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0월호

국순당 사장 배중호 - 요리

“음식 만들다보면 원칙과 디테일의 중요성 절감하죠”

  • 글 구미화 기자 mhkoo@donga.com / 사진 김성남 기자 photo7@donga.com

    입력2006-10-13 16: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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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리는 손끝, 혀끝 감각에 정성이 더해져야 제 맛이 난다. 그러니 앞치마를 두른 남자는 피아노를 치는 남자만큼이나 매력 있다. 노련한 칼솜씨가 빚어내는 맑고 규칙적인 소리, 들릴 듯 말 듯한 지글지글 보글보글…. 귀를 쫑긋 세웠을 때 진한 향이 살며시 코를 자극하면 그만한 감동이 없다. 음식을 먹어보기도 전에 ‘사는 맛’을 느낀다.
    국순당 사장 배중호 - 요리
    “낮에 근처 식당에서 묵은지를 먹었는데, 짜지 않고 군내도 안 나더라고요. 숙성도 잘 됐겠지만 그런 맛이 나려면 담글 때부터 신경을 써야 할 거예요. 소금을 적당히 풀어서 배추를 절이고, 채소의 물기를 충분히 뺀 다음에 버무리고, 젓갈도 많이 안 넣고….”

    넥타이를 맨 정장차림일 땐 카메라 앞에 서는 걸 영 멋쩍어하던 국순당 배중호(裵重浩·53) 사장이 칼자루를 쥐고부터는 표정이 자연스러워지고 말이 끊이지 않는다. 오이를 채 써는 손놀림이 날렵하진 않아도 섬세하다. 칼을 한두 번 잡아본 솜씨가 아니다.

    배중호 사장은 배상면(82) 국순당 회장의 장남이다. 연세대 생화학과에서 미생물을 연구하고 1980년 국순당의 전신인 배한산업 연구소장으로 입사, 가업을 이어받았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 각종 한약재에 쌀가루를 넣어 발효시키는 생쌀 발효법을 이용한 ‘백세주’를 출시, 주류업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배중호 사장은 아버지의 권유로 대학에서 미생물을 공부했지만 큰 재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대학 3,4학년 땐 전공과목보다 경영학 수업에 더 열심이었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나 가업을 잇기 위해 술을 빚으면서 미생물학이 신기하고 흥미롭게 다가왔고, 일이 진전되는 것을 보며 성취감을 맛보았다고.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술을 만들다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발효식품으로 관심이 옮겨갔다. 요즘 유행하는 묵은 김치를 먹어보면 숙성기간이 6개월인지 1년인지, 냄새와 씹는 느낌으로 정확히 알아낼 수 있다는 그는 지난해엔 직접 김장을 했다. 자그마치 200포기. 땅속에 김치항아리를 묻어두고 몇 포기씩 꺼내 먹는데 “수분이 많아 묵은 김치로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김장김치를 데쳐서 내놓으면 아내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맛을 인정해준다”며 으쓱해한다.



    “김장김치를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치면 김치가 단단해져서 씹히는 맛이 좋아요. 발효가 더 진행되지 않게 하려면 김치 국물만 따로 한 번 끓여서 식힌 다음에 다시 부어놓으면 되고요. 미국 유학 중인 아이들이 집에서 담근 김치를 먹고 싶어 하는데, 담가서 택배로 보내면 가는 동안 너무 익어버리잖아요. 그래서 무슨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생각해낸 거예요. 요리는 손으로 해야 하는데, 전 머리로 하고 있죠(웃음).”

    국순당 사장 배중호 - 요리

    한 달에 한 번은 직원들과 가벼운 술자리를 갖는 배중호 사장. 술잔을 기울이며 격의 없이 이야기를 주고받다보면 제품에 대한 솔직한 평가와 새로운 아이디어도 건질 수 있다고 한다.

    김치 외에 그가 가족들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은 요리는 냉면, 김밥, 조림닭…. 닭을 홍합, 다시마, 두부, 오징어 등과 함께 양념에 졸이는 조림닭은 대구 지방 특유의 제사음식인데, 그 국물로 나물을 무쳐 먹어도 맛있다고 한다. 가만 보면 배 사장이 즐겨 하는 요리는 대개 손이 많이 가는 것들이다. 냉면 하나를 만들더라도 양지머리를 물에 담갔다가 육수를 내어 최종 완성하기까지 2∼3일은 족히 걸린다. 시중에 파는 육수를 이용하면 훨씬 간편할 텐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조금 쉽게 하려면 그만큼 맛이 떨어지는 걸 감수해야 하더라고요. 재료 하나를 고를 때부터 정성을 들이고, 원칙을 지켜야 최고의 맛을 낼 수 있지요. 인삼과 오미자 등 백세주에 들어가는 10여 가지 한약재가 어떤 순서로 얼마만큼 들어가느냐, 어떤 온도에서 얼마 동안 발효시키느냐, 용기에 얼마나 담느냐에 따라 술맛이 완전히 달라지는데, 요리는 술보다 훨씬 많은 변수가 복잡하게 작용하더라고요. 나물을 무치는 손의 미세한 압력 차이로도 그 맛이 달라지는 걸 경험하면서 디테일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했죠.”

    배 사장은 직원들에게도 요리에 관심을 가지라고 권한다. 작은 일을 소홀히 해서 전체를 망칠 수 있고, 작은 변화 하나가 획기적인 차별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걸 요리를 통해 배우기 때문. 새로운 요리를 시도하고, 익숙한 것을 변형시키면서 도전정신을 키울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는 김밥을 만들 때도 평범함을 거부한다. ‘누드김밥’을 만들기도 하고, 구운 김으로 말기도 하고, 날김으로 만든 김밥을 굽기도 한다. 해보고 싶은 요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국순당 사장 배중호 - 요리

    일주일에 2~3회 1시간씩 운동하는 배 사장은 몸무게 변화에 민감하다. 그렇지 않으면 과음과 과식, 운동 부족으로 건강은 물론 생활 전반이 무너지기 십상이기 때문. 일과 중 틈이 생기면 옥상 정원에서 산책하거나 책을 읽으며 한숨 돌린다.



    국순당 사장 배중호 - 요리

    ‘백세주’로 주류시장에서 전통주 영역을 획기적으로 넓힌 배중호 사장은 ‘백세주’를 이을 신제품들을 속속 내놓고 있다. ‘별’ ‘오가명작’ ‘오미명작’…. 아직까지 백세주 이상의 폭발력이 발휘되진 않았지만 제품 다양화는 계속될 거라고 한다. 그의 예민한 미각과 멈추지 않는 호기심이 또 한번 일을 낼는지….

    저녁 약속이 없는 날이나 휴가 때, 강원도 둔내 공장에 출장 갔다가 용평리조트에 묵을 때면 손수 요리하며 온전히 자신과 가족을 위해 시간을 보내지만 대부분의 일상은 그렇게 여유롭지 못하다. 그래도 신문을 보다가 요리 관련 정보를 발견하면 오려두곤 한다. 덕분에 ‘동치미에 살얼음 띄우는 법’ ‘김치냉장고를 활용해 김치를 익히는 법과 익지 않게 하는 법’ 등 주부들이 관심 가질 만한 것들을 꿰고 있다.

    요리가 간헐적으로 만나는 삶의 오아시스라면 매주 2∼3회 헬스장에서 거르지 않고 하는 아침 운동은 철저한 자기 관리의 일환이다. 주류회사 사장이다 보니 사람 만나는 자리에서 많든 적든 술이 빠지지 않아 누구보다 자기 관리에 신경을 쓰는 편이다.

    “‘술 마시고 안 취하면 손해’라는 생각을 버리고, 천천히 즐기면서 마시는 문화가 확산돼야 한다”고 말하는 배중호 사장. 그는 남편이 손수 만든 요리를 안주 삼아 부부가 함께 즐길 만한 술을 개발하기 위해 오늘도 대형 마트에서, 혹은 주방에서 열심히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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