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0월호

‘천년왕국 수시아나에서 온 환웅’

서남아시아에서 중원을 거쳐 한반도까지

  •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유적학과 교수 dhhw1984@hanmail.net

    입력2006-10-13 16: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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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년왕국 수시아나에서 온 환웅’

    ‘천년왕국 수시아나에서 온 환웅’ 정형진 지음/일빛/ 584쪽/2만원

    이책의 저자는 연세대 철학과 졸업 후 취업했다가 뜻한 바 있어 직장을 그만두고 1988년부터 지금까지 한국 고대 문화가 살아 숨쉬는 경주에 내려와 살고 있다. 18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한국 고대사 및 고대의 종교와 문화 연구에 매진했고,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한민족의 상고사를 주도한 엘리트 종족에 관한 연구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2003년에 부여족의 기원과 이동에 관한 연구서인 ‘고깔모자를 쓴 단군’(백산자료원)을 낸 데 이어 지난해 신라 왕족의 원류를 밝힌 ‘실크로드를 달려온 신라 왕족’(일빛)을 출간했다. 저자는 장차 한민족의 역사를 주도한 엘리트 종족의 사유 체계를 근간으로 한 한국 고대 종교의 뿌리와 문화 그리고 한국 사상사에 관한 책을 출간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이렇듯 장황하게 저자를 소개한 것은 ‘천년왕국 수시아나에서 온 환웅’이라는 이 책의 제목이 대부분의 독자에게 생소할 것이기에 본격적으로 평하기에 앞서 사전 정보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단군과 메소포타미아 문명

    ‘수시아나’라는 용어를 처음 봤더라도 그 앞에 ‘천년왕국’이라고 했으니 장구한 내력을 지닌 고대왕국으로 간주하면 될 것 같다. 그런데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수시아나에서 왔다니. 이 책의 핵심이 바로 이 제목에 담겨 있으며, 아울러 범상치 않은 내용이 전개될 것임을 짐작케 한다. 목차를 대강 살펴봐도 심상치 않다.

    1장 대한민국 국호의 뿌리를 밝힌다. 2장 홍산문화인의 곰 숭배와 한민족(앙소와 홍산문화인의 교체와 융합, 바이칼호의 추억). 3장 한텡그리산에서 한원으로. 4장 한민족의 조상은 천손이다. 5장 고대 문명과 공공족(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대한 기억, 우바이드에서 찾은 진한인의 편두 풍습). 6장 신라의 선주민은 공공족이다. 7장 선단군과 후단군(고깔모자를 쓴 단군을 밝힌다, 메소포타미아의 천년왕국에서 고깔모자 쓴 신을 찾다). 8장 공공족으로 이해한 단군 신화.



    목차를 통해 이 책의 무대가 한반도를 넘어 중국 대륙과 메소포타미아 등으로 확대된다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단군과 메소포타미아, 중국의 신석기 문명인 앙소(仰韶)문화가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도 궁금해진다.

    그렇다면 먼저 수시아나는 어디에 소재한 왕국이었을까? 수시아나는 메소포타미아 남동부 연장 지역인 후지스탄 평원의 카르헤쿠르 강둑 인근의 자그로스 산맥 언저리다. 성서에는 ‘수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저자는 자그로스 산악 지대에서 내려온 엘람인들이 수시아나를 장악하자 수시아나인의 지도층 일부가 많은 수의 사람을 데리고 신천지를 찾아 나섰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그들이 최종적으로 중원의 앙소문화 지역에 도착했다고 추정한다. 수시아나 문화와 중국 앙소문화 사이에 유사점이 보이기 때문이다. 가령 물을 중시하는 농경문화적 요소, 고깔형 모자를 쓴 제사장, 공공(共工)의 공(工)이라는 글자와 관련된 도상이 그렇다. 수시아나 채도(彩陶·칠무늬 토기)에 표현된 주요 모티프가 앙소문화의 채도와 관련 있는데, 특히 공공족의 ‘공(工)’ 자가 확인된다고 한다.

    고깔모자의 비밀

    중국 고문헌에서 상고시대를 무대로 등장하는 ‘공공족’이 바로 이 책의 키워드다. 저자는 공공족의 이동을 끈질기게 추적하면서 그들과 한국 민족과의 연관성을 찾아낸다. 저자가 공공족을 한국 민족과 결부시키는 데는 황룡사 목조 9층탑 건립을 제안한 자장의 말이 실마리가 되었다. 신라 승려 자장이 당나라 청량산에서 문수보살로부터 전해 들었다는 다음과 같은 말을 주목한 것.

    “너희 국왕은 인도의 찰리 종족인데, 이미 불기(佛記·약속)를 받은 까닭에 남다른 인연이 있으므로 동이(東夷) 공공의 족속과는 동일하지 않다.”

    여기서 신라 왕족을 가리키는 찰리 종족은 부처의 사카족을 뜻한다. 중앙아시아에서 유목을 하던 스키타이 중 사카라고 불린 사람들이 인도에 정착했는데, 신라 왕족이 바로 그 계통의 집단이라는 것. 공공족은 신라 김씨 왕실이 정착하기 이전에 경주에 정착해 있던 선주민 집단으로 간주했다.

    당초 천산 산맥 너머에 살았던 공공족은 새로 이동해 온 중국 대륙의 위하(渭河)와 황하를 무대로 신석기 시대 후기에 주역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중국 한족(漢族)의 조상이 되는 황제족이 중원 대륙으로 진입하자 공공족은 동북 지역으로 축출당했다. 밀려난 곳은 북경시 밀운현 공공성이었는데, 저자는 공공족이 이곳에서부터 ‘요서 요동 한반도 진한’ ‘요서 평양 마한’ ‘요동 변한’으로 이동해 삼한이 탄생했다고 쓰고 있다.

    수시아나인과 앙소문화, 사카족, 그리고 한민족을 동일선상에 두는 중요한 근거는 고깔모자다. 사카족이 새겨놓은 암각화를 통해 사카족에게서 고깔모자를 쓰는 전통을 발견했고, 수시아나인들도 고깔모자를 썼으며 앙소채도에 그려진 인물도 고깔모자를 쓰고 있는 것. 저자는 “이 고깔모자는 중국 동북을 거쳐 한반도로 들어와 제석천과 삼신제석의 머리에도 씌워졌다. 무당이 고깔모자를 쓰게 된 비밀은 이와 같은 상고문화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600쪽에 가까운 방대한 양의 이 책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씌어졌다. 작금에 다시 고개를 쳐든 동북공정과 관련해 저자는 “일부 강단 학자들이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서 학술적으로 냉정히 대응해야 한다고 순진하게 말하고 있을 때 저들은 동북공정이 정치적임을 공언하고 있다”며 기존 학계를 비판한다. 저자는 “저들은 분명히 정치의식을 가지고 동북공정에 임하고 있다. 누가 저들의 그러한 의도를 무력화할 수 있는가? 상고사의 여러 문제에 대해 소극적으로 일관하던 강단 사학자들이 잘 수행할 수 있을까?”라고 물으며 일종의 사명감을 지니고 본서를 집필했음을 무거운 마음으로 토로하였다.

    이처럼 뚜렷한 목적에 입각해 씌어진 이 책에는 저자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한민족의 뿌리를 찾아 떠난 답사 성과가 녹녹하게 배어 있다. 이란 서쪽의 수시아나에서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북중국과 요동반도 그리고 한반도에 이르는 엄청난 공간을 추적한다. ‘인류사는 이동의 역사’라고 한 저자다운 연구 태도라고 하겠다. 그러니 본서에서 저자가 현장을 답사하면서 펼친 무대의 광할함에 그만 압도되고 만다. 특히 북경시 북쪽의 밀운현 연락촌에서 공공족이 살았던 성터를 찾는 과정은 저자에게 생애 최대의 희열을 안겨주지 않았나 싶다. 저자가 확인한 이곳은 과거 단군과 관련 있는 지명(地名)인 단주(檀州)라 불렸고, 538년 이전에는 ‘박달현(白檀縣)’이 설치되었다.

    정열로 강단 학계를 자극하다

    또한 저자는 중국 고문헌에 대한 면밀한 분석은 물론이고, 동서양의 소소한 고고 물증을 놓치지 않고 비교 검토하여 기어이 그 상관성을 밝혀냈다. 가령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천전리 암각화에서 이집트왕의 영혼을 용(구렁이)으로 묘사한 것과 연결되는 물증을 찾았을 뿐 아니라, 이집트의 파피루스에 묘사된 앙크(태양이 발산하는 생명 에너지)와 흡사한 문양을 발견했다. 중남미의 고대 유적에서는 중국의 채도 문양과 한자가 새겨진 도자기까지 찾아냈다. 아울러 동북아시아와 중남미의 편두 풍속을 비교하여 그 이동 과정을 추적했다. 현장 답사를 통한 치밀한 고증, 방대한 사료와 동서양 물질·문화 비교를 통해 얻어낸 성과가 담긴 이 책은 차제에 강단 학계에 자극을 주는 한편 안목의 지평을 넓히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논지의 큰 축을 이루는 진국(辰國) 진조(辰朝) 진한(辰韓) 진국(振國·발해)을 모두 동일시하는 데는 좀더 신중해야 할 것 같다. 저자는 ‘부여융묘지명’에 보이는 ‘백제 진조인(百濟辰朝人)’을 ‘백제 때(辰) 조인(王族)’이라고 한 견해를 비판하였다. 묘지명에서 부여융의 조와 부를 밝히고 있는데 굳이 다시 ‘백제 때의 왕족’이라고 쓸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이 구절을 ‘백제인이지만 진국의 혈통을 가진 사람’으로 해석하였다.

    그런데 묘지명에서는 ‘백제 진조인’이 먼저 나온 뒤에 몇 구절 지나 그 조와 부가 언급되었다. 그러므로 ‘굳이 다시’라는 저자의 표현은 전말이 바뀐 것이다. 그리고 이 구절이 ‘진국의 혈통’과 관련 있다면 ‘흑치상지묘지명’처럼 가문의 내력이 구체적으로 적시(摘示)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말갈인 이다조의 경우도 ‘삼한귀종(三韓貴種)’이라고 하였듯이 ‘진한’이니 ‘삼한’이니 하는 표현은 범칭으로 광범하게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기록이 저자의 기왕의 논지에 보탬이 될지는 불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서가 지닌 강점과 장점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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