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9월호

KAL 858기 폭파사건, 남은 의혹과 진실

“라디오 속 C-4 폭탄, 흑백 X레이에는 고추장으로 보였다”

  • 조인직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cig1999@donga.com

    입력2006-09-08 1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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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현희 출입국 기록 3국 통해 확인, ‘틀림없는 북한 공작원’
    • 안기부, ‘북한 공작원 활동’ 첩보는 확보…테러 사전 인지설은 거짓
    • 김현희 음독 목격한 경비원 “마유미 몸 굳어지면서 싸움은 순식간에 끝났다”
    • 기체 잔해 폐기한 것은 ‘증거인멸’이 아니라 ‘무신경’ 때문
    • 김현희는 10년째 ‘완전 자연인’…자녀들 알까봐 극도로 예민
    KAL 858기 폭파사건, 남은 의혹과 진실
    “오늘 영어학원에서 선생님이 김현희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시는데…뭐, 라디오로 폭탄을 만들었다는데 맞나요? 그리고 북한 사람이에요? 지금 살아 있나요?”

    “우리나라 비행기를 폭파해서 많은 사람을 죽였다네요. 예전에 마유미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했고…. 그리고 북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정확한 게 아니라고 하는군요.”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지식검색’ 코너에 올라 있는 대화이다. ‘김현희’를 치면 첫 화면에서 이런 글들을 접하게 된다. KAL 858기 폭파사건이 일어난 것은 1987년 11월29일. 지금 대학 1학년생에게만 해도 막 태어났을 때의 일이니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대화 내용이 황당하다.

    그럴 듯해 보이는 팩트(fact)와 의견들이 섞여 ‘진실’로 둔갑할 여지가 많은 인터넷 공간에서 KAL기 폭파사건은 명백한 실체적 진실조차 ‘의문’과 ‘의혹’으로 뒤덮인 지 오래다. 2, 3년 전부터 유족과 시민단체 등을 중심으로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다시 불거지면서 다양한 의문과 의혹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8월1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가 내놓은 ‘KAL 858기 폭파사건 중간발표’ 자료는 눈여겨볼 만하다. KAL 858기 가족회 등 유족단체가 제기한 의혹은 처음엔 30여 가지에 불과했으나, 최근 수년간 시민단체와 각종 매체 등에서 제기한 의혹을 합치면 무려 350가지에 달했다. 이 중에는 1987년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대통령선거를 겨냥해 KAL기를 일부러 폭발시켰다는, 소설 같은 음모론적 의혹도 들어 있다. 진실위는 이에 대해서도 광범위한 조사가 이뤄졌다고 밝혔다.



    언론은 국정원의 이날 중간발표를 큰 기사로 다루지 않았다.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만한 새로운 사실도 없을뿐더러, 마침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이에 따른 외교적 여진이 워낙 심각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언론은 ‘이라크 바그다드 공항을 출발, 서울로 향하던 KAL 858기가 북한 공작원 김현희, 김승일의 폭탄 테러에 의해 폭파돼 승객과 승무원 115명이 전원 사망한 사건’이라는 뼈대는 모두 사실로 드러났다고 보도했고, 진보 성향의 몇몇 매체는 “당시 정권이 KAL기 사건을 대선 국면에 이용한 것으로 조사됐다”는 부분 정도를 비중 있게 다뤘을 뿐이다.

    국정원 진실위의 자료를 중심으로, 그간 비교적 널리 알려지지 않은 세간의 의혹과 그에 대한 조사결과를 재구성해 본다.

    김현희·김승일, 북한인 맞나?

    1988년 1월15일 안기부의 수사발표문은 “김현희는 북한 외교부에 근무하던 김원석(58)의 1남2녀 중 장녀로 평양외국어대학 일어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0년 2월 공작원으로 선발됐다. 김원석은 1962~67년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 3등 서기관으로 근무한 사실이 있으며 소련주재 대사관에서도 근무했다. 현재(1988년)는 앙골라 주재 북한무역대표부 수산대표다”라고 돼 있다.

    진실위는 김원석이 김현희의 진술대로 쿠바 대사관에 근무한 것은 확인했다. 쿠바 외무성이 발행한 1962년 외교관 명단에 따르면 김원석이 주재관으로, 처 임명식과 함께 등재돼 있고, 1965년에는 공보담당 3등 서기관으로 기록돼 있었다.

    김현희의 출입국 기록도 확인됐다. 김현희와 김승일이 각각 김옥화, 김성락이라는 가명으로 북한 공무여권을 이용, 1987년 11월13일 소련 항공기편으로 모스크바에서 부다페스트로 입국한 사실이 러시아측을 통해 확인됐다. 또 5일 뒤 북한 현지 지도원이 운전하는 외교관 차량으로 오스트리아 국경을 통과, 베오그라드로 갔다는 김현희의 진술도 사실로 입증됐다. 오스트리아 당국에서 “해당 시점에 북한 대사관 소유 차량이 오스트리아에서 출국한 일이 있다”고 확인해준 것.

    1972년 11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절위원회 개최 당시 남측 장기영 대표에게 꽃을 전달한 북측 화동 가운데 한 명이 김현희라는 사실 역시 추가로 발굴된 사진을 통해 확인됐다.

    김원석이 앙골라 주재 북한 외교관으로 근무했다는 점과 평양 집 주소가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얻지 못했으나, 앞서의 증거만으로도 북한인으로 보기에는 충분하다는 게 진실위측 시각이다.

    김승일의 경우 북한 공작원이라는 정황이 한결 더 분명하다. 일본의 일부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는 김승일이 ‘남한 경상도 출신의 이수업이라는 인물’이라는 설을 내놓기도 했다. 사건 당시 안기부는 1989년부터 1년여 간 북한 대남 공작원들의 개인정보를 수집하는 이른바 ‘악어공작’을 통해 김승일이 황해도 재령 명신중학교와 평양 대동공업 전문학교를 졸업한 김일선이라고 결론지었다.

    그 근거로 안기부는 일본 과학경찰연구소가 보내온 소견을 제시했다. 이 연구소는 김승일과 김일선의 인물 사진이 외관상 안면 형태가 동일하고 얼굴 치수, 머리 높이 등의 비율도 일치한다는 소견을 제시했다.

    다만 올해 국정원 진실위의 의뢰를 받은 한국의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사진 해상도가 떨어진다는 등의 이유로 동일성 여부를 판단하기 곤란하다고 답신했다. 진실위는 국가기록원을 뒤져 ‘이수업’이라는 인물의 실존 가능성도 확인했으나 문서로 확인된 것은 없었다.

    유엔 안보리에선 무슨 일이?

    일부 민간단체는 1988년 2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한이 KAL 858기 사건을 ‘남한의 특수공작’이라고 강력하게 반박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사건에 대한 보고를 청취하고 북한 제재 등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유엔 안보리 긴급회의에서 박길연 당시 북한 유엔대사는 “남한 안기부 비밀요원이 폭발물을 설치하고 외교관 11명과 함께 아부다비 공항에 내렸다”고 주장했다.

    이들 민간단체는 당시 우리측 대표단이 북측의 이 같은 주장을 즉각적으로 논박하지 못했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더욱이 폭파사건 바로 다음날인 1987년 11월30일 서울에서 재외공관장 회의가 열린 사실을 거론하며 의혹을 키웠다.

    당시 박길연 북한 대사는 “대한항공기 사건과 북한은 아무 관계가 없다. 이 사건은 대선 승리를 노린 노태우 집단의 시나리오에 의해 만들어진 연극에 불과하다. K-87이라는 암호명으로 실행된 이 작전은 H-107이라는 안기부 비밀공작원이 비행기를 폭파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당시 남한 외무부 차관보인 박수길이 신병인도를 위해 바레인에 수백만달러를 줬다. 이 사건이 아무런 물적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용의자 김현희의 자백에만 의존하는 것도 문제”라고 덧붙였다.

    진실위는 이에 대해 ‘전혀 사실이 아니다’고 최종 판단했다. 외교부가 작성한 ‘공관장 귀국 예정 일정’ 자료와 출입국관리사무소를 통해 아부다비 경유 가능성이 있는 유럽, 아프리카 지역 공관장들의 입국 항공편과 국내 출입국 날짜 등을 확인한 결과 이들은 모두 11월29일 이전에 서울로 들어왔다. 강석재 당시 이라크 총영사 부부가 KAL 858기에 탑승했다가 사망한 것만 봐도 이 같은 의혹은 어불성설이라는 것.

    또 유엔 안보리에서 북한에 반박하지 못했다는 의혹도 일축했다. 당시 안보리 회의록에 따르면 한국의 박수길 유엔대표는 북한 박길연 대사의 주장에 대해 “반박할 가치도 없다(They did not deserve a reply)”라는 말을 서두에 꺼내면서 적극적으로 반박한 것으로 확인됐다.

    KAL 858기 폭파사건, 남은 의혹과 진실

    1989년 7월 KAL 858기 폭파사건 2차공판에 출석한 김현희. 현재는 국정원 진실위의 모든 추가조사 요청을 거부한 채 ‘자연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폭탄 테러 맞나?

    ‘폭탄 테러’라는 이 사건의 기본성격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 것은 폭파된 KAL 858기의 명확한 동체 잔해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폭탄이 과연 존재했느냐는 원천적인 의혹에서부터 폭탄이 어떻게 공항검색대를 통과할 수 있었는지 등을 놓고 설왕설래가 있었다.

    김현희와 김승일이 비행기에 폭탄을 장치해놓고 중간 기착지인 아부다비 공항에 내렸다는 안기부의 수사결과 발표에 대해서도 “중간 기착지에서도 출발지, 도착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승객들의 짐을 점검하는 항공사들의 관례를 고려할 때 그대로 믿기 힘들다”는 의견이 나왔다. “1983년 사할린에서 소련 미사일에 격추된 KAL 007기는 미사일에 맞고도 약 12분간 활공하면서 긴급 구조신호를 보냈는데, 아무리 폭탄 테러라 해도 구조신호 한 번 못 보내고 공중에서 실종될 수 있느냐”며 ‘상식적인 시각의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진실위는 몇 가지 신빙성 있는 증거를 바탕으로 이런 의혹을 일축하고 ‘폭탄 테러’라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바그다드 공항 검색원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공항 관리지침에 따라 배터리 4개를 분리 소지한 일본인에게서 배터리를 압수했으나, 이들 일본인이 ▲배터리를 직접 라디오에 넣어 작동 여부를 보여주는 등 필요한 물건이라는 점을 강조했고 ▲새로 실시한 X레이 검사에서도 이상을 발견하지 못해 연로자에 대한 예우 등을 고려해 배터리 휴대를 묵인한 것으로 밝혀졌다.

    진실위는 국방과학연구소 폭발물 전문가에게 의뢰한 결과 김현희가 사용했다는 파나소닉 RF-082 라디오에 폭탄의 뇌관과 플라스틱 폭약을 장치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4명의 전문 연구원은 “라디오 내부의 구조를 변경하지 않고 빈틈에 C(콤포지션)-4 폭약을 장치하면 C-4가 회로에 접촉해도 라디오 기능에 장애를 주지 않고, C-4를 라디오 기기판의 여백에 삽입해 여느 라디오 회로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으며 X레이 검색에도 적발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진실위는 추가 실험을 통해 C-4 폭탄이 요즘의 공항검색대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진실위의 의뢰를 받은 경찰 역시 “1987년 무렵에는 대부분의 국제공항에서 현재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흑백 X레이 검색장치를 사용했고, 이는 물체의 형태인식 정도만 가능했다. 총기류나 폭탄과 같이 일정한 형태를 지니지 않은 폭약은 X선 검색을 해보면 마치 고추장처럼 불특정한 형태로 인식되기 때문에 검색대를 충분히 통과할 수 있다”고 답했다.

    또한 진실위는 다수의 옛 대한항공 직원들을 면담해 “당시에는 중간 경유지에서 수하물 관리를 체계적으로 하지 않아 경유 승객이 자신의 짐을 선반에 올리거나 내리는 것이 가능했다”는 증언을 얻어냈다.

    납치일 경우엔 협상을 위한 접촉이 있을 것이라는 점, 공중폭파 때는 구조신호도 보낼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비행기가 분해된다는 전문가의 의견 등을 고려할 때 KAL 858기 실종을 ‘폭탄 테러에 의한 추락’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는 게 진실위의 결론이다. 다만 사건 당시 조사를 맡았던 안기부 수사과장은 폭약의 정확한 종류와 양은 전문가의 말을 참고해 눈대중과 실험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정부, 테러 정보 입수하고도 방치?

    일본의 ‘TV아사히’는 2004년 3월 ‘김현희 17년의 진실’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북한 공작원이 망명과 신분보장을 전제로 KAL 858기 테러 계획을 한국에 알려줬고, 한국은 이 테러를 대통령선거에 이용하기 위해 저지하지 않았다”는 내용을 방영했다.

    이 프로그램 방영 이후 불거진 논란이 한국 민간단체의 KAL 858기 진상규명 운동을 촉발한 측면도 있다.

    진실위는 이 프로그램 담당 PD였던 야스다 신이치로씨를 만났다. 야스다씨는 “제보자를 통해 판단한 결과 이 테러 계획을 당시 한국 정부에 알려준 이는 1988년 5월 서울로 귀순한 김병철(가명)로 추정됐다”고 답변했다. 그는 또 김병철이 중국에서 실종됐다는 ‘중앙일보’ 보도(2002년 2월15일자)를 언급하며 “실종된 게 아니라 살해된 것일 수도 있다고 본다”고 했다.

    진실위는 김병철에 관한 국정원 내부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고 그의 거취를 수소문했으나 그가 KAL기 사건과 무관한 인물인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김병철은 북한에서 외화벌이 사업에 종사하다 1988년 5월1일 귀순했으며, 이후 생활에 어려움을 겪다가 2001년 7월21일 아들의 소식을 알아보러 간다며 출국한 뒤 현재까지 귀국하지 않고 있다. KAL기 사건이 일어날 무렵엔 그가 노동당 직속 외화벌이 기관인 대양무역 사장으로 발탁되는 등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한국 정부와 위험한 ‘딜’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게 진실위의 판단.

    또한 김병철은 KAL기 사건이 발생한 뒤인 1988년에 귀순했으며, 그 동기는 북한에서의 ‘사업실적 허위보고’ ‘공금유용’인 것으로 밝혀졌다.

    김병철에 대한 안기부와 국정원의 관리는 극히 일반적인 수준이었으며, 출국 및 출국 후 언동 등에 대해 방임하다시피 한 것을 볼 때 KAL 858기 테러 계획을 제보할 만한 인물은 아니라고 진실위는 판단했다.

    안기부가 이 사건을 미리 알았으면서도 방치했다는 주장은 허위라는 사실이 어렵지 않게 확인됐다. 당시 안기부 쿠웨이트 파견관은 사건 발생 직후 “KAL 858기 사건이 나기 전부터 북한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모스크바, 빈, 프랑크푸르트, 베오그라드, 바그다드, 아부다비 등을 돌아다닌다는 첩보가 있긴 했다. KAL 858기 실종 소식을 듣고 상기(上記) 첩보내용과 관련 있다는 판단 아래 중간 경유 승객에 대한 추적을 시작했다”고 보고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와 관련, 제3국 정보기관의 테러에 대한 사전 인지 혹은 공작 여부도 도마에 올랐으나 모두 사실무근으로 조사됐다. “김현희 일행이 KAL 858기를 폭파하기 전 이미 제3국 정보기관에 신분이 노출돼 있던 헝가리 주재 북한외교관 한송삼의 집에 1주일가량 머물러 있었다”는 게 의혹의 핵심인데, 이는 1988년 2월 미국 의회 외교위원회 특별공청회에서 당시 국무부 테러대책차장이던 맥 마나웨이가 제기해 공론화했다.

    하지만 진실위는 제3국 정보기관이 김현희의 한송삼 집 체류 사실을 알게 된 시점은, 1988년 1월19일과 27일 안기부의 주선으로 해당국 정보기관이 김현희와 1, 2차 면담을 한 이후인 것으로 파악했다. 김현희는 제3국 정보기관과의 1차 면담에서 자신과 김승일을 외교관 차량에 태우고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로 간 ‘전 지도원’이라는 인물의 신상과 국경 통과 과정에 대해 진술했다. 2차 면담에서 제3국 정보기관은 김현희에게 18명의 북한 요원 사진을 열람시켰고, 김현희는 이 자리에서 자신이 만난 ‘전 지도원’을 지목했다. 제3국 정보기관은 ‘전 지도원’이 자신들이 파악하고 있던 북한 노동당 조사부 소속 부다페스트 거점장 한송삼이라는 것을 안기부에 확인해줬다.

    진실위는 제3국 정보기관이 한송삼의 신원 자체는 사건 이전부터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한송삼 주변에 대한 동향 및 첩보수집 행위가 있었을지 모른다고 봤다.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김현희 일행이 헝가리 체류 때부터 폭탄 테러를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김현희는 정말 음독자살을 기도했나?

    김현희가 정말로 음독자살을 기도했는지에 대해서도 말이 많았다. 청산가리를 극소량이라도 흡입했다면 살아날 수 없다는 얘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음독 후 김현희를 최초로 진찰한 바레인 의사가 일본 TV에서 “위 세척을 했지만 독극물은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고 말한 것도 이런 의혹을 더했다.

    그러나 1988년 1월6일 바레인 정부가 한국에 제공한 KAL 858기 수사보고서에는 김현희의 음독 및 저지, 응급처치, 병원후송 등의 상황이 상세히 담겨 있다.

    “아흘람은 나지마(이상 현지 공항 경비원 이름)에게 담뱃갑을 검사해보자고 제의했고, 마유미로부터 담뱃갑을 빼앗아 담배 한 개비를 부러뜨렸다. 그 순간 마유미가 벌떡 일어나더니 아흘람에게서 부러진 담배 조각(필터 같았음)을 오른손으로 낚아챘다. 그러고는 뒤로 넘어지면서 입에 오른손을 넣었다. … 여러 명의 경호원은 마유미의 손을 입에서 떼어놓으려 했고, 마유미가 꽉 쥐고 있는 것을 빼앗고 마유미의 입 속에 든 것을 빼내려 하면서 싸움이 계속됐다. … 마유미는 이를 악물었고, 싸움은 마유미의 몸이 갑자기 굳어지면서 순식간에 끝났다. 마유미의 입술은 피로 범벅이 됐고, 신이치(김승일)는 쓰러져 있었다.”

    함께 제공된 레바논 법의과학연구소 보고서에 따르면, 김현희의 위 세척물, 혈액, 소변을 검사한 결과 소변에서 청산염 양성반응이 나왔다. 진실위의 의뢰를 받고 바레인측 보고서를 정밀분석한 한국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실제로 화학자 1명이 413mg의 청산칼륨을 복용한 후 8시간 치료를 받고 의식을 회복해 생존한 경우도 있다. 청산 독약 앰플을 기체상태로 소량 흡입하고, 음독현장에서 위 세척물을 다량 사용했다면 김현희의 위 세척물에서 청산염이 검출되지 않은 것은 가능할 수 있다고 추정되지만, 혈액에서 청산염이 발견되지 않은 이유는 알 수 없다.”

    진실위 발표에 대해 대부분의 언론매체는 “이는 김현희가 음독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실”이라는 식으로 보도했지만, 소수의 매체들은 “혈액에서 청산염이 발견되지 않은 것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혹”이라고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진실위가 충분히 조사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 대목에서 2005년 7월13일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의 ‘KAL기 폭파범 검거공신 스기나와 죠준 인터뷰’ 기사를 살펴보자.

    스기나와씨는 당시 바레인 주재 일본 대사관 서기관으로 일하면서 김현희와 가장 먼저 접촉한 인물이다. 사건 직전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공항에서 내린 일본 여권 소지자 2명의 행방을 추적해 바레인의 한 호텔에 투숙한 김현희와 김승일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그는 공항 출입국담당자를 설득해 이들을 붙잡아두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김현희·김승일의 음독 장면도 현장에서 생생하게 목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인터뷰에서 “김현희의 음독을 똑똑히 목격했다. 음독 직후 경련하는 모습은 절대 꾸며낼 수 없는 형상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범인이 일본인으로 밝혀질 경우 양국 단교까지 갈 만한 엄청난 사건인지라 당시 늘 녹음기를 켜놓고 행동했다. 조사 경험으로 봤을 때 이 사건은 100% 김현희측 범행이다”고 단언했다.

    그는 김현희가 음독 직후 병실에서 “일본인이 아닌데도 친절하게 대해줘 고맙다”고 말하는 순간, ‘테러범은 일본인이 아니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한다. 다만 이런 결정적인 증거에도 불구하고 당시 ‘김대중 납치사건’의 영향으로 한일 수사공조가 단절된 상태라 한국측 수사 관계자가 그때(지금까지도) 자신에게 한 번도 당시 상황에 대해 물어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안기부가 기체 잔해를 고의로 폐기했다?

    안기부는 추락지점 인근에서 발견된 KAL 858기 잔해들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낸 뒤 국과수의 감정이 끝나자마자 고의로 폐기 처분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즉 ▲KAL 858기 잔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랬거나 ▲KAL 858기 잔해가 맞다 해도 폭파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잔해를 신속하게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다.

    그러나 진실위의 조사를 통해 기체 잔해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감정 후 5년 간 보관하다 자체 규정에 따라 폐기한 것으로 밝혀져, 안기부가 개입한 정황은 없는 것으로 결론났다.

    국과수의 감정 결과서가 안기부로 전달된 1990년 6월4일 국과수 결과보고서를 보면 이화학 3과에서 작성한 문서에는 ‘5. 비고-증거물 잔량은 반환함’이라고 기재하고 청색 고무인을 날인했으나, 이화학 2과의 보고서에는 ‘5. 비고’란에 고무인이 누락돼 있었다. 또 ‘증거물 잔량은 감정서 발송일로부터 14일 이내에 반환 요구가 없을 때 폐기 처분하겠음’이라고 기재된 감정서도 일부 있었다.

    국과수측은 “(안기부에) 가져가라고 해도 가져가지 않기에 5년 정도 보관하다가 자체 규정에 따라 폐기 처분했다”고 밝혔다.

    결국 국과수도 기체 잔해를 감정의뢰 관서에 보관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안기부 또한 주요 증거물인 기체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해 반환요구를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어떤 의도가 숨어 있다기보다는 일단 현안이 종결되면 다시 뒤치다꺼리를 하고 싶지 않은 공무원 특유의 관료주의 성향이 투영된, ‘해프닝성’으로 판단한 것이다.

    이에 대해 진실위는 “잔해가 없어지게 된 것은 관계기관 모두 도의적 비난을 받기에 충분하며, 경솔한 조치였다고 판단된다”고 했다.

    우리가 아는 김현희는 이제 없다?

    진실위측은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김현희씨의 증언이 핵심이지만 협조해 주지 않고 있다. 최종 발표 때까지는 꼭 조사가 성사되도록 김씨가 나서주기 바란다”고 밝혔다.

    김현희는 1990년 4월12일 특별사면 된 뒤 7년 동안 안기부의 특별관리를 받았다. 그는 본격적인 사회정착에 앞서 1995년 4월부터 외고종조부 김모씨(당시 73세) 집에서 2년을 살았으며, 안기부는 이후 1997년 12월말까지 김현희가 완전히 사회에 배출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려 했다.

    마침 김현희와 교제해오던 안기부 직원이 결혼을 결심했다. 김현희는 마침내 1997년말 결혼을 계기로 자연스레 사회로 나왔으며, 이후로는 안보 강연, 신앙 간증 등 공개활동은 물론 안기부와의 실질적 관계도 끊었다.

    김현희는 2003년 MBC 취재진이 전 거주지인 서울 용산구 이촌동 아파트에 카메라를 들고 찾아오는 바람에 극도로 당혹스러워한 뒤, 언론은 물론 주소를 알려준 것으로 의심되는 국정원 지인들에 대해서도 불신감을 표출하고 있다고 한다. 이미 초등학생 자녀들을 두고 있어 자칫 아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부담을 줄 수 있는 상황도 우려한 듯하다는 게 국정원 관계자들의 말이다.

    철저하게 보안에 붙여진 자신의 소재지가 노출되자 그는 한때 가족처럼 지내던 가까운 지인들과의 관계도 대부분 정리하고 서울 외곽으로 이사를 간 것으로 알려졌다. 원래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성형수술을 했다는 소문도 나돈다.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은 최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김씨가 자녀 문제 때문에 상당히 고민하고 있다. 외출도 마음대로 못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국정원 관계자들은 그의 현 주소지에 대해 ‘서울의 남쪽’이라고만 확인해주고 있고 정 의원은 ‘경기도 서쪽 접경 변두리’라고 한 바 있어, 안양이나 광명시 일원이 아니겠느냐는 추측만 무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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