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총독부가 길회선 종단항 예정지로 발표한 나진만에 대한 ‘동아일보’ 1932년 11월13일자 르포기사. 기사 위쪽 사진은 지도에 이름조차 표시되지 않았던 오지 나진만의 당시 전경이다. 왼쪽은 나진 주변에 대한 부동산 투자로 수백배 차익을 남긴 동일상회 두취 김기덕.
‘오늘 하루도 녹록지 않겠는걸. 대체 나진이 뭔데 청진, 웅기랑 맞먹는다는 걸까.’
얼마전 사업상 알고 지내는 일본인 관리로부터 길회선(吉會線·옌지-회령 철도) 종단항(終端港·철도종착역과 연결된 항구) 후보지가 청진, 웅기, 나진 세 곳으로 압축됐다는 정보를 건네들은 뒤부터 줄곧 그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의문이었다.
‘청진이야 인구 4만의 중견도시인데다 함경북도 최대의 항구이니 당연히 유력한 후보지일 테고, 웅기야 병합 이후 일본이 총력을 기울여 건설한 군항이니 청진과 자웅을 겨뤄봄 직한데, 황무지나 진배없는 나진은 도대체 왜 후보지에 낀 것일까. 청진, 웅기와 격이 맞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나진이 종단항으로 유력하다는 뜻 아닌가.’
김기덕은 일단 나진이 어디에 붙어 있고 어떻게 생긴 곳인지 직접 가서 확인하기로 마음먹었다. 서른넷이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산전수전 다 겪은 이 노회한 사업가는, 나진까지 가는 네댓 시간의 여정 동안 자가용 뒷좌석에 앉아 종단항 후보지에 슬그머니 나진을 끼워넣은 일본의 속셈이 뭘까 숙고하고 또 숙고했다.
김기덕은 1892년 함경북도 부령군의 가난한 농부 김형국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인근 경성군의 함일학교에서 얼마간 신학문을 닦은 후 열여덟 살에 혈혈단신으로 청진에 가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강제합방을 한 해 앞둔 청진의 상권은 이미 일본인 상인들의 손에 넘어간 상태였다. 김기덕은 이와타(岩田)라는 일본 상인의 상점에서 잔심부름꾼으로 일했다. 근면하고 명석한 김기덕은 잔심부름꾼 생활도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고, 주어진 기회를 십분 활용해 열심히 일본어 실력을 닦았다.
강제병합 후 청진에 축항(築港) 공사가 시작됐다. 항만의 시공을 맡은 일본 상선회사는 통역과 잔심부름을 맡을 소년을 구했다. 이태 동안 김기덕의 성실한 태도를 눈여겨보아온 이와타는 김기덕을 상선회사에 추천했다. 처음엔 일개 잔심부름꾼으로 들어갔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 덕분에 얼마 후 정규직 측량 보조기사로 채용됐다. 1년 후에는 ‘보조’자도 떼버리고 측량기사로 승진했다.
함경북도 토지왕 김기덕
서글서글한 성격의 김기덕은 누구와도 잘 어울렸지만, 특히 일본인 간부들의 총애를 받았다. 1913년 청진항 측량이 끝나자 측량기사들은 일본으로 돌아갔다. 김기덕을 아끼던 간부들은 귀국 선물로 그의 일본행을 주선했다. 오사카로 건너간 김기덕은 학교에 입학하는 대신 간장 도매상에 점원으로 취직했다. 2년 남짓 일본 상인들의 상술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학교에서는 도저히 배울 수 없는 생생한 현장학습을 했다.
1915년 스물네 살 김기덕은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청진으로 돌아와 꿈에 그리던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지인들과 ‘공동무역상사’라는 회사를 차린 후 청진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가며 조선의 곡물과 목재를 수출하고 연해주의 해산물과 잡화를 수입했다. 오랫동안 준비한 사업인 만큼 국제무역은 그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줬다. 이와타의 상점에 잔심부름꾼으로 들어간 지 10년도 안 돼 김기덕은 함북에서 손꼽히는 부호로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