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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의 ‘딥 인사이드’

3년 전 중국 동북공정의 실체 최초 폭로한 ‘신동아’의 현장 취재

광개토태왕비 앞에는 發福 비는 잔돈만 수북이…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3년 전 중국 동북공정의 실체 최초 폭로한 ‘신동아’의 현장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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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820여 m의 오녀산 정상에 오르면 뜻밖에도 남북으로 1000m, 동서로 300m쯤 되는 평지가 나온다. 풍수지리에서는 한 일(一)자로 된 산 정상을 가리켜 임금을 낳을 수 있는 ‘일자문성(一字文星)’의 명당으로 본다.

평지 정상에는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샘이 있는데, 현재 이 샘터에는 ‘천지(天池)’라는 이름의 자그마한 연못이 있다. 이곳에 이르려면 999개의 가파른 돌계단이나 하늘이 실처럼 보일 정도로 좁다고 하여 ‘일선천(一線天)’이라는 이름을 얻은 좁은 바위틈을 타고 올라야 한다. 군사적으로는 한마디로 난공불락의 요새이고 신선교를 믿는 사람들로서는 더없이 좋은 기도처인 곳이다.

더구나 다섯 선녀의 전설까지 있으니 이 산 정상에는 일찍이 중국식 신선교를 믿는 사람들이 만든 도관(道館·도교 사원)이 있었다. 중국 도교는 이 산을 10대 명산으로 꼽아왔다. 이곳에는 도교와 관련된 건물과 함께 2000여 년의 풍파를 견뎌온 오래된 성벽이 있다.

정상으로 올라오는 길목에 있는 이 성벽은 견치석을 이용해 촘촘히 쌓은 것이 특징이다. 성문이 있었던 곳은 성벽이 항아리처럼 안쪽으로 움푹 들어온 ‘옹성(甕城)’ 구조인데, 이는 고구려의 성문 형태로 많이 발견되는 양식이다. 천지는 성 안의 우물 구실을 한다. 때문에 사람들은 오녀산성이 고구려의 산성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오녀산성 = 졸본성’에 꿰어 맞추는 중국



이 성벽 때문에 한국과 중국 일본 학자들은 오녀산성이 졸본에 도읍을 정한 고구려와 관련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과연 고구려가 이곳을 첫 도읍지로 삼았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고 있다. 고구려를 포함한 한민족은 전통적으로 두 개의 성을 쌓았다. 하나는 평상시 생활공간인 평지에 쌓는 ‘평원성(平原城)’이고, 다른 하나는 유사시 들어가 항전하는 ‘산성(山城)’이다.

이 원칙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한양에는 평시의 정치·생활 무대인 도성(都城)을 짓고, 유사시를 대비해서는 임금과 주민이 대피해 항전하는 남한산성과 북한산성 등을 지었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오녀산성을 적군이 쳐들어왔을 때 올라가 항전하는 산성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중국과 과거 일본 학자들은 이 성을 고구려의 왕실이 있던 도성으로 보았다.

중국이 오랫동안 만주 일대의 고구려 유적 공개를 거부해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2004년 고구려 유적을 유네스코에 등록하고 난 다음부터는 적극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유네스코에 문화유산으로 등록하는 조건 중 하나가 유적을 발굴한 다음에는 일반인의 접근성을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구려 유적을 유네스코에 등록함으로써 중국은 만주에 있던 고구려는 중국 역사의 일부라는 것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셈이 되었다. 그리고 이곳을 공개해 한국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1석2조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 지역에 있던 고구려가 중국사의 일부이면 이곳에서 살아온 중국 국적의 조선족도 중국인이 되어야 한다. 중국은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털 뽑아 부채질까지 하고 있다.

한국인을 끌어들여 돈을 벌겠다는 중국의 의욕이 새로운 역사 왜곡을 낳고 있다. 즉 오녀산성 안에서 발굴된 모든 건물터를 고구려의 궁전터로 해석하는 오류를 낳은 것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건물터는 왕궁 유적으로 보기엔 턱없이 작다. 왕궁터가 아니라 도교를 믿는 사람들이 기도하기 위해 지은 건물터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한데 중국은 일일이 고구려 왕실의 건물터라는 설명을 붙여놓았다.

이 산성이 유사시 대피하는 곳이었다면 고구려는 이곳에 왕궁을 지을 이유가 없다. 왕궁은 많은 사람이 거주하는 평지에 건설했을 터인데 유감스럽게도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오녀산성 바로 곁에는 일제가 혼강을 막은 댐으로 생겨난 저수지 환용호(桓龍湖)가 있다. 오녀산 주위엔 고구려 시대의 무덤이 즐비한데, 환용호에 담수할 때 많은 무덤이 수몰됐다고 한다.

환용호에서는 유람선을 타고 나가 오녀산성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광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어쩌면 평지에 지었던 고구려 최초의 도성은 환용호 아래로 가라앉았는지도 모른다.

중국은 목적을 정해놓고 유적을 발굴했다. 오녀산성이 고구려의 도성이라는 전제 아래 이곳을 발굴했기에 오녀산에서 나온 건물터 대부분에 고구려 왕궁터라는 설명을 붙여놓았다. 이러한 무리수는 도처에서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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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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