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6월호

세인트앤드루스의 추억

  • 소동기 법무법인 보나 대표변호사

    입력2006-06-08 15: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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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인트앤드루스의 추억

    영국 세인트앤드루스의 골프링크스(왼쪽)와 필자(오른쪽).

    2001년 9월21일.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다. 9·11테러로 모두들 비행기 타기를 주저하던 바로 그때, 나는 보름간의 골프여행을 위해 혼자 서울을 떠났다.

    비행기가 중국 상공을 날아가고 있을 때부터 나는 창밖 구경을 즐겼다. 스튜어디스가 말을 거는 것마저 귀찮게 여겨질 정도였다. 발 아래 펼쳐지는 여러 가지 모양의 땅을 보면서 ‘사람이란 어쩔 수 없이 땅의 생김새에 따라 사는 모습이 달라지는 모양’이라는 생각에 잠겼다.

    어느새 영국에 이른 비행기는 런던 근처를 선회했다. 히드로 공항이 붐벼서 착륙이 예정보다 15분쯤 늦어진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스튜어디스는 혹시 에든버러행 연결편을 타지 못할까봐 염려해줬지만, 나는 그렇게 되면 기대하지 않던 또 다른 재미있는 일이 펼쳐지리라 생각하고는 조바심내지 않기로 마음먹은 터였다.

    다행히 연결편을 놓치지 않은 나는 한 시간 후 에든버러에 내렸다. 공항 근처에서 서둘러 차를 한 대 빌렸다. 오른쪽에 있는 운전석에 앉아 왼쪽 차선을 따라 운행하자니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밖은 이미 어두웠다. ‘서둘러 가다가 사고라도 나면 여행은 여지없이 엉망이 되겠군.’ 게다가 배까지 고팠던지라 일단 에든버러 시내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새벽에 출발하기로 결심했다.

    10여 분을 달리자 낯익은 호텔체인 간판이 눈에 띈다. 하룻밤 객실료가 130파운드란다. 원래 지독하게 비싸거나 아니면 바가지였거나. 어쨌든 일단 체크인을 한 뒤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침대 위에 잠깐 엎어졌을 뿐인데 그만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정신을 차려 시계를 보니 고작 20분이 지났을 따름이었다. 다시 잠을 청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뒤척거렸지만 방법이 없어 결국 체크아웃하기로 마음먹었다. 짐을 챙겨 내려가자 호텔 직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래도 방값은 다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직원의 표정이 어찌나 얄밉던지….



    시동을 걸어놓고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세인트앤드루스를 향해 출발했다. 스코틀랜드의 옛 길에서 한참을 헤맨 뒤 새벽 4시40분에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름하여 ‘골프의 발상지’, ‘골프의 성지’라는 세인트앤드루스의 골프링크스(Golf Links)에 다다른 것이다.

    잔디 뿌리가 400년이 됐다는, 이름도 유명한 올드코스(Old Course)의 호텔 쪽으로 갔다. 방값이 하루에 269파운드란다. 차를 돌려 주빌리코스의 클럽하우스 주차장으로 왔다. 시계를 보니 5시가 겨우 지났다. 잠시 후 차 한 대가 도착하더니 덩치 큰 사내가 다가온다.

    인사를 건네자마자 “올드코스에서 골프를 하고 싶어서 아무런 예약 없이 서울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하면 플레이를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은 하지 않고 서울이 어디냐고 되물었다. 나는 2002년 월드컵을 개최할 도시로 대한민국의 수도라고 설명해줬다. 그의 표정에는 깜짝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날이 밝거든 스타트하우스에 가서 대기자 명단에 등록을 하고 기다리세요. 조인이 되면 스타터가 이름을 부를 겁니다. 당신이 이렇게 이른 시간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을 보니, 올드코스에서의 플레이는 물론 원하는 모든 소망을 다 이룰 수 있을 것 같군요.”

    올드코스에서 플레이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나서 나는 그전에 먼저 주빌리코스를 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 인생에서 단 한 번밖에 돌아볼 수 없을 올드코스인데, 스코어가 형편없어서야 되겠는가.

    조용히 차 안에서 주빌리코스의 개장시간을 기다렸다. 눈을 감고 언덕 너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올드코스와 그곳에서 라운드하는 내 모습을 그려보았다. 문득 10년도 훨씬 지난 옛일이 뇌리를 스쳤다.

    LA 공항에서 차를 빌려 샌프란시스코로 가던 도중에 페블비치(Pebble Beach)에서 라운드를 한 적이 있다. 그 무렵 나는 세계 100대 골프장을 다 돌아보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골프가 지닌 묘한 흡인력에 한창 매료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 시발점으로 세계 3대 골프코스 가운데 하나인 페블비치를 찾은 것이었다.

    그러나 페블비치에 도착하니 이미 날이 어두워진 후였다. 예약을 하지 않았으므로 다음날 날이 밝더라도 라운드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호텔에 체크인을 한 다음 혼자 골프장을 거닐었다. 때마침 휘영청 밝은 달이 발걸음을 이끌어주었다. 골프장에 가서 걷기만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후 1994년, 역시 세계 3대 코스 중 하나인 오거스타내셔널 골프장에 들렀을 때도 플레이를 하지 않은 채 18홀을 모두 걸어서 돌았다. 다행히 페블비치에서는 그 다음날 오전 라운드를 했지만, 오거스타에서는 아직까지 플레이를 해보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3대 코스의 마지막인 세인트앤드루스에 와 있는 것이었다.

    마침내 아침 7시40분! 나는 두 사람의 골퍼와 조인이 되었다. 구름이 잔뜩 끼어 있긴 했지만 비가 올 것 같진 않아 보였다. 바람도 없었다. 습기가 많아서인지 이슬이 내린 탓인지, 그린키퍼가 타고 갔을 듯한 카트의 바퀴자국이 러프에 나 있었다. 함께 라운드하게 된 톰이라는 친구가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네요. 이 무렵의 세인트앤드루스에서는 날씨가 좋은 날이 드물거든요. 남다른 복을 타고난 것임에 틀림없어요.”

    그렇게, 꿈에 그리던 라운드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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