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호

어머니 콩꽃처럼 희디흰

  • 입력2005-08-25 16: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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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콩꽃처럼 희디흰
    요즘은대체로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가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로 오더군요. 제 기억에 예전에는 마을사람들이 여러 패로 나뉘어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근동에 알렸지요. 발품 팔 일이 없어진 요즘의 부고 메시지는 참 편리하고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메시지를 받은 사람 쪽에서도 다른 일이 있어 문상을 가지 못할 경우에는 메시지 확인을 하지 못했다고 둘러치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아무튼 이쪽저쪽으로 편리하긴 마찬가지입니다.

    7월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팔순이 훨씬 지난 나이에 뇌경색증으로 쓰러지신 지가 2년 가까이 되다 보니 당신은 한쪽 발을 저승길에 놓고 계신 듯했고 자식들은 어머니의 죽음을 예감하며 사후 문제를 상의하곤 했지요. 인생의 마지막 몇 년을 제가 사는 시골집에 기거하시다가 병환이 나신 후 서울의 큰댁으로 가신 탓에 저는 늘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다만, 이제 와서 스스로를 위무하건대 저와 함께 사셨던 말년의 어머니는 행복하셨을 거라고, 그토록 원하던 농사일을 마음껏 하셨으니 틀림없이 그랬을 거라고 되도 않는 생각을 합니다. 참으로 뻔뻔하고 같잖은 생각이지요.

    그 연세에 농사일이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똑같이 고추를 따기 시작해도 늘 저보다 앞서 나가던 어머니. 농사일이 서툰 막내자식이 힘에 부쳐 보이면, “담배나 한 대 피며 쉬거라” 하시던 어머니. 그랬던 어머니가 행복했을지 어땠을지 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자식들이 종신(終身)을 하는 가운데 조용히 이승의 끈을 놓으셨지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식들은 저마다 휴대전화를 꺼내들었습니다. 각자 연관된 사람들에게 부고를 알리기 위함입니다.

    어머니가 저와 함께 시골에서 살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서울 생활을 늘 답답해하시던 차에 제가 시골에 터를 잡았으니 훌쩍 큰집을 떠나오시게 된 거지요. 게다가 막내인 저는 어머니에게 애물단지였을 테니 함께 살면서 어떻게든 돕고 싶었을 겁니다. 저는 젊어서부터 어머니에게 한번도 안정된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했습니다. 늘 집 밖으로 떠돌면서 애간장깨나 녹여드렸지요. 그런 막내자식의 불안정한 생활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함께 사는 길밖에 없었을 겁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대책이 상책이라는 생각으로 내려온 시골에서의 생활은 막막함뿐이었습니다. 몇 푼 되지 않는 돈도 다 까먹고 남의 집 농사일에 품이나 팔며 지내는 날이 늘어났지요. 그럴 무렵 어머니는 텃밭에 흰콩을 심어 메주를 만들고 그 메주로 된장을 담갔습니다. 보리쌀을 띄워서 고추장도 담갔지요. 콩을 삶거나 메주를 만들거나 된장, 고추장을 담글 때면 어머니는 언제나 저와 아내를 부르셨습니다. 우리에게 일을 시키며 일일이 설명을 하셨지요.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늘 이런 말씀이 뒤따랐습니다.

    “잘 봐둬. 나 죽으믄 죄다 늬들이 할일이여.”

    그러나 그때 어찌 알 수 있었겠습니까. 병환이 나시기 전까지 어머니가 보여준 삶이 바로 우리 가족이 살아나갈 지침이었던 것을.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된장과 고추장을 만들어 식구들이 먹고 살게 될 줄을.

    어머니를 산에 모시는 발인 날은 늦장맛비가 하염없이 내려서 산역꾼이나 문상객이나 상주들이나 죄다 일회용 비닐 우비를 입고 질척이는 산길을 오르내려야 했습니다. 어미를 잃은 새끼의 본능적인 슬픔 따위는 빗속에서 진행되는 산역(山役)의 번거로움 탓에 느낄 새도 없었지요. 하관을 하고 봉분을 쌓을 곳에만 천막을 쳐놓았는데, 으레 말 많은 산역 판에 비까지 내려서 정신이 어질어질하더군요. 평토제와 봉분제를 지낸 상주들은 산 아래 천막 안에 모여 비를 피하며 저마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었지요.

    저는 그때 고향에 남은 유일한 땅인 수실(들 이름) 밭에 심어 놓은 흰콩을 생각했습니다. 지금쯤 고랑에 난 잡풀을 잡지 못하면 콩밭이 풀밭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 지금쯤 콩 순을 쳐줘야 뒤이어 올 태풍에 콩이 쓰러지지 않고 다보록이 자랄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삼우제가 끝나기 전에는, 무엇보다 이 비가 그치기 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에 휘둘리며 ‘나도 이젠 농사꾼이 다 된 모양이여’ 하면서 쓴웃음을 흘렸지요.

    3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곁에 어머니를 모신 후 잠시 멎었던 비가 삼우젯날 새벽부터 다시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여름 장사(葬事)가 어렵다는 걸 익히 들은 바 있는 저는 비닐을 갖고 어둑한 신새벽에 묘지로 향했습니다. 세찬 빗줄기에 봉분이 상했을까봐 걱정이 되었던 겁니다. 제가 어머니 산소에 갔을 때는 한발 늦었습니다. 어머니 산소의 봉분 한쪽이 벌써 주저앉은 겁니다. 죄스럽고 난감한 일이었지만 날씨를 탓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며칠 후에 시골 친구들과 함께 어머니 산소의 봉분을 헐고 처음부터 다시 쌓았습니다.

    “여름엔 산소관리 잘해야 된다. 비 오면 비닐 덮고 비 그치면 벗겨주고.”

    “비 안 오고 뜨거운 날엔 물도 뿌려줘야지. 잔디 잘 살리려면 고생 좀 해야겠다.”

    “자네가 어머님 생전에 불효를 했는갑다. 하하.”

    뜻하지 않은 산역을 두 번씩이나 한 친구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더군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지 꼭 일주일 후에 고향 친구가 모친상을 당했습니다. 그 부고 역시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로 오더군요.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동네가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시오 리쯤 떨어진 곳이라 자동차로 가면 금방입니다. 부고를 받은 날부터 발인하는 날까지 연 이틀을 상가에서 보냈습니다. 일종의 품앗이지요. 제 어머니는 영구차로 모셨지만, 이 친구의 어머니는 상여를 꾸며서 모셨습니다. 장지인 공동묘지까지의 거리가 만만치 않기에 젊은이들이 두 패로 나뉘어 상여를 멨습니다. 저는 앞서 떠난 산역꾼을 따라가지 않고 상두꾼에 속해서 상여를 멨습니다.

    아침 일찍 서둘렀는데도 상여가 장지에 도착했을 때는 햇볕이 뜨거웠습니다. 상두꾼과 산역꾼, 그리고 마을의 부녀회원들과 어르신들이 천막 아래 모여서 술과 음식을 먹었습니다. 상사(喪事)는 호상(好喪)이라 걸쭉한 농담이 자연스레 오가는데, 여자 상주들의 곡소리가 늦은 밤 새소리처럼 간간이 들렸지요. 슬픔도 곡소리도 농지거리도 허옇게 퇴색될 만큼 뜨거운 여름날이었습니다. 막걸리 두 사발과 수박 한쪽으로 입을 가신 저는 산소자리로 올라가 산역꾼들이 파놓은 광중(壙中)을 바라보고 앉았습니다.

    일주일 전, 빗속에서 어머니가 들어갈 자리를 보고 있던 때와는 사뭇 다른 기분이 들었지요. 그러다가 담배를 한 대 물고 공동묘지 건너편 들판을 넘겨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묘한 느낌이 드는 겁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꿈속의 장면을 실제로 본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습니다. 잠시 후 그 느낌의 실체를 알게 된 저는 실소하고 말았습니다. 그 건너편 들판에 우리 콩밭이 있었던 겁니다. 몇 년 동안 수도 없이 밭에서 공동묘지를 건너다보았지만, 공동묘지에서 우리 밭쪽을 본 게 처음이었던 탓에 그리 되었던 겁니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저는 콩밭으로 갔습니다. 콩은 종아리께까지 자라서 가벼운 바람에도 너풀거렸지요. ‘그래. 내일쯤 낫을 벼려서 순을 질러야겠다’고 생각하며 콩잎을 들추는 순간 보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의 흰머리 같은, 생전의 환한 웃음같이 피어나는 희디흰 콩꽃을 말이지요. 이제 시기를 놓쳐 순을 지르기는 틀린 겁니다. 꽃이 핀 나무는 가지를 부러뜨릴 수 없는 법이니까요.

    49재를 올릴 무렵이면 콩꽃은 꼬투리가 되고 가을바람도 살폿 불겠네요. 그때쯤 저는 어머니를 마음에서 놓아드릴 테니 어머니께서도 한시름 놓고 편안히 가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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