故鄕은, 분명바다 건너천길 허공 중에 있으리
오늘도, 어제처럼물결은 높고… 오랫동안개는 어슬렁거린다
개의 발 아래쪽은늘 위험하였으나그게 生이란 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듯
여기는 남의 나라 땅밤마다, 꿈자리 뒤숭숭한이 세상의 끝이다
뿌리뽑혀서, 늘발바닥 밑이 허전한개(윤필립 詩 ‘바다 건너’ 전문)
이민자들 사이엔 불문율 같은 것이 있다. “지금 무슨 일을 하는가”와 “이민 오기 전에 무슨 일을 했는가”를 묻지 않는 것이다. 이건 한국계뿐 아니라 다른 나라 이민자들도 마찬가지다.
전자는 이민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신분하락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는 이민자의 처지에서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현재의 신분을 밝히도록 강요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호주 LP공립유치원의 박경숙 원장(뒷줄 맨오른쪽)과 어린이들.
그 누구에겐들 잘나가던 왕년이 없었겠는가. 저마다 큰 산이고 긴 강이었던 사람들, 그들은 십중팔구 긴 한숨으로 이야기를 맺는다. “젠장맞을! 그놈의 이민바람만 나한테 불지 않았어도….”
‘이민폐인’의 가을편지
2004년 9월의 일이다. 필자는 그때 붙잡은 ‘이민(移民)’이라는 화두를 지금껏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이메일을 보내고 전화를 걸어오던 한 ‘이민폐인(移民廢人)’ 때문이다.
시드니의 9월은 봄이 오는 길목이다. 사방에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꽃대궐이 펼쳐진다. 아열대성 기후에다 토양까지 기름져 눈길 머무는 곳마다 눈부신 꽃들이 피어 있는 것.
자연은 겨울을 견뎌내지 않은 씨앗에겐 발아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던가. 비록 시드니의 겨울이 5~20℃를 오르내리는 이름뿐인 겨울이긴 하지만, 겨울을 이겨낸 시드니의 봄이 온갖 꽃들로부터 축하를 받는 주말에 필자는 문득 서울의 가을을 떠올렸다.
수락산과 송추계곡의 아스라한 기억들을 떠올리면서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서울이 그리울 때마다 편지를 보내는 K후배에게 시드니의 봄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종로거리와 인사동 골목을 걸어다니고 있을 서울의 가을. 그 가을의 안부를 묻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