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팔순이 훨씬 지난 나이에 뇌경색증으로 쓰러지신 지가 2년 가까이 되다 보니 당신은 한쪽 발을 저승길에 놓고 계신 듯했고 자식들은 어머니의 죽음을 예감하며 사후 문제를 상의하곤 했지요. 인생의 마지막 몇 년을 제가 사는 시골집에 기거하시다가 병환이 나신 후 서울의 큰댁으로 가신 탓에 저는 늘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다만, 이제 와서 스스로를 위무하건대 저와 함께 사셨던 말년의 어머니는 행복하셨을 거라고, 그토록 원하던 농사일을 마음껏 하셨으니 틀림없이 그랬을 거라고 되도 않는 생각을 합니다. 참으로 뻔뻔하고 같잖은 생각이지요.
그 연세에 농사일이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똑같이 고추를 따기 시작해도 늘 저보다 앞서 나가던 어머니. 농사일이 서툰 막내자식이 힘에 부쳐 보이면, “담배나 한 대 피며 쉬거라” 하시던 어머니. 그랬던 어머니가 행복했을지 어땠을지 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자식들이 종신(終身)을 하는 가운데 조용히 이승의 끈을 놓으셨지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식들은 저마다 휴대전화를 꺼내들었습니다. 각자 연관된 사람들에게 부고를 알리기 위함입니다.
어머니가 저와 함께 시골에서 살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서울 생활을 늘 답답해하시던 차에 제가 시골에 터를 잡았으니 훌쩍 큰집을 떠나오시게 된 거지요. 게다가 막내인 저는 어머니에게 애물단지였을 테니 함께 살면서 어떻게든 돕고 싶었을 겁니다. 저는 젊어서부터 어머니에게 한번도 안정된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했습니다. 늘 집 밖으로 떠돌면서 애간장깨나 녹여드렸지요. 그런 막내자식의 불안정한 생활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함께 사는 길밖에 없었을 겁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대책이 상책이라는 생각으로 내려온 시골에서의 생활은 막막함뿐이었습니다. 몇 푼 되지 않는 돈도 다 까먹고 남의 집 농사일에 품이나 팔며 지내는 날이 늘어났지요. 그럴 무렵 어머니는 텃밭에 흰콩을 심어 메주를 만들고 그 메주로 된장을 담갔습니다. 보리쌀을 띄워서 고추장도 담갔지요. 콩을 삶거나 메주를 만들거나 된장, 고추장을 담글 때면 어머니는 언제나 저와 아내를 부르셨습니다. 우리에게 일을 시키며 일일이 설명을 하셨지요.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늘 이런 말씀이 뒤따랐습니다.
“잘 봐둬. 나 죽으믄 죄다 늬들이 할일이여.”
그러나 그때 어찌 알 수 있었겠습니까. 병환이 나시기 전까지 어머니가 보여준 삶이 바로 우리 가족이 살아나갈 지침이었던 것을.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된장과 고추장을 만들어 식구들이 먹고 살게 될 줄을.
어머니를 산에 모시는 발인 날은 늦장맛비가 하염없이 내려서 산역꾼이나 문상객이나 상주들이나 죄다 일회용 비닐 우비를 입고 질척이는 산길을 오르내려야 했습니다. 어미를 잃은 새끼의 본능적인 슬픔 따위는 빗속에서 진행되는 산역(山役)의 번거로움 탓에 느낄 새도 없었지요. 하관을 하고 봉분을 쌓을 곳에만 천막을 쳐놓았는데, 으레 말 많은 산역 판에 비까지 내려서 정신이 어질어질하더군요. 평토제와 봉분제를 지낸 상주들은 산 아래 천막 안에 모여 비를 피하며 저마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