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을 소재로 한 미스터리 소설, ‘뿌리 깊은 나무’와 ‘훈민정음 암살사건’.
한편 북한에서는 ‘세종 25년인 1444년 1월(음력 1443년 12월)에 창제되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1월15일을 훈민정음 창제일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창제일을 기념하든 반포일을 기념하든 훈민정음이 남북한에 모두 귀중한 문화유산임은 분명하다.
한글이 모방한 옛 글자는 무엇인가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된 것은 1940년대. 경북 안동의 이한걸 가(家)에 전해지던 것을 간송 전형필이 구입해 6·25전쟁이 나자 오동나무 상자에 이 책만 넣어 피난을 갔고 밤에는 베고 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지금은 국보 70호로 지정되어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으로 사람의 발음기관을 본떠 만들었다는 한글 창제의 원리가 밝혀지고 세종 친제설이 굳어지긴 했으나 그렇다고 모든 궁금증이 속시원하게 풀린 것은 아니다. ‘세종실록’을 보면 “28자는 옛 전자(古篆)를 본받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옛 전자가 무엇인지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훈민정음 반포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추측을 낳았다. 성종 때는 옛 전자를 산스크리트 문자로 보았고, 18세기 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원나라의 파스파 문자라고 했으며, 최근엔 ‘단군세기’에 나오는 정음 38자, 즉 가림토 문자가 전자라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됐다. 고대 근동지역 언어와 역사 전문가인 조철수 박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훈민정음 음운체계가 유대교 신비주의 기본서에 나오는 히브리어 음운체계와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즉 한글이 히브리 문자에서 왔다는 것이다(‘고대 메소포타미아에 새겨진 한국신화의 비밀’, 김영사, 2003).
한글 창제의 원리뿐 아니라 국보로 지정된 ‘훈민정음 해례본’ 그 자체도 여전히 논란거리다. 지난해 국보 제1호를 다시 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을 때 0순위로 거론된 것이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이에 대해 대다수 국민이 공감했으나 최규일 제주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최근 학계에서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 경위와 원본 유출과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마당에, 진본 여부가 분명치 않은 책을 국보 1호로 지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중앙일보 칼럼, 2006.6.20).
이러한 문제 제기가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이미 2001년 경상대 국문과 려증동 명예교수는 ‘배달글자’(한국학술정보, 2001)에서 애초에 ‘훈민정음 해례본’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붓글씨로 썼을 뿐 중국을 의식해서 간행하지 못했고 다만 책 내용이 ‘세종실록’에 실려 전해졌는데, 일제 강점기에 경성제국대 오구라 신페이 교수가 ‘세종실록’의 훈민정음을 베낀 것과 1940년대 규장각에서 발견된 ‘붓글씨로 쓴 훈민정음 해례’라는 책을 하나로 편집해 간송 전형필에게 팔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국보 70호인 ‘훈민정음 해례본’의 역사는 50여 년밖에 안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2005년 새로운 발견으로 인해 힘을 잃는다. 서울대 언어학과 김주원 교수는 앞의 2장이 떨어진 채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 뒷면에 빽빽하게 적힌 한글을 조사했다. 그 결과 중국 명나라 때 왕실 자제 교육서인 ‘십구사략통고’를 한글로 풀어쓴 ‘십구사략언해’임을 밝혀냈고, 한글 문법 등으로 보아 18세기 전후에 씌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했다(‘훈민정음 해례본의 뒷면 글 내용과 그에 관련된 몇 문제’, 2005). 그러므로 적어도 18세기 이전부터 이 책이 존재했으며 누군가 책 뒷면에 글을 베껴 쓴 직후 앞의 2장이 떨어져나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논문이 발표된 것과 비슷한 시기에 ‘훈민정음 해례본’에 대한 또 다른 주장이 나왔다. 부산 동래여중 박영진 교사가 한글학회 기관지 ‘한글새소식’ 2005년 7월호에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훈민정음 해례본’은 원래 안동 이씨 가(家)의 것이 아니라 같은 안동 지역 광산 김씨 종택인 긍구당 소장본이었다”고 쓴 것. 김씨 집안 사위이던 이용준씨가 허락 없이 가져가 간송에게 넘겼다는 주장이다. 박씨는 긍구당 종손 김대중씨의 증언을 근거로 이런 주장을 폈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원리부터 국보인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 경위까지 아직도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이 많은 셈이다.
집현전을 둘러싼 거대한 음모
최근엔 한글과 관련한 새로운 학설이나 연구결과가 나오는 대신, 훈민정음을 소재로 한 미스터리 소설들이 잇따라 출간돼 한글날을 기념하고 있다. 지난 여름 추리소설로 큰 인기를 모은 ‘뿌리 깊은 나무’(이정명, 밀리언하우스)와 ‘훈민정음 암살사건’(김재희, 랜덤하우스중앙)이 대표적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세종시대 ‘훈민정음’을 반포하기 7일 전 궁 안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을 다룬다. 경복궁 후원 우물 안에서 칼에 찔린 채 죽은 집현전 학사 장성수의 시신이 발견되고 어린 겸사복 강채윤이 조사에 투입된다. 강채윤은 사건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성삼문, 박연, 이순지, 정인지, 최만리 등을 차례로 만나며 궁중 내 개혁파와 사대파의 갈등, 그로 인한 거대한 음모를 알게 된다.
이 책은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훈민정음’의 창제과정을 소개하며, 세종의 인간적인 면모와 국가경영 전략까지 드러낸다는 점에서 스케일이 만만치 않다. 당대에 화려하게 꽃피운 수학, 천문, 건축, 음악, 미술 등을 접할 수 있는 것도 이 소설의 묘미. 다만 어린 겸사복이 단 며칠 만에 오행의 이치나 하도(河圖), 마방진(魔方陣), 천문 등을 섭렵하고, 그것을 이용해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그럼에도 세종과 훈민정음에 대한 탐구열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훈민정음 암살사건’은 ‘한글이 진정 세종대왕이 만든 문자인가?’라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앞서 소개했듯이 한글의 수많은 기원설 가운데 가림토 문자설을 토대로 한 소설이다. 지하철에서 소매치기를 당한 일본인의 지갑에서 한문이 가득 적힌 낡은 종이 한 장이 나온다. 이 종이를 들고 사학과의 서민영 교수를 찾아간 강현석 형사. 서민영 교수는 이 종이가 세종대왕 친필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서 교수의 아버지는 한글의 역사를 고조선 시대로 끌어올리는 데 평생을 바쳤고, 한글 창제의 비밀이 기록된 ‘훈민정음 원류본’을 찾는 데 성공하지만,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뒤 ‘원류본’의 행방이 묘연해진다. 이를 찾아 나선 서민영과 강현석, 그리고 원류본을 빼앗기 위해 이들을 추적하는 일본의 극우단체. 왜 일본은 원류본이 세상에 나오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훈민정음, 고대사를 다시 쓰다?
‘훈민정음 암살사건’은 보이지 않는 적과 서로 쫓고 쫓기는 스릴러와 암호를 하나하나 풀어가는 추리를 섞어 놓은 형식이다. 그 속에서 작가는 주로 서민영의 입을 통해 자신의 역사관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훈민정음 원류본’의 가치를 묻는 형사에게 서민영은 이렇게 대답한다.
“훈민정음 원류본이 진짜 있었고, 그 진품이 발견된다면 우리나라의 문자 역사는 다시 씌어져야 해요. 고작 1443년에 만들어져 갓 560여 년을 넘긴 글자가 아니라, 단군시대에 만들어져 4000여 년을 넘긴 문자라는 게 밝혀지면 우리 한글의 유구한 역사성은 세계에서 다시 한번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어요. 문자의 역사는 바로 그 문자의 값어치를 나타냅니다. 훈민정음 창제 시기보다 먼저 쓰인 일본의 히라가나 문자를 들먹이며 일본인들은 한글을 대놓고 무시해요.”
고조선에 대해 서민영은 이런 말도 한다.
“고조선은 참으로 슬픈 나라예요. 자국민에게조차 국가로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그런 나라죠. 하지만 고조선은 반드시 있었습니다. 많은 역사서가 그걸 증명하고 있고요. …아쉽게도 고조선 문자가 적힌 유물은 한 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조선 시대에 문자가 씌었다는, 더욱이 가림토 문자가 그것이었다는 걸 증명하는 유물이 나온다면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는 다시 씌어져야 합니다.”
‘훈민정음 살인사건’은 독자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하려 하지만 정작 가림토 문자가 무엇인지는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 허점을 보인다. 목숨을 걸고 원류본을 지키려는 주인공들에게 쉽게 공감할 수 없는 점도 그 때문이다.
책을 덮으며 든 생각은 ‘현실세계에서 벌어지는 ‘훈민정음’ 논쟁이 소설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것을 어쩌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