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호

신항, 지반침하 우려 논란

법원 연약지반 배수재 기능 부실 인정, 업체 “잘못된 전제 아래 내려진 판결”

  • 최영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ftdog@donga.com

    입력2006-03-28 10: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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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항, 지반침하 우려 논란
    #장면 12006년 1월12일 김해국제공항 신활주로가 균열과 지반침하 문제로 준공 6년 만에 전면 폐쇄됐다. 안전진단 결과 신활주로 균열과 지반침하의 원인은 당초 매립지였던 신활주로 지역에 대한 지반 다지기(연약지반 개량) 공사가 잘못된 때문이었다. 그동안 김해공항 신활주로를 이용한 파일럿과 승객들은 목숨을 담보하고 이착륙을 한 셈이다.

    #장면 2한국토지공사는 1995년 12월 완공예정이던 부산 녹산국가공단 택지 1단계 조성공사를 3차례 공기(工期)를 연기한 끝에 1999년 6월에야 끝냈다. 지반이 계속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보강공사 추가비용만 936억원이 들었다. 완공 이후에도 지반침하는 계속됐고, 입주업체들은 “이 상태에서 공장을 짓는 것은 무리”라고 항의했다. 녹산국가공단은 2003년 여름, 태풍 매미에 의한 해일로 입주업체의 절반 가량이 물에 잠겼다(피해액 572억원). 부산시의 조사 결과 녹산공단 방파제는 준공할 당시 높이는 1.4m였으나 그후 전체 지반이 40cm가량 내려앉아 1.6m 높이의 해일과 파랑을 견디지 못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엔 바닷가에 지어지는 국책시설이 유난히 많다. 이들이 들어선 지역은 원래 바다나 개펄이지만 흙으로 덮이면서 자연스럽게 매립지가 된 곳으로, 그 아래는 다량의 물과 흙이 혼재된 연약지반이다. 연약지반 위에 구조물을 세우려면 지하의 물을 빨아내고, 불안정한 지반을 다지는 작업이 필수.

    이때 지하에 있는 물을 빠른 시간 내에 빨아내고 안정화시키는 공사를 ‘연약지반 개량공사’라 하고, 물을 빨아낼 때 쓰이는 자재를 배수재(排水材, PBD)라 한다. 만약 배수재 공사가 잘못되면 구조물을 짓기도 전에 땅이 꺼지거나, 건물이 들어선 후에도 지반이 가라앉아 수십억, 수백억원의 추가예산을 들여 재시공을 해야 한다. 심한 경우에는 건물, 도로 붕괴와 같은 대형 참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들 국책시설 외에도 준공 후 연이은 지반침하로 홍역을 앓은 곳이 부지기수다. 경남 양산·물금택지지구, 인천국제공항 1단계 공사, 평택항 부두, 김해 내외지구 신도시, 서해안 고속도로 등이 그것. 매립지 연약지반 위에 세워진 국책시설에 대해 감사원과 국회는 부실공사 감사를 거의 매년 진행하고, 건설교통부와 해양수산부, 시공사의 정밀안전진단이나 자체 조사도 이뤄졌지만 지반침하의 원인을 속시원히 밝혀낸 경우는 극히 드물다. 원인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다 보니 그에 대한 책임 추궁이 있을 리 없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시공사 문건 ‘배수 안 돼 무너져 내릴 것’

    더욱이 매립지 연약지반 위에 짓고 있거나 지을 예정인 국책시설은 이미 지어놓은 시설보다 오히려 많다. 신항(Pusan New Port), 인천국제공항 2단계, 전남 광양항, 목포 남악신도시, 인천 송도신도시, 군산 수송지구 택지 등. 과연 이 시설들은 지반침하 현상 없이 오랫동안 안전할 수 있을까.

    지난 1월19일 서울동부지방법원은 지반침하 현상과 관련, 건설업계에 경종을 울리는 판결을 내렸다. 판결의 골자는 현재 진행 중인 신항 연약지반 개량공사에 사용된 배수재의 필터링 기능에 문제가 있다는 것.

    신항 배후부지와 민자(民資)부두는 연약지반 개량공사를 둘러싸고 부실공사 의혹이 제기되면서 2004년 검찰 수사와 국정감사를 거쳐 해양부, 건교부의 특별감사가 벌어졌던 곳이다. 그 중 2001년 11월 공사가 시작된 민자부두는 2009년 완공 예정으로, 총 9선석 중 3선석이 이미 지난해 말 공사를 마치고 올 1월16일 가동을 시작했다. 개항식에는 노무현 대통령도 참석했다.

    이곳은 뒤편의 배후부지와 함께 지하 50m까지가 매립지로,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초연약지반. 이미 연약지반 공사가 끝난 민자부두에 들어간 배수재만 2만8000km(배수재의 양은 km 단위로 표기)에 달하고, 현재 공사가 진행 중인 배후부지(2013년 완공)에는 2만4500km의 배수재가 이미 사용됐거나 사용될 예정이다. 지하 50m까지 배수재를 깔아야 하므로 엄청난 양이 소요된 것이다.

    그런데 2004년 초 한 배수재 업자가 이곳에 들어간 배수재가 시방 규정에도 맞지 않고, 필터 기능에도 문제가 있어 이후 지반침하의 가능성이 높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는 검찰 수사와 국정감사의 시발점이 됐다.

    2004년 한 해 동안 계속된 검찰 수사, 해양부·건교부 특별감사는 모두 ‘전혀 이상이 없다’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오히려 검찰은 2005년 1월 신항 연약지반 공사에 배수재를 공급한 업체의 고소를 받아들여 당초 부실 배수재 의혹을 제기한 김모(57)씨를 신용훼손(업무방해) 혐의로 기소하기에 이른다. 김씨는 싱가포르와 동남아 등지에서 연약지반 공사를 해오던 업자로, “싱가포르에선 사용이 금지된, 설계시방에도 맞지 않는 배수재가 신항에 쓰였다”며 신항 시공사들에 편지를 써 논란을 촉발시켰다.

    김씨는 2003년 12월 신항 공사현장에서 연약지반 공사를 담당한 현장기사가 회사 임원과 상급 시공사 간부에게 보낸 몇 통의 e메일을 접하게 된다.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배수재를 지하 50m까지 설치했으나 30m 아래쪽은 배수가 중단돼 성토(盛土)가 되면 무너져내릴 것이다. 배수재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원인 규명은 되지 않는다. 배수 중단 사실이 외부에 노출되면 문제가 일어나므로 내부에서 조용히 처리해야 한다.’

    신항에 쓰인 배수재에 큰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김씨는 이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고, 이는 부실공사 논란으로 이어졌다. 후일 이 e메일 문건은 재판부가 김씨의 무죄를 인정하는 한 요인이 됐다.

    전문기술 분야의 공방이 계속되면서 재판은 1년을 끌었다. 1심 법원은 양측의 지루한 공방을 지켜본 후 결국 부실의혹을 제기한 업자에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즉, “신항에 쓰인 배수재에 문제가 있다”는 김씨의 주장을 법원이 인정한 셈. 판결문에 나타난 법원의 ‘판단’은 정부의 감사 결과를 완전히 뒤집는 내용이었다. 서울동부지법 단독 임수식 판사는 판결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엠보싱하면 배수재 水路 막힌다”

    ‘(신항 배후부지 연약지반 공사에 쓰인) 배수재 필터(부직포)는 필터 위에 엠보싱 처리를 함으로써 비록 유효구멍 크기는 줄이는 효과를 보았지만, 부직포 내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공극(구멍)의 크기는 그대로인 까닭에, 물을 빨아들이는 투수성 내지 투수력은 몰라도, 적어도 부직포 내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공극들의 절대적 크기에 의존하는 부직포의 필터 기능, 즉 물과 함께 공극을 통해 들어오려는 진흙 입자 등의 이물질을 거르는 기능은 일반 부직포의 경우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 약화된 만큼 수로(水路)가 막히는 이른바 클로깅(clogging)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질 것…’.

    전문가가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 문장이다. 이 판결문을 ‘해독’하려면 신항 배후부지와 민자부두에 사용되고 있는 연약지반 개량공법, 즉 PBD 배수재 공법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반을 빠르게 단단하게 다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지하 곳곳에 스며 있는 물을 밖으로 잘 빼내고 반대로 흙은 잘 걸러내는 데 있다. 배수재 공법은 물을 잘 빨아들이도록(親水) 만들어진 필터(부직포, 오른쪽 사진 참조)와 필터 안으로 흡수된 물의 수로 기능을 하는 코어로 구성된 배수재를 지하에 박아넣어 흙 입자는 걸러내고 지하수만 빨아올리는 공법. 이때 필터에 난 구멍 크기(유효구멍 크기, AOS)가 그 지역의 토질에 비해 너무 크면 흙 입자들이 배수재 속으로 들어가 코어(수로) 구멍을 막음(클로깅 현상)으로써 배수가 되지 않거나 배수효율이 낮아진다.

    반대로 필터의 구멍 크기가 너무 작으면 필터의 겉면이 흙 입자에 의해 막힘으로써 배수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 따라서 필터의 구멍 크기가 주변 지질과 비교해 적당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필터를 땅속에 박아도 지하수는 배출되지 않고, 땅은 다져지지 않아 결국 그 위에 건물이 들어서거나 흙으로 메울 경우 지반이 침하하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부실시공 논란은 피고인 김씨가 “신항에 쓰인 배수재 D필터에 엠보싱 처리, 즉 곰보 처리가 되어 필터링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촉발됐다. 그가 신항의 연약지반 공사 주관사와 시공사에 보낸, 즉 신용훼손 재판의 불씨가 된 편지를 살펴보자.

    ‘최근 신항에 공급되는 엠보싱 제품(D필터)은 근본적으로 구멍 크기를 줄이지 않고 엠보싱 처리를 해 시험할 때 구슬 알의 통과량만 줄인 것이다. 엠보싱된 부분은 필터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한다. 엠보싱 처리된 필터는 필터링 기능만 반감시키고 너무 큰 입자를 통과시켜 클로깅을 초래하게 된다. 이는 유효구멍 크기 검사를 편법으로 통과하는 방법으로 다른 나라에서도 사용되다가 문제가 많아 5년여 전에 금지된 방법이다.’

    신항, 지반침하 우려 논란
    신항, 지반침하 우려 논란

    신항에 쓰인 D배수재. 아래가 필터(부직포)이고 위가 수로 구실을 하는 코어다. 오른쪽은 엠보싱 부분을 확대한 사진.



    당시 신항 배후부지 연약지반 개량 공사의 유효구멍 크기 설계 시방기준은 국제적 검사방법인 ‘ASTM D4751’ 기준으로 80㎛ 이하. D필터의 유효구멍 크기는 75㎛로 시방규정을 만족했기에 D필터 제조·납품업체로선 김씨의 이런 주장에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ASTM D4751과 엠보싱

    ASTM(American Society for Testing and Materials, 미국재료시험협회)이란 공업원료, 또는 그 시험법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이용되는 유효구멍 크기의 측정방법을 제안한 곳이다. 이 기관에서 내놓은 일반 배수재 필터의 유효구멍 크기 검사법인 D4751은 필터 시료 위에 다양한 크기(75∼1200㎛)의 유리구슬을 작은 것부터 차례로 올려놓고 정해진 시간만큼 상하좌우로 흔들어 필터를 통과한 유리구슬의 무게를 측정한 후 이가운데 통과한 양이 일정 비율에 해당하는 유리구슬의 크기를 그 필터의 유효구멍 크기로 정한다.

    이때 필터를 통과한 유리구슬 중 원래 필터에 올려놓은 구슬 무게의 5%만이 통과한, 즉 95%는 걸러진 유리구슬의 크기를 그 필터의 유효구멍 크기로 정하는 검사방법을 D4751(O95, 건식 측정법) 검사법이라 한다. 예를 들어 다양한 크기의 유리구슬 중 75㎛ 크기의 유리구슬 100g을 필터 위에 올려놓았는데, 5g만 통과하고 95g은 남아 있었다면 이 필터의 유효구멍 크기는 75㎛이 되는 것이다.

    필터 구멍의 크기를 직접 재지 않고 걸러진 유리구슬의 양으로 유효구멍 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필터의 구멍 크기가 워낙 작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멍의 모양이 모두 제각각으로 불규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과한 구슬의 양이 적을 수록 유효구멍의 크기도 작은 것으로 평가될 뿐, 필터에 있는 실제 구멍 크기(판결문에서는 ‘절대적 공극의 크기’로 묘사) 모두가 수치 그대로를 의미하진 않는다.

    다음으로 엠보싱(또는 ‘칼렌더링’)이란 배수재의 필터 표면을 녹이거나 기계로 눌러, 곰보 처리된 화장지와 같이 부분적으로 움푹 들어가게 하는 필터처리법의 일종이다(원내 사진 참조). 배수재 필터에 엠보싱 처리를 하면 엠보싱이 된 부분은 구멍이 꽉 막히거나 극도로 좁아져 필터 기능을 아예 하지 못하고, 필터 전체적으론 구멍의 숫자가 줄어들어 필터링 기능을 하는 표면적이 줄어든다는 게 피고인 김씨의 주장이다. 필터의 전체적인 구멍 숫자가 줄어드니 ASTM 방식으로 유효구멍 크기 검사를 할 때 구슬이 필터 아래로 통과하는 양도 줄어 유효구멍 크기가 줄어드는 효과를 나타내지만, 이것이 필터 구멍이 모두 작아졌음을 의미하진 않는다는 것. 결국 엠보싱을 하지 않은 부분의 구멍은 큰 상태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이 구멍으로 굵은 흙 입자가 들어가 배수재 코어의 수로를 막는다는 얘기다.

    법원, 피고인 주장 인정

    이 대목에서 판결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자.

    ‘부직포(필터) 위에 엠보싱 처리를 함으로써 비록 유효구멍 크기는 줄이는 부수적 효과를 보았지만, 부직포 내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공극의 크기는 그대로인 까닭에…이물질을 거르는 기능은 일반 부직포의 경우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 약화된 만큼 수로가 막히는 이른바 클로깅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배수재 필터에 엠보싱 처리를 함으로써 D필터의 ‘유효구멍 크기’는 줄었지만 엠보싱을 하지 않은 부분의 ‘실제 구멍 크기’는 그대로인 까닭에 김씨의 주장처럼 ‘시방보다 큰 구멍 사이로 입자가 굵은 흙이 몰려 들어오면서 수로를 차단하게 되고, 이는 흙을 거르는 필터링 기능을 반감시킨다’는 의미다.

    또 법원은 판결문에서 ‘같은 수치의 유효구멍 크기(ASTM D4751기준)를 가진 부직포라도 일부 엠보싱 처리를 한 경우가 그러한 처리를 전혀 하지 아니한 경우에 비해 부직포 내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공극들의 절대적 크기는 큰 상태’라고 밝혀, 엠보싱 처리가 된 필터는 유효구멍 크기보다 실제 구멍 크기가 더 크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나아가 법원은 ‘이는 피해회사, 즉 시공업체측도 사실상 일부 시인하고 있는 점’이라고 적시했다.

    납품사, “잘못된 전제로 판결”

    이에 대해 D필터 납품업체측은 “판사가 ‘필터 표면 중 엠보싱을 한 부분의 구멍이 막혀 있다’는 김씨의 진술을 과학적, 객관적 확인 없이 인정한 상태에서, 즉 잘못된 전제를 가지고 판결을 내렸다”고 반박한다. 업체 관계자는 “엠보싱 처리공정은 부직포의 두께만 압착해 인장(引張)강도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지 막을 형성시키는 공정이 아니다”라며 “이는 전자현미경을 통한 촬영에서도 확인된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엠보싱 처리를 한 부분이 일부 유효구멍 크기를 줄이는 효과는 있지만 실제 구멍의 크기는 엠보싱 처리를 하지 않은 부분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것.

    또한 판사는 ‘논의 전개의 편의상 필터에 있는 실제 구멍크기(절대적 공극의 크기)가 균일한 것으로 가정’했지만, 업체 관계자는 “필터는 수많은 섬유가닥을 방사시켜 열접착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므로 실제 구멍 크기는 절대 균일할 수 없으며, 오히려 수세미를 연상케 하는 3차원 망상구조로 돼 있다”고 반박한다.

    “ASTM이 구멍의 크기를 직접 재지 않고 구슬의 양으로 유효구멍 크기를 측정하는 것도 필터의 실제 구멍 크기가 다 다르기 때문인데, 재판부는 피고인의 주장만 믿고 모두 같은 것으로 단정했다. 필터의 구멍 크기가 실제로 균일한지, 엠보싱 처리로 막이 형성되는지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채 확인되지 않은 전제 아래 추론을 펼치다 보니 필터링 기능에 문제가 있다는 잘못된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필터의 실제 구멍 크기가 각각 다르고 엠보싱 처리로 막이 형성되는 것도 아니므로 유효구멍 크기 검사를 편법으로 통과했다는 김씨의 주장은 허위이며, 엠보싱을 하지 않은 부분의 구멍으로 흙 입자가 들어가 필터를 막는 현상은 있을 수 없다.”

    업체의 또 다른 관계자는 “신항을 비롯해 인천공항 2단계 등 D필터가 쓰인 곳의 모든 계측자료에 이상이 전혀 없다고 나오는데 왜 이런 모함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그 배경에는 피고인이 속한 다국적회사가 국내 기업을 흠집 내 자사 제품을 납품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음모설’까지 제기한다.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한 검찰은 ASTM측이 한국에 보낸 자료를 피고인 김씨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한 증거를 잡고 보강 수사를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D필터 납품업체측은 “ASTM측이 D필터도 D4751 방법으로 검사할 수 있고, 검사법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편지를 보냈는데도 김씨가 이를 교묘히 이용해 마치 다른 검사법을 써야 하는 것처럼 오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土公, 칼렌더링 배수재 사용 금지

    법원은 피고인의 주장을 인정하는 또 하나의 근거로 1997년 9월 한국토지공사(이하 토공)가 발행한 ‘연약지반의 처리공법과 침하계측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지목했다. 토공은 보고서에서 “단, 드레인보드(배수재) 제조업체에서 제조원가를 낮추기 위해 중량이 작은 필터재를 사용한 후 AOS(유효구멍 크기) 규정에 맞추기 위해 필터재 표면을 직경 1∼2mm의 원형으로 녹여 필터의 간극을 줄이는 칼렌더링을 하고 있으나, 이러한 칼렌더링은 용융(鎔融) 면적이 불투수성이 되어 투수면적을 감소시키므로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명시했다. 토공은 당시 경남 양산·물금 택지개발 지구가 지반침하를 일으키자 각종 배수재에 대한 시험시공을 한 후 이런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따라 신항 민자부두 연약지반 개량공사 시방서의 재료규정에도 당초에는 ‘칼렌더링 필터를 사용하지 말 것’이라는 문장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 규정은 실시설계 과정에서 무슨 영문인지 삭제돼 버렸다. 재판부가 판결문에서 ‘우리나라의 경우도 한때 엠보싱 처리된 부직포 제품의 유효구멍 크기 왜곡 문제가 부각되어 일부 공사현장의 시방서에서 그 사용이 금지된 적이 있었다’고 기술한 것은 이 때문이다. 재판부는 엠보싱을 칼렌더링과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했다.

    이 보고서를 작성한 토공 연구원은 이번 재판 과정에서 ‘D필터는 내가 보고서에서 언급한 해당 칼렌더링 제품이 아니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냈으나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다. 이 연구원이 한 방송사 인터뷰에서 D필터를 직접 가리키며 “이 제품이 (내가) 보고서에 쓴 바로 그 칼렌더링 제품이 맞다”고 말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토공이 낸 보고서의 칼렌더링 금지 조항은 네덜란드의 배수재 생산업체 콜본드의 블래어 로스 박사의 논문을 그대로 인용한 것. 로스 박사는 “칼렌더링 공정은 적은 비용으로 배수재를 제작하는 방법 중 하나로 유효구멍 크기 시험검사를 하면 충분히 통과하지만, 투수성이 떨어진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D필터 납품업체측은 “토공이나 로스 박사가 언급한 칼렌더링 제품은 1990년대 초중반까지 쓰인 중량이 아주 작은 접착식 부직포로, 중량이 165g이나 되며 2003년 11월부터 제조 판매된 D필터와는 전혀 다른 제품”이라며 “D필터는 설사 칼렌더링 과정을 거친다 해도 중량이 무겁기 때문에 필터 기능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반박했다. 재판부와 달리 업체측은 토공이나 시방서에 나온 칼렌더링이 이미 10년 전에 나왔다 폐기된 공법으로 D필터의 엠보싱 처리공법과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보고 있다.

    農基公, “D필터 배수 성능 떨어진다”

    신항, 지반침하 우려 논란

    배수재를 지하에 박아넣는 기계.

    한편 법원은 판결문에서 엠보싱 처리를 한 필터재가 일반 부직포보다 필터링 기능, 즉 흙입자를 걸러내는 기능은 떨어지지만 ‘투수력 내지 투수성은 알 수 없다’고 썼다. 필터의 본래 기능은 지하에 있는 물은 잘 빨아들이고, 수로를 막는 흙은 내뱉는 것. 때문에 배수재의 배수 성능 등 이른바 물을 빨아들이는 통수 기능은 연약지반 개량공사 시방서에 유효구멍 크기와 함께 규정돼 있을 정도로 중요한 요소다.

    이와 관련해 최근 농업기반공사(이하 농기공)는 주목할만한 실험결과를 내놓았다. 농기공이 신항에 쓰인 D필터와 일반 배수재 필터에 대한 배수 성능 검사, 즉 통수능 검사를 실시한 결과 D필터가 일반 배수재보다 시공 초기에는 10%, 시공 종료시점에는 40% 이상 배수 성능이 떨어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실험 결과를 보면 일반 배수재의 경우 초기에는 1초당 71∼80cc의 물을 빨아들이다 시험 종료시점에는 35∼45cc를 빨아들인 데 비해 D필터는 초기엔 64∼75cc를 빨아들이다 막판에는 20∼25cc밖에 빨아들이지 못했다.

    배수재 전문가이자 설계자문회사 대표인 옥치남 박사는 “지하 50m에선 배수 성능의 차이가 이보다 더 클 수도 있다. 필터에 엠보싱 처리를 하면 해당 부분의 투수성이 거의 없어져 필터의 투수면적이 급격하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농기공의 실험은 전남 광양항 동측 배후단지 조성공사를 맡은 시공업체가 배수재 필터의 실제 성능을 검증하기 위해 의뢰한 것으로, 현장 지형을 그대로 축소해 검증했기 때문에 시험의 신뢰도가 일반 검사법보다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D필터 납품업체측은 “일반 배수재로 사용된 필터의 종류가 정확히 무엇인지, 배수재 안에 들어간 코어가 어떤 것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또 실험에 가해진 여러 조건이 다른 상황에서 이뤄진 실험결과는 믿을 수 없다. D필터 제품은 투수계수에 대한 공인시험을 통과해 시방규정에 맞춰 공급된 제품으로 통수 성능에 전혀 이상이 없다”고 밝혔다. 설사 모든 조건이 만족됐다 하더라도 실험에 사용된 흙이 신항의 연약지반 지하층 흙이 아니기 때문에 이 실험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게 업체측의 설명이다.

    건교부와 해양부의 ‘이상한 감사’

    신항에 대한 관리·감독권을 가진 해양부는 지난해 1월20일 ‘신항 북측 컨테이너 부두(민자부두) 연약지반 시공은 적절했다’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내고, 그 근거로 한국지반공학회가 발표한 학술연구용역 조사보고서를 제시했다. 해양부는 학회의 용역보고서를 바탕으로 “신항만 민자부두의 지반 개량에 사용된 배수재의 필터는 투수계수, 유효구멍 크기 등 각종 기준이 현장 시방 규정을 만족하며 배수재의 성능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그런데 해양부는 내부에 배수재 전문가가 없다는 이유로 신항 시공사인 S사에 용역조사를 주관하게 했다. S사는 자비 수억원을 들여 지반공학회에 학술연구용역을 의뢰했고, 이 학회로부터 ‘문제 없다’는 결과물을 얻어냈다. 연구 용역의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할 만한 대목이다.

    더욱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지반공학회에서 시료로 쓴 배수재가 실제 공사현장에 쓰인 제품이 아니라는 것. 취재 결과 신항 시공사는 시공현장에 납품하는 배수재 제조업체가 아닌 다른 업체로부터 실제로 사용되지 않은 배수재 필터를 받아 지반공학회에 전달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반공학회에 실험 검사용으로 배수재 필터를 제공한 한 하도급 업체 관계자는 “우리는 신항에 배수재 필터를 납품한 적이 없고, 지반공학회에 제출한 배수재는 신항에 쓰인 배수재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해양부는 이런 식으로 2004년 10월의 국정감사 지적사항을 모두 피해갔다. 이에 대해 해양부 관계자는 “지반공학회가 권위 있는 학회라 성실하게 조사했을 것으로 믿는다”며 “축소·은폐가 의심된다면 성실히 답변하겠다”고 해명했다.

    두 달 후인 지난 3월 말에 건교부가 발표한 신항 특별감사 결과는 해양부 감사결과의 복제판이었다. 건교부는 이미 특감 결과 발표 두 달 전인 지난해 1월 초, 신항에 쓰인 배수재 필터에 대한 시험검사를 건설기술연구원에 의뢰한 적이 있다. 검사 발표를 계속 미루던 건교부가 3월에 공개한 시험 결과는 놀랍게도 해양부가 시공사에 맡겨 1월 말에 내놓은 지반공학회의 용역 조사보고서와 동일한 내용이었다.

    최후의 진실은?

    어떻게 된 일일까. 건설기술연구원 시험검사 책임자이자 지반공학회 용역조사팀의 일원이었던 조모 박사는 건교부의 지시와 예산으로 시험검사를 한 뒤 이 자료를 지반공학회로 넘겼고, 지반공학회는 마치 자신들이 직접 검사를 한 것처럼 해양부의 용역조사 보고서에 이 시험결과를 원용한 것이다. 그나마 신항에 쓰이지도 않은 배수재를 시료로 한 ‘엉터리’ 시험검사 결과였다. 이 자료는 다시 조 박사에 의해 당초 시험을 의뢰한 건교부에 넘겨졌다. 시공사로부터 수억원의 비용을 받고 용역을 진행한 지반공학회는 결국 정부 예산으로 실시한 시험검사(그것도 잘못된 시험검사의) 결과를 도용한 셈이 됐다.

    배수재의 필터 기능에 대한 재판은 워낙 전문적인 분야이다 보니 항소심과 상고심에서 또 어떤 판결이 나올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번 1심 판결은 배수재를 둘러싼 국회와 정부의 공방 이후 법원이 처음으로 판단을 내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건교부와 해양부 측은 일단 “곤란한 일이 벌어졌다”면서 “1심 판결인 만큼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해양부 관계자는 “이미 감사에서 아무 이상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으나 판결문을 다시 해석하고 재판 진행상황을 주목하겠다”고 밝혔다.

    신항 공사에 배수재를 납품한 업체측은 이번 판결이 배수재의 기능에 대한 것이 아니기에 아무것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반응이다. “이번 판결은 신용훼손 혐의에 대한 것으로, 피고 김씨가 부실 배수재 주장을 할 당시 자신의 주장이 허위임을 알고 했느냐 아니냐에 대해 밝힌 것이지 배수재 기능 자체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진 게 아니다”라는 것.

    과연 최후의 진실은 무엇일까. 연약지반 개량공사의 부실로 인한 지반침하 문제는 공사의 결과, 즉 지반침하 현상이 짧게는 1년, 길게는 5∼10년 이후에 발생하는 만큼 섣불리 예단할 수 없다. 하지만 신항에 사용된 D배수재가 신활주로를 포함한 인천공항 2단계 공사를 비롯해 많은 국책시설에 이미 투입됐거나 투입될 예정인 만큼 시시비비는 분명하게 가려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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