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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쉰 넘어 빛 본 ‘대기만성’의 전형, 韓紙작가 전광영

“나를 향한 온갖 거부(拒否)가 나를 키웠다”

  • 글: 이지은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miley@donga.com

쉰 넘어 빛 본 ‘대기만성’의 전형, 韓紙작가 전광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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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이 왈칵 뒤집어졌다. 아버지는 학비며 생활비를 한푼도 대주지 않았다. 그러면 돌아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4년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조달했다. 또 그렇게 모은 돈으로 1969년 미국 필라델피아로 유학까지 떠났다.

“미국에 있는 13년 동안 아버지와 전화 두 통, 편지 두 통 주고받은 게 전부였어요. 아버지는 돈을 보내주긴커녕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신 적도 없었죠. 한 번은 부둣가에서 막일을 하고 들어와 쓰러져 자는데, 전화가 온 거야. ‘헬로’ 하고 받으니까 아버지가 ‘이놈의 자식아, 뭐가 헬로야, 이 정신 나간 놈아!’ 하며 마구 퍼붓더라고. 아무 말도 안하고 듣기만 하다가 조용히 끊었지. 그날 밤 베갯잇을 눈물로 흥건히 적셨어요.”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무명작가였던 전 화백은 생활고를 면하기 위해 미술학원을 운영해야 했고 그런 그를 아버지는 늘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가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른 후에도 전시장을 찾기는커녕 아들이 그린 그림 한 점을 제대로 봐준 적이 없었다. 그런 시아버지에게 늘 잘했던 아내가 한번은 울먹이면서 “당신, 아버님 친자식 맞아?”하고 물어왔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2년 전 임종하기 전에도 끝내 그를 외면했다.

“돌아가시기 두 시간 전에 당신의 손자인 내 아들에게 유언을 남기셨어요. 내 손을 뿌리치며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을 땐 ‘당신 가슴에 얼마나 피가 맺혔으면 저러실까’ 싶어 눈물이 왈칵 나더라고. 화가를 천직이라 생각하지만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니 ‘내가 과연 인생을 잘 살아온 것인가’ 싶었죠.”

두 번의 자살 기도



두 번째 거부는 미국 사회로부터였다. 전 화백에 대한 아버지의 거부는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미국 사회의 거부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명문으로 꼽히는 필라델피아 미술대학원에 진학했지만 그림을 그리려면 돈이 필요했다. 당장 끼니가 걱정이었다.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밤마다 쓰레기통을 뒤져 먹다 버린 빵 조각을 주워 모았다. 남의 입이 닿은 자리를 가위로 잘라내고 먹었다. 아내는 고맙게도 참 맛있게 먹어줬다.

그래도 학교를 다닐 때는 나았다. 졸업과 동시에 그는 불법 체류자가 됐다. 영주권이 없어 늘 이민국을 피해 다녀야 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도 이민국에서 전화 한 통 걸려오면 월급도 못 받고 도망쳐야 했다. 그는 지금도 전화 기피증이 있다. ‘이민국입니다’ 하는 전화일 것 같아서다.

변기와 빨래 건조대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남의 집 지하실에 세들어 살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그림을 그렸다. 흙바닥에 앉아 그림을 그리다 지치면 그대로 누워 잠을 잤다. 어느 날엔가는 지하실에 빗물이 흘러들어와 그림이 망가진 채 둥둥 떠다녔다. 온몸에 맥이 탁 풀렸다. 살아갈 용기도 없었다. 첫아이가 황달에 걸려 여러 번 실신하는 데도 불법 체류자 신세라 병원에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전 화백 자신도 중병에 걸렸다가 간신히 회복했고 두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다.

당시 그는 빛에 몰두했다. 빛의 영롱함과 색의 오묘함을 추상회화로 표현했다. 그런데 지나치리만큼 밝은 빛, 화사한 색에 집착했다.

“그림이 침울해 보이면 대개 ‘걱정이 있냐’고 묻잖아요. 그런데 정말 미국에서 죽도록 고생할 때 그린 작품들이 모두 밝고 명랑했어요. 내 작품 속의 밝음이 내 내면의 욕망이었기 때문이죠. 눈을 뜨면 힘들고 괴로운데, 눈을 감으면 무지개를 볼 수 있었거든. 내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환상적인 꿈을 꾼 거지. 그 욕망들이 바로 밝은 빛, 구원의 빛으로 나타난 겁니다.”

“그림이 좋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고 필라델피아와 뉴욕에서 개인전도 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뒤떨어지진 않았지만 앞선 예술을 따라가기에 급급했을 뿐 그만의 독특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그마한 동양 젊은이에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한계를 느꼈다. 한국으로 돌아가 자신을 다시 한번 둘러보고 싶었다. 내 나라에서는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1982년, 전 화백은 유학을 떠난 지 13년 만에 귀국길에 오른다.

국내 화단의 거부

하지만 더 큰 거부, 너무도 뼈아픈 거부가 전 화백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국내 화단으로부터의 거부였다. 그를 반겨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 시절만 해도 계보라는 게 있었어요. 그 안에 끼지 못하면 안 되거든. 바로 화단의 이단아로 내몰리게 되죠.”

그는 철저하게 배척당했다. ‘조선일보’ 정중헌 논설위원은 ‘화단의 이방인 전광영의 My Way’에 이렇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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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지은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mil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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