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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획정에서 남북정상회담까지⑨

분단 극복과 점진 개혁 내세운 좌우합작운동의 좌절

  • 정윤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정치학 tasari@aks.ac.kr

분단 극복과 점진 개혁 내세운 좌우합작운동의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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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미소공위가 진행되는 과정에 소련측이 ‘반탁운동을 전개한 단체나 개인은 공동위원회의 협의대상으로 초청할 수 없다’고 거절함으로써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로 소련과의 협력적 우호관계를 최대한 활용해 한반도가 적대진영이 되는 것을 막고자 했던 미국은 새로운 정치전략을 강구하게 됐다.

동시에 이미 좌우합작 경험이 있는 민족지도자들은 임시정부 수립을 고대하며 벌써부터 좌우 양 진영의 합작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다. 김규식과 여운형은 3·1운동 이전에 신한청년당 때부터 동지로, 1922년 2월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서 둘 다 한국대표로 활약했다.

여운형은 건국동맹과 건준을 통해 이미 좌파인사들과 협력한 경험이 있었고, 민족혁명당 주석을 지낸 김규식은 좌파를 대표해 충칭 임시정부의 부주석으로 활동한 바 있었다. 여운형은 제1차 미소공위 결렬 직후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좌우합작을 구상하고 평소에 친분이 있던 김규식과 협의했으며, 미군정의 버치(Leonard Bertsch)에게 자신의 견해를 설명해 동조를 얻는 데 성공했고, 버치가 다시 하지를 설복해 결국 미군정이 좌우합작운동을 공식 지지하도록 했다.

미군정의 지지

안재홍도 이미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의 합작품인 신간회(新幹會)를 적극 주도한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광복 직후 건준을 ‘제2의 신간회’로 발전시키려고 애썼을 뿐 아니라, 그것이 실패한 이후에도 민공협동(民共協同) 전략에 따라 좌우합작이 반드시 성사돼야 독립된 통일국가 건설을 위한 민족투쟁을 효과적으로 전개할 수 있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한 바 있다.



좌측 대표 허헌은 일제 강점기 ‘민족변호사’로서 어려운 사람을 많이 변호해주어 공산주의자들을 포함해 폭넓은 인간관계를 유지했는데 좌익 지도자로 활동하던 광복 직후에도 이 같은 인간관계는 지속됐다. 미소공위가 결렬된 이후에도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에 따르는 것만이 분단극복의 ‘유일한 해결책’으로 믿고 행동했다. 그는 나중에 공산당과 행동을 함께하고 월북(越北)했지만, 그때만 해도 스스로 이념을 표방한 적이 없다. 다만 주변에 공산주의자가 많이 모여든 탓에 ‘타의로’ 좌익이 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요컨대 좌우합작운동은 8·15광복 직후의 전환기적 상황에서 분단극복과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대의에 충실하고자 했던 자주적 민족지도자들이 비판적 대안으로 제기한 것이었다. 또 미국은 국제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협상 파트너인 소련과의 협조를 극대화하기 위해 자기중심성을 극복하지 못한 극우 및 극좌인사를 협의대상에서 제외하고 한반도의 장래를 논의하기를 원했기에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껏 좌우합작에 참여한 지도자들이 ‘중간파’라는 경멸적인 언사로 규정되고 ‘회색분자’ 또는 ‘기회주의자’로 매도된 것은 그간의 한국현대사가 이념적 경직성을 동반한 냉전적 권력투쟁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또 어떤 경우에는 좌우합작위원회가 ‘미국 통치자들의 괴뢰집단’으로까지 간주됐는데, 이 또한 극단적인 이데올로기적 파워게임에서 비롯된 ‘좌우합작 죽이기 담론전략’의 소산인 셈이다.

광복 직후는 일종의 전환기로 예측할 수 없는 정치·사회적 변화의 가능성이 충만한 때였다. 국민은 잘 알지도 못하는 이데올로기의 홍수에 휩쓸려 우왕좌왕했고, 급변하는 국제정세는 그들로 하여금 당대 정치지도자들에게 희망과 기대를 걸게 만들었다. 이승만과 그를 따르던 정치세력은 미국 중심의 세계관과 일본군국주의의 천황숭배와 관련된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철모르는 대중’을 동원해 극우세력의 기득권 확보·유지에 유리한 정치상황을 조성했다. 반면 박헌영과 남로당 계열 공산주의자들은 레닌주의와 스탈린의 지도노선에 따라 설익은 급진 계급혁명을 시도했다.

이러한 혼란상황에서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한 정치지도자들은 무엇보다 민족 차원의 모순, 즉 민족분단과 미소가 점령하는 형태의 불완전한 민족독립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하고 민족 내부의 정치적 단결과 ‘어설픈 국제주의’ 혹은 외세 추종 방지를 위해 노력했다. 동시에 그들은 끈질긴 협상과 타협을 통해 ‘합작 7원칙’을 성사시켜 점진적 사회·정치개혁의 길을 터놓음으로써 전환기적 혼란 속에서도 건강한 민족단결과 민주주의적 협상을 지향하는 정치 리더십을 보여줬다.

좌우합작에 참여한 지도자들은 이른바 중도좌파와 중도우파 인사들로 서양의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운 정치노선을 표방했다. 이는 당시 한국 국민의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했다는 미군정청 여론국의 설문조사 결과에 나타난 일반 여론의 지향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예컨대 우파 합작위원 중 한 사람이던 안재홍은 친일·반동적 극우세력과 공산독재정치를 지향하는 극좌세력의 득세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좌우합작이 성공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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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정치학 tasari@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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