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제가 있으면 비판을 해야 한다. 협상 상대자에 대해 불만이나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부 미국 정부 관계자들의 움직임은 이러한 ‘선’을 넘어섰다. 한동안 정치권과 정부 실무부처, 미국통 인사들 주위를 흘러다닌, ‘한국 NSC가 미국의 정상회담 제의를 뭉갰다’는 소문의 진실과 오류, 그 안에 담긴 의도와 배경을 꼼꼼히 들여다봤다.
제15차 남북장관급회담 첫날 만찬장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오른쪽)과 이종석 NSC 사무차장.
●장면2. 정부 실무부처의 한 과장급 당국자는 이보다 조금 앞선 4월 중순, 즉 정상회담 개최가 아직 확정되기 전에 “미국이 수개월 전에 정상회담을 제의했지만 청와대가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례적인 것은 이 이야기를 한 사람이 주한미군 관계자였다는 것. 청와대에 대한 서운함을 실무부처 사람에게 털어놓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이를 대사관이나 행정부 인사가 아닌 주한미군 관계자가 한다는 것 또한 전에는 보지 못한 일이었다.
●장면3. 역시 5월 중순, 안보분야에서 명망이 높은 예비역 장성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종석 차장이 미국의 정상회담 제의를 뭉갰다”는 내용이었다. 이 장성은 “펜타곤의 의중이 궁금하면 그에게 물어보라”고 할 정도로 이전부터 미 국방부·합참 관계자들과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 말이 흘러다니는 것 자체가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생각한 그는 가까운 옛 동료에게 관련내용을 들은 적이 있는지 확인해보기도 했다.
‘월간조선’, “4월 조사는 정상회담 관련”
다양한 경로를 통해 같은 내용의 이야기가 오가자 외교안보 실무부처 일각과 정치권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말이 많으면 결국은 세상에 나오게 마련. 6월 중순 발매된 ‘월간조선’ 7월호는 ‘이종석은 부시 대통령의 한미정상회담 제안을 묵살했다’라는 톱기사를 통해 “1월 말 미 NSC는 이종석 차장에게 정상회담을 제안하는 문건을 전달했으나 이 차장은 이를 정동영 통일부 장관 겸 NSC 상임위원장에게 보고하지 않고 뭉갰다”고 보도했다.
사실 이러한 내용은 5월18일자 ‘내일신문’에 간략하게 언급된 적이 있다. 5월 중순 전략적 유연성 문제 처리와 관련해 NSC와 이 차장에 대해 두 차례의 ‘조사성 회의’가 열렸다는 사실이 공개된 직후였다. ‘내일신문’은 ‘‘이종석 삼면초가’ 진원지는 미 국방부 한미동맹 협상팀’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지난 2월 초 부시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캠프 데이비스에서 정상회담을 여는 문제에 대해 미국 NSC측이 한국 NSC에 협의를 요청한 바 있다. 한국측의 답변이 없자 2월말 미 국방부 라인에서 한국 외교팀에 ‘이 차장이 뭉개고 있는 것 아니냐’며 의문을 제기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월간조선’의 기사 내용은 이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간 것이었다. “(이 차장의 보고누락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정 장관이 분노했으며, 2월말 방한한 리처드 롤리스 미 국방부 부차관보는 정 장관을 만나 ‘이 차장이 있는 한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강력히 항의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또한 ‘월간조선’은 전략적 유연성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알려진 4월의 두 차례 조사가 실은 미국측의 정상회담 제의 묵살 의혹 때문에 불거진 것이었다고 전했다. 4월 말 이 차장이 미국을 방문한 것은 이에 대한 해명 차원이었다는 것이다.
미묘한 시점, 미묘한 정황
이 기사에 대한 NSC의 반응은 이례적일 만큼 강했다. 기사가 나간 직후 NSC 사무처는 보도자료를 통해 “전혀 사실무근임. 이 차장의 정동영 통일부 장관에 대한 보고누락, 정상회담 관련 청와대 ‘조사’, 해명성 방미 부분도 모두 사실과 다른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또한 NSC는 “기초적인 사실조차 왜곡한 허위보도를 한 데 대해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이에 대해 필요한 대응을 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7월 중순 현재 해당기사는 같은 호의 다른 기사들과 달리 ‘월간조선’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없다.
NSC의 강력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정치권과 실무부처 일각에서 이 기사를 주목한 것은 우선 앞서 살펴본 것처럼 비슷한 소문이 미국측 관계자들의 입을 통해 여러 차례 나왔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이미 복수의 미국측 인사에게서 ‘교차확인’한 셈이었던 것. 더욱이 미국측이 처음 정상회담을 제의했다는 ‘지난 1월말’이라는 시점의 의미심장함도 개연성에 힘을 실었다. 이때는 NSC가, 한미연합사령부가 추진하던 작전계획 5029-05 작성 작업을 중단하기로 결정하고 미국측에 통보한 직후였다. 이 무렵 펜타곤과 청와대 NSC의 관계가 상당히 심각했다는 것은 당국자들 사이에선 ‘만인공지의 사실’에 가깝다.
청와대 내에서 전략적 유연성 문제에 대한 NSC의 대응방법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수면으로 떠오르던 시점 또한 이 무렵이었다. NSC 자체적으로 이에 대해 분명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때이기도 했다. 더욱이 2월10일 북한이 핵 보유 선언을 하자 미국에선 즉각 대북제재 방안이 흘러나왔다. 때문에 ‘사정을 좀 아는’ 이들로서는 이종석 차장이나 NSC 입장에선 여러 모로 정상회담 조기 개최가 달갑지 않았을 만한 정황이 있었다는 걸 부인하기 어려웠다.
‘월간조선’의 기사를 분석해보면 해당기사의 주요 취재원 가운데 하나는 한나라당 유정복 의원임을 알 수 있다. 기사는 6월7일 유 의원이 정동영 장관을 상대로 한 대정부질문을 길게 인용하며 기사 내용을 뒷받침하는 주요 근거 가운데 하나로 사용하고 있다. 유 의원의 질의는 “NSC에 대한 4월의 조사가 정상회담 제안 묵살과 관련해 보고체계를 조사한 것 아니냐”는 요지였다. 유 의원실의 한 관계자는 “‘월간조선’ 기사는 우리 방과 긴밀한 협조를 거친 것이 맞다. 기사를 쓴 기자도 취재를 통해 이미 들은 적은 있는 것 같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우리 방에서 상당부분 제공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4월의 ‘조사성 회의’가 정상회담 관련내용을 조사하기 위해 열렸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두 차례 열린 회의에서 정상회담 관련의제는 제기된 적도, 논의된 적도 없다는 것이 당시 상황에 정통한 관계자들의 한결 같은 전언이다. NSC나 이종석 차장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견지해왔으며 4월 회의에서 ‘검사’에 해당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민정수석실 관계자들의 설명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전해졌다. 비교적 중립적인 위치에서 상황을 분석하는 관계자들도 “4월 회의에서는 ‘전략적 유연성’에 논의가 집중됐을 뿐, 정상회담 관련 이야기는 논의된 적이 없다”고 말한다.
‘보고를 받지 못한 정 장관이 이 차장을 불러 분노했다’는 내용 또한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는 설명이 지배적이다. 사실 이 부분은 개인적인 대화에 속하는 것이라 정 장관과 이 차장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긴 하지만, 기사에 언급된 2월 시점에 두 사람의 관계엔 별다른 이상이 없었으며 오히려 상당히 긴밀했다는 것이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4월의 ‘조사성 회의’에서 정 장관이 사실상 이 차장의 편을 들어준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으냐는 것. 또한 이미 작계 문제나 전략적 유연성 문제로 강하게 비판받고 있던 이 차장이 과연 그러한 사실을 대통령이나 정 장관에게 장기간 보고하지 않았겠냐는 반문은 설득력이 있다.
펜타곤의 언론 플레이?
물론 모든 내용이 사실과 다른 것은 아니다. 우선 복수의 소식통은 미국측이 정상회담 관련 이야기를 처음 꺼낸 것이 1월말 마이클 그린 백악관 NSC 선임보좌관이 방한했을 때라는 것은 사실이라고 전한다. 단지 ‘월간조선’ 기사에 언급된 것처럼 ‘친서’ 형식은 아니었고 ‘아이디어 교환’ 차원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한미 정상회담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청와대 NSC와 펜타곤 사이에 삐걱거리는 소리가 커졌던 지난해부터 정부 여러 곳에서 꾸준히 제기되기도 했다.
교차확인을 통해 분명해진 또 하나의 사실은 지난 봄 롤리스 부차관보가 정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이종석과는 함께 일 못하겠다. 교체할 수 없겠느냐”고 대놓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때 롤리스 부차관보는 “NSC가 한미 양국이 합의한 내용에 대해 자꾸 입장을 번복하고 있다. 말이 바뀌는 상대와는 일할 수 없지 않냐”며 이종석 차장을 매우 강도 높게 비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된다. 이른바 ‘NSC의 정상회담 제의 묵살의혹’의 내용 가운데 미국측과 관련된 이야기는 대부분 사실인 것으로 교차 확인되지만, 청와대 내부의 상황은 대부분 사실이 아니거나 거리가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는 점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묵살설’ 자체가 미국측 관계자에게서 출발한 데다, 같은 내용이 일부 실무부처 관계자들이나 정치권 인사 등을 거쳐 나온 때문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예가 ‘4월 조사에 정상회담 관련사안이 포함됐다’는 부분이다. 앞서 이야기한 한나라당 유정복 의원실 관계자는 “그 내용은 우리측에서 먼저 ‘월간조선’ 기자에게 전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이종석 낙마설’이 힘을 얻던 5월 무렵 미국측 관계자들이 자신들과 비교적 친분이 있는 인사들-이들은 보수적인 관점에서 NSC에 비판적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에게 ‘묵살설’을 흘렸다는 사실, 롤리스 부차관보가 정동영 장관에게 ‘이종석 교체’를 요구했다는 사실은 사뭇 의미심장하다. 과연 이러한 미국 정부 인사들의 움직임이 적절했는가에 대한 의문이 자연스레 제기되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이 무렵 청와대 NSC와 펜타곤의 관계는 매우 좋지 않았고, 지난해 연말부터 올 상반기에 이르기까지 미국측 관계자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NSC와 이종석 차장이 “사실상 이중 플레이를 하고 있는 것 아니냐”며 비판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서두에서 살펴본 것처럼 4월과 5월 무렵 대단히 ‘공격적’이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5월 초 미국을 방문해 펜타곤의 한반도 담당 관계자들을 인터뷰한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비록 익명이라고는 하지만 인터넷을 통해 기사화하겠다는 것을 인터뷰하기 전에 알렸는데도, 책임 있는 자리의 관리들이 매우 강도 높은 톤으로 전략적 유연성 문제 등과 관련해 NSC를 비판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말한다. 펜타곤 인사들이 이종석 차장의 낙마(落馬)를 염두에 두고 언론 플레이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기사 쓰기가 매우 조심스러웠다는 설명이다.
펜타곤의 이러한 움직임은 “지난해 10월 노 대통령의 LA 발언 이후 이종석 차장이 달라진 모습을 보이려 애쓴다”는 몇몇 청와대 관계자의 말과 관련 있는 것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그 준비과정에서 NSC가 소외되다시피 했던 LA 발언 등을 통해 노 대통령이 ‘보다 적극적인 독자행보 견지’에 뜻을 두고 있음을 명확히 하자, 이 차장이 이후 실무부처 관계자들과 협의하는 자리에서 ‘자주파’적인 발언의 수위를 높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1년 가까이 진행 중이던 작계 5029 작성 작업에 뒤늦게 강력히 제동을 건 일처럼 상반기 중 펜타곤과 강한 파열음을 빚은 일련의 분위기도 이와 관계가 깊다는 것이 NSC 안팎의 해석이다. 물론 이 차장의 ‘달라진 모습’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미국측에 전달됐을 공산이 크다.
명분도 실리도 ‘부적절한 움직임’
2003년 출범 이후 한미동맹이나 주한미군 관련이슈에 있어 NSC의 대응이 적절치 못했다는 비판은 충분히 주목할 만한 의미가 있다. 일각에서 “미국측이 NSC에 대해 ‘말을 바꾼다’고 분노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것에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는 의견이 흘러나오는 것 또한 같은 이유에서다. 그간 정부 안팎에서는 이와 관련해 꾸준히 비판이 제기되었고, ‘신동아’ 역시 같은 관점에서 펜타곤을 포함한 미 정부 관계자들의 반응을 관련기사를 통해 전해왔다. 협상의 당사자가 공식라인을 통해 문제의식을 피력하고 수정을 요청하는 것은 납득할 만한 부분이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가까운 인사들이나 정치권에 사실과는 사뭇 거리가 있는 불분명한 이야기를 ‘흘린다’거나, 한국 정부의 고위 당국자를 교체하라고 직접 요구한다는 것은 전혀 의미가 다르다. 특히 특정 시점을 정해 의도적으로 분위기를 조성하는 식으로 주권국가 당국자의 낙마를 유도하려 했다면 이는 분명히 선을 그어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명분’을 넘어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인해 청와대 안에서 국내 언론이나 NGO의 비판마저 ‘미국에 이용당하는 것’으로 매도되는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다.
더욱이 이러한 움직임은 ‘실리’적으로도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미국측의 ‘교체 요구’가 청와대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오히려 NSC의 입지를 강화하는 작용을 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이종석 체제’는 최근 들어 더욱 견고해지는 분위기다. 결국 ‘정상회담 묵살설’을 둘러싼 일련의 해프닝은 미국이 아직도 한국을 모른다는 사실, 정확하게는 노무현 정부를 모른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로 남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