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호

한국 최초의 전투비행사 서왈보 소전(小傳)

  • 글: 이영신 / 일러스트·홍석찬

    입력2004-12-28 13: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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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최초의 전투비행사 서왈보 소전(小傳)
    필자가 지금은 없어진 동아방송에 ‘백두산아 말하라’라는 제목으로 독립투쟁 비화를 다큐드라마로 집필하기 시작한 것이 1970년 4월1일이니 벌써 30여년이나 세월이 흘렀다. 이 프로그램은 1972년 3월31일까지 만 2년간 730회에 걸쳐 방송되었다. 그때 필자가 활용한 1차 자료가 바로 동아일보다.

    다이쇼오(大正) 15년 7월분 축쇄판을 뒤적이던 어느 날 7월6일자와 7월10일자 3면에 실린 추도문이 필자의 눈에 들어왔다. 일본 연호(年號)인 ‘다이쇼오’ 15년은 서기로는 1926년이다. 추도문의 제목은 이러했다.

    ‘嗚呼(오호) 徐曰甫公(서왈보공) 血淚(혈루)로 그의 孤魂(고혼)을 哭(곡)하노라’

    제목만으로도 서왈보라는 사람을 추모하는 글임을 알 수 있었다. 추도문을 쓴 이는 한병도(韓秉道)라는 분이었다. 그때까지 필자는 서왈보라는 이름 석자를 대한 적도, 누구한테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 추도문은 두 번에 나누어 실었을 정도로 꽤 길었다. 대강의 내용은 이러했다.

    ‘서왈보는 중국군에서 활동하다가 3·1운동 후 중국 군적(軍籍)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활동한 독립지사로서 독립군을 양성할 뜻을 세우고 그 자금 마련을 위해 금광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자 베이징에 있는 남원항공학교에 입교했다. 남원항공학교를 졸업한 후 같은 학교 교관으로 활약했다. 둥베이(滿洲) 순무사(巡撫使) 장쭤린(張作霖)이 그를 초빙해서 휘하에 두려고 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펑즈전쟁(奉直戰爭) 때는 국민군(國民軍) 편에서 활동했다. 그렇게 종횡무진, 눈부시게 활동하다가 비행기 시험비행을 하다가 추락사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당시 필자는 동아방송에 독립투쟁 비화를 집필하고 있던 터라 새로운 인물을 발견했다는 것만으로도 여간 흥분한 게 아니었다.

    허술한 한국독립운동 사료

    당장 서왈보라는 인물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고 했으니 어쩌면 독립운동사에 소개돼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김승학(金承學) 선생이 펴낸 ‘한국독립사(1965년)’를 훑어보았다. 그런데 인명편에 딱 한 줄로 소개되어 있었다.

    ‘徐曰甫 : 만주 개별사건(個別事件)의 공적으로 (단기)4296년 3월1일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 수상.’

    ‘만주 개별사건’이 있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문제는 이 사건의 내용이 ‘한국독립사’ 어디에도 소개되어 있지 않다는 것. ‘한국독립사’의 허술한 편찬에 여간 실망스럽지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독립운동에 관련된 자료를 닥치는 대로 뒤적여보았지만 모두가 허사였다. 다행히 ‘한국인명대사전(靑丘文化社, 1967년)’에서 어렵사리 서왈보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단서를 발견했다.

    ‘徐曰甫 1886(고종 23)∼1928년 독립운동가. 최초의 비행사. 평안도 출신. 원산 일본인 보통학교 졸업.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에서 수학(修學)하고, 안창호(安昌浩) 이갑(李甲) 등과 함께 시베리아에 건너가서 사관학교를 설립, 젊은 독립투사들을 양성했다. 1909년 베이징의 육영(育英)학교에서 공부하고 1911년 유동열(柳東說)과 함께 몽골(蒙古) 등지에 들어가서 독립운동에 종사했고, 1914년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와서 바오딩(保定)보 육군학교에 입학, 졸업 후에 중국군 육군대위로 활약하다가 3·1운동 후 애국지사들이 망명하자 이들과 함께 남만주에 들어가 활약했다. 뒤에 다시 베이징에 가서 육군 항공학교에 입학, 1년 후 졸업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가 되어 동교(同校) 교관으로 있다가 1928년 베이징을 방문한 이탈리아 비행사의 비행기를 시승(試乘)하다가 추락하여 사망했다. 기로수필(騎驢隨筆).’

    ‘기로수필’은 송상도(宋相燾) 선생이 일제시대에 여기저기 떠돌던 소문을 정리해서 출간한 책이다. 그러나 ‘한국인명대사전’은 ‘기로수필’ 하나만을 자료로 삼았기 때문인지 사실과 다른 내용이 적지 않았다. 우선 사망연대부터 틀렸다. ‘한국인명대사전’에는 서왈보의 사망시기를 1928년이라고 기록했는데 한병도의 추도사가 실린 것은 동아일보 1926년 7월6일과 10일자였다. 사실관계가 서로 다른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일한 증언자 권기옥 여사

    필자는 서왈보와 관련된 자료 발굴에 착수했다. 그러나 서왈보 발굴 작업은 고달프기 그지없었다. 1970년만 해도 만주나 중국 본토에서 독립투쟁을 했던 독립지사가 꽤 많이 생존해 있을 때라 필자는 그분들을 신발이 닳도록 일일이 찾아다녔다.

    “혹시 서왈보라는 독립지사를 모르십니까? 한국 최초의 비행사라고 합니다. 서왈보라는 이름 석자는 들어보셨겠죠?”

    서왈보가 사망한 1926년 이전까지 조선인 비행사는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때문에 일제 식민지하에 조선인이 비행사가 됐다는 것은 굉장한 뉴스거리였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서왈보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서왈보는 그냥 비행사가 아니라 독립운동을 한 독립지사 비행사였음에도 그 이름을 알고 있는 독립지사는 단 한 사람,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독립군 연성대장이었던 철기 이범석(鐵驥 李範奭) 장군뿐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장군 또한 서왈보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6, 7년 뒤 필자는 ‘대한항공 10년사’ 편찬작업에 관여한 적이 있다. 1978년의 일이다. 이때 필자는 다시 ‘지하에 묻혀 있는 비행사들’을 발굴해 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때 만난 분이 바로 권기옥(權基玉) 여사다. 권 여사가 이범석 장군이 졸업한 중국 윈난(雲南)성의 강무학교(講武學校) 항공과 출신으로,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참으로 다행이었던 것은 권 여사가 서왈보와 2개월 가량 국민군 항공대에서 함께 생활해 서왈보에 대해 상당히 자세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권 여사는 특히 서왈보가 비행기 추락사했을 때 갈기갈기 찢긴 시신을 수습해서 장사를 치러준 사람 중 하나라고 했다. 며칠에 걸쳐 권 여사로부터 서왈보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 소전(小傳)은 전적으로 권 여사의 증언을 뼈대로 하고 관련 자료를 참고해서 구성했음을 밝혀둔다.

    권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서왈보가 비행기 추락사한 뒤 서왈보의 아내는 중국 국민당 총사령관 펑위샹(馮玉祥)의 아내 리더취안(李德全)의 보살핌을 받다가 평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북한의 어딘가에 서왈보의 핏줄이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훗날 통일이 되어 그 누군가가 ‘한국 최초의 전투 비행사 서왈보’의 일대기를 보다 정확하게 밝혀낸다면 이보다 더 고맙고 다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서왈보의 어린 시절

    서왈보는 1886년 평안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서씨 가문은 평안도 성천(成川)의 서씨 집성촌에서 오랫동안 뿌리내리고 살아왔으나 할아버지 대에 평양으로 옮겼다고 한다.

    1876년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뒤 시대의 흐름에 눈뜬 양반 사이에 자녀를 일본에 유학시키는 일이 점차 늘어났다. 서왈보의 아버지도 일본으로 유학(연대 미상)을 다녀왔다. 서왈보의 아버지는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한동안 평양에서 부모를 모시고 살다가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나자 함경도 원산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일본이 설립한 원산 체신분장국(遞信分掌局)에 통역 일자리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때가 1888년으로, 서왈보가 세 살 되던 해다.

    서왈보가 7세가 되자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원산의 일본인 소학교에 입학시켰다. 1892년 봄이었다. 어떤 생각에서 아들을 일본인 소학교에 보냈는지는 확인키 어렵지만, 어린 서왈보의 가슴에 일본인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기에는 충분했다.

    3학년 무렵의 일이다. 일본 아이들은 서왈보와 어울리려고 하지 않았다. 요즘 말로 치면 ‘왕따’를 시켰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슨 꼬투리라도 잡으면 “조선놈의 새끼!” 하면서 쥐어박기 일쑤였다. 복수를 다짐한 서왈보는 어린 마음에도 먼저 신체를 단련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고 기계체조에 매달렸다. 그 시대에 일본인 소학교 운동장에는 이미 철봉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서왈보는 틈만 나면 철봉에 매달렸다. 그러나 일본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는 절대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았다. 반드시 학교수업이 끝나고 아무도 없을 때 철봉에 매달렸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기계체조로 단련한 그의 신체는 훗날 비행사가 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4학년에 진급한 어느 날 점심시간이었다. 아이들이 도시락을 먹다 말고 소동을 벌였다. 누군가의 도시락에서 역겨운 마늘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 마늘 냄새의 진원은 두말할 것도 없이 서왈보의 도시락이었다. 하필이면 그날따라 어머니가 마늘장아찌를 도시락 반찬으로 잔뜩 넣어주었던 것이다.

    일본 아이들 가운데 대장노릇을 하는 아이가 욕설을 퍼부었다. 서왈보는 심한 모욕감에 몸을 떨었다. 어린 마음에도 도시락을 챙겨주신 어머니에 대한 모욕으로 느껴졌다. 순간 서왈보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벌떡 일어서 그 아이를 향해 성난 황소처럼 돌진했다. 그러고는 그 아이의 얼굴을 받아버렸다. 박치기는 평안도 사람의 특기다. 불의에 박치기를 당한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벌렁 뒤로 나자빠졌다. 코가 깨졌는지 코피가 줄줄 흘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왈보는 개의치 않고 일본 아이를 올라타고 앉아 연방 주먹을 휘둘러댔다. 기계체조로 단련된 팔뚝이었으니 상대방 아이의 얼굴이 성했을 리 있겠는가. 조선 아이가 일본 아이를 두들겨 팬 이 사건으로 서왈보의 아버지는 끝내 아들을 자퇴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각하께서도 서둘러 항공사 양성에 힘을 쏟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항공기도 없는데 항공사부터 양성하란 말인가? 아이를 가지기도 전에 기저귀부터 장만하는 꼴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각하. 항공기를 구입한 다음에 항공사를 양성하려고 하면 때가 늦을 수도 있습니다. 소관이 남원항공원양성소에 입소했으면 합니다. 졸업 후에 각하의 항공대를 창설코자 해서입니다.”

    펑위샹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마침내 서왈보의 계획에 동의했다. 1919년 3월 초하루 조선에서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소식을 듣자 서왈보의 피는 부글부글 끓었다. 군대만 거느리고 있다면 당장에라도 조선으로 쳐들어가겠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에 가슴이 찢기 듯 아팠다. 서왈보는 그날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비행사가 돼야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3월 중순 서왈보는 며칠 휴가를 내어 베이징의 남원항공훈련소로 달려갔다. 훈련생 모집이 언제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 사이 간판이 ‘남원항공학교’로 바뀌어 있었다. 남원항공훈련소는 1기 훈련생을 배출하고는 거의 휴교 상태에 빠져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데다가 위안스카이가 급사한 뒤로는 중앙정부의 어느 누구도 이 훈련소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거의 폐교나 다름없던 이 학교가 항공학교로 명칭을 바꾸고 교육기간도 1년으로 늘려 다시 문을 연 것은 1919년 3월 초였다.

    장쭤린의 회유

    서왈보가 달려갔을 때 학교에서는 마침 제2기생을 모집하고 있었다. 서왈보로서는 운이 좋은 셈이었다. 제2기 항공학생 시험을 치는 날, 서왈보에게는 학과시험이 면제되었다. 중국군의 현역 육군 소령이었기 때문이었다. 서왈보는 비행사로서의 신체적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를 가려내기 위한 신체검사와 신경의 예민성에 대한 테스트만 받았을 뿐이었다. 결과는 합격. 남원항공학교 제2기생으로는 모두 83명이 뽑혔다. 이때 서왈보의 나이 34세였다. 동급생들은 모두 20대였다.

    서왈보가 남원항공학교에 입교한 1919년 그해, 중국의 군벌들이 잇따라 그들의 성도(省都)에 항공학교를 세우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위난성 도독인 탕지야오(唐繼堯)가 강무학교 안에 항공과를 설치했다. 이어 산시성 도독인 예신산이 타이위안(太原)에 항공학교를 세웠으며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돼 연금당해 있던 바오딩보에도 항공학교가 세워졌다.

    남원항공학교 제2기생부터 교육기간이 1년으로 늘었다. 그런데 6개월의 기본교육이 끝나자 신설 항공학교에서 재학생을 상대로 스카우트 경쟁이 벌어졌다. 나머지 6개월은 비행훈련 기간이었는데 실제로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보지도 못한 학생들을 상대로 경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서왈보에게도 물론 제안이 들어왔다. 그들이 내세운 조건은 소령계급에 관사를 제공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서왈보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펑위샹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늦가을의 어느 날 비행훈련을 끝낸 서왈보가 쉬고 있는데 전혀 낯선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키 190㎝에 몸무게는 140㎏쯤 될 것 같은 거한이었다. 서왈보는 세상에 태어나 그런 거한은 처음 보았다.

    “나는 펑톈의 장쭤린 동삼성 순열사 막하의 장쭝창(張宗昌)이라 하오.”

    서왈보는 장쭤린이 만주의 순열사라는 말에 속으로 무척 놀랐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동삼성(東三省) 순열사라면 만주의 최고 권력자였다. 더욱이 장쭤린이라면 서왈보가 유동열과 함께 만주에서 마적 활동을 할 때 동북군 제27사의 사장(師長)이던 인물이 아닌가. 당시 중국의 군사편제상 사장은 중대장쯤의 하급 지휘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위인이 어떻게 5, 6년 사이에 만주의 최고 실력자인 순열사의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는지, 서왈보로서는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였다.

    더구나 장쭤린은 녹림(綠林) 출신이었다. 녹림이란 마적단을 말한다. 장쭤린은 제 이름 석자도 쓸 줄 모르는 무식한으로 전해 듣고 있었다. 그런 무식한이 만주의 최고 권력자가 된 것이다. 장쭝창이 입을 열었다.

    “만주에 살고 있는 당신네 교포나 당신네 나라 독립군의 운명은 당신 하기에 달렸소.”

    명백한 협박이었다.

    “나는 장쭤린 순열사와 의형제요. 내가 아우요. 순열사께서는 나더러 서왈보 학생을 우리 동북군에 영입하라는 특명을 내렸소. 당신이 우리의 권유에 응하면 당신네 동포도 독립군도 무사할 거라 그 말이오.”

    한국 최초의 전투비행사 서왈보 소전(小傳)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서왈보를 스카우트하라고 장쭤린에게 지시한 사람은 바로 일본 관동군 참모인 육군 대좌 혼조 시게루(本庄繁)였다. 일본이 남만주 철도를 수비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만주에 파견한 육군 병력을 하나로 묶어 대본영 직할의 관동군으로 재편성한 것은 1919년 8월17일로, 이때는 이미 일본 군부가 대륙 진출의 청사진을 마련해놓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중국정부가 비행사 양성을 개시하자 관동군은 바짝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었다. 혼조는 베이징에 주재하는 공사관 무관에게 지령을 내려 남원항공학교 학생 명단을 입수케 했다. 학생들을 상대로 회유공작을 펴기 위해서였다. 학생 명단을 놓고 성분을 분석하던 일본 관동군은 국적이 조선으로 되어 있는 학생을 발견하고는 경악했다. 이 사실은 즉시 조선총독부에 통고되었고,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는 그때 마침 경무국 촉탁으로 만주에 특파된 배정자(裵貞子)에게 서왈보를 회유하라는 지령을 내렸던 것이다.

    당시 배정자는 만주의 교포들이 서로 반목하도록 만드는 임무를 띠고 그 교란책으로 친일적인 보민회(保民會)를 조직하고 있었다. 책략에 뛰어났던 배정자는 경무국의 비밀지령이 떨어지자 장쭤린을 이용할 계책을 세웠다.

    “남원항공학교에 서왈보라는 조선인 학생이 있소. 그를 회유해서 당신 막하에 두시오. 그를 포섭하지 못하면 아마 일본군은 당신에 대한 지원을 포기하고 새 사람을 순열사로 맞아들일지도 모르오.”

    배정자는 이렇게 장쭤린을 협박했던 것이다.

    남원항공학교 제2기 졸업식이 거행된 것은 1920년 5월30일이었다. 서왈보는 남원항공학교를 수료하자 지체 없이 펑위샹 휘하로 복귀했다. 그가 장쭤린의 제의를 뿌리쳤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펑위샹은 서왈보가 복귀하자 그를 더욱 신임했다. 서왈보는 무엇보다도 먼저 항공대 창설에 착수했다. 남원항공학교 동기생 중에서 몇 사람을 장교로 특채했는가 하면 사병 중에서 중등과정을 이수했을 정도로 교육수준이 있는 사병들을 선발해서 항공병과 정비병으로 편성했다. 그리고 남원항공학교 동기 중에서 특채한 장교들로 하여금 항공기 구조에 관한 이론교육부터 실시하도록 했다. 그러러면 단 한 대라도 실물이 있어야겠기에 펑위샹을 설득해서 프랑스로부터 코드롱 한 대를 주문케 했다. 중국 현대사에 ‘안즈전쟁(安直戰爭)’으로 기록된 전쟁이 벌어진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1920년 7월의 일이다.

    대한민국정부 2대 공군 참모총장 최용덕과 서왈보

    서왈보는 자나깨나 오로지 항공기 구입문제에만 매달렸다. 우선 모금을 통해 단 한 대만이라도 더 구입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이 모금운동에 펑위샹의 아내 리더취안까지 끌어들였다. 리더취안은 협화대학(協和大學) 출신으로 대학을 졸업하자 상하이에서 YWCA 운동을 주도하는 등 폭넓은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상류사회 인사 다수와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그런 여인이 장래가 촉망되는 군벌과 결혼을 했으니 이용가치가 충분했다.

    서왈보가 이렇게 항공기 구입을 위한 모금운동으로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 베이징에 살고 있는 김달하(金達河)로부터 화급히 만나고 싶다는 편지 한 통이 배달됐다. 평안도 의주 출신인 김달하는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을 지낸 김활란(金活蘭) 박사의 형부가 되는 사람으로 그가 중국으로 망명해온 것은 3·1운동 직후였다. 서왈보가 김달하와 안면을 튼 것은 남원항공학교에 재학중일 때였다.

    서왈보는 김달하의 편지를 받는 즉시 베이징으로 달려갔다. 김달하는 거두절미하고 애절하게 부탁했다.

    “서 동지가 젊은이 한 사람 좀 살려주게. 최용덕이라는 젊은이가 있네. 나이는 22세일세. 서울 태생인데, 세상을 비관한 나머지 굶어죽을 결심을 하고 지금 단식중에 있어. 그러니 서 동지가 좀 타일러서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면 고맙겠네.”

    어쩔 수 없었다. 서왈보는 최용덕(崔用德) 이 거처하고 있는 하숙집으로 찾아갔다. 과연 젊은이 하나가 축 늘어져 누워 있었다. 서왈보는 문답무용(問答無用)이라는 듯 덮어놓고 최용덕을 부축해 일으켜 앉히더니 갑자기 따귀를 한 대 후려갈겼다.

    “날 따라와!”

    서왈보는 앞장서 나갔다. 최용덕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군말 않고 따라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택시를 잡아타고는 바오딩보 항공학교로 가게 했다. 항공학교에 들어서자 당직 장교가 황급히 달려 나왔다.

    “귀관, 이 젊은이를 책임지고 입교시키게. 이 젊은이에 대한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네.”

    당직장교는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 친구는 항공사가 되지 못하는 것이 한이 되어 죽으려고 단식중이었어. 항공기에 미친 이런 놈을 항공사로 만들지 않으면 어떤 놈을 항공사로 만들겠나. 안 그런가? 중국군에는 바로 이런 놈이 필요하단 말일세.”

    당직 장교는 그제서야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뒤 제2대 공군 참모총장을 역임한 최용덕은 이렇게 해서 서왈보 덕분에 비행기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바오딩보 항공학교를 졸업할 수가 있었다.

    제1, 2차 펑즈전쟁

    제1차 펑즈전쟁(奉直戰爭)이 벌어진 것은 1922년 4월이었다. 제2차 펑즈전쟁은 1924년 9월에 일어났다.

    장쭤린은 차오쿤과 손잡고 돤치루이를 축출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두 사람 모두 대권은 잡지 못했다. 자연 권력투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차오쿤은 북양무비학당(北洋武備學堂) 출신으로 군사학을 전공한 지식인이었다. 무비학당은 사관학교 격이었다. 베이징 정계에서는 장쭤린이 마적 출신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거기에 장쭤린이 차오쿤과 손잡고 거병했으나 그가 관동군의 비호를 받고 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권력투쟁 결과는 너무나 뻔했다. 장쭤린의 패배였다. 그는 펑톈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장쭤린을 축출했다고 해서 차오쿤이 대권을 거머쥐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때까지는 권력이 공중에 떠있는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닭 쫓던 개 꼴이 되어 펑톈으로 돌아간 장쭤린은 와신상담 끝에 1922년 차오쿤 타도를 위한 군사행동에 나선다. 이 전쟁을 제1차 펑즈전쟁이라 한다. 그러나 이 전쟁의 결과는 장쭤린의 패배였다.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장쭤린을 암암리에 지원해주던 배후세력은 일본 관동군이었으나 차오쿤의 지원세력은 미국과 영국이었던 것이다.

    그 사이에 차오쿤은 국회의원들을 매수해서 대총통으로 선출되었다. 1923년의 일이다. 장쭤린은 2년의 와신상담 끝에 이번에는 자신이 축출했던 돤치루이와 손을 잡고 차오쿤 타도를 위한 군사행동을 일으켰다.

    돤치루이-장쭤린 거두회담에 감춰진 서왈보의 계략

    “장군께서 상부로 모시는 돤치루이 장군을 지원할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즉시 거병을 해서 베이징으로 진격하십시오.”

    장쭤린이 돤치루이와 손잡았다는 첩보를 입수한 서왈보는 즉시 펑위샹에게 돤치루이 지원을 위해 거병하라 헌책했다. 펑위샹은 서왈보의 헌책을 받아들여 지체 없이 거병했다. 동쪽에서는 동북군이, 남쪽에서는 펑위샹의 군대가 노도처럼 밀어닥치니 아무리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받는 차오쿤이라 해도 별다른 재주가 있을 리 없었다. 참패도 그런 참패가 없을 정도였다. 더구나 차오쿤은 어이없게도 펑위샹에게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어쩌면 차오쿤은 펑위샹에게 생포된 것이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장쭤린에게 생포당했더라면 참수형을 면치 못했을 테니 말이다. 펑위샹은 차오쿤을 생포하자 총통부에 유폐시켰다. 돤치루이는 자기를 지원해준 펑위샹의 손을 잡고, “차오쿤에게 축출당했을 때는 너무 수치스러워 자결하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펑 장군이 내 한을 풀어주었네” 하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이것이 1924년 9월에 벌어졌던 이른바 제2차 펑즈전쟁이다.

    “장군, 이제 장군께서 하실 일은 장쭤린을 만주로 몰아내고 돤치루이 상부가 대권을 잡도록 해드리는 일입니다.”

    서왈보는 이렇게 건의하고는 베이징에서 장쭤린을 몰아낼 계략을 헌책했다.

    베이징에 입성한 지 며칠 뒤 총통부에서 돤치루이와 장쭤린의 양 거두회담이 열렸다. 펑위샹이 돤치루이를 수행해서 배석했고 장쭝창은 장쭤린을 수행해서 배석했다. 이 양 거두회담이 열리기 전에 서왈보는 차오쿤 때의 총통부 경비병을 펑위샹 휘하의 친위대로 교체했다. 그리고는 회담장소 주변 일대에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총통부 사용인으로 변장시킨 무장병력을 배치했다. 여차하면 장쭤린 일행을 모조리 체포해버릴 계획이었던 것이다. 서왈보는 사전에 그가 세운 책략을 펑위샹으로 하여금 돤치루이에게 귀띔해두도록 했다.

    예상대로 회담은 격렬한 말다툼으로 번져갔다. 급기야 장쭤린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총통부 사용인인 요리사 청소부 등이 일제히 회담장소로 뛰어들어 장쭤린과 장쭝창을 에워쌌다. 사용인으로 위장해 미리 잠입해 있던 펑위샹의 친위대들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모두 육혈포가 들려 있었다. 장쭤린과 장쭝창은 순식간에 돌변해버린 뜻밖의 사태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두 사람의 얼굴빛이 흙빛으로 변했다.

    펑위샹은 거듭 동북군을 산하이관(山海關) 밖으로 물리라 요구했다. 장쭝창은 자기도 살고 장쭤린도 살리자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장쭤린의 눈치를 살피고는 밖으로 나갔다. 결국 장쭤린은 이번에도 또 눈물을 머금고 돤치루이에게 권좌를 양보하고 펑톈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서왈보의 책략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돤치루이는 은혜에 보답하는 뜻에서 서왈보를 크게 포상하고자 했다. 그러나 서왈보는 책략은 보좌하는 참모의 당연한 의무라며 포상을 완강히 사양했다. 그 대신 조선의 독립지사인 김달하가 학문이 높은 선비니 총통부에서 일할 수 있게 배려해주면 고맙겠다며 김달하를 천거했다. 물론 돤치루이는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김달하가 아무 연고도 없던 돤치루이의 무관부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서왈보 덕분이었던 것이다.

    대권을 잡은 돤치루이는 펑위샹을 베이징으로 불러 올렸다. 그러고는 국민군(國民軍)이라는 명칭을 주어 수도 방위를 담당케 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반긴 사람이 서왈보였다. 첫째는 정부 예산으로 비행기를 구입할 수 있을 것이요, 둘째는 펑위샹이 대권에 한 발 더 다가섰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피격당한 서왈보의 전투기

    세 번에 걸쳐 대권을 놓쳤다면 어지간한 사람은 실의에 빠지거나 야망이고 뭐고 모조리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장쭤린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복수심을 다졌다.

    이를 갈며 권토중래의 기회를 노리던 장쭤린은 1926년 4월 기어이 돤치루이 타도를 위한 군사행동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그는 ‘타도 돤치루이’의 기치를 내걸고 노도와 같이 만리장성을 넘어 베이징으로 쳐들어왔다. 국민군은 허를 찔린 셈이었다. 이때 서왈보는 단독으로 비행기를 몰고 정찰에 나섰다. 만리장성 일대가 산이고 들판이고 간에 물감을 뿌린 듯 온통 노랬다. 동북군의 군복 색깔이 노란색이었던 것이다. 족히 10만 대군은 돼 보였다.

    국민군의 병력은 고작해야 1개 사단이었다. 1만5000명의 병력으로 10만 대군을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서왈보는 비행기를 동원해서 제1차 대전 때 일본군이 칭다오의 독일 요새를 공격했을 대와 같은 전법을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정찰을 끝내고 기지로 돌아온 서왈보는 서둘러 10대의 비행기에 포탄을 실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포탄이 없었다.

    항공대 육성에만 진력했지 포병대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대권을 둘러싼 군벌들의 전쟁은 소총만을 사용하는 보병부대의 전투로 승패를 가렸다. 대포를 사용하면 인명살상만이 아니라 국토를 초토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해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어쨌거나 다른 도리가 없었다. 술병에 화약과 심지를 넣어 임시방편으로 포탄을 만들었다. 갑자기 서둘러 만들었으니 수량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니 10대의 비행기를 모두 출격시킬 필요도 없었다. 서왈보는 임시로 급조한 사제 폭탄을 비행기에 싣고 단독으로 출격했다. 적진 머리 위에 이르자 폭탄의 심지에 불을 붙여 던졌다. 폭탄은 땅에 떨어지며 통쾌할 정도로 잘 터졌다. 폭탄 투하가 끝나자 서왈보는 고도를 저공으로 잡고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물론 인명살상이 목적은 아니었다. 동북군이 겁을 먹고 뒤로 후퇴할지언정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기총소사였다.

    그런데, 위협사격을 하기 위해서 고도를 저공으로 잡은 것이 실책이었다. 서왈보의 비행기에 대고 응사하는 병사들의 총탄에 그만 연료탱크가 피격당하고 만 것이다. 서왈보는 연료가 바닥나기 전에 불시착해야만 했다. 그러자 동북군이 달려와 총부리를 겨누며 비행기를 에워쌌다. 서왈보는 두 손을 들고 조종석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깡마른 중키에 호랑이 눈의 장쭤린

    베이징 중앙정부를 공격한 동북군의 선봉군은 하필이면 장쭝창이 이끄는 부대였다. 장쭝창군 병사의 태반은 마적 출신자들이었다. 그들은 돈이라면 환장했다. 서왈보는 그런 병사들한테 생포당한 것이다. 서왈보는 포박당한 채 장쭝창 앞으로 끌려갔다. 그는 서왈보를 금방 알아보았다.

    만주의 마적떼는 포로를 잡으면 덮어놓고 목을 쳐버렸다. 장쭝창도 마적 출신이었던 만큼 서왈보는 참수당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장쭝창은 서왈보를 참수하지 않았다. 참모에게 보고문을 작성케 해서 그 서류와 함께 서왈보를 펑톈 장쭤린의 본영으로 보냈다.

    서왈보는 장쭤린의 실물을 이때 처음 보았다. 거한인 장쭝창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깡마른 중키에 두 눈만 호랑이 눈처럼 형형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장쭤린은 장쭝창의 보고서를 부관에게 읽게 했다. 장쭝창의 보고서를 읽고 난 부관이 장쭤린의 귀에 대고 뭐라 소곤거렸다. 그러자 장쭤린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이놈을 어떤 방법으로 죽여야 내 속이 후련해질까? 청룡도로 목을 쳐 죽여? 아니면 총살형에 처해? 그도 저도 아니면 불 속에 던져 죽여?”

    장쭤린은 잔인한 미소를 흘리며 서왈보를 조롱했다.

    “순열사, 나는 국민군 육군 대령이오. 덕장은 적장을 조롱하지 않는다 했소. 죽이려거든 어서 말없이 죽여주시오.”

    서왈보는 총살형을 택했다. 목이 잘리는 참수형은 머리와 몸이 둘로 나뉜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화형은 또 화형대로 몸이 타는 동안의 고통을 참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 그렇다면 소원대로 총살형에 처해주지.”

    장쭤린이 옆방에 대고 소리지르자 부관이 황급히 달려왔다. 근위병은 서왈보를 앞세워 끌고 나갔다. 그런데 그들은 서왈보를 원수부(元帥府) 지하로 끌고 내려가 유치시켜버리는 게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얼마 뒤에는 요리상이 배달됐다. 산해진미가 차려진 요리상이었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서왈보는 이승에서의 마지막 식사라는 생각에 접시를 모조리 비웠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당장 총살형에 처할 것 같았는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도무지 이렇다 할 기척이 없었다. 더욱이 하루 세끼 꼬박꼬박 제공하는 끼니는 산해진미였다. 서왈보가 다시 장쭤린 앞으로 끌려간 것은 보름 만이었다.

    장쭤린은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가 곧 웃는 얼굴이 되었다.

    “어서 항복해. 항복하면 너를 살려주고 우리 동북군 항공대를 너한테 맡기겠다. 어떠냐?”

    서왈보는 목숨을 걸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장쭤린은 순순히 서왈보를 풀어주었다.

    “부관, 부관은 그 자를 데리고 가서 베이징행 열차에 태워줘라.”

    장쭤린의 부관은 서왈보를 펑톈역으로 안내했다. 장쭤린의 부관은 서왈보를 객차 안으로 안내해주고 잘 가라며 깍듯이 거수경례까지 붙였다.

    베이징에 내렸다. 거리에는 동북군이 넘쳐났다. 국민군이 패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질풍노도처럼 밀어닥치는 장쭝창의 대군 앞에 펑위샹의 국민군은 변변히 저항해보지도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서왈보는 서둘러 사복으로 갈아입고 남원항공학교로 달려갔다. 9대의 비행기는 모두 제 자리에 놓여 있었으나 항공대원이나 항공학교 학생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어느 독군 휘하의 병사든 중국군은 전투에서 패배하면 삼십육계 줄행랑을 쳐서 제 살길을 찾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있었다. 전쟁에 졌으니 그들의 지휘자가 무슨 재간으로 급료를 지불하겠느냐는 것이 이유였다. 서왈보는 국민군이 어디로 패주했는지를 수소문해보았다. 모두 북쪽을 가리켰다. 북쪽이라면 장자커우(張家口)일 것이 틀림없었다.

    국민군 패주하다

    펑위샹의 국민군은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타격을 입었으나 병사들이 모조리 도망친 것은 아니었다. 국민군의 3분의 1 정도가 펑위샹을 따라 장자커우로 후퇴했던 것이다. 장자커우는 베이징에서 서북쪽 방면으로 약 200㎞ 떨어져 있는 만리장성을 등지고 있는 도시였다. 그래서 장자커우는 내몽골로 통하는 관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장쭝창은 결코 장자커우로 패주하는 펑위샹의 국민군을 추격해서 섬멸하려고 하지 않았다. 베이징 외곽에 방어선만 구축해놓고 승리를 자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추격해서 섬멸전을 폈더라면 펑위샹의 국민군은 여지없이 섬멸당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펑위샹은 장제스(蔣介石)가 북벌전을 감행했을 때 제2집단군 사령으로 영입되는 행운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문제는 서왈보였다. 국민군 항공대에는 쓸모 있는 비행기 10대가 남아 있었다. 모두 구형 쌍엽기였다. 서왈보는 이 비행기들을 내버리고 달아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비행사가 남아 있지도 않았다. 그는 혼자서 이 비행기들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서왈보는 스스로 조종간을 잡고 한 대씩 쿵자좡(孔家莊)으로 옮겼다. 쿵자좡 은 장자커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마침 간이비행장이 마련돼 있었다. 서왈보는 한 대를 몰고 가서는 간이비행장에 세워놓고 자동차 편으로 남원으로 돌아와서는 다시 비행기를 몰고 갔다. 그렇게 열 번을 반복했다.

    윈난의 강무학교 항공과를 졸업한 권기옥이 서왈보를 찾아온 것이 이 무렵이다. 그녀는 1925년 가을 윈난 강무학교 항공과를 졸업하고 독군 탕지야오에게 조선독립군에 합류하겠다고 간청해 만주로 떠나는 것을 허락받았다고 했다. 탕지야오는 두말 않고 그 청을 들어주었다.

    권기옥은 임시정부를 찾아 상하이로 왔다. 그러나 간판뿐인 임시정부에서 그녀가 할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누군가가 서왈보 얘기를 해주며 그를 찾아가보라고 했다. 그래서 권기옥은 서왈보를 찾아 베이징으로 달려오게 되었던 것이다.

    9대의 비행기를 무사히 쿵자좡으로 옮긴 서왈보는 이제 아내와 딸아이를 거느리고 베이징만 탈출하면 되었다. 서왈보의 아내가 딸을 데리고 베이징으로 온 것은 그가 남원항공학교를 졸업하고 펑위샹 휘하로 복귀한 직후였다. 펑위샹은 서왈보가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그토록 세심하게 배려했던 것이다. 서왈보는 가족과 권기옥, 거기에 유동열과 그의 가족까지 거느리고 베이징에서 열차 편으로 장자커우로 탈출했다. 유동열 역시 서왈보가 가족을 불러들일 무렵 가족을 베이징으로 불러들였다.

    국민군의 본영은 장자커우였으나 항공대의 본영은 쿵자좡이었다. 소문을 들었는지, 달아났던 항공대원들과 학생들이 하나 둘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중국인의 생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서왈보는 군말 않고 그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펑위샹의 권토중래를 위해서는 단 한 사람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인적 자원이었기 때문이었다. 서왈보는 그들을 주축으로 항공대를 재편했다.

    장쭤린의 동북군이 베이징을 공격하기 3개월 전, 펑위샹은 이탈리아의 안살도 비행기회사에 최신예기 10대를 주문한 일이 있었다. 주문한 비행기는 쌍엽기가 아닌 단엽기들이었다. 6월 초 그 비행기들이 쿵자좡에 도착했다. 개량에 개량을 거듭해 당시로선 최신예기종이었다. 비행기에 기관총을 장착할 수 있는 장치도 달려 있었다. 이 신예기에 비하면 서왈보가 필사적으로 옮긴 10대의 비행기는 이미 한물 가버린 구닥다리에 지나지 않았다. 연습용으로나 효용가치가 있었다.

    사고를 예고한 불길한 꿈

    10대의 비행기는 분해해서 배편으로 보내졌기 때문에 이것을 조립해야만 했다. 이탈리아 안살도 비행기회사에서 보낸 1명의 시험비행사와 2명의 정비사가 항공대원들과 항공학교 학생들의 도움을 받으며 함께 조립했다. 이제 시험비행만 남았다.

    시험비행 날짜는 6월20일로 정했다. 이 소문이 퍼지자 그 날, 쿵자좡 주변 일대의 산 중턱에는 시험비행을 구경하려는 관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유동열과 그의 가족, 권기옥, 서왈보의 아내와 딸, 펑위샹의 아내 리더취안도 모두 본부석에 앉아서 관람했다.

    시험비행은 이날 오후 1시부터 실시되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바람도 없었다. 안살도 비행기회사에서 파견한 시험비행사가 먼저 10대의 비행기를 차례차례 시험비행했다. 쿵자좡은 험한 돌산으로 둘러싸여 분지 지형이었다. 교통도 더없이 열악했고 더구나 장쭤린의 동북군이 베이징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행기 연료를 구하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서왈보는 대당 3분 이상을 비행하지 못하게 했다.

    시험비행사의 시험비행은 뜨고 선회하고 내리는 간단한 테스트에 지나지 않았다. 10대의 비행기 모두 성능에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그것으로 끝났다면 얼마나 다행이었을까. 몇 분 후에 벌어질 참극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서왈보는 자신이 직접 시험비행을 해보지 않고는 만족할 줄 모르는 성격이었다. 우선 1번기 시험비행 때는 이 신예기가 어느 정도까지 치솟아 올라가는지를 테스트했다. 2000m까지 거뜬히 치솟아 올라갔다. 고도계의 고도 표시는 3500m로 돼 있었다. 고도 2500m로 상승하자 양쪽 귀가 대기의 압력으로 멍해졌으나 신예기는 무리 없이 상승했다. 지상으로 내려앉아 비행기에서 내리는데 권기옥이 달려왔다.

    “소감이 어때요?”

    “응, 마냥 유쾌할 뿐이야.”

    “2번기는 제가 시승해볼게요. 그 사이에 조금이라도 쉬세요.”

    “아냐, 책임상 그럴 수 있나. 3번기까지는 내가 해볼 테니까, 권 소위는 4번기부터 해보도록 해.”

    “어젯밤 꿈자리가 사나웠다면서요?”

    “개꿈일 거라고 하지 않았어?”

    서왈보의 마지막 비행

    그날 아침 서왈보는 권기옥을 만나자마자 간밤에 꾼 꿈 얘기를 해주었다. 언제나와 같이 일본전투기와 공중전을 벌이는 꿈이었다. 그런데 간밤의 꿈은 여느 날과 조금 달랐다. 일본군과 한창 공중전을 벌이던 중 연료탱크를 피격당한 비행기가 검은 연기를 토하며 날다가 엔진이 뚝 멎었다. 그러자 비행기가 그대로 곤두박질치는 것이었다.

    “하필이면 시험비행이 있는 날 추락하는 꿈을 꾸다니?”

    서왈보는 권기옥에게 꿈 얘기를 들려주고는, “개꿈일 거야, 개꿈” 그렇게 스스로 부정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서왈보는 2번기의 시험비행 때는 급상승과 급강하만을 되풀이했다. 역시 성능에 이상이 없었다. 3번기 시험비행 때는 급상승 급강하에 곡예비행을 겸해보기로 했다. 그는 쉴 틈도 없이 3번기를 몰고 하늘로 올라갔다. 아마도 그는 3번기를 몰고 하늘로 올라가자 신예기의 우수한 성능에 더욱 매료되었던 것 같다.

    공중전에서 곡예비행은 필수적이나 아직은 쌍엽기가 단엽기로 발전한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기체 제작 연구에 각국이 경쟁을 벌이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서왈보는 곡예비행을 감행했다. 기수를 90도로 치켜들고 급상승하다가 기체를 뒤집는가 하면, 기수를 90도로 꺾고 지상으로 급강하하다가 다시 기체를 뒤집는 곡예비행을 감행했던 것이다. 관중은 손에 땀을 쥐고 비행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서왈보가 탄 비행기는 하늘로 치솟아 올라갔다. 그러다가 고도 1000m쯤에서 다시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권기옥은 자신도 모르게 “어, 저게 아닌데…”하고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전기에 감전된 듯 번갯불 같은 것이 그녀의 뇌리를 때리며 등줄기에 진땀이 흘렀다. 고도가 너무 낮았기 때문이었다.

    고도 1000m에서 급강하를 시도하면 실속(失速)할 확률이 높다. 아니나다를까, 그녀가 내지른 비명의 메아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급강하하던 3호기는 그대로 땅에 처박히고 말았다. 요란한 굉음이 일며 기체는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엔진 잔해가 화염에 휩싸였다.

    지상에 곤두박질하는 순간 산산조각이 나버린 기체가 사방에 흩어질 때 서왈보의 신체도 그대로 갈기갈기 찢겨 사방으로 흩어졌다.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최후였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곡예비행을 지켜보던 서왈보의 아내와 딸은 엄청난 충격에 그 자리에서 실신하고 말았다. 결국 서왈보가 지난밤에 꾼 꿈이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삼가 명복을 빌며

    너무나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이때 서왈보의 나이가 만으로 40세였다. 그가 해방이 되고 대한민국이 건국될 때까지 생존했다면 이 나라 항공계를 위해서, 또 공군 창설을 위해서 얼마나 큰일을 했을지 모를 일이다. 권기옥과 펑위샹의 아내 리더취안, 유동열과 그의 아내 등이 통곡하며 갈기갈기 찢겨 흩어진 시신을 수습했다. 그렇게 모아진 서왈보의 유체는 간이비행장 뒤편 산중턱에 묻혔다.

    장례식이 끝나자 권기옥은 유동열에게 부탁해서 나무에 ‘朝鮮 最初의 軍事飛行士 徐曰甫公之墓’라고 써서 무덤 앞에 비석 대신 세워주었다.

    서왈보가 간 지 8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 묘목(墓木)은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 한국 최초의 전투비행사 서왈보공의 무덤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을까. 삼가 한국 항공계의 선구자 서왈보 선생의 명복을 빈다.



    1년 뒤인 1896년 여름, 함경도 일대에는 무서운 역병이 창궐했다. 그 역병은 호열자, 즉 콜레라였다. 이때 서왈보의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전염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어린 서왈보가 역병에 전염되지 않고 무사했던 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대성학교에선 학생 대신 학도라 불렀다

    18세가 되던 해 서왈보는 아버지 친구들의 중매로 결혼을 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벌어진 그 해 가을이었다. 신부는 평양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 어느 장로의 딸이었다.

    서왈보가 가정을 이루자 그를 양육해준 아버지의 친구와 장인은 의논 끝에 집을 한 채 마련해주었다. 이와 함께 양부는 서왈보 선친이 남긴 원산 집을 정리해 은행에 맡겨두었던 돈을 찾아주었다. 몇 해 동안은 아무런 수입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큰 금액이었다.

    서왈보는 장인의 권고에 따라 강서(江西)에 땅을 샀다. 벼농사를 짓기 위해서였다. 도지(睹地)만 받아도 넉넉히 생활할 수 있었다. 서왈보의 나이 21세 때인 1907년 봄,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가 세워졌다. 대성학교는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新民會)가 ‘장차 유능한 독립투사를 길러내자’는 취지에서 세운 중등과정의 학교였다. 서왈보는 아내의 권고도 있고 해서 대성학교에 들어갔다. 스물한 살에 중학생이 된 것이다. 당시 21세는 중학생으로서 그렇게 많은 나이는 아니었다.

    대성학교는 병영학교(兵營學校)였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 같다. 모든 교육이 철두철미하게 군대식으로 이뤄졌다. 설립목적이 유능한 독립투사를 길러내는 데 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조회(朝會)로 학교의 일과가 시작되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조회를 거르는 법이 없었다. 조회가 시작되면 애국가를 목청껏 부른 다음 대판교장(代辦校長)인 안창호의 훈화가 이어졌다. 대판교장이란 교장대리라는 뜻이다. 대성학교의 교장은 윤치호(尹致昊)였다.

    안창호는 학생들을 ‘학생’이라고 하지 않고 반드시 학도라 호칭했다. 아마도 구한말 무관학교 학생들로 조직되었던 학도대를 연상해서 그렇게 불렀던 것으로 추측된다. 안창호는 훈화할 때 반드시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삼았다. 수나라 10만 대군을 섬멸한 을지문덕 장군은 어떤 인물이었으며, 임진왜란 때 노량대첩의 주인공인 이순신 장군은 어떤 인물이었던가를 소개하며 학생들 가슴속 깊이 민족혼을 주입하려 무던히 애를 썼다.

    대성학교가 조회시간 못지않게 심혈을 기울인 것이 체육시간이었다. 체육 담당 교사는 구한국군 장교출신인 정인목(鄭仁穆)이었는데, 그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군인정신으로 무장된 무인이었다.

    ‘장하도다 우리 학도 무쇠 골격 돌 근육/ 병식행보(兵式行步)가 소년남아야/ 나파륜(나폴레옹)의 군인보다 애국의 정신을/ 질 것 없겠네 분발하여라!’

    정인목은 반드시 이 노래를 부르게 한 뒤 수업에 들어갔다. 대성학교의 교육이 이러했으니 서왈보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학생들의 가슴속에 애국심이 자라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국은 점점 악화됐다. 대성학교가 개교한 지 채 3개월도 지나지 않아 해아밀사사건(海牙密使事件·헤이그밀사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 이후 조선통감부는 강제로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한국군대를 해산하는 등 폭거를 저질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제는 애국지사들을 말살해버리고자 눈을 확대경처럼 뜨고 감시하다가 꼬투리만 잡으면 잡아들여 족쳤다. 이른바 공포의 헌병통치가 본격화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헌병통치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헌병보조원이 모두 조선인이었다. 대성학교에도 조선인 헌병보조원들이 드나들며 감시의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조선인 헌병보조원 테러사건

    당시 대성학교에는 강론부를 비롯해서 음악부, 운동부, 사교부, 검찰부 등 여러 서클이 있었다. 웅변가인 안창호의 영향 탓인지 학생들 사이에선 강론부의 인기가 가장 높았다. 하지만 서왈보는 운동부에 들어갔다.

    서왈보가 3학년에 진학한 1909년 봄 어느 날, 서왈보는 불쑥 강론부 모임에 뛰어들어 밑도 끝도 없이 소리쳤다.

    “매번 모여서 웅변연습이나 해가지고 그걸 어디다 써먹겠다는 거냐. 지금은 행동할 때다. 젊은 우리가 행동으로 나서야 시들어가는 백성의 민족혼을 일깨울 수 있을 게 아니냔 말이다.”

    강론부 학생들은 어리둥절했다. 무슨 이유로 서왈보가 저토록 소리를 지르며 야단을 치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행동을 하다니, 뭘 행동해야 한단 말이냐?”

    “너희들도 알고 있잖아, 학교에 염탐하러 드나드는 헌병보조원 놈이 있다는 거 말야. 그놈은 조선 사람이야. 조선 사람이 왜놈의 개 노릇을 하고 있는데 보고만 있어야겠어?”

    당시 대성학교 학생들은 헌병보조원들의 횡포에 비분강개했지만 차마 어떤 행동을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저 부글부글 끓는 가슴을 안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서왈보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열변을 토하며 나선 것이다. 권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평소 서왈보는 말수가 적었다고 한다. 눌변인 탓이었다는 것. 그러나 한번 격해지면 안창호 버금가는 열변을 토했다고 한다.

    “좋다, 왜놈 헌병의 개 노릇을 하는 보조원 놈들을 병신으로 만들어버리자”며 어느 학생이 동조하고 나서자 여기저기서 “민족정기를 되살리자!”는 외침이 터져나왔다.

    대성학교가 개교한 지 3년 만에 벌어진 첫 사건이었다. 평양 주둔 일본군 헌병대에 비상이 걸렸다. 어쩌면 일본 헌병당국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사건을 구실로 평양의 애국지사들을 깡그리 붙잡아들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을 테니 말이다. 숱한 학생이 잡혀 들어가 지독한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대성학교 교사들은 물론이고 기독교계의 지도급 인사들도 깡그리 잡혀갔다. 학생들을 선동하고 조종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용케 체포의 손길을 벗어난 학생 중에는 만주나 중국 본토로 달아나 독립운동 단체에 뛰어든 사람도 있었다. 대성학교는 그야말로 쑥밭이 되었다.

    신양리 여관에서 이갑과의 만남

    해를 넘겨, 1910년 4월에 막 들어선 어느 날이었다. 이갑(李甲)한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이갑은 1877년 평안도 숙천군(肅川郡) 서해면(西海面) 사산리(蛇山里)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12세에 과거에 합격했다 해서 화제가 될 정도로 머리가 좋은 수재형 인물이었다. 서왈보보다는 열한 살 위였다. 1907년 8월1일, 통감부에 의해 한국군이 해산되자 퇴역한 이갑은 즉시 서우학회(西友學會)의 확대 강화를 위해 전면에 나선다.

    서우학회는 한 해 전인 1906년 10월에 이갑이 유동열, 안병찬(安秉讚), 김달하(金達河), 정운복(鄭雲復) 등과 손잡고 교육진흥을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였다. 같은 시기 안창호는 전덕기(全德基), 양기탁(梁起鐸), 이동녕(李東寧), 이동휘(李東輝), 안태국(安泰國), 조성환(曺成煥), 신채호(申采浩) 등과 손잡고 신민회 조직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이갑이 안창호와 안면을 튼 것도 그 무렵이었다. 1907년 평양에 대성학교가 개교하자 안창호는 이갑을 자주 초빙해서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는 강연을 하게 했다. 서왈보는 이때 이갑과 각별한 사이가 됐다.

    이갑의 전갈을 받고 서왈보가 찾아간 곳은 신양리(新陽里)에 있는 한 여관이었다. 이갑은 서왈보에게 통감부의 움직임을 설명해주면서, “아무래도 우리들 모두가 무사할 것 같지 않네. 우리들을 때려잡아야 마음놓고 조선을 요리할 수 있을 테니 말일세”라며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이갑이 불쑥 망명 이야기를 꺼냈다. 이갑은 안창호 유동열 등 9명도 같이 망명하기로 했다고 밝히고 이렇게 말했다.

    “나하고 같이 망명하기로 한 아홉 사람은 모두 주머니가 비어 있네. 그런 우리가 어떻게 망명하기로 결심하게 됐는지 아나? 실은 내장원경(內藏院卿)을 지낸 이용익(李容翊)의 두 아들이 3000달러를 군자금으로 내놓겠다고 했다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한꺼번에 망명하기로 한 것일세.”

    이용익은 당시 이름난 거부였다. 서왈보는 4월8일 밤 압록강변인 평안도 석하(石下)역에서 만나기로 하고 이갑과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와 쌔근쌔근 잠들어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보자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언제까지 사정(私情)에 얽매어 있을 수만은 없지 않느냐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망명, 그리고 ‘칭다오회의’

    1910년 4월7일 서왈보는 등산복 차림에 배낭을 짊어지고 집을 나섰다. 일본에 잠시 다녀오겠다는 사람이 등산복 차림을 하고 나서자 그의 아내는 수상쩍다는 표정이었으나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다음날인 4월8일, 석하역에 들어서자 이갑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낯선 두 사나이와 함께였다. 그들이 다름아닌 이용익의 두 아들이었다. 장남은 이종호(李鍾浩)라 했고 차남은 이종만(李鍾萬)이라 했다.

    “안창호 동지는 신채호 김지간 등과 함께 서울을 떠나 행주나루에서 배편으로 의주(義州)로 가서 압록강을 건너기로 되어 있다”고 이갑이 귀띔해주었다. 일행은 허름한 주막에서 요기를 하고 용암포(龍岩浦)로 떠났다. 용암포에 닿자 이갑은 일행을 한 예배당으로 안내한 뒤 어디론가 바삐 나갔다가 잠시 후 웬 허름한 차림의 사나이와 함께 돌아왔다. 안내원이었다.

    그 안내원을 따라 해안가로 갔다. 거기에는 조그마한 배 한 척이 마련되어 있었다. 통통선이었다. 달이 뜨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그렇다고 엔진을 걸어 항해할 수는 없었다. 느리지만 노를 저어 배를 띄워야 했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일행은 안동(安東-지금의 단둥)에 무사히 닿았다. 단둥에서 열차편을 이용해 펑톈(奉天, 지금의 선양), 베이징, 톈진을 거쳐 이틀 만에 칭다오(靑島)에 도착했다. 이갑이 서울에서 안창호와 미리 약속해두었던 장소로 일행을 안내했다. 약속 장소에는 벌써 안창호, 유동열, 김지간, 조성환, 박영로, 신채호, 김응선 등이 도착해 이갑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한자리에 모이게 된 일행은 회의를 시작했다. 앞으로 어떤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펼쳐나갈 것인가를 토의하기 위한 회의였다. 이것이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칭다오회의’라 일컫는 회의다.

    “나라를 되찾자면 무장투쟁 외에 달리 방법이 있겠소? 3000달러를 기금으로 해서 우선 무기를 구입하고 병사를 모집해서 무장투쟁을 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도록 합시다.”

    이갑이 먼저 독립투쟁의 방법론을 제시했다. 유동열 김응선이 이갑의 주장을 지지했다. 안창호가 이갑에게 물었다.

    “3000달러의 군자금으로 어느 정도의 병력을 갖출 수가 있겠소?”

    “만주의 사정을 잘 모르니 지금 이 자리에서 뭐라 단언하기는 어렵소만, 하여간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지 않소. 일을 시작하고 보면 국내외에서 호응도 있을 것이고….”

    그 말을 듣자 조성환이 다시 물었다.

    “3000달러를 다 쓰고 나면 그 다음엔 어떤 방법으로 군자금을 마련하겠다는 거요?”

    “말하지 않았소, 일을 시작하고 나면 국내외의 호응이 있을 거라고.”

    “있을 거라는 것은 희망사항이지 확실히 그렇다는 보증은 아니잖소?”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요?”

    이갑이 역정을 내며 되물었다.

    “도산의 계획대로 하도록 합시다. 도산이 서울에서 미리 세워놓은 계획이 있어요.”

    “그게 어떤 계획이요?”

    안창호파와 일본 육사출신 간의 설전

    안창호가 서울에서 미리 세워놓았다는 계획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의 설명은 이러했다.

    ‘만주 지린(吉林)성 미산(密山)으로 가서 거기에 자리를 잡는다. 3000달러로 농지를 사서 농장을 마련하고 가난한 재만(在滿) 동포들을 불러 모은다. 농장을 경영하다 보면 자연 부대사업도 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해서 자금이 축적되면 산업을 일으킨다. 그와 함께 교육에도 힘을 쏟아 민족의 역량을 키우자. 그렇게 10년 20년을 두고 민족의 역량을 축적해나가다 보면 독립전쟁을 일으킬 만한 힘이 자랄 것이다.’ 계획치고는 참으로 원대한 계획이었다.

    안창호는 자기가 세운 계획을 설명하고 잠시 숨을 돌린 다음 덧붙였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은 나라를 되찾는 일이오. 우물에 가서 숭늉 달라는 식으로는 어려운 일이오. 그러니 힘을 기른 연후에 왜적과 맞서도록 합시다.”

    “어느 세월에.”

    이갑은 한마디로 안창호의 계획을 부정했다. 다혈질인 사람은 성질이 급하고 매사에 조급한 것이 결함이다. 이갑이 바로 그러했다. 그때부터 서왈보를 뺀 10명의 지사가 갑론을박하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이갑, 유동열, 김응선 등은 당장 만주에 군사기지를 마련한 다음 흩어진 의병들을 규합해서 독립전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안창호, 신채호, 조성환 등은 힘이 없는데 당장 독립전쟁을 전개한다는 것은 무모한 만용이라고 반박하며 먼저 만주의 동포들을 규합해서 산업과 교육을 일으켜 힘을 기른 연후에 독립전쟁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두가 대단한 옹고집들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토론은 이성에서 벗어나 감정으로 흘렀다. 밤을 새우다시피 토론했으나 제 자리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안창호는 어떻게 해서든 통일된 의견을 이끌어내려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지금까지 듣기만 할 뿐 좀처럼 입을 열지 않고 있던 신채호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아무리 왈가왈부해 봐야 그게 무슨 소용이요. 우리 모두 만주의 사정이 어떤지 전혀 모르고 있지 않소. 그러니 일단 미산으로 갑시다. 미산에 가서 만주 사정을 면밀히 검토해보고 나서 결론을 내리도록 합시다.”

    사실이 그랬다. 10명의 지사 중 만주 사정에 정통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그제야 10명의 지사는 얼굴을 붉히며 갑론을박만 되풀이한 것이 부끄러워졌는지 멋쩍게 웃으며 신채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였던 서왈보는 이들의 토론을 지켜보며 독립운동의 앞날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혼자 가슴을 앓았다.

    이들은 미산으로 가는 도중에 한일합병 소식을 전해 들었다. 특히 안창호는 주위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11명의 지사 모두가 통곡했다.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인 미산에 도착한 것은 9월 초순이었다. 안창호는 미산에 도착한 날부터 은밀히 농장 구입에 나섰다. 어떻게 해서든 자기 생각을 관철하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표현 같았다. 마침 그때 땅을 팔겠다고 내놓은 회사가 있었다. 미국인이 경영하던 태동실업회사(泰東實業會社)였다. 그런데 이 회사와 매매 상담을 하고 있는 도중에 예기치 못한 사건이 벌어졌다. 3000달러의 자금을 제공하기로 했던 이종호 이종만 형제가 행방을 감춘 것이다.

    얼마 뒤 한 교포가 이종호 이종만 형제가 사라진 전후 사정을 귀띔해주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진작부터 김립(金立)과 윤해(尹海) 두 사람이 터를 닦고 있었는데(이들은 훗날 공산주의자가 된다), 이 두 사람이 이종호 형제가 미산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화급히 미산으로 달려왔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이종호 형제를 붙들고 “미친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함경도 사람이 평안도 사람한테 빌붙어서 부화뇌동한단 말인가. 이용익 선생이 살아 계셨다면 미친 짓을 하려 한다고 펄펄 뛸 걸세” 하며 이간질을 해댔다고 했다. 이들은 또 “안창호하고 갈라서라. 함경도 사람은 함경도 사람끼리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며 이종호 형제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고 했다.

    부끄럽기 짝이 없는 얘기지만 지역감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명색이 독립지사인 사람들마저 나라가 망해버린 마당에 관서파(關西派), 관북파(關北派), 기호파(畿湖派), 호남파(湖南派) 4개 지역으로 갈리어 아귀다툼을 벌였던 것이다.

    이종호 형제가 행방을 감추자 다른 9명의 지사는 넋을 잃고 말았다. 이제는 독립투쟁은 고사하고 앞으로 뭘 먹고 살아가야 할지, 끼니 걱정까지 해야 하는 신세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일단 베이징으로 돌아가서 선후책을 강구합시다.”

    그렇게 제의한 사람은 조성환이었다.

    “한일합병이 이뤄진 이상 모르긴 몰라도 베이징으로 망명해 오는 지사가 많지 않겠소?”

    신채호가 맞장구를 쳤다.

    “나는 미주로 돌아가겠소.”

    안창호가 힘없이 말했다. 그는 이종호 형제의 처사에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실의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신민회 소속 회원들이 망명을 결심한 것은 안창호의 권유 때문이었다. 3000달러의 군자금이 생겼으니 무대를 만주로 옮겨 독립운동의 기틀을 닦아나가자고 일행을 설득한 사람이 바로 안창호였던 것이다.

    일석이조의 육영학교 생활

    독립운동에 나선 지사가 자금 마련을 위해 마적단 활동을 했다면 이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9명의 지사는 일단 미산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간 뒤 거기서 각자 갈 길을 찾기로 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안창호가 미주로 떠나고 난 뒤 서왈보는 이갑과 유동열을 따라 베이징으로 갔다. 세 사람 모두 고국을 떠나올 때 호구책으로 가져온 돈이 있어 빈민촌에 셋방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서왈보만 하더라도 300원이나 되는 돈이 있었다. 당분간은 생활이 가능했다.

    베이징에서 서왈보는 육영학교(育英學校)에 들어갔다. 중국에서 활동하려면 무엇보다도 중국어부터 익혀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또 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를 하고 있다면 총독부에서 그를 망명자 취급은 하지 않을 테니 가족을 괴롭히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서왈보가 육영학교에 입학한 것은 해가 바뀐 1911년 1월 중순이었다. 베이징에 정착한 뒤로 이갑과 유동열은 날마다 출타를 했다. 두 사람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서왈보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그저 공부에만 열중했다.

    육영학교에 다닌 지 반 년쯤 지나자 서왈보는 중국인 학생 여럿을 친구로 사귈 수 있었다. 그들을 통해서 중국 본토의 정치 현황과 만주의 실정에 대해서 눈뜰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왈보가 이갑과 유동열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고국을 떠나온 우리가 이렇게 매일 무위도식만 하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마적단이라도 조직해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유동열은 서왈보의 말에 일리가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으나, 이갑은 눈알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이 사람아, 독립운동은 신성한 거야. 아무리 자금이 궁색하기로서니 강도짓을 해서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자니, 자네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갑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해보겠다며 시베리아의 치타로 떠나려 했다. 유동열과 서왈보는 어떻게든 이갑을 붙잡으려고 애썼다. 마적단 활동을 하려면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갑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기어이 치타로 떠나버리고 말았다.

    한국 최초의 전투비행사 서왈보 소전(小傳)
    얼마 후 유동열은 “마적단 활동을 하려고 해도 돈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내가 국내로 잠입해 자금을 좀 마련해오겠네. 그 사이에 자네는 만주의 어디를 근거지로 해서 활동하는 게 좋을지 그거나 연구해두게” 하고는 베이징을 떠났다. 1911년 초여름이었다.

    국내 잠입한 유동열 체포당하다

    유동열이 국내로 잠입한 지 석 달이 지났는데도 꿩 구워 먹은 듯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서왈보는 초조함에 애를 태웠다. 아무래도 무슨 사고가 난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 사이 서왈보는 평양을 떠날 때 지니고 온 300원을 벌써 다 쓰고, 노동판에 나가 노동을 하며 유동열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이 벌어진 일을 알고 나면 이 또한 기막힌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유동열은 스스로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든 꼴이 돼버렸던 것이다. 그 경위는 이러했다.

    조선과 만주를 잇는 압록강 철교는 1910년 12월27일 준공되었다. 이 공사는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원대한 계획의 일환으로 추진한 대역사(大役事)였다.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사촌동생인 안명근(安明根)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반드시 참석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搏文)가 조선을 집어삼킨 원흉이라면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조선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갖은 계략을 짜낸 원흉이었다. 안명근은 바로 그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준비했지만 불행하게도 데라우치가 탄 특별 열차가 당도하기도 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1911년 양력 1월1일, 조선총독부 경무총감 아카시 모토사부로(明石元三郞)는 전국 경찰에 신민회 회원을 무조건 잡아들이라는 비밀지령을 내렸다. 이 기회에 눈엣가시 같던 신민회 회원을 모조리 때려잡겠다는 심산이었다. 이런 연유로 검거선풍이 한창이던 서울에 유동열이 제 발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유동열은 체포당하자마자 재판에 회부돼 1년6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서왈보는 그 1년6개월 동안 유동열을 마냥 기다리고만 있었으니, 서왈보의 끈기도 알아줄 만하다.

    유동열이 형기를 마치고 다시 베이징으로 탈출해온 것은 1913년 7월 초였다. 그러나 절망적이기는 전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번에는 제가 고국에 다녀오겠습니다.”

    “자네가? 지금 나라 안은 살얼음판일세. 공연히 내 꼴이 되기 십상일세.”

    유동열이 말렸다.

    “저는 알려진 인물도 아니니 좀 다를 겁니다. 어떻게든 목적을 달성해보겠습니다.”

    서왈보, 군자금 모금에 나서다

    서왈보는 육혈포(권총) 한 자루와 탄환 10발을 몸에 지니고 1913년 7월 하순 베이징을 떠났다. 평양에 도착해 어디에 숙소를 잡을까 고민하다가 문득 이갑이 유숙했던 여관이 떠올라 신양리로 가서 그 여관에 숙소를 정했다. 심정이 착잡했다. 평양까지 와서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여관 신세를 져야 하는 것이 서글펐다. 그가 떠난 뒤 집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어차피 또 떠나야 할 몸이기에 혀를 깨물며 끓어오르는 그리움을 삭였다.

    서왈보는 다음날 밤부터 활동을 개시했다. 평양의 갑부가 누군지 익히 알고 있었던 터라 먼저 머리에 떠오른 갑부의 집부터 찾아갔다. 의외의 반응이 나왔다.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도와달라고 하자 “허구한 날 독립운동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찾아와서는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을 하니, 이러다간 알거지가 되기 딱 알맞겠어” 하고 투덜거렸던 것이다. 그날 밤 서왈보는 딱 두 집을 찾아갔는데 두 사람 모두 그렇게 투덜댈 뿐이었다.

    평양에 잠입한 지 사흘째 되던 날 서왈보는 여관방에 널브러져 종일토록 번민에 번민을 거듭했다. 모금활동을 계속해야 할지, 모조리 때려치우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지, 오만가지 상념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러나 베이징에서 기다리고 있을 유동열을 생각하면 경솔한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사흘째 밤은 쉬고 나흘째 밤에 활동을 재개했다.

    서왈보는 신사적인 방법을 버리고 육혈포를 들이밀며 위협하기로 작심했다. 그렇게 그날 밤 세 집을 돌았다. 육혈포의 위력은 대단했다.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하며 그저 목숨만 살려달라는 눈빛으로 돈을 내놓는 것이었다. 하지만 겨우 700원을 모금하는 데 그쳤다.

    다음날, 어느 집을 찾아갈 것인지 궁리하고 있는데 여관집 주인이 한 장의 신문을 들고 서왈보의 방 문을 노크했다. 주인영감은 들고 온 신문을 서왈보의 코밑에 내밀었다. 순간 서왈보의 가슴이 뜨끔했다. 돈을 뜯긴 부호들이 경찰에 신고했구나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일었다.

    서왈보는 신문을 받아들었다. 조선통감부가 1906년 9월1일부터 기관지로 발행하기 시작한 경성일보(京城日報)였다.

    “여기를 좀 읽어보시오.”

    주인영감이 손가락으로 기사를 짚었다. 다행히 돈을 강탈당해 경찰에 신고했다는 기사가 아니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새나왔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기사를 읽어보았다.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朝鮮半島에서 最初의 公開飛行 開催키로’

    ‘오는 8月29日에 日本海軍의 中技士 奈良原三次(나라하라 산지)가 朝鮮半島로 건너와 京城 龍山 朝鮮軍司令部 練兵場에서 半島 歷史上 처음으로 公開飛行大會를 開催하기로 되었다는 바 많은 觀覽이 있기를 바란다고 한다.’

    “공개 비행대회라는 게 도대체 무슨 소리요?”

    여관집 주인영감이 물었다.

    “글쎄요.”

    서왈보도 ‘공개 비행대회’가 무슨 소린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일본이 용산 삼각지의 허허벌판에 조선군사령부 건물을 짓기 시작한 것은 1908년이었다. 통감부 시대에 터를 닦고 착공했던 것이다. 이 건물이 완공된 것은 1911년.

    일본 해군의 기술장교인 나라하라 산지(奈良原三次)가 용산의 조선군사령부 연병장에서 공개 비행대회 행사를 가진 것은 1913년 8월29일의 일이다. 이 날은 바로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국치일(國恥日)이었다. 일본이 굳이 이 날을 택해서 공개 비행대회를 가진 저의가 지배자인 일본의 과학 발전과 국력을 과시해 식민지 조선인을 심리적으로 굴복시키기 위한 것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날 용산 주변 일대의 야산에는 공개 비행대회를 구경하려고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물론 서울에 살고 있는 왜인들도 거의 철시하다시피 하고 참관에 나섰다. 서왈보도 관중 속에 끼여 대회를 관람했다. 연병장 동쪽 끝에 쌍엽기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관중들은 그 쌍엽기를 가리키며 쑥덕거렸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보는 것이니 신기할 만도 했다. 서왈보는 멀리 세워져있는 비행기라는 것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도 세상에 태어나 비행기를 처음 보는 처지였다.

    조선 최초의 공개 비행대회

    오후 1시, 군악대의 팡파르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육군대장 정장 차림으로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郞)등 국장들을 거느리고 차일이 쳐 있는 본부석으로 나와 자리에 앉았다. 이어 이날의 주인공인 나라하라 산지가 무개차(無蓋車)에 올라타고 연병장에 나타났다. 우레 같은 박수가 일었다.

    나라하라는 무개차에서 뛰어내리자 차일이 쳐진 곳으로 달려가 데라우치에게 거수경례를 한 뒤 동쪽 끝자락에 세워져 있는 쌍엽기로 달려가 올라탔다. 그러자 쌍엽기 옆에 서 있던 두 사람이 프로펠러에 매달리듯이 달라붙어 힘껏 돌렸다. 곧 요란한 엔진소리가 일대에 진동했다. 동시에 쌍엽기는 서쪽을 향해 구르기 시작했다. 곧 속도가 붙었고 ‘꽤 빨리 달린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뿐히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이었다.

    “와!”

    관중 속에서 일제히 탄성이 터져나왔다. 서왈보도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일본의 과학이 얼마나 눈부시게 발전했는지를 비행기가 입증하는 것만 같았다. 나라하라의 쌍엽기는 고도 200m쯤 날아올랐다가 연병장을 한바퀴 돌더니 곧 내려앉았다. 그 시간은 길어야 고작 3분이었다.

    ‘저 비행기가 더 발전해서 하늘을 1시간이고 2시간이고 날 수 있다면?’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서왈보는 가슴이 섬뜩했다. 그런 날은 반드시 올 것이고, 그 수준이 된다면 전쟁에 투입될 것이 뻔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조선독립군은 비행기를 상대로 싸워야 할 판이니 독립전쟁이고 뭐고 도저히 가망이 없을 것만 같았다. 새어나오는 게 탄식과 한숨뿐이었다.

    서왈보는 비행대회가 끝나자 곧 평양으로 돌아왔다. 여관방에 틀어박힌 채 이틀 동안 생각에만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본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만주 일대의 동포를 규합해서 산업을 일으키고 교육을 일으켜 힘을 키운 연후에 독립전쟁을 단행해야 한다던 안창호의 말이 새삼스럽게 되새겨졌다. 서왈보는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결론을 얻었다.

    “나도 왜놈처럼 비행기 타는 기술을 익히자. 기술을 익혀 독립군에게 비행기 타는 기술을 가르쳐주면 될 게 아닌가.”

    그렇게 결심을 굳히자 용기가 치솟았다. 사흘째 되는 날부터 다시 육혈포를 들고 부호의 집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육혈포 앞에 투덜거리는 부호는 없었다. 서왈보는 양심에 가책을 받았으나 이를 악물고 이 노릇을 되풀이했다.

    마적단 거점은 교통요충지 ‘솽랴오’

    서왈보가 베이징으로 돌아온 것은 1913년 9월 하순이었다.

    “4500원이나 모금해왔단 말인가?”

    서왈보가 내놓은 돈을 보면서 유동열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마냥 감격했다. 이제 돈이 생겼으니 행동할 차례였다. 두 사람은 만주지도를 펼쳐놓고 의논했다. 유동열은 러일전쟁 때 사관생도로 전쟁에 참여한 적이 있기 때문에 만주의 지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사관학교에서 군사학을 전공한 인물이었다. 그러니 마적 활동에 지리(地理)의 이(利)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를 리 없었다.

    “우리가 웅거할 산채를 여기 솽랴오(雙遼)로 정하세.”

    지도를 들여다보던 유동열이 한 지점을 짚으며 말했다. 서왈보가 없는 사이 유동열은 만주의 실정을 파악하느라 거의 한 달 동안이나 만주를 둘러보고 돌아왔던 터였다. 유동열이 설명했다.

    “지금 일본인 마적떼가 퉁랴오(通遼), 카이퉁(開通), 창링(長嶺) 등지에서 노략질을 일삼고 있다네. 그러니까 우리가 일본 마적떼를 상대하려면 나아갈 땐 수월하게 나아가고 후퇴할 때는 귀신처럼 신속하게 자취를 감출 수 있는 지형이라야 하는 것일세. 그런 점에서 솽랴오가 안성맞춤이라 생각하네.”

    솽랴오는 펑톈과 창춘(長春)의 중간쯤에 있는 시골도시로 교통의 요충지였다. 퉁랴오, 카이퉁, 창춘 등 인근 도시로 가려면 반드시 솽랴오를 거쳐야 했다. 유동열은 서왈보가 없는 사이에 동지들까지 구해놓았다.

    “그럼 선생님은 그 동지들한테 연락을 취하십시오. 저는 마적단에 필요한 것들을 갖추도록 하겠습니다.”

    무기는 만주에서 구하기로 하고 베이징에서는 우선 말과 마차만 마련하기로 했다. 그 무렵 베이징 덕숭문(德崇門) 밖에서는 매일 말 시장이 섰다. 다음날 서왈보는 육영학교에서 사귄 중국인 친구를 앞세우고 덕숭문 밖으로 향했다. 중국인 친구가 흥정을 하는 사이에 중국인이 읽다버린 신문을 뒤적이던 서왈보는 깜짝 놀랐다. ‘남원 항공훈련소에서 훈련생 모집중’이란 1단 기사가 눈에 띄었던 것이다. 순간 서왈보의 심장이 마구 방망이질을 해댔다. ‘중국 사람들도 벌써 비행기에 대해서 관심을 품고 있단 말인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서왈보는 당장 항공훈련소로 달려가고 싶었다. 당시 항공훈련소가 마련되어 있던 남원은 지금의 베이징 국제공항이다.

    남원은 베이징 외성인 영정문(永定門) 20리 밖에 있는 숲이 우거진 야산이었다. 그 옛날 왕조시대 황제가 사냥을 즐기던 사냥터에 항공훈련소를 마련하고 항공훈련생을 양성하라고 명령한 사람은 총통인 위안스카이(袁世凱)였다. 그가 가장 신임하는 고문 중에 백리소(白里蘇)라는 프랑스인 고문이 있었는데, 앞으로 항공시대가 열릴 테니 미리 준비하는 게 좋겠다는 백리소의 건의에 따라 중국에서도 항공훈련소를 설립한 것이다. 위안스카이는 훈련용 비행기로 프랑스제 코드롱(Caudron)식 쌍엽기 12대(40, 50, 80마력 각 4대씩)를 들여다 훈련용으로 쓰도록 했다. 그것이 1913년 초가을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서왈보는 자신이 조선 사람이어서 항공훈련생에 응모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와락 서글픔이 엄습했다. 그렇게 상념에 젖어 있는 사이 중국인 친구가 말장수와 흥정하는 데 성공해 서왈보는 말 두 필과 마차 두 대를 800원에 구입했다.

    17명으로 꾸려진 이름 없는 마적단

    며칠 뒤, 유동열의 연락을 받았는지 건장한 청년 15명이 베이징으로 달려왔다. 그들은 모두 국치를 당하자 독립운동의 뜻을 품고 만주로 망명해온 젊은이들이었다. 유동열은 만주로 떠나기에 앞서 베이징에서 꽤 많은 약재를 구입했다. 만주에서는 귀한 것들이었다. 기왕에 가는 길에 약재를 싣고 가서 이윤을 좀 남겨보자는 속셈도 있었지만 약재상으로 위장하려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10월 초 일행은 솽랴오로 떠났다. 그곳에 도착하자 우선 중국인 반점(飯店-여관)에 숙소를 정했다. 마차 한 대분의 약재를 싣고 갔기 때문에 누가 보아도 틀림없는 약재상이었다. 그런데 이틀 뒤, 한밤중에 지린성 경찰의 급습을 받았다. 베이징에서 약재상이 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경찰 당국에서는 혹시 아편 밀매업자가 아닐까 의심해서 그들을 급습했던 것이다. 다행히 이 사건은 아무런 말썽 없이 해결되었다.

    유동열과 서왈보가 이끄는 마적단은 명칭이 없었다.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기에 명칭을 붙여봐야 명예스러울 것도 없었다. 또 17명의 동지 모두 이름 대신 1호, 2호… 이렇게 호칭하기로 했다. 유동열이 1호였고 서왈보가 2호였다.

    당시 창춘에는 장춘화실공사(長春華實公司)라는 큰 회사가 있었다. 유명한 일본인 마적단의 두목 우스키 마스조(薄益三)가 유흥업과 대러시아 무역을 목적으로 설립한 회사였다. 그의 부하는 300명을 웃돌았다. 만주 일대에서 준동하는 100개 가까운 일본인 마적단 중 우스키 마스조의 마적단이 제일 컸다. 우스키 마스조는 매춘업을 하는 한편 도박장도 경영하고 있었다. 도박장 안에는 마작을 비롯해서 미국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룰렛 등 서양의 도박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1914년 봄, 유동열과 서왈보는 이 도박장을 치기로 했다. 17명의 인원으로 경비가 삼엄한 도박장을 치자면 사전에 치밀한 작전계획이 필요했다. 더구나 유동열의 마적단은 인원도 적은 데다가 무기라고 해야 육혈포 2자루에 장총 15정, 거기에 각자 소지한 단도 한 자루씩이 전부였다. 그러므로 우선 무장에 있어 열세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춘화실공사 습격사건

    솽랴오에서 창춘까지는 직선거리로 250㎞가 넘었다. 그래서 유동열의 마적단은 일단 창춘 근방의 농가로 옮겨 은신했다. 여기에서도 물론 약재상을 가장했다. 우스키 마스조의 도박장을 정찰한 지 열흘 만에 기습을 단행했다. 4월 하순이었다. 해가 저물자 일행은 먼저 만주인 복장으로 위장했다. 만주인 마적단이 도박장을 기습한 것으로 인식시키기 위해서였다. 도박장 기습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그들 일행은 중국으로 간 후 처음으로 큰돈을 거머쥘 수가 있었다. 한국 독립사에 기록된 ‘만주 개별사건’이 바로 이 마적단 활동을 말하는 것이 아닐지 모르겠다. 필자는 아직도 이 ‘개별사건’을 규명하지 못했다.

    마적단은 1년 반 만에 해체했다. 1915년 가을의 일이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일본의 만주 지배욕은 더욱더 강해졌다. 일본은 남만주 철도를 수비한다는 구실로 육군병력을 계속 증파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병력을 만주인 몽골인 한족 마적단과 한국 의병 소탕전에 투입했다. 이 소탕전에는 일본인 마적단도 가세했다. 고작 17명의 인원으로 일본군을 상대한다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유동열과 서왈보는 눈물을 머금고 마적단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베이징으로 되돌아왔다. 할 일이 없었다. 마적단 활동으로 조금 모아둔 돈이 있어 당분간은 굶지 않고 지탱할 수가 있었지만 서왈보는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무위도식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언젠가는 그 돈도 바닥날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유동열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서 동지, 군인의 길을 걷는 게 어떻겠나?”

    “독립군이 없는데 어떻게 군인의 길을 걸을 수가 있겠습니까?”

    “내 말은 중국군에 들어가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일세.”

    “중국군에요? 중국군에 들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들어갈 수 있어. 바오딩보에 있는 육군학교에 지원해보게나.”

    바오딩보 육군학교는 속성 장교양성 기관으로, 교육기간은 6개월이었다. 서왈보는 유동열이 권고한 대로 바오딩보 육군학교에 지원했는데 의외로 쉽사리 입학을 허락해주었다. 서왈보는 6개월의 교육과정을 끝내자 육군소위로 임관했다. 학교 당국에서 어느 독군(督軍) 밑으로 배치되기를 희망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안후이(安徽)성 총사령관인 펑위샹 휘하로 배치되기를 희망했다. 펑위샹은 중국의 기라성 같은 장군들 중에서 유일한 크리스천이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크리스천 제너럴’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1880년생이었으니까 나이는 서왈보보다 여섯 살이 많았다. 아직 30대의 새파란 장군이었으나 중망(衆望)이 높았다.

    대망의 남원 항공학교 졸업

    서왈보가 소령으로 진급한 얼마 뒤의 일이었다. 펑위샹은 서왈보를 신임한 나머지 7, 8개월에 한 번씩 진급을 시켜주어 이때 그는 소령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지금 일본은 군비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더구나 항공기 개발에 국력을 쏟아붓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전쟁에 항공기가 필요할 거다, 그 말인가?”

    “필요한 정도가 아닙니다. 항공력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판가름나게 될 것입니다. 각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항공기들이 얼마나 눈부신 활약을 했는지를 말입니다.”

    펑위샹의 표정이 조금 심각해지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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