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쉼터에 와 있던 A씨는 아들의 돌잔치가 있던 날 집에 잠시 들렀다. 그러나 잔치가 끝나고 다시 집을 나서자 남편은 “왜 쉼터에 가느냐”며 행패를 부렸다. 갑자기 길 한복판에서 A씨의 머리채를 잡고 구둣발로 차며 폭력을 휘두른 것. 그녀가 비명을 지르자 동네 사람들이 놀라 뛰어나와 “얼른 도망가라”고 소리쳤다. 이날 사건으로 병원에 입원해 2주간 치료를 받고 퇴원한 그녀는 남편과 헤어지기로 마음을 굳혔다. 일자리를 얻어 방 한 칸을 마련하면 혼자 힘으로 아들을 잘 키우고 싶은 게 그녀의 유일한 소망이다.
최근 한국 남성과 외국 여성의 국제결혼이 급증하고 있다. 2005년 한 해에만 한국 남성과 결혼한 외국 여성이 3만1180명으로, 이는 2004년에 비해 21.8%나 증가한 숫자다. 국내 결혼커플 10쌍 중 1쌍이 외국 여성과의 결혼인 셈이다. 지난 15년간 한국 남성과 결혼한 외국 여성은 16만명에 육박하고, 이 가운데 현재 국내에 거주하는 이주여성 수는 6만6000명에 달한다.
한국에 시집오는 외국인 여성의 수는 가파르게 늘고 있지만 이들에 대한 인식과 차별, 인권 침해는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이주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상담센터에는 다음과 같은 하소연이 끊이지 않는다.
“임신 3, 4개월 후부터 남편이 때리기 시작했다. 베트남 남성 중에도 때리는 사람이 있지만 정도가 다르다. 남편은 밤늦게 들어와 ‘말을 안 들을 거면 베트남으로 돌아가라’고 하면서 때리기 시작하더니 6, 7개월부터는 아주 심하게 때렸다.”
“병원에 갔더니 임신 1개월이 조금 지났다고 했다.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좋아했지만 남편은 싫은 표정이었다. 남편은 ‘내 아이가 아니다’라며 유산시키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나를 자신이 아는 사람에게 시집보내겠다고도 했다. 임신 전부터 늘 때렸지만, 임신한 후에는 머리를 잡고 목을 조르기도 했다. 아기를 가지면 더 잘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지난해 11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 남성과 결혼한 지 5년 된 필리핀 여성이 의처증 증세를 보이던 남편으로부터 둔기로 폭행당해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고, 함께 폭행당한 두 자녀는 사망한 것. 2003년 3월에는 결혼생활 8년 동안 구타에 시달린 한국 귀화 필리핀 여성이 남편의 폭력을 피해 달아나다 아파트 10층 베란다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는 사고도 있었다. 남편의 구타 이유는 그녀가 한국 풍습에 익숙하지 않고 필리핀으로 돈을 부친다는 것이었다. 숨진 그녀의 턱 밑에서 칼에 베어 생긴 5㎝ 길이의 상처가 발견되기도 했다.
필리핀 외교부의 ‘경고문’
지난해 주한 필리핀대사관은 자국 여성을 대상으로, 결혼중개업체 소개로 한국 남성과 결혼한 뒤 한국에 가거나 연예 관련 비자를 받아 입국할 때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며 “한국인과의 국제결혼은 추천할 만하지 않다”는 충고를 공지했다. 또한 필리핀 외교부는 ‘경고문’을 배포해 “필리핀 여성들이 한국인과의 결혼을 피할 수 없다면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