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호

분단 극복과 점진 개혁 내세운 좌우합작운동의 좌절

  • 정윤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정치학 tasari@aks.ac.kr

    입력2006-04-10 14:3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분단 극복과 점진 개혁 내세운 좌우합작운동의 좌절

    광복 이후 좌우합작운동에 나선 민족지도자들. 앞줄 왼쪽부터 안재홍, 김붕준, 김규식, 한 사람 건너 원세훈. 가운뎃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강원룡.

    광복 이후 3년간의 한국정치는 제1공화국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는 현대 한국민족주의의 최대 과제인 민주적 통일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나 그것을 위한 정치적 이니셔티브는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빚어진 민족분단, 남북의 첨예한 이데올로기적 대립, 그리고 반민족적 친일세력의 온존(溫存) 등은 이후 현대 한국정치사가 권력의 정당성 빈곤과 사회 통합의 결여로 파행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원인이 됐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남북화해와 평화정착을 위한 각종 구상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실천되고 있는 오늘날, 광복 이후 3년간 전개된, 민주적 통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역동적이고 정치적인 노력은 새로운 관심과 재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만일 냉전적 고정관념과 그것에 기울어진 편견을 없애고, 한국민족주의의 최대 과제는 민주적 통일국가 건설에 있다는 시각에서 그 같은 정치적 이니셔티브들을 재평가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한국정치의 이상과 현실이 맞닿는 어떤 사상적 맥락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민족통일의 비전과 그 실천을 위한 구체적인 방략을 결정하는 데 유용한 정치사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해방정국에서 빚어진 실패 사례들이 우리 현대사의 어둠이었다면 이 어둠에 대한 성찰을 통해 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하나의 지혜일 것이다.

    이러한 기대와 문제의식에 터 잡아 필자는 광복 이후 3년간 비록 정치적 경쟁에서 성공하지 못했으나 오늘날 새로이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필자는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그간의 각종 비판과 비난, 혹은 의도적인 언급회피나 묵살에 유의하면서, 그것은 첫째로 분단극복을 위한 민족내부의 자주적 이니셔티브였다는 점, 둘째로 좌우합작을 추진했던 정치지도자들은 현대 한국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점진적인 개혁 리더십의 한 유형을 보여주었다는 점, 셋째로 좌우합작운동은 한국민족주의의 합리적이고 실용주의적인 대외 접근이었다는 점을 들어 그 정치적 성격을 확인한 다음 이를 바탕으로 좌우합작운동에 대해 나름의 재평가를 시도하고자 한다. 아울러 해방정국에서 시도된 좌우합작운동이 오늘의 한국정치와 남북관계에 어떠한 함의를 지니고 있는지도 생각해보고자 한다.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추진한 통일정부 수립이 무산된 이후 당시 정치과정에 참여한 지도급 인사나 단체는 누구나 민족대통합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각 세력은 자신을 중심으로 민족대통합을 이루고자 노력했다. 박헌영은 공산당이나 인민공화국을 중심으로, 김구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중심으로 각각 좌우익 모든 정치·사회단체가 대동단결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들 모두 조직 차원에서나 이념 차원에서 자기중심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경직된 가운데 경쟁하고 대립한 탓에 국민이 바라던 통합적 정치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

    김규식과 여운형의 활약



    그런데 상하이 임시정부 부주석 김규식과 건준위원장 여운형을 중심으로 1946년 5월부터 전개한 좌우합작운동은 국내 여러 정치세력 간의 권력투쟁적 적대관계를 지양하고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한국민족주의의 대의에 따라 좌우 양 진영 정치지도자들끼리 서로 인정하는 가운데 대화와 협상을 통해 일대 단합을 기도한 민족자주적인 이니셔티브였다.

    널리 알려진 대로 1945년 12월27일 ‘미·영·중·소 4개국에 의해 최소 5년간의 신탁통치로써 한국의 독립을 준비하고 그 구체적 방안으로 조선임시민주주의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보존할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를 설치·운영한다’는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사항이 발표되자 한국의 국내 정치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워졌다. 우익진영은 반탁(反託) 구호와 함께 이승만을 의장, 김구·김규식을 부의장으로 하는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좌익진영은 찬탁(贊託) 프로파간다와 함께 여운형·박헌영·허헌·김원봉 등을 의장단으로 하는 민주주의민족전선을 중심으로 결집함으로써 양 진영의 암투와 대결은 매우 날카롭게 전개됐다.

    더구나 미소공위가 진행되는 과정에 소련측이 ‘반탁운동을 전개한 단체나 개인은 공동위원회의 협의대상으로 초청할 수 없다’고 거절함으로써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로 소련과의 협력적 우호관계를 최대한 활용해 한반도가 적대진영이 되는 것을 막고자 했던 미국은 새로운 정치전략을 강구하게 됐다.

    동시에 이미 좌우합작 경험이 있는 민족지도자들은 임시정부 수립을 고대하며 벌써부터 좌우 양 진영의 합작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다. 김규식과 여운형은 3·1운동 이전에 신한청년당 때부터 동지로, 1922년 2월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서 둘 다 한국대표로 활약했다.

    여운형은 건국동맹과 건준을 통해 이미 좌파인사들과 협력한 경험이 있었고, 민족혁명당 주석을 지낸 김규식은 좌파를 대표해 충칭 임시정부의 부주석으로 활동한 바 있었다. 여운형은 제1차 미소공위 결렬 직후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좌우합작을 구상하고 평소에 친분이 있던 김규식과 협의했으며, 미군정의 버치(Leonard Bertsch)에게 자신의 견해를 설명해 동조를 얻는 데 성공했고, 버치가 다시 하지를 설복해 결국 미군정이 좌우합작운동을 공식 지지하도록 했다.

    미군정의 지지

    안재홍도 이미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의 합작품인 신간회(新幹會)를 적극 주도한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광복 직후 건준을 ‘제2의 신간회’로 발전시키려고 애썼을 뿐 아니라, 그것이 실패한 이후에도 민공협동(民共協同) 전략에 따라 좌우합작이 반드시 성사돼야 독립된 통일국가 건설을 위한 민족투쟁을 효과적으로 전개할 수 있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한 바 있다.

    좌측 대표 허헌은 일제 강점기 ‘민족변호사’로서 어려운 사람을 많이 변호해주어 공산주의자들을 포함해 폭넓은 인간관계를 유지했는데 좌익 지도자로 활동하던 광복 직후에도 이 같은 인간관계는 지속됐다. 미소공위가 결렬된 이후에도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에 따르는 것만이 분단극복의 ‘유일한 해결책’으로 믿고 행동했다. 그는 나중에 공산당과 행동을 함께하고 월북(越北)했지만, 그때만 해도 스스로 이념을 표방한 적이 없다. 다만 주변에 공산주의자가 많이 모여든 탓에 ‘타의로’ 좌익이 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요컨대 좌우합작운동은 8·15광복 직후의 전환기적 상황에서 분단극복과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대의에 충실하고자 했던 자주적 민족지도자들이 비판적 대안으로 제기한 것이었다. 또 미국은 국제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협상 파트너인 소련과의 협조를 극대화하기 위해 자기중심성을 극복하지 못한 극우 및 극좌인사를 협의대상에서 제외하고 한반도의 장래를 논의하기를 원했기에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껏 좌우합작에 참여한 지도자들이 ‘중간파’라는 경멸적인 언사로 규정되고 ‘회색분자’ 또는 ‘기회주의자’로 매도된 것은 그간의 한국현대사가 이념적 경직성을 동반한 냉전적 권력투쟁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또 어떤 경우에는 좌우합작위원회가 ‘미국 통치자들의 괴뢰집단’으로까지 간주됐는데, 이 또한 극단적인 이데올로기적 파워게임에서 비롯된 ‘좌우합작 죽이기 담론전략’의 소산인 셈이다.

    광복 직후는 일종의 전환기로 예측할 수 없는 정치·사회적 변화의 가능성이 충만한 때였다. 국민은 잘 알지도 못하는 이데올로기의 홍수에 휩쓸려 우왕좌왕했고, 급변하는 국제정세는 그들로 하여금 당대 정치지도자들에게 희망과 기대를 걸게 만들었다. 이승만과 그를 따르던 정치세력은 미국 중심의 세계관과 일본군국주의의 천황숭배와 관련된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철모르는 대중’을 동원해 극우세력의 기득권 확보·유지에 유리한 정치상황을 조성했다. 반면 박헌영과 남로당 계열 공산주의자들은 레닌주의와 스탈린의 지도노선에 따라 설익은 급진 계급혁명을 시도했다.

    이러한 혼란상황에서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한 정치지도자들은 무엇보다 민족 차원의 모순, 즉 민족분단과 미소가 점령하는 형태의 불완전한 민족독립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하고 민족 내부의 정치적 단결과 ‘어설픈 국제주의’ 혹은 외세 추종 방지를 위해 노력했다. 동시에 그들은 끈질긴 협상과 타협을 통해 ‘합작 7원칙’을 성사시켜 점진적 사회·정치개혁의 길을 터놓음으로써 전환기적 혼란 속에서도 건강한 민족단결과 민주주의적 협상을 지향하는 정치 리더십을 보여줬다.

    좌우합작에 참여한 지도자들은 이른바 중도좌파와 중도우파 인사들로 서양의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운 정치노선을 표방했다. 이는 당시 한국 국민의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했다는 미군정청 여론국의 설문조사 결과에 나타난 일반 여론의 지향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예컨대 우파 합작위원 중 한 사람이던 안재홍은 친일·반동적 극우세력과 공산독재정치를 지향하는 극좌세력의 득세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좌우합작이 성공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국민 70%가 사회주의 지지

    다음으로 좌우합작위원회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처리하기 위해 입법기관이 조례를 만들어 합리적으로 심리·결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천명했다. 이는 전(前) 시대의 민족적 모순을 자의적으로 척결하지 않고 제도와 법에 따라 민주적 절차를 통해 청산함으로써 새로 건립될 독립국가의 도덕성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함을 확인한 의미 있는 이니셔티브였다.

    또 좌우합작위원회는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통한 민생문제의 해결은 물론 무조건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매상(遞減買上) 등 다양한 방법으로 토지를 매수해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토지개혁도 실시할 것을 천명했다. 반민족행위자 처리와 토지개혁에 관한 이 같은 제안은 당시의 극단주의 정치세력이 요구하는 바를 점진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에서 고려해 최대한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적어도 당시의 날카로운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완화하고 통일 임시정부 수립에 유리한 상황을 이끌어낼 만한 정책대안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좌우합작위원회는 7원칙 외에 입법기구 설치안도 제시했는데, 이것은 위에서 예시한 제안들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현실적인 고려에서 비롯됐다. 미군사령관 하지 장군은 이에 대해 “조선민족의 완전통일과 독립과정상의 진일보한 걸음”이라고 평가했다. 또 당시 내한한 미국 대통령특사도 “민주주의 정부가 조선에 수립되는 데 일보 진전을 보인 것”이라고 말하고 “좌우합작의 성공으로 통일정부가 들어선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극동의 복리를 의미하는 것”이라고까지 평가했다.

    좌우합작위원회는 또 입법의원의 개원을 앞두고 약 1개월 동안 한미공동회담을 개최해 ‘악질 고등계 형사들’ 철수, ‘적극적인 친일파’와 ‘살기 위해 부득이 친일한 경우’ 구분, 통역관들의 악폐 시정, 폭력 행사하는 공산주의자들의 파괴활동 단속 등을 요구해 하지사령관으로부터 최대한 개선하고 대책을 강구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또 10월 영남대폭동의 책임을 물어 조병옥 경무부장을 파면하고 장택상 수도청장을 경질할 것을 요구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다만 1947년 5월까지 ‘악질 경찰관’ 56명이 파면됐다.

    그러나 이러한 좌우합작위원회의 점진적 개혁노선에 대해 공산당은 “반동세력을 조장하려는 의도를 역력히 풍김은 물론 통일의 길을 열어주는 듯한 거짓 환상에 젖게 한다”고 공격했다. 또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전국청년동맹은 “최근 좌우합작위원회의 동향은 남북통일이라는 중대과업을 몰각하고 막연히 남조선의 좌우합동을 공작함으로써 극렬 파괴분자의 책략을 엄호·조장한다”고 비판하고 동 위원회 참여를 중단했다.

    좌우합작위원회는 정치적으로 성공하지 못하고 민족분단의 고정화를 방지하지 못한 채 소멸되고 말았다. 하지만 동서 이데올로기의 냉전이라는 비정상적 구조에서 민족 차원의 모순부터 해결한 다음 점진적으로 제반 국내 문제를 의회주의 관점에서 해결코자 했던 노력은 이념적 극단에 치우친 권력투쟁적인 정치문화의 극복이 요구되는 오늘날의 상황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신탁통치’를 민족통일 지름길로 여겨

    흔히 민족주의라고 하면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인 정치적 교조(敎條)로 간주되기 일쑤다. 특히 한국민족주의의 경우에는 그러한 편견과 함께 아직까지 저항이데올로기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광복 이후 3년간의 정치사에서 현대 한국민족주의의 중심 과제인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진력했다고 여겨지는 좌우합작위원회와 그것을 이끈 주요 정치지도자들에게 이러한 평가는 부당한 면이 있다. 대내적 점진 개혁노선과 더불어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를 현실적으로 파악한 그들은 민족주의적인 목표달성을 위해 최대한 실용주의적인 차원에서 미국의 정책에 부응하고 이를 합리적으로 활용하려 했다.

    미국은 당초 지원하고자 했던 이승만과 김구측의 지나친 자기중심성으로 남한 정치세력 통합이 무산되고 그들이 미소공위 참여를 거부하자, 남한의 ‘공산화 방지’라는 전략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남한 내 정치적 파트너를 좌우합작 방식을 통해 구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미국은 여운형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합작파’ 인사들을 선호했고, 합작기운이 무르익자 여운형측이 박헌영측과 결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공산당 활동을 탄압했다.

    김규식은 이미 독립운동기를 통해 민족독립운동을 위한 연합전선 구축에 수다한 경험을 한 바 있고, 영문 잡지에 기고한 ‘아시아의 혁명운동과 제국주의’라는 글을 통해 통일전선의 실천방법을 논하고 한국의 독립이라는 민족 차원의 과제를 달성하려면 현실적으로 소련과 중국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바도 있다.

    분단 극복과 점진 개혁 내세운 좌우합작운동의 좌절

    일제 강점기 최대 항일운동 단체였던 신간회 창립 79주년 기념식. 해방정국에서 벌어진 좌우합작운동은 신간회와 사상적으로 맥이 닿아 있다.

    광복 이후 임시정부 부주석으로 귀국한 그는 김구와 함께 우익 정치세력의 지도자로 부각됐다. 신탁통치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임시정부의 노선에 따라 적극 반대했다. 그러나 곧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받아들여 통일임시정부 수립에 주력하고 신탁통치가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하는 길이라고 판단해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1945년 12월, 귀국한 지 닷새 만에 열린 환영회에서 “카이로회담에서 ‘적당한 시기에 조선독립을 준다’고 한 ‘적당한 시기’란 우리가 늦출 수도 있는 것이고, 앞당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 손에 달렸단 말입니다. 우리가 바로만 하면 미군과 소련군이 내일이라도 없어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민족 내부의 단결이 관건임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 언론과 신간회 활동을 통해 국내 민족운동에 적극 가담했을 뿐 아니라 신민족주의적 역사관에 입각한 역사연구에 진력했던 안재홍은 ‘계급투쟁’보다 ‘민족투쟁’을 통해 민족의 자주적이고 통일된 정부 수립이 긴요한 상태임을 전제로 다음 세 가지 관점에서 좌우합작을 지지했다.

    균형외교로 유리한 국제정세 조성

    첫째, 좌우합작과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는 38선을 가운데로 미국의 자본적 민주주의와 소련의 공산주의가 대치돼 민족을 갈라놓은 “민족위기 타개의 일로(一路)”다. 둘째로 좌우합작에 따른 통일민족국가와 관련된 정치적 이니셔티브는 극좌세력뿐 아니라 친일·극우세력의 배제를 통한 대중공생(大衆共生)·만민공화(萬民共和)의 진보적 민족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는 것이다. 셋째, 신탁통치 실시 여부는 미소공동위가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에 따라 수립될 임시 한국 민주정부와 협의해 결정할 것이므로 일단 좌우합작을 성사시켜 반탁(反託)의 민족적 총의를 관철할 수 있다.

    또한 안재홍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동북아 국제정세는 제국주의 시대이던 20세기 초와 달리 미국과 소련이 파시스트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해 싸워 이긴 이후 한반도에서 서로 군사력을 동원해 대립·갈등할 가능성보다는 일련의 외교 경쟁을 통해 자국의 이익을 도모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광복이 비록 ‘떨어진 홍시’ 줍듯 아무런 자체 노력 없이 얻은 것이지만, 이제부터는 국내적인 정치 단합을 극대화하고 미소를 포함한 연합국들에 대해 편향되지 않은 외교정책, 이른바 균형 외교노선을 적극 실천하고 이를 통해 조성될 유리한 국제조건을 최대한 활용해 통일독립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좌우합작위원회의 좌측 대표이던 여운형도 1946년 3월에 열린 미소공동위원회가 이른바 ‘협의대상’ 문제로 결렬되자, 이에 대한 국내의 정치적 대응책으로 좌우합작을 추진했다. 당시 정세에서 미군정과 대립해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했던 것이다. 또한 어떻게든 좌우익의 첨예한 대립을 완화해 국내정치의 안정을 이룩해야 할 처지에 있던 미군정도 좌우합작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이때 여운형은 광복 직후 한국은 새로운 사회로 비약하기 위한 모든 필요조건, 특히 경제적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그는 또 이러한 상황에서 ‘진보적인 계급의식의 한 경향’이 존재하는 것을 시인하는 것처럼 민족의식 계열의 한 경향이 있는 것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통일자주독립 민주국가 건설을 위한 좌우합작에 참여한 배경에는 이러한 합리적인 현실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좌우합작을 반대하거나 이 활동에 소극적이던 정치인들은 대부분 우리 민족이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식민 지배를 당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투쟁해온 점, 그리고 그 과정에서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이 반일(反日) 또는 민족독립을 위해 공동보조를 취하거나 민족주의적 공감대를 지니고 있었다는 역사적 경험을 가볍게 여겼다. 그럼으로써 레닌주의나 일본 극우세력, 미국적 세계관의 소산인 반공주의를 ‘몰아적(沒我的)으로 추수하는’ 사상적 비주체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아울러 ‘찬탁’ 또는 ‘반탁’이라는 극히 단순화된 정략적 프로파간다를 널리 유포함으로써 당시 한민족 통일의 유일한 국제 방식이던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이나 미소공동위의 효율성을 크게 떨어뜨리는 데 공헌했을 뿐이다.

    이상에서 필자는 광복 직후의 좌우합작운동을 재평가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 그것이 추진된 국내외적 배경과 주요 참여인사들의 시각을, 분단극복을 위한 자주적 이니셔티브, 점진적인 개혁리더십의 한 유형, 그리고 한국민족주의의 합리적 대외접근이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 정리했다. 이러한 시도는 물론 논자의 관점과 역사적 사실에 따라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날 냉전체제 붕괴로 동·서독과 남·북 예멘이 한 나라로 통일되고, 특히 2000년 6·15정상회담 이후 남북의 평화공존과 민족통일을 향한 여러 움직임이 역동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한반도 상황을 고려할 때 해방정국에서 시도된 좌우합작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재평가할 수 있다.

    일관된 ‘민족우선’ 원칙

    첫째, 좌우합작운동은 미국의 반공산화정책과 공산정권 수립을 반대한 민족지도자들의 전략적 선택이 일치한 데서 비롯된 정치적 이니셔티브였다. 즉 좌우합작에 참여한 지도자들은 냉전적 극우파가 매도하듯이 미국의 일방적인 조작에 놀아났던 것도 아니고, 극좌파의 주장대로 미국의 민족분열 책동의 희생물도 아니었다.

    미국은 당초 남한 내 보수주의자들을 묶어 임시정부를 구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이 정치적 편협성을 드러내고 한반도 문제 해결의 국제적 공식이던 모스크바3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열린 미소공위 참여를 거부하자 한반도 비공산화라는 기존 전략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대안으로 온건한 민족지도세력을 새로운 정치 파트너로 선택했다. 그리고 식민지시대를 겪으면서 이미 좌우합작을 경험했거나 인격적으로 존경받는 가운데 좌우를 넘나들며 활동한 일부 민족지도자들은 이 같은 미국의 정책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했다. 또한 이승만이나 김구의 정치 리더십을 대체해 과도기 한국정치를 적극 책임지고자 했다.

    둘째, 좌우합작에 참여한 인사들은 결코 기회주의적인 ‘중간파’가 아니라 오히려 식민지시대부터 일관된 ‘민족우선’ 원칙과 행동을 보인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일제 강점기에 몸을 사리며 입신영달과 부귀영화를 추구하지 않고, 국내에서든 국외에서든 국제정세에 밝은 당대의 대표적인 지식인 엘리트로서 민족의 식민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던 지도자들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우둔할 정도로 민족대의를 추구한 원칙주의자들이었고, 정치적 조직력이 충분치 못한, 그래서 오히려 비정치적인 성격이 더 강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과도기 해방정국에서 정치적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

    셋째, 좌우합작운동이 형식상 좌우 양 진영에서 대표 5명씩 동일 비율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추진됐지만, 실질적으로는 민족진영이 앞서 이끌고 공산진영이 2선에서 협동하는, 이른바 ‘민공협동’ 방식으로 추진됐다는 점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는 1927년에 추진된 신간회운동과 유사한 방식이었다. 즉 당시 미군정은 과격급진세력으로 박헌영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자의 세력화를 경계하면서 좌파인사라도 박헌영파와는 일정하게 구별되는 진보세력을 좌우합작에 참여시켜 비공산주의적 임시정부 수립을 기도했던 것이다.

    물론 우측 합작위원들은 이러한 미국의 태도와 전략을 충분히 인지했다. 민족진영이 우위를 차지하는 가운데 좌파와의 합작에 성공하면 한반도에 대한 영토적 야심이 없는 미국과 연계되는 동시에 소련에 우호적이지 않은 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던 것. 즉 해방정국의 좌우합작운동은 그 지향과 방법에서 ‘제2의’ 혹은 ‘제3의 신간회운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넷째, 현재 우리가,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그에 따른 시장경제구조가 전지구적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남북한이 문화적, 역사적 동질성을 갖고 있다는 점과 남북공존 및 평화적 통일의 당위성을 부정하지 않는 한, 앞으로 전개될 남북협상과 남북교류는 일제 강점기의 신간회운동 및 해방정국의 좌우합작운동과 역사적 맥을 공유하는 한국민족주의의 건강한 전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분단 극복과 점진 개혁 내세운 좌우합작운동의 좌절
    鄭允在
    ● 1953년 충남 출생
    ●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동 대학 석사(정치학), 미국 하와이대 박사(정치학)
    ● 現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정치경제연구실 교수, 국제협력처장
    ● 저서 : ‘다사리 국가론’ ‘유교 리더십과 한국정치’ ‘장면, 윤보선, 박정희’ ‘정치리더십과 한국민주주의’


    따라서 앞으로 대한민국에 어떠한 정권이 들어서든, 대한민국과 북한의 좌우합작적인 성과로 볼 수 있는 ‘6·15남북공동성명’의 정신과 원칙을 인정하는 바탕에서 대북정책의 성격과 내용을 조절하는 것이 역사의식에 따른 지혜로운 선택일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대한민국은 건강한 한국민족주의의 확실한 실천 주체가 될 수 있으며, 동시에 인류역사의 근대적 산물인 좌우이념의 폭력적 대립을 비폭력적으로 마무리하는 시대적 소명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