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비교(秘敎)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이 대목에서 ‘1666년’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숫자에 깊은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1600년도 아니고 1666년이라니! 스트라우스는 이 숫자가 어디서 나왔는지 밝히지 않기 때문에 독자의 궁금증은 커진다. ‘리비우스 논고’의 해당 대목을 찾아보는 수밖에. 그곳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이러한 종파들은 5000~6000년 사이에 두세 차례 바뀌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전의 기록들을 잃어버렸다.”
마키아벨리는 여기서 홍수와 역병 같은 대규모 자연 재해가 종파와 언어의 변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논했다. 하지만 스트라우스에게 영감을 준 것은 위의 짤막한 한 문장이었다. 5000을 3으로 나누면 1666.666...이 나온다. 이것이 ‘1666년’의 계산법이다. 숫자의 비밀에 흥미를 느끼는 독자는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추’를 탐독하기 바란다. 그곳에는 스트라우스 식 암호를 역으로 푸는 방법이 나와 있다.
스트라우스는 “마키아벨리가 악의 교사”였다는, 익히 알려진 주장을 하는데 왜 이렇게 ‘비상한’ 독법을 사용해야 했을까? 그것이 단지 진부한 주장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마키아벨리가 숨긴 ‘진정한 의도’임을 만천하에 밝히고 싶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악덕’을 권고한 것이나 ‘리비우스 논고’에서 고대 로마를 예찬한 것은 일면 새로운 주장처럼 보이겠지만, 그것은 단지 “성서적 전통의 전복 혹은 그것에 대한 내재적 비판이라 불릴 만한 것”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스트라우스가 이 책에서 마키아벨리의 주장들을 끊임없이 성서와 연결시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대의 마키아벨리 학자들을 일절 언급하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들 누구도 이런 숨겨진 비밀을 해독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와 아메리카
이제 한 가지 의문만이 남는다. 신학자가 아니라 고전학자인 스트라우스가 왜 이토록 기독교 중심주의/근본주의에 집착했는가 하는 점이다. 답은 책의 서문 뒷부분에 나온다. “미합중국이야말로 세계에서 마키아벨리의 원리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세워진 유일한 나라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가 최상의 국가로 칭송한 로마는 형제를 살해한 자에 의해 창건됐다. 일찍이 토머스 페인은 미국의 독립이 통치의 원리와 실제에서 혁명의 정신을 따라 자유와 정의에 입각하여 이루어졌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지금도 유효하다. 현대의 폭정은 “선한 목적이면 어떤 수단도 정당화된다는 마키아벨리의 원리”에 뿌리가 닿아 있다(과연 마키아벨리가 그런 생각을 가졌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미국이 어떤 나라인가. “자유의 보루”가 아닌가. 비록 “적어도 미국의 현실이 미국의 열망과 떨어질 수 없는 한”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스트라우스는 감히 단언한다. “아메리카니즘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반대편에 있는 마키아벨리즘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스트라우스는 대단히 복잡한 우회로를 거쳐 매우 단순하고 전혀 새롭지 않은 결론에 이르렀다. 사실 이 책을 읽는 보통의 독자는 스트라우스의 논지를 따라가기 어렵다. 마키아벨리의 저작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비의적 텍스트를 해독하는 스트라우스의 비의적 방식을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야말로 스트라우스를 정점으로 한 ‘성배 기사단’의 존재를 영속케 해주는 중요한 요소다. 근본주의적 기독교 신앙에 기초를 둔 순혈의 아메리카니즘이라는 성배는 그것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마키아벨리스트라는 적들로부터 반드시 지켜져야만 한다. 스트라우시안과 네오콘의 기사들이 그렇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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