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사정은 다르다. 세계적 학문 전통을 이끌 ‘토종 이론가’도, 국제 사회를 주도할 우리의 담론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2000년 이후 한국의 인문·사회과학 대학원에서 학위를 받고 외국 대학에 교수로 임용된 사례가 거의 없다는 것이 단적인 예다. 외국 명문대 학위를 취득한 학자는 미국과 유럽에서 유행하는 최신 이론을 발 빠르게 전파하면서, 정작 한국의 특수성을 외국이론으로만 설명하려는 우를 범한다. 이젠 국내 대학에도 아이비리그 등 미국과 유럽의 명문대 출신 교수들이 넘쳐나지만 여전히 “석·박사학위를 따려면 해외로 나가라”고 충고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인문·사회과학의 방법론을 처음 발전시킨 곳은 서구다. 더욱이 가치지향적이고 언어에 의존하는 학문의 특성 때문에 강대국 중심의 연구가 세계 학계를 주도하는 것은 일면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인문·사회과학 대학원이 정책담론과 사회 트렌드를 선도할 세계적 학자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간과할 수는 없다.
한국의 인문·사회과학 대학원은 정말 위기인가. 이들은 견고한 지적 풍토 형성과 우리 사회의 현안 해결에 기여하고 있는가. ‘신동아’는 한국 인문·사회과학 대학원의 연구 경쟁력을 진단하기 위해 2002년부터 2004년까지 3년 동안 5개 대학(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서강대 성균관대)의 사학, 정치외교학, 사회학 분야에서 발표된 773편의 석·박사학위 논문 주제 경향을 분석했다. 각 학과별로 가장 활발하게 연구되는 분야, 주제, 독창성, 문제의식의 근거 등을 살펴봄으로써 이들 논문의 학문적, 사회적 기여도를 가늠해보기 위함이다.
석·박사학위 논문은 곧 지도 교수의 연구 성향을 비추는 거울이다. 학생들이 논문의 주제를 택하고 완성하기까지 교수가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각 대학별로 논문 주제가 특색을 띠는 것도 교수들의 관심사와 성향이 반영된 결과다.
◇ 역사학
흔히 ‘문사철(文史哲)’이라 부르는 인문학은 그 사회의 지적 풍토를 조성하는 기반이다. 특히 역사학은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현재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데 의의가 있다. 서울대 최갑수(서양사) 교수는 역사학의 의의에 대해 “자국의 역사를 공부함으로써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고, 서양사와 동양사를 연구함으로써 한국의 세계사적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깊이 있는 역사의식이야말로 현재를 읽고 미래를 예측하는 중요한 키가 된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서울대(서양사학과, 동양사학과, 국사학과), 연세대(사학과), 고려대(서양사학과, 동양사학과, 한국사학과), 서강대(사학과), 성균관대(사학과)에서 발표된 석·박사학위 논문은 모두 219편(박사학위 논문은 67편)이다.
이 중 한국사에 관련된 논문이 140편(박사·44편)으로 가장 많고 서양사가 42편(박사·11편), 동양사가 37편(박사·12편)이다. 동·서양사 관련 논문 편수가 적은 것은 사료(史料) 접근이 중요한 역사 연구의 특성상, 서양사나 동양사는 해외에서 공부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대학원에서 서양사·동양사 학위를 받더라도 해외에서 1년 정도 자료 리서치를 하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 서울대 박지향 교수(서양사)의 시각이다.
서양사 논문 중에서 연구 비중이 가장 높은 지역은 유럽이다. 프랑스사(9편), 영국사(7편), 러시아사(4편) 등 유럽사 연구가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미국사 논문은 5편이 발표됐다. 패권 국가로서 한국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나, 그 역사가 짧은 미국 연구가 상대적으로 적다. 이외에 알제리 독립운동가의 혁명 역사를 다룬 ‘프란츠 파농의 탈식민주의 혁명론(성균관대 사학과 석사)’ 남미사를 연구한 ‘멕시코의 혁명적 인디헤니스모의 성격(서울대 서양사학과 박사)’ 등 제 3세계 역사를 다룬 논문이 2편 발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