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 직원이 박지원 장관실까지 미행…‘봉투 들고 들어갔다 빈손으로 나왔습니다’ 보고”
- 삼성 고위관계자, “미행 지시한 적 없다, 밑에서 알아본 건지…”
- “박지원 장관, X-파일 정독한 뒤 ‘박형, 고맙소’”
- “MBC, 내가 준 녹취록 특종보도 후 검찰에 넘겨…제보자 처벌에 일조”
- “‘기자의 생명’인 ‘취재원 보호’ 외면…’양길승 몰카’ SBS와 대비
- “정치적 목적이었다면 2002년 대선 때 X-파일 썼을 것”
- “파일 폭로자는 처벌 다 받았다, 274개 파일 내용도 수사하라!”
2006년 8월24일 ‘X-파일 제공자’ 박인회씨가 미국으로 강제 출국하기에 앞서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신동아’와 인터뷰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박인회(朴麟會·59)씨는 MBC 이상호 기자에게 불법 도청된 녹음테이프와 녹취록을 제공함으로써 X-파일의 존재를 최초로 외부에 알린 인물이다. 그러나 박씨는 사건이 보도된 직후 공항에서 연행되어 검찰에 구속됐기 때문에 사건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언론과 인터뷰한 적이 없다. 정작 X-파일 사건을 격발시킨 당사자에게선 한마디도 들어보지 못한 것이다.
강제 출국 전 8일의 자유
이런 가운데 지난 7월 ‘신동아’는 모 사정기관으로부터 ‘박인회씨가 8·15 가석방 대상에 포함됐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확정판결에 따르면 박씨는 오는 10월16일 만기출소 예정인데, 약 2개월 앞당겨 출소할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박씨가 수감된 대전교도소측도 지난 5월, “(수형) 고과점수가 좋네요. 6월에 봅시다”라며 박씨에게 희망을 안겨줬다.
그러나 7월10일 ‘재소자 환경조사’에선 “(가석방) 자격은 되는데 워낙 큰 사건의 연루자여서…”라는 회의적인 얘기가 나왔다. 박씨는 다시 불안해졌다. 심장 지병으로 2003년 수술까지 받은 박씨는 수감생활을 무척 힘들어했다. 그는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출소를 기다렸다. 8월10일 박씨는 교도소측과 가석방 여부를 결정하는 최종 면담을 했다. 이날도 교도소측은 가부 확답을 주지 않았다.
8월14일 오전, 박씨는 마침내 가석방 결정을 받아 대전교도소를 나왔다. 교도소측은 당일에야 가석방 사실을 박씨에게 통보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법무부가 박씨를 출소시키자마자 충북 청주의 ‘외국인 보호소’로 보낸 것이다. 사실상의 감금 상태가 계속된 것.
박씨(미국 여권에 기재된 이름은 William Hoe Park)는 법적으로는 1993년 7월 미국시민권을 취득한 외국인(미국인)이다. X-파일 사건의 중대성과 박씨의 국적이 미국임을 감안해 주한 미국대사관 관계자도 수감 중인 박씨를 두 차례 면담한 바 있다. 박씨는 미대사관측에 억울함을 호소했다고 한다.
박씨는 8월14일 외국인 보호소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법무부는 박씨를 보호소에서 곧장 인천국제공항으로 이송해 미국으로 강제 출국시킬 계획이었다고 한다. 외부인과의 접촉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의도였다. 이후 5년 동안 박씨는 한국에 입국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상황이 반전됐다. 박씨는 법무부에 “서울에 팔순 부모가 살고 있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른다. 부모가 미국까지 먼 여행을 하기도 힘들다. 지금 내가 나가면 5년 내에 못 들어오니 상(喪)도 치르지 못할 수 있다. 며칠만 더 국내에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박씨의 변호사는 공탁금을 걸었다.
법무부는 박씨측의 요청을 어렵게 받아들여 박씨가 며칠 더 국내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보호일시해제)했다. X-파일 사건에 대해 일절 함구하며 수감생활을 성실히 해온 점이 참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써 박씨는 8월16일 저녁 외국인 보호소를 나와 24일 강제 출국할 때까지 ‘8일간의 자유’를 얻게 됐다.
다량의 X-파일 수사기록 입수
박씨는 8월17일 밤 지인을 만났다. ‘신동아’는 그를 통해 박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박씨는 “한국에서 겪은 X-파일 사건이므로 한국을 떠나기 전에 말하고 싶다”며 응했다.
다음날 그는 기자에게 약속시간과 장소를 일러줬다. 저녁 무렵 박씨를 만났다. 박씨는 세 곳이나 장소를 바꾸더니 자리를 잡았다. 기자와 만나는 사실이 당국에 포착되면 당장 추방될 것이므로 신중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들으니…”라고 했다. 도청 테이프 제공자가 그런 속담을 인용하니 웃음이 나왔다. 이후 ‘신동아’는 세 차례 10시간에 걸쳐 박씨를 인터뷰했다. 마지막 인터뷰는 출국 직전인 8월24일 오후에 이뤄졌다.
박씨는 인터뷰에서 X-파일 사건의 공익적인 부분과 관련해 몇 가지 새로운 이야기를 했다. 뒷받침하는 증거도 꽤 있었다. ‘의혹’ 수준으로 보도할 수 있는 내용은 넘쳐났다. 그러나 ‘신동아’는 ‘완벽하게’ 확인되지 않은 내용은 보도를 보류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박씨가 말한 내용 전부를 기사화하지는 않았다. 이 부분에 대해선 계속 보강 취재해 추후 보도할 계획이다.
‘신동아’는 재판 자료로 사용된 다량의 X-파일 사건 수사기록도 사정기관으로부터 입수했다. 이 기록과 박씨의 주장을 대조했다. 예를 들어 박씨가 인터뷰에서 특정인의 행적을 언급했을 경우, 해당 인사가 본인 명의로 검찰에서 진술한 내용과 동일할 경우에만 기사화했다. 추가로 그 인사의 반론도 들었다. 인터뷰의 ‘의견 개진’ 부분 역시 박씨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전달하지 않고, 객관적 정황과 상식에 비쳐봤을 때 타당성이 있는 내용만 채택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좀 ‘야박하다’ 싶을 정도로 냉정하게 질문을 던졌다. 같은 사안에 대해 추가 질문도 여러 번 했기 때문에 박씨는 마치 심문당하는 것으로 느꼈을 수도 있다. 이 또한 객관성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불가피했다.
X-파일 사건에서 박씨와 관련해 짚어볼 부분을 시간 순으로 정리해보면 ▲박씨가 공운영 전 미림팀장으로부터 도청 테이프와 녹취록을 넘겨받은 대목 ▲박씨가 이학수 삼성전자 부회장·그룹전략기획실장(당시 삼성 기업구조조정본부장)을 찾아가 녹취록을 보여준 대목 ▲박씨가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을 찾아가 녹취록을 준 대목 ▲박씨가 MBC 이상호 기자에게 테이프와 녹취록을 제공한 대목 ▲X-파일 보도 및 검찰 수사 상황 ▲박씨가 공개되지 않은 또 다른 자료를 갖고 있는지 여부 등 6가지다.
“X-파일은 화려한 독배(毒杯)”
박인회씨는 “X-파일은 화려한 독배(毒杯)”라고 자조했다. 이 세상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일급비밀’이어서 화려하기 그지없지만, 지니고 있는 것 자체가 위험천만한 일이었고, 결국 자신을 구속의 구렁텅이에 빠뜨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씨는 X-파일을 처음 손에 쥔 1999년 9월을 회상했다.
사업차 서울에 온 박씨는 친구 이모씨를 만난 자리에서 전직 국정원 직원 임모씨를 소개받았다고 한다. 당시 임씨는 “국정원에서 억울하게 퇴출됐다”며 복직을 준비하고 있었다. 임씨는 박씨에게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과 친하냐”고 물었다. 박씨는 “아주 친한 사이는 아니어도 25년 이상 뉴욕에서 함께 생활했기 때문에 잘 안다”고 답했다. 그러자 임씨는 자신의 복직 얘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박씨는 “당신은 정보기관에서 근무했으니 큰 정보나 정책을 주면 정치인이 좋아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무심코 던진 이 말이 ‘판도라의 상자’에서 X-파일이 새어 나오는 계기가 됐다.
3주 뒤 임씨의 소개로 나온 공운영 전 안기부 미림팀장은 안기부 재직시절인 1997년 이학수 부회장과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의 대화를 도청한 테이프 1개와 녹취록 3부를 박씨에게 줬다. 박씨는 “집에 가서 그것을 찬찬히 읽었다”고 했다. 검찰은 이후 박씨의 행동에 대해 공소장에 이렇게 기록했다.
“1999년 9월 하순 박씨는 이학수 당시 삼성기업구조조정본부장의 사무실을 찾아가 녹취록을 제시하면서 5억원을 요구했으나 이 본부장이 이를 들어주지 않고 국정원에 신고했다.”
그러나 박씨의 주장은 좀 다르다. 박씨가 이 본부장을 만나는 장면을 떠올리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 이학수 당시 본부장을 어떻게 만났습니까.
“공운영씨를 만난 다음날 이 본부장 비서실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이 본부장을 보좌한다는 직원에게 ‘지난 대선(1997년) 때 회사가 관련된 문건이 있다. 이 본부장과 상의해야 할 일이다’라며 연락처를 남겼습니다. 다음날 이 본부장 비서실에서 ‘오전 10시에 약속을 잡아놨으니 본부장실로 혼자 오라’고 약속을 잡아주더군요.”
MBC측은 자료를 넘기기 전에 나와 접촉이 있었음에도 한마디 상의도 해오지 않았습니다. 만일 내게 물어왔다면 나는 ‘절대로 검찰에 줘선 안 된다’고 했을 겁니다. MBC가 자료를 검찰에 넘기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취재원 보호는 굳이 말을 안 해도 당연히 지켜야 할, 언론사와 취재원 사이의 불문율 아닙니까. 더구나 나는 무슨 파렴치범도 아니고 MBC측엔 공익제보자였는데 말입니다. MBC처럼 권력기관이 달라고 한다고 해서 다 주면, 앞으로 누가 언론사에 비리자료를 제보하겠습니까.
실제로 MBC측이 넘긴 녹취록 등의 자료는 취재원인 내가 처벌되는 ‘물증’으로 작용했습니다. ‘MBC가 자사 기자도 구속될 위기에 처하자 취재윤리는 미처 생각지 않고 제보자료를 순순히 넘겨주며 검찰에 협조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양길승 몰카’의 경우
▼ MBC가 공익적 차원에서 X-파일의 ‘내용’에 대한 수사에 일조하기 위해 검찰에 녹취록을 제공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X-파일 내용 수사에 협조하는 것이라면 ‘복사본’만 줘도 충분합니다. 담긴 내용의 사실관계만 파악해 수사의 실마리로 삼으면 되기 때문이죠. 내가 이 기자에게 준 녹취록은 X-파일의 유통 경위를 파악해 ‘녹취록을 제공한 사람’을 처벌하는 데 필요한 자료입니다. MBC측은 녹취록 내용이 실제 대화내용과 일치하는지를 ‘육성’으로 확인할 수 있는 도청 테이프(마스터CD)도 검찰에 줬기 때문에 녹취록은 복사본만 줘도 상관이 없습니다.”
▼ MBC측이 녹취록을 검찰에 제공하지 않았더라도 검찰은 박 선생을 구속 기소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랬을 수도 있죠. 당시 검찰의 기세로 봐선 MBC측이 녹취록을 주지 않았어도 다른 정황 증거를 들이대 나를 구속 기소하려 했을 겁니다. 그러나 내가 MBC에 X-파일을 제공했다는 점을 검찰이 ‘물증’으로 입증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MBC가 검찰에 자료를 모두 넘겨주기 전인 7월28일자 검찰 수사 기록은 ‘박인회가 MBC측에 X-파일 자료를 제공한 부분’을 ‘범죄사실’로 적시하지 않았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취재원 보호라는 언론 윤리를 외면한 MBC의 태도에 있는 것이죠.”
2003년 8월 SBS는 양길승 청와대 부속실장이 업자들과 유흥업소에 출입하는 장면을 촬영한 ‘몰래 카메라’ 테이프를 방영해 논란이 일었다. 한 제보자가 SBS에 제공한 것이다. 당시 검찰은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SBS에 원본 비디오테이프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SBS는 ‘취재원 보호를 위해 원본은 절대 넘겨줄 수 없다’며 주지 않았다.
당시 한국기자협회와 SBS노조는 성명을 통해 “취재원 보호는 기자에게는 생명과 같은 것”이라며 SBS의 방침을 지지했다.
‘신동아’는 박인회씨의 인터뷰 내용에서 이상호 기자 및 MBC측과 관련된 부분, 이상호 기자의 검찰 진술 내용 전반에 대해 당사자인 이 기자와 MBC측에 설명을 요청했다.
이 기자는 X-파일 사건 관련 사안을 개인이 결정해 대답할 수 없으므로 질의서를 보내주면 회사와 상의해 먼저 연락을 주겠다고 말했다. ‘신동아’는 이 기자에게 질의서를 보냈으나, 만 3일후 최종마감 때까지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2005년 7월29일 통신비밀보호법 위반혐의로 구속되는 박인회씨.
“내가 본부장실로 들어가자 이 본부장은 먼저 와 있던 비서를 내보냈습니다. 서로 명함을 건넨 뒤 나는 소파에 앉자마자 거두절미하고 이 본부장에게 X-파일 녹취록을 보여줬습니다. 이 본부장은 문건을 보자 곧장 책상 앞으로 가더군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전화기로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똑같은 게 여기 있네’라고 하며 한참을 더 대화한 뒤 다시 소파에 와 앉았습니다.”
▼ 녹취록을 본 뒤 이 본부장이 뭐라고 하던가요.
“정중하게 ‘잘 알겠습니다. 내가 오른팔처럼 데리고 있는 김OO 이사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김 이사와 상의해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는 김 이사를 불러 나에게 인사시켰습니다.”
▼ 그럼 박 선생은 이 본부장에게 무슨 말을 했습니까.
“개인적으로 삼성측이 이 녹취록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습니다. 공씨와 임씨의 사정도 딱해 보여 중개자 역할을 하게 된 거죠. 그래서 이 본부장에게 공운영씨 등을 염두에 두고 ‘국정원 직원이 강제로 퇴직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도울 방법이 없겠냐’고만 했습니다.”
박씨는 검찰 공소 내용과는 달리 “5억원이라는 구체적 금액을 얘기한 바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본부장이 전화 통화를 하며 “똑같은 게 여기 있네”라고 말한 것과 관련해선 “도청 녹취록의 또 다른 주인공인 홍석현씨와 상의한 게 아닌가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본부장은 검찰 진술에서 이를 부인하며 “삼성 구조본 김인주 사장에게 전화한 것이다. 명확한 기억은 없지만 상대방의 김을 빼기 위해 내가 그렇게 말한 것 같다”고 말했다.
‘5억원’ 공방
▼ 박 선생이 5억원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습니까.
“삼성측에 구체적 액수를 얘기하면 법률에 저촉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 본부장에게 5억원 말을 꺼냈다는 것은 이 본부장만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 그 말을 믿을 만한 근거가 뭡니까.
“국정원 전 직원에게 도움을 주는 문제의 경우 이 본부장은 ‘김 이사와 상의하라’고 했습니다. 그 지시에 따라 김 이사는 나와 두 차례 만났습니다. 그런데 김 이사는 X-파일 사건 법정에서 5억원 얘기를 꺼낸 적이 없습니다. 내가 실제로 이 본부장에게 5억원 얘기를 했다면, 이 본부장이 ‘구체적으로 상의하라’며 이 문제를 일임한 김 이사에게도 5억원 얘기를 하지 않았을 리가 없잖아요. 실제로 나는 삼성으로부터 한푼도 요구한 적도, 받은 바도 없습니다.”
박씨는 “내가 삼성에 찾아간 것이 잘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파렴치범으로 매도당할 정도의 잘못은 아니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5년여 전 별일도 없이 끝난 해프닝이 X-파일 사건이 터지자 ‘물 타기’용으로 부각된 것이다. 오히려 내가 삼성으로부터 미행을 당하는 등 시달렸다”고 했다.
“내가 이 본부장을 만나던 날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과도 약속이 되어 있었어요. 나는 이 본부장을 만난 뒤 삼성 본관을 나와 전직 국정원 직원 임모씨와 함께 택시를 타고 문화관광부 장관실로 갔습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박 장관에게 녹취록을 전달했습니다. 그러면서 ‘말단직이라도 괜찮다’며 임씨의 취업을 청탁했어요. 그런데 삼성 직원 2명이 삼성 본관에서부터 박 장관 부속실 복도까지 우리를 미행했습니다. 우리가 걸을 땐 몰래 뒤따라 걷고, 우리가 차를 타면 차로 뒤쫓아왔어요. 나는 미행당하는 사실을 미처 몰랐는데, 국정원 출신인 임모씨가 눈치를 채고 일러줬어요.
나는 장관실을 나와 다시 택시를 타고 프레지던트호텔 커피숍으로 갔습니다. 삼성 직원들은 거기까지 따라왔어요. 내가 경찰에 신고해 경찰 두 명이 출동하는 것을 보고서야 그들은 도주했습니다. 그 날 이후 누군가 내 뒤를 밟고 있다는 느낌을 계속 받았습니다.”
삼성 관계자, “박씨 미행한 사실 있다”
검찰의 X-파일 수사과정에서 1999년 당시의 삼성 관계자는 “박씨를 미행한 사실이 있다”고 인정했다. 김모 당시 이사는 검찰 조사에서 “박인회를 미행한 직원들로부터 미행한 결과를 보고받았다”고 진술했다.
“직원들로부터 ‘박인회가 (삼성 본관) 1층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와 함께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실로 갔다. 박씨가 먼저 박지원 장관실로 들어가고, 함께 있던 남자는 비서실에 앉아 대기하고 있었으며, 잠시 후 이 남자는 박씨의 신호에 따라 대봉투 하나를 들고 들어갔다. 나올 때는 봉투가 없었다’는 내용으로 들었다.”(김 당시 이사 검찰 진술)
그러나 삼성 고위관계자는 검찰에서 “나는 직원들에게 박인회를 미행하도록 시킨 적이 없다”고 부인하면서 “나중에 이 사람(박인회씨)에 대해 알아보라고 한 적은 있는데, 혹시 밑에서 한번 알아본 것인지는 모르겠다”고 진술했다.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은 박씨가 준 녹취록을 흥미롭게 읽었다고 한다. 박씨는 “박 장관과는 잘 알던 사이여서 보좌관에게 전화하니 바로 장관 면담 약속을 잡아주더라”고 했다.
▼ 도청 녹취록을 보여주니 박지원 장관은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박 장관은 5분 동안 진지하게 숙독하더니 내게 ‘아, 박형, 정말 고맙소’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문건을 갖고 온 사람이 밖에 있다’고 말하며 임모씨를 장관에게 소개하고 ‘말단직이라도 부탁드린다’고 했어요. 그러나 임씨는 취업이 되지 않았습니다.”
▼ 그후 공운영씨, 임모씨와는 어떻게 됐습니까.
“나는 테이프와 녹취록을 복사한 뒤 공씨에게 돌려줬습니다. 공씨와 임씨는 내게서 도움을 기대했는데 전혀 그렇게 되지 못했어요. 그래서 나와의 관계도 서먹해졌습니다.”
“공운영씨와 서먹해져”
▼ 검찰은 공씨 집에서 274개의 미공개 도청 테이프를 압수했고, 일부 국회의원과 시민단체는 이 테이프 내용의 공개와 수사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내가 모든 벌을 다 받았다는 사실이 시민운동가들에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즉 X-파일 사건은 불법도청 및 도청내용 유포의 불법성에 대한 문제, 도청 내용에 대한 수사 문제 등 두 가지 쟁점을 안고 있어요. 도청내용 유포의 문제에 대한 처벌은 거의 완결됐습니다. 이상호 기자는 1심에서 무죄를 받았고, 나는 출소했고, 공씨도 얼마 뒤면 복역을 마칩니다. 파일 폭로자는 벌을 다 받았으니 이제는 274개 파일 내용도 수사해야 합니다. 한 시민단체는 ‘도둑이 있다고 가리킨 사람을 왜 처벌하는가. 도둑을 처벌하라’고 표현했어요.”
▼ 그러나 파일에 들어 있는 사람들은 불법도청의 희생자라는 의견도 만만치 않습니다.
“국정원이 도청한 현장에선 무엇인가 특별한 일이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국정원이 그런 정보를 취득하고도 방기한 것이므로 이것은 잘못입니다. 국가가 반드시 해야 할 사법적 심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료로서의 가치가 커서 공운영씨가 들고 나온 것 아닙니까. 따라서 이제라도 274개 테이프 내용은 공개리에 밝히고 수사해야 합니다.”
▼ 도청자료 공개 및 수사가 통신비밀보호법 등을 침해해 법치주의를 흔들게 될 것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파일 내용을 공개하지 않을 경우 이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권력자들이 사익(私益)을 위해 이를 사용할 가능성이 더 높아집니다. 공개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사회 투명성’을 해치는 일이 됩니다.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자들은 이미 다 처벌받았어요. 통신비밀보호법이 만병통치약인가요. 그것으로 모든 부조리에 면죄부를 주려 해선 안 됩니다.
이미 검찰에 입수된 274개 도청 자료를 수사하는 것은 앞으로 불법도청이 없도록 방지하는 것과도 별개로 다뤄야 할 일입니다. 보다 투명하고 건강한 내 조국이 되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1990년대 초 박인회씨가 에드워드 케네디 미국 민주당 상원의원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씨는 미국 민주당 선거캠프에서 활동했다.
“미완이 아니라 아직 시작도 안 한 셈이죠. 진실을 영원히 덮을 수는 없습니다. 정치권은 남은 도청 자료의 내용을 공개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불리한지, 이득인지를 따져선 안 됩니다. 여야는 X-파일 내용 공개를 위한 특별법을 이번 정기국회 때 통과시켜야 합니다. 이번에 인터뷰하는 것도 이를 촉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박씨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삼성측은 “우리는 ‘불법도청의 피해자’이며, 잘못은 불법도청을 한 안기부와 이를 유포한 박인회씨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삼성, “우리는 피해자”
이학수 부회장은 검찰 진술에서 “국가기관이 불법도청을 하고 제3자가 그 자료를 이용해 기업체를 협박하면서 거액을 요구하고 뜻대로 되지 않자 무려 5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언론사에 넘겨 공개한 행위에 대해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마음이 착잡하다. 박인회씨는 물론 불법도청 내용을 유출해 삼성그룹에 막심한 피해를 준 사람들을 모두 가려내 법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인주 당시 삼성 구조본 사장도 검찰 진술에서 “불법도청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도청 공포가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열심히 일하는 임직원들의 정상적인 기업 활동이 위축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도 2005년 8월3일 자택을 찾은 언론인들에게 “박인회씨가 녹취록을 보여주며 인사청탁을 했으나 거절했고, 국정원에 이를 신고했다. 녹취록은 실체가 없었다”고 밝혔다. 박인회씨가 건넨 녹취록을 무시했으며 녹취록을 일절 활용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X-파일 내용과 관련, 이학수 부회장과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린 수사에 대해 시민단체는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사법기관인 검찰이 무혐의 결정을 내린 것을 두고, 객관적 근거도 주장하지 않은 채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법조계 일각에선 “대화 내용 부분에서 불법성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으므로 이 본부장과 홍 전 회장 역시 ‘도청의 피해자’로 봐야 한다”는 적극적 해석도 나온다.
274개 미공개 도청테이프 내용에 대한 수사 문제와 관련, 검찰 주변에서는 신중론이 우세하다. 일부는 “불법 도청 자료 자체는 증거로서의 가치가 없다. 도청 내용 역시 불법으로 취득된 정보인 만큼 수사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2005년 10월6일 천정배 당시 법무장관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도청 테이프 274개의 내용에 대해 수사에 착수하는 것은 종국적으로 내용 공개에 해당하므로 통신비밀보호법을 위반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도청 내용 수사가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법리적 원칙’도 충분히 존중해야 한다는 얘기다.
한나라당의 일부 의원은 “X-파일 사건의 본질은 ‘재벌 비리’라기보다는, 무차별 불법도청을 일삼은 ‘권력범죄’”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도청의 폐해를 근절하는 방안을 찾는 게 더 시급한 일이라는 것이다. 검찰 수사 결과에 따르면 김영삼 정권 때는 연인원 5400여 명, 김대중 정권 때는 상시인원 1800여 명이 도청 피해자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1999년 박인회씨의 손에 들어온 X-파일은 2004년 12월 MBC 이상호 기자에게 넘겨졌다. 박씨와 이 기자의 만남은 X-파일 사건이 본격 점화되는 지점이다.
▼ 이상호 기자는 처음 어떻게 만났습니까.
“2004년 12월 초 외신기자클럽 소속 A기자에게 ‘대기업 비자금과 관련해 제보할 것이 있으니 잘 아는 기자를 소개해달라’고 했어요. A기자는 외국 방송사에 근무하는 한국인 기자로, 2002년쯤부터 잘 알고 지내왔습니다. A기자는 이상호 기자를 추천해 줬습니다. 2~3일 뒤인 12월5일 오후 2시쯤 나와 A기자, 이 기자 3명이 서울 마포의 불교방송 건너편 커피숍에서 함께 만났습니다.”
▼ 커피숍에서 X-파일 녹취록을 이상호 기자에게 바로 건네줬습니까.
“그때만 해도 나는 사람을 잘 믿는 편이었어요. 이상호 기자를 만난 지 10분도 안 돼 간단한 설명과 함께 X-파일 녹취록을 이 기자에게 줬습니다. A기자는 자료를 보려 하지도 않았고요.”
X-파일 보도 이후 ‘그렇게 엄청난 특종 자료가 어떤 이유로 MBC의 이상호 기자에게 흘러들어갔을까’라는 궁금증이 일기도 했다. 참여연대도 지난해 “언론사가 도청자료를 입수한 경위를 수사하라”고 검찰에 촉구한 바 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좀 싱거워 보였다.
▼ A기자가 만일 다른 기자를 소개했다면 그 기자가 X-파일을 입수했겠군요.
“그렇습니다. 당시 나는 이상호 기자를 전혀 알지 못했지만 A기자가 추천했기 때문에 ‘사람은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죠.”
이상호 기자도 검찰 진술에서 “2004년 외신기자클럽 소속 A기자가 휴대전화로 연락해 ‘이상호 기자, 오랜만이다. 국내 유수의 대기업 비자금 관련 제보가 있다는데 취재가 가능하겠는가’라고 의향을 물어와 ‘가능하죠’라고 답했다. 내가 A기자에게 연락해 12월5일 A 기자와 박인회씨를 만나게 됐다”고 밝혔다.
‘박인회씨가 처음 만난 자리에서 녹취 문건을 건네주었다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검사의 질문에 이 기자는 “내가 소속돼 있던 프로그램(MBC ‘시사매거진 2580’)이 공신력이 있었고 A 기자와 박씨가 나를 만나기 전에 많은 대화를 했기 때문에 박씨가 A 기자를 먼저 믿고 내게 건네준 것 같다”고 설명했다.
검찰 수사에 따르면 이상호 기자는 커피숍에서 문건을 쭉 읽더니 흥분하기 시작했다. 당시 두 사람의 대화에선 ‘목숨을 걸겠다’는 ‘결의’까지 나왔다.
박인회 : 방송 내보낼 자신 없으면 시간 끌지 말고 여기서 포기하라.
이상호 : 목숨을 걸고 방송하겠다.
박인회 : 보도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상호 : 이런 내용이라면 충분히 방송할 수 있다. 준비가 되면 연락하겠다.
구찌백과 ‘미국출장 소감’
그러나 육성을 녹음한 테이프가 없는 녹취록은 무용지물. 박인회씨는 “2004년 12월23일 이상호 기자는 내게 전화를 걸어와 ‘테이프가 없으면 방송을 못한다. 테이프를 지금 달라’고 요청해왔다”고 말했다. 이에 박씨가 이 기자에게 “일단 미국으로 오라”고 하여 이 기자는 12월28일 미국으로 출국했다.
그런데 이 기자는 박씨로부터 테이프를 받기 위해 미국으로 출국하면서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문제의 ‘미국출장 소감’ 글을 올려 이른바 ‘구찌 명품 백’ 파문을 일으켰다.
MBC 간부들과 함께 태영측으로부터 구찌 핸드백을 선물로 받았다가 돌려준 사실을 공개한 것. 이 글로 인해 해당 프로그램이 폐지됐고 보도국장 등 간부들이 보직사퇴·정직 등의 징계를 당했으며 사과방송이 나가는 등 MBC는 내홍을 겪었다.
이 기자는 이 글에서 “이번 미국 출장은 자본에 대한 깊은 성찰을 수반하는 일이다. 밤잠을 포기해가며 지금껏 구찌 핸드백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고 있는 것도 모두 이번 출장의 성격 때문”이라고 적었다.
박인회씨는 “뉴욕 JFK공항에 내가 직접 차를 타고 마중 나가서 이 기자 일행(2명)을 뉴욕 인근 뉴저지 주 집으로 데려왔다. 숙식도 내 친구 집에서 해결하게 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이 기자에게 테이프를 준다고 확답을 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한번 와 보라”고만 했다는 것이다. 이 기자도 검찰 조사에서 “내가 ‘테이프를 달라’고 했더니 박인회가 ‘일단 나의 뉴욕 집으로 오라’고 하여 결국 미국으로 출장을 가게 됐다”고 진술했다. 하긴 박씨에겐 이 기자에게 테이프를 줘야 할 ‘채무’ 같은 것도 없었다.
▼ 뉴저지 집에 도착한 뒤 이상호 기자에게 도청 테이프를 줬나요.
“뉴저지에서 이상호 기자와 술 한잔 하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어요. 그런 뒤 이 기자는 ‘테이프를 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찾아봤는데 없더라,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이 기자는 펄펄 뛰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이해는 됩니다. 회사를 발칵 뒤집어놓을 내용의 ‘미국 출장 소감’까지 띄우고 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상황이었으니…”
“‘테이프 없다’고 하니 펄펄 뛰어”
▼ 도청 테이프는 실제로 없었습니까.
“뉴저지 집과 은행 금고에 도청 테이프를 복사한 CD를 보관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CD를 이 기자에게 주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 그렇다면 이 기자를 속인 것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나는 CD가 아닌 카세트테이프를 이 기자에게 주려 했습니다. 공운영씨에게서 복사한 그 테이프 말입니다. 나는 그게 뉴저지 집에 있는 줄 알았어요. 내가 이 기자를 미국까지 헛걸음하게 해서 내게 돌아오는 이익이 없잖아요. 그런데 집안 곳곳을 찾아봤지만 정말 없었어요. 사실은 테이프를 서울의 부모 댁에 뒀어요. 시간이 오래 지나면서 뉴저지에 있는 것으로 착각했던 겁니다. 이 기자에게도 ‘혹시 서울 집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어요.”
-이 기자는 ‘당장 서울에 같이 가자’고 했을 것 같은데.
“당연하죠. 이 기자와 나는 서울행 비행기를 같이 탔습니다. 12월30일 서울에 도착했죠. 우리 둘은 밤 12시쯤 상도동 제 부모 댁에 갔습니다. 이 기자는 늦은 밤인데도 ‘같이 찾아보자’며 집안으로 들어올 기세였어요. 내가 ‘집이 누추하다’며 제지했죠. 1시간쯤 뒤 도청 테이프를 찾아내어 집앞에서 기다리던 이 기자에게 건네줬습니다.”
▼ 이 기자로부터 어떻게 테이프를 돌려받았습니까.
“다음날 테이프를 이 기자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러고는 이날 바로 미국으로 갔어요. 하루 만에 한국과 미국을 왕복한 여행이어서 굉장히 피곤했습니다. 그런데 테이프를 받은 이후로 이 기자는 내게 연락을 잘 하지 않았고 보도도 되지 않았습니다. 나도 잊어버리다시피 했어요.”
어두컴컴한 상도동 골목에서 박인회씨로부터 테이프를 넘겨받는 순간의 ‘희열’을 이 기자는 검찰 조사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박인회가 ‘이사를 해서 테이프를 찾기가 어려웠다’고 말한 것 같았는데, 나는 테이프를 받으면서 너무 흥분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기자는 12월31일 다시 미국으로 가 미국측 전문가로부터 ‘테이프 속 대화의 주인공이 이학수 부회장과 홍석현 전 회장이 맞다’는 감정결과를 받아내고 1월10일 귀국했다. 이 기자는 미국에 있는 동안 박씨에게 1000달러를 제공했고, 박씨의 서울~뉴욕 왕복 비행기표도 끊어줬다. 이런 비용은 MBC측에서 댔다. 비행기표는 검찰이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1000달러 건의 경우 X-파일 사건 당시 박씨가 ‘파렴치한’으로 몰리는 계기의 하나가 됐다.
이에 대해 박씨는 “내가 먼저 돈을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이 기자 일행이 ‘이렇게 연말에 두 사람이 여기서 자고 먹고 신세만 지면 어떻게 합니까. 이것만은 받아줘야 마음이 편합니다’라고 간곡히 말해서 받았다. 이 기자가 회사에 제출할 영수증에 서명도 해줬다. 이 돈으로 집을 빌려준 친구에게 선물을 사줬다. 이런 일로 내게 법적·윤리적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법원도 박씨가 1000달러를 받은 것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최종 판결했다.
5년이 지나 폭로한 이유
결과적으로 박인회씨는 2004년 12월5일, 12월31일 두 차례에 걸쳐 이상호 기자에게 ‘안기부 미림팀이 1997년 불법 도청한 녹취록과 테이프’를 모두 넘겨준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박씨는 이 기자에게 금전적 대가를 요구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재판 결과 박씨와 이 기자 사이에는 불법적 거래가 없었다.
박씨가 공운영 전 미림팀장으로부터 X-파일을 건네받아 삼성으로 찾아간 것은 1999년이다. 법원은 이 일에 대해선 박씨에게 ‘공갈 미수죄’를 적용했다. 그러나 적어도 박씨가 5년여 뒤인 2004년 말 언론사에 X-파일을 제공한 것은 1999년의 일과는 무관한 것으로 재판 결과 드러났다. “삼성에 협박하다 안 되니까 MBC에 넘겼다”는 주장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5년여의 간극이 너무 길 뿐 아니라 MBC에 X-파일을 준 것은 협박이나 금전적 대가와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박씨는 이 기자에게 X-파일을 제공한 이유에 대해 “언론이 보도해 홍석현씨의 주미 대사 직무를 막아야 한다는 공익적 목적”이었다고 밝혔다.
▼ X-파일을 집 안에 묵혀둔 지 5년여가 지난 시점에 갑자기 이상호 기자에게 이를 제공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2004년 말 미국에서 홍석현씨가 주미 한국대사를 맡을 것이라는 소식을 접했어요(홍 전 회장은 2005년 2월 주미대사에 임명됐다). 홍씨는 더 나아가 유엔 사무총장이나 여권의 차기 대통령후보로 거론되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하는 순간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불법행위 모의’를 한 사람이 외교관으로 활동하도록 놔둬선 안 되잖아요. 정부가 면책특권까지 주면서 홍 전 회장을 세계의 정치 중심도시인 워싱턴과 뉴욕으로 보내 한국의 국익을 대변하게 하는 것은 안 될 말이죠. 아무런 조건 없이 언론사에 X-파일을 제공해 이를 막아야 할 때가 됐다고 결심했습니다.”
▼ 홍 전 회장이 주미대사로 임명되지 않았다면 X-파일을 공개하지 않았을 거라는 뜻인가요.
“청와대의 임명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나는 파일 공개를 통해 이를 증명하려 했을 뿐입니다. 홍 전 회장이 민간 언론사에서 활동하는 것까지 문제 삼고 싶지는 않습니다. ‘공직’에 진출하려 하지만 않았다면 나는 X-파일을 결코 공개하지 않았을 겁니다.”
▼ X-파일을 거주지에서 가까운 미국 주재 한국 언론에 제공할 수도 있었을텐데요
“미국에 있는 기자들은 잘 몰라요. 미국에서 줬다면 ‘통신비밀보호법’으로 처벌될 일은 없었겠죠. 나는 한국에 ‘통신비밀보호법’이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나 같은 해외 교포가 그런 걸 어떻게 알겠어요. 단지 엄청난 비리의혹을 고발하겠다는 마음에서 자료를 제공했을 뿐인데 1년이나 억울한 옥살이를 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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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기자, “박인회는 공익제보자”
▼ X-파일 사건이 터진 것은 국내 정치적 이유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요.
“나는 2002년 대선 때 정몽준 후보측의 강신옥 창단기획단장 특보로도 활동했어요. 정치적 목적으로 X-파일을 활용할 생각이었다면 그때 써먹었을 겁니다.”
강신옥 변호사는 박씨가 X-파일 사건으로 구속된 뒤 박씨의 변호인으로 활동했다. 강 변호사는 “박씨가 한때 삼성을 찾아간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는 행위였다. 그러나 삼성으로부터 금전적 이익을 취하지는 않았다. 나무가 아닌 숲을 본다면, 그는 2004년 큰맘 먹고 용기 있게 비리자료를 제보한 사람이다. 벌을 줄 게 아니라 칭찬을 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이상호 기자도 X-파일 보도 이후인 2005년 12월27일 ‘불법도청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공동대책위원회’와 ‘민주노동당’이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공동 주최한 토론회에 참석해 박인회씨가 ‘공익 제보자’라는 점을 인정했다. 이 기자는 토론회에서 “박씨가 DJ 정권 초반에 삼성을 찾아간 것은 사실이고 금전적 이득을 기대한 것도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몇 년 뒤 제보할 때는 공익적 제보자로서 온 것이고, ‘특종으로 인정받아 돈을 주겠다’고 제안했더니 그것도 싫고 감사패나 달라고 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MBC는 2004년 12월말 이 기자가 박씨로부터 X-파일을 입수한 지 6개월이 지나도록 기사를 내보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X-파일의 존재 및 제작 경위, 대강의 파일 내용이 MBC 외부에도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몇몇 언론이 이를 보도하기 시작했다(2005년 6월8일 ‘미디어 오늘’, 7월20일 ‘동아일보’ 등). 언론은 ‘이상호 기자의 X-파일’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줬다. 파문은 서서히 확산됐다.
마침내 2005년 7월21일, 조선일보는 안기부 불법 도청 실태와 ‘이상호 기자의 X-파일’의 존재를 상세히 보도했다. 이날 저녁 MBC는 조선일보 보도를 따라가며 X-파일 내용의 일부를 보도했다. 그러나 같은 시각 KBS는 X-파일 내용에 대해 MBC보다 더 상세하게 보도했다. 그러자 MBC는 다음날 X-파일 내용 전반에 대해 심층 보도했다.
박인회씨는 “MBC가 내게서 완벽한 자료를 받고도 6개월 이상 보도를 하지 않은 것은 문제다”라고 주장했다. 2005년 7월 개인적인 일로 입국한 박씨는 X-파일 보도가 봇물처럼 터져나오기 직전 이상호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시내 한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박씨는 “이 기자가 ‘바쁘다’며 5분 만에 자리를 뜨더라”고 했다.
“MBC측은 6월부터 언론이 X-파일 관련 보도를 하기 시작해 파문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MBC측은 6개월이 넘도록 수없이 내부 검토를 한 끝에 X-파일의 유포 및 공개가 한국에선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등 매우 민감한 법적 책임을 수반한다는 것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 살고 있는 나는 사정을 몰랐다. MBC가 당연히 실정법상의 문제점을 취재원인 내게도 알려줬어야 한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시한폭탄’ 같은 한국 체류를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박씨)
검찰에 쥐어준 녹취록 ‘원본’
▼ 박 선생이 제공한 X-파일이 7월21일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것을 지켜봤습니까.
“신문과 방송을 통해 봤습니다. 자료는 MBC에 줬는데 다른 곳에서 먼저 썼더군요. 그런데 다음날부터 X-파일 사건이 일파만파로 더 크게 번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서야 ‘아차, 한국에 있으면 내가 위험할 수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 자기 보호 차원에서 출국을 시도했겠군요.
“서둘러 미국으로 돌아가려 했죠. 그런데 마침 휴가철 해외여행 성수기여서 비행기 표를 구할 수 없었어요. 이 문제로 부탁할 사람은 이 기자밖에 없었죠. 이 기자에게 표를 구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기자는 7월25일 ‘26일 출발하는 표를 구했다’고 연락을 해왔습니다. 고마웠죠. 그런데 26일 공항에 나가자 본 적도 없는 MBC 기자들이 ‘같이 미국에 가자’고 따라붙었습니다.
MBC측은 내게서 핵심 자료를 받아간 뒤 6개월이 지나도록 보도가 된다, 안 된다는 말 한마디 없었어요. 그러다 갑자기 X-파일 사건이 터지자 ‘박인회에게서 정보를 더 얻을 게 있겠다’ 싶어 그렇게 한 것 같아요. 그들이 생각하기에 미국에 있을지도 모르는 자료를 추가로 받아내겠다는 의도인 듯했습니다. ‘사전에 물어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같이 가자는 게 무슨 경우냐, 따라오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국정원에 같이 갑시다”
▼ 그날 공항에서 연행됐는데요.
“나중에 알고보니 이미 나는 법무부에 의해 출국 금지된 상태였습니다. 비행기에 탑승하지 못했죠. 국정원 직원 3명이 내게 다가오더군요. 이들은 ‘국정원에 같이 가자. 임의동행이니 싫으면 말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여기서 하자’고 해서, 공항 VIP실에서 자정까지 이들로부터 조사를 받았죠. 국정원 조사가 끝난 뒤 검찰에 긴급체포되어 7월28일 구속영장이 청구됐습니다. 의협심 하나로 X-파일을 제보했는데, 꼼짝없이 걸려든 셈이죠.”
언론 보도에 따르면 국정원 고위 관계자는 7월28일 “MBC와 박인회씨 사이의 부적절한 거래가 있었는지 조사 중이다. 삼성에 테이프를 팔려고 했던 박씨가 공익 차원에서 MBC에 제보했다는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 같은 언급은 재판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지만, X-파일 사건 초기 ‘안기부 불법 도청’에 집중된 여론의 초점이 ‘제보자의 부적절한 거래 의혹’ 쪽으로도 분산되는 효과를 톡톡히 냈다. 박씨와 관련된 내용은 8월5일 김승규 국정원장이 ‘자체 중간조사 결과 및 사과문’을 발표할 때도 포함됐다.
박인회씨는 검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박씨는 “내가 이상호 기자에게 제공한 녹취록 3부를 MBC측이 검찰에 모두 넘겨준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X-파일 보도를 전후해 MBC는 이 녹취록을 여러 개로 복사했다. 일부 언론사나 국가기관은 ‘복사본’만 갖고 있었다. 그러나 박인회씨가 이 기자에게 제공한 녹취록 원본 3부는 MBC만이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검찰은 MBC측에 대해 “자료를 넘기라”고 요청했다.
▼ 이상호 기자에게 제공한 녹취록을 MBC측이 검찰에 넘겼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됐습니까.
“조사를 받던 중 검사가 ‘MBC에서 다 받았습니다. 이거, 당신이 이상호 기자에게 준 X-파일 녹취록 맞죠?’라며 내게 확인해왔어요. 내가 2004년 12월5일 이 기자에게 제공한 바로 그 녹취록이 틀림없었습니다.”
▼ 원본과 복사본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었습니까.
“이 기자에게 준 녹취록은 내가 오랫동안 보관하고 있던 것이라 한눈에 보면 압니다. 그 문서는 미국 뉴저지 주의 종이 용지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의 A4 용지 보다 규격이 조금 큽니다. 복사한 녹취록과는 쉽게 구별이 되죠. 이 기자가 자주 읽어보고 여러 군데 들고 다녔는지 손때가 많이 묻어 있더군요. 검사 책상 위에 놓인 그 녹취록을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후 수감돼 있으면서도 언론에 대해 배신감을 많이 느꼈습니다. 적어도 소임을 다한 제보자를 적극적으로 보호했어야 했습니다.”
“손때 묻은 녹취록 보며 뭉클”
MBC는 검찰이 박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한 지 하루 만인 2005년 7월29일 검찰의 요청을 받자 이 녹취록을 넘겼다. 검찰의 이 날짜 압수조서에 따르면 “주식회사 문화방송 기자 이상호가 같은 회사 기자 OOO을 통하여 피의자 박인회로부터 받은 도청 녹취보고서 3건과 도청 녹음 테이프를 복사한 마스터CD 2장을 검사실에 임의 제출하므로 법관의 영장 없이 이를 압수하다”라고 되어 있다.
이상호 기자도 검찰에서 “7월29일 검찰청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OOO 기자를 통해 녹취 문건 3개와 도청 테이프를 복사한 마스터CD 2장을 제출했다”고 동일하게 진술했다.
▼ 왜 배신감을 느꼈다는 겁니까.
“나는 미국 한인사회에서 민주화운동을 한 전력이 있습니다. 다양한 사회활동도 했어요. 그래서 취재 윤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죠. 이에 비쳐볼 때 MBC측의 행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비리의 증거자료를 언론사에 제공한 ‘제보자’예요.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도, 받지도 않았습니다. 1000달러 문제 역시 판결을 통해 나의 떳떳함이 입증되지 않았습니까. 무엇보다 MBC 이상호 기자도 나를 ‘공익제보자’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MBC는 취재원인 나로부터 자료를 제공받아 X-파일 보도에 결정적으로 이용해 언론으로서 크게 성가를 높인 뒤엔 그 제보자료로 인해 취재원이 사법처리의 위기에 빠졌음에도 제보자료를 아무 거리낌 없이 검찰에 넘겨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