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 그레고리 번스 지음/ 권준수 옮김/북섬/375쪽/ 1만3000원
이런 열풍이 우리나라에도 불어 뇌에 관한 책이 많이 출간되었다. 보통 사람들이 뇌에 쉽게 접근하도록 길잡이가 되어준 책이 있는가 하면 순전히 흥미거리에 지나지 않는 내용들로 채워진 책도 있다. 어쨌든 독자는 심리와 뇌를 연결하려는 시도 등 뇌와 관련한 정보를 다양한 방식으로 접하게 되었다.
너무 무겁거나 가볍거나
그러나 첨단이라고 할 두뇌 혹은 인지과학을 풀어서 설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전공자조차 알기 어려운 현학적인 단어와 도저히 어디를 지칭하는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해부학적 용어가 범람하는 불친절한 설명을 하고 있어 오히려 이 분야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리거나 아니면 너무도 뻔한 상식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가벼운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 대부분이다.
지나치게 무겁거나 혹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책들 때문에 밝혀야 할 것이 무궁무진함에도 이제 겨우 출발선을 지난 뇌 과학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식을 수도 있다는 건 참 안타까운 일이다.
쉽다, 재미있다
이번에 출간된 ‘뇌 과학이 밝혀낸 욕망의 심리학’이라는, 어찌 보면 지극히 평범하고 진부한 부제가 붙은 ‘만족’은 깊이와 재미라는, 공존하기 어려운 두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켰다.
일단 재미있다. 대학에서 행동과학과 정신의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쓴 책이라기보다는 심층 다큐멘터리를 취재하는 기자의 취재일기를 보는 것처럼 현장감이 넘친다. 특히 책의 내용이 저자가 속해 있던 실험실과 직접 만난 사람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저자가 궁금했던 점들을 실험으로 구명해 나가는 과정이 긴박감 넘치게 정리되어 있어 잘 만든 TV 프로그램을 보는 듯하다.
이런 결과는 발로 뛰지 않고서는 만들어낼 수 없다. 직접 뇌 영상 장치에 누워 사진을 찍고, 요리사를 인터뷰하고, 퍼즐 토너먼트 대회에 참여했으며, 장거리 달리기 대회에 자원해서 의학 검진을 하고, 혈통과 환경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아이슬란드를 방문하기도 하는 열성이 없었다면 독자는 이 책의 미덕인 생생한 현장감을 만끽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은 쉽다. 사람들이 지루해할 만한 전문적인 용어 fMRI, TMS, 도파민 등을 아주 쉽게 풀어썼다. 저자는 누구라도 이런 용어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실제 실험을 진행하는 사람처럼 뇌의 작동 방식을 구명하는 연구에 푹 빠질 수 있게 만들어주는 재주를 부렸다.
왜 그의 연구팀이 해낸 실험 결과들이 ‘네이처’와 같은 전문 학술지 외에 ‘포브스’ ‘머니’ ‘뉴욕 타임스’ CNN BBC 같은 대중 매체에도 자주 소개되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런 재미있고 쉬운 접근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건 사람이 느끼는 ‘만족’이 “자신의 행동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감정”이며 뇌는 이런 만족감을 위해 끊임없이 활동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무엇인가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뇌가 가장 원하는 방식임을 실제 삶의 현장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 보여준다.
이를테면 금전에 대한 추구를 이야기하면서 ‘복권 당첨자는 행복하고, 사고 피해자는 불행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너무도 뻔한 질문 같지만 저자의 실험 결과는 뻔한 예상을 보기 좋게 뒤엎는다. 버튼을 눌러야 돈을 받을 수 있는 장치와 안 눌러도 받을 수 있는 장치로 실험을 했더니 공짜 돈을 받는 것보다 평범한 버튼 누르기를 할 때 실험 참가자들의 뇌에서 선조체(線條體)가 더 활성화됐다. 뇌의 선조체 부위가 활발해지면서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 물질이 다량 분비되면 인간은 만족감을 느낀다.
이번엔 교통사고가 난 현장 주변은 교통체증이 심하다는 걸 상기해보자. 사고 현장 주변이 정체되는 건 사고 정리 때문이기보다는 끔직한 현장을 보기 위해 속도를 늦추는 운전자들의 호기심 때문일 때가 더 많다.
만족감을 느끼도록 뇌에서 도파민 분비를 촉진하는 것은 ‘새로움’이다. 근본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뇌는 자주 새로운 놀라움에 자극받는다.
만족과 쾌락의 경계선
이밖에도 잘 풀리지 않는 퍼즐을 놓고 고민하다 마침내 엉클어진 실타래가 풀리듯 답을 찾았을 때의 만족감, 좋아하는 회를 며칠 간격으로 먹어야 물리지 않을까 하는 고민 등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흔히 경험하는 활동들이 뇌의 만족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살펴보고, 독자로 하여금 “아하” 하면서 무릎을 치게 만든다.
저자가 10여 년 전에 사망한 뇌 연구의 대가 히스의 오래된 16mm 필름을 돌려보면서 쾌락과 고통이 뇌의 서로 다른 부위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같은 신경회로를 나누어 쓰고 있으며, 전극을 불과 1∼2mm 이동하여 전류를 제공하면 쾌락적인 것이 고통으로 바뀌는 걸 알아채는 과정은 가히 극적이라 할 만하다.
사도마조히즘 클럽에서 프랑스 하녀복을 입은 가슴이 풍만한 여자에게 채찍으로 맞아 넓적다리에 고통스러운 상처를 입고도 쾌락을 느끼는 남자를 통해서 통증과 쾌락이 선조체에서 결합되는 것을 발견하는 내용도 단순한 재미를 넘어선다. 저자는 오랜 관계에서 성적 만족감을 회복하는 방법을 탐구하다 아내와 나눈 색다른 섹스 경험까지 과감히 소개한다.
요즈음 ‘바다이야기’로 장안이 떠들썩하다. 이런 사행성 게임에서부터 경마와 카지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도박 중독, 섹스 중독, 쇼핑 중독, 심지어 사랑 중독까지 행동을 매개로 하는 갖가지 중독 현상에 대한 일반의 관심도 높아졌다.
알코올이나 마약 같은 물질에 대한 중독을 포함해 사람들은 왜 어떤 것에 중독되고,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할까? 만족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일까? 이 책의 저자는 만족과 쾌락의 경계선을 분명히 긋는다.
“쾌락은 참으로 좋은 느낌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상한 것이고 때론 상대적으로 정상적인 상태를 회피하고 싶은 것처럼 느껴지며, 더 많은 쾌락으로 가득 채우려고 한다. 쾌락이 없는 삶은 사실 음산할 것이다. 그러나 대개 쾌락을 얻을 목적으로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그 반대로 비참함을 초래한다. 그리고 뇌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만족감을 찾는 것은 쾌락을 뒤쫓는 것과는 다르다. 만족감은 자신의 행동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인간의 감정이다. 당신이 만족했을 때 당신은 의미를 발견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그것은 쾌락이나 심지어 행복보다도 더욱 영구적인 것이다.”
쾌락과 만족을 구분하면서, 자신의 뇌를 만족시키면서 살고 싶은 사람들은 이 책을 꼼꼼히 읽어봐야 할 것이다.
뇌 과학이 일깨워준 교훈
이 책의 가치는 삶의 진리를 다른 방식으로 통찰할 수 있게 해준다는 데 있다. 일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딱딱한 교훈서가 아닌데도, 실험을 통해 아무런 대가 없이 돈을 받을 때보다 적극적으로 일하고 났을 때 뇌의 선조체가 더 활성화되는 것을 보여주고, 일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복인지를 일깨워준다.
또한 100마일(160.9km)이 넘는 거리를 30시간 이내에 달리는 철인들을 통해 운동의 놀라운 효과를 제시한다. 운동을 하면 전반적인 몸 상태가 향상되는 것은 물론이고 뇌의 신경 발생을 촉진하여 말 그대로 뇌를 새롭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모든 스트레스의 원천에서 뇌를 보호하는 만병통치제가 될 수 있다는 것. 반면 사람마다 도파민 신경세포의 양이 비슷하지만 사춘기 이후부터 꾸준히 줄어들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한다’는 원리가 뇌에도 적용된다고 경고한다.
모처럼 차지게 잘 씌어진 책을 읽고 나니 뿌듯했다. 책에는 “일찍이 이전에 읽어보지 못했던 어떤 책을 읽을 때 새로움은 도파민을 분비한다. 그것은 뇌의 운동을 촉진한다. 이 과정을 항상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당신은 확실히 이 과정에 뒤이어 나타날 만족감을 알고 있을 것이다”라고 씌어 있는데, 이 같은 현상이 필자의 뇌에서 일어난 모양이다.
국내 인지과학과 뇌영상 연구 분야의 최고 권위자인 역자의 깔끔한 번역이 독서의 즐거움을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