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호

신군부 주역들의 ‘무용담’ 통해 본 12·12 그날 밤, 최규하의 진실

탁! 대통령 앞에 내려놓은 권총… 최규하, JP에게 “나 간밤에 아주 죽을 뻔했소”

  • 천금성 소설가, 전두환 전기작가

    입력2006-12-06 17: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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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문도가 내민 ‘전두환 대위’ 인사카드
    • 이순자의 엄명 “12·12를 기록으로 남겨야 ‘각하’ 진면목 알릴 수 있다”
    • 전두환 수행해 총리공관 찾은 이학봉 허리춤엔 권총이…
    • 대통령 면전에서 ‘육참총장 공관 총격’ 보고한 숨은 뜻
    • 점퍼 안주머니에 권총 넣고 최 대통령 마주한 백운택
    • “야, 백 장군! 각하 앞에서 그게 무슨 짓이야!”
    • 1980년 5월, 중동 방문 귀로에 페낭 섬에 머무른 속내는?
    • 신군부 인사들, “최 대통령에 줄기차게 하야 강권…주역은 주영복 장관”
    신군부 주역들의 ‘무용담’ 통해 본 12·12 그날 밤, 최규하의 진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10월23일 오후 서울대병원 영안실을 방문해 故 최규하 전 대통령 빈소에 분향하고 있다.

    10월22일 최규하 전 대통령의 타계 소식을 전하며 몇몇 언론은 ‘불행한 대통령’이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을 맞고 유명을 달리한 그해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정식 선출되어 일국의 원수로 재임한 고인이지만, ‘불행’이라는 수식어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 ‘불행’이라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다. 헌정사상 최단기 재임, 외압설이 지배적인 하야가 그 한 축이다. 그러나 장안의 장삼이사들이 느끼는 또 하나의 불행은 그가 자신을 둘러싼 갖가지 미스터리에 대해 끝내 해명을 거부했다는 점일 것이다. 고인의 빈소를 찾은 전두환 전 대통령은 ‘그 진실은 고인이 남긴 글에서 소상하게 밝혀질 것’이라고 말해 궁금증을 더욱 증폭시켰다. 12·12 이후 사반세기, 미스터리는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그렇다고 안개 속에 숨겨진 당시의 내막을 추측만으로 얼버무릴 수는 없는 일이다. 아직 고인의 증언은 공개되지 않고 있지만, 우리는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몇 가지 근거를 갖고 있다. 1979년 12월12일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벌어진 일련의 일들과, 이듬해 8월 그가 하야할 때까지 청와대를 중심으로 벌어진 갖가지 사건들의 ‘또 다른 당사자들’은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 필자는 운 좋게도 이들 신군부측 인사들의 직접증언을 청취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새로 획득한 권력의 맛에 취해 있던 그들은 숨길 것 없다는 듯 과감하게 그날의 일들을 증언했다. 이들의 증언은 당시 최 전 대통령 주변에서 벌어진 일들을 재현하고 진실에 접근하는 데 있어 근거가 되리라고 믿는다.

    “전기를 써달라”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필자가 어떻게 ‘12·12쿠데타의 본질’에 접근하게 됐는지부터 밝히는 게 순서일 듯하다.

    10여 년간 외항선을 탄 필자는 1970년대 말 ‘경향신문’에 ‘표류도’라는 해양소설을 연재하느라 서울에 머무르고 있었다. 1980년 8월11일 아침 7시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선수는 그동안 일본인들이 수차례 도전했으나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대한해협 도영(渡泳)을 위해 부산 다대포를 출발했다. 이 이벤트는 ‘동아일보’가 창간 50주년을 맞아 기획한 여러 행사 가운데 하나였고, 조오련은 사상 최초로 4시간30분 만에 대마도 해안에 당도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해양작가인 필자는 동아일보의 요청에 따라 이 사건에 대한 글을 8월13일자에 기고했다.

    대학선배인 허문도씨가 연락을 해온 것은 바로 그 글을 보고서였다. ‘조선일보’ 외신부 차장을 그만둔 후, ‘한국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이원홍씨의 주선으로 주(駐)일본대사관 공보관으로 근무했던 그는 이 무렵 중앙정보부장 특별보좌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요청에 따라 남산 그의 집무실로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며 그가 간간이 외부와 하는 통화를 엿들어보니, 그가 하는 일이란 각 언론매체에 대한 통제인 듯했다.

    신군부 주역들의 ‘무용담’ 통해 본 12·12 그날 밤, 최규하의 진실

    12·12 쿠데타가 끝나고 군 수뇌부 인사가 발표된 뒤인 1979년 12월14일, 쿠데타 지휘부와 행동대장들이 보안사 본부건물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이중 보안사 간부 일부는 쿠데타계획을 모른 채 전두환 사령관의 지시에 따랐다. 앞줄 왼쪽부터 이상규 최세창 박희도 노태우 전두환 차규헌 유학성 황영시 김윤호 정호용 김기택. 둘째줄 왼쪽부터 박준병 이필섭 권정달 고명승 정도영 장기오 우국일 최예섭 조홍 송응섭 장세동 김택수. 셋째줄 왼쪽부터 남웅종 김호영 신윤희 최석립 심재국 허삼수 김진영 허화평 이상연 이차군 백운택.

    그 자리에서 그는 전두환 장군이 대위 계급장을 달고 (5·16 직후) 중앙정보부에 재직하는 동안 남긴 것으로 보이는 한 장의 인사카드 복사본을 내밀었다. “우리는 동지 사이다. 이 양반의 전기(傳記)를 써보겠냐?”고 물었다.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 성싶어 필자는 이를 흔쾌히 수락하고 곧 전 장군의 성장과정을 역추적해 두어 달 후인 10월말 탈고하는 것으로 일을 끝냈다. 이때 이미 전 장군은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상태였고, 자신이 이끄는 내각으로 하여금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헌법을 새로 만들어 7년 임기의 12대 대통령을 중임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이 12대 취임식 날짜에 맞추느라 필자의 책은 이듬해 2월에야 세상에 나왔다. ‘인간 전두환-창조와 초극의 길’이라는 부제가 붙은 ‘황강에서 북악까지’였다.

    출간 직후, 책을 읽어본 이순자 여사가 청와대 정무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긴 허문도와 함께 필자를 불렀다. 고생은 많이 했는데, ‘각하’가 보안사령관으로 부임하는 대목에서 끝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다는 말이었다. 이태 전 12월12일 밤중에 일어난 군부 내 충돌사건을 진압하는 자초지종을 알아야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고 이 여사는 말했다. “그날 각하는 불의와 패륜을 일삼은 무리와 목숨을 내걸고 대결해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풍전등화 꼴의 나라를 구해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이 여사는 허 비서관에게 “수도권 일원에는 당시 관련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잊어버리기 십상이니, 당장 작가가 그들을 만나게 해 중요한 이야기를 완결짓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때까지 12·12는 언급조차 꺼리던 허 비서관이었지만 영부인의 지엄한 분부를 물리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음날부터 필자는 청와대 제1부속실 요원의 주선으로 관련자들을 차례차례 만났다. 처음에는 워낙 장군들의 서슬이 퍼래 공연히 주눅들곤 했지만, 조만간 생각이 바뀌었다. 한 장군은 대담을 마친 필자에게 느닷없이 “작가 선생, 각하를 만나시거든 전방은 저희들이 튼튼히 지키고 있으니 아무 걱정 말고 국정에나 전념하시라고, 바로 제가 말씀드리더라고 전해주십시오”라며 경례까지 붙이는 것이었다. 청와대의 전화 한 통이면 모든 것이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이 과정에서 필자가 만난 관련자는 위로는 노태우 보안사령관에서 아래로는 제1공수특전여단 운전병에 이르기까지 200여 명에 달했다. 군사작전 같은 그들의 1979년 12월12일 행적을 받아쓴 노트만도 십수권이다. 이를 바탕으로 필자는 2년 동안 매달려 원고지 3000장에 달하는 ‘10·26, 12·12, 광주사태’를 탈고했다.

    그러나 필자의 작업은 끝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원고를 읽어본 ‘고위층(당시 보안사 요원의 표현임)’이 출간을 불허한 때문이었다. 더욱이 필자는 ‘광주학살의 원흉’을 미화했다는 죄목으로 그간 쌓아올린 명성에마저 먹칠을 당해 잡지사나 출판사로부터 원고를 퇴짜맞는 등, 그 뒤로 10여 년간 단 한 편의 작품도 발표하지 못하는 ‘식물작가’가 되고 말았다.

    1980년 초, 서울에는 봄이 오고 있었지만 국가는 두 가지 면에서 큰 시련에 봉착했다. 두 해 전인 1978년 말 이란의 국내 혼란과 1979년 초 이슬람 혁명의 여파로 2차 석유파동이 일어나면서 원유 공급이 원활하지 못한 점이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연이은 냉해로 주곡 생산이 여의치 않아 식량부족 문제가 대두된 점이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신군부가 나섰다. 부족한 쌀을 조달해오겠다며 정부 담당자들을 제쳐두고 빠릿빠릿한 영관급 장교들을 캘리포니아로 급파해 20만t의 물량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정부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런 다음 ‘원유 문제만큼은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한다’고 충동했다. 여기에 신군부의 계략이 작용한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예고하는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 와중에 국가원수가 나라를 비운다?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가. 그런데도 최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를 순차 방문했다. 그런 다음 귀로에 잠시 ‘동양의 진주’라고 하는 말레이시아 페낭 섬에 머물렀다.

    그 사이 신군부는 광주 등지의 혼란을 빌미로 ‘5·17 조치’를 단행했다. 최 대통령이 귀국한 다음 ‘광주사태’가 발발하자 비로소 마각을 드러낸 신군부는 초법적 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면서 제5공화국의 태동을 예고했다. 그 결과로 신군부의 행세를 방관했다는 의혹을 받게 된 최 대통령은 국민이 그토록 갈망하던 문민시대의 개막을 지연시킨 주범이 되고 만다.

    드디어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된 전 본부장은 거리낄 것 없이 국가원수에 준하는 행세를 하기에 이르렀다. 태평양 요트 횡단항해에 성공한 ‘파랑새 콤비’와 대마도 도영에 성공한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등을 차례로 불러 치하함으로써 신문 1면의 톱 기사를 장식한 게 그 증거였다. 그로부터 한 달 남짓한 사이에 ‘최고집’은 그만 헌정사상 두 번째로 스스로 하야하는 비운의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

    남아 있는 한 사람

    기이한 것은 전남도청이 원상회복된 날(5월27일)의 특별성명과 스스로 대통령 자리를 내놓겠다는 8월 중순의 하야성명을 보면 최 대통령은 은연중 자신의 후임이 누구라는 뉘앙스를 물씬 풍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별성명에서 그는 향후 마련할 헌법 개정안에 대해 언급했는데, 특히 ‘남북한 간의 대치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의 계속성을 수호하고 국가보위를 확고히 할 수 있는 헌법이 되어야겠다’는 등의 네 가지 기준을 찬찬히 뜯어보면 ‘헌법’ 대신 ‘전 아무개’라는 실명으로 대체해도 문장에 전혀 무리가 없을 만큼 내심으로는 이미 후임자를 확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만 봐도 최 대통령은 이미 오래전부터 하야를 결심하고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몇해 전 MBC가 방송한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극중의 한 지인이 이제 갓 환갑을 지냈을 뿐인 최 대통령더러 ‘이제 우리는 늙었어. 늙었으면 뒤로 물러나야지. 새 역사는 새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말이야’라는 식으로 우회적으로 하야를 권유하는 장면을 본 일이 있다. 그러나 당시 신군부측 핵심인사들이 필자에게 전한 바에 따르면, 신군부는 최 대통령에게 줄기차게 하야를 강권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내각의 한 사람인 공군참모총장 출신 주영복 국방장관이 적극적으로 총대를 멨다는 게 가장 근접한 설(說)이다.

    신군부 주역들의 ‘무용담’ 통해 본 12·12 그날 밤, 최규하의 진실
    천금성

    1941년 진주 출생

    서울대 농대 졸업

    원양어선 선장, 소설가, 한국해양문학가협회장, 문화방송 편집위원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저서 : ‘허무의 바다’ ‘지금은 항해중’ ‘가블린의 바다’ ‘외로운 코파맨’ 외 20여 권의 해양소설


    그렇다면 옹골차고 양보를 모르던 ‘최고집’이 진작부터 스스로 하야를 결심하게 된 연유는 진실로 무엇일까. 자신의 무능무력(無能無力)을 스스로 인정해서일까, 아니면 12월12일 기나긴 밤 동안 자신이 했던 수치스러운 행동에 대한 자괴심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밖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더 이상 대통령직을 수행하지 못할 만큼 어떤 중대한 비리라도 있었단 말인가. 그리하여 신군부는 그것을 빌미로 대통령을 코너로 모는 도구로 악용했던가. 분명한 것은 어느 쪽이든 유쾌한 일이 전혀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미스터리를 미궁 속에 남겨두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 미스터리를 푸는 것은 결국 불가능한가. 아니다. 그걸 풀어낼 수 있는 단 한 사람은 여전히 살아 있다. ‘진실은 고인이 남긴 글(비망록)에서 소상하게 밝혀질 것’이라고 에둘러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그러던 어느 새벽에는 갑자기 들이닥친 치안본부 특별수사대 요원(훗날의 ‘사직동팀’)들에 의해 태평로(옛 국회 3별관 자리)로 끌려가 사나흘 동안이나 닦달을 당하기도 했다. 필자가 정부와 전두환 대통령을 모략·비방하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공들여 쓴 원고는 빛을 못 보고 일감마저 끊기고 난 후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길 없어 취기가 웬만큼 오르면 ‘5공’을 싸잡아 욕하는 것이 그 무렵 필자의 소일거리였기 때문이었다. 그 취중잡언이 정보통에 걸려들어 ‘손을 봐줘야 할 인간’으로 지목된 것이었다.

    이러저러한 넋두리를 듣고 난 수사요원들은 필자에게 “영부인에게 얼마나 받았냐”고 물었다. 필자가 단돈 10원 받은 게 없다고 하자 그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정희 대통령 때 시인 박목월과 박재삼이 육영수 여사의 전기를 쓰고 1억원을 받았다고, 이후 각급 기관에서 이 책을 단체주문하느라 난리가 났었다고도 했다. 그렇지만 ‘광주사태’ 1년 뒤인 그 시절에 전 대통령의 전기를 사볼 이가 누가 있었겠는가. 책은 대부분 파지로 처분되고 책을 펴낸 출판사 사장도 출판계에서 냉대를 받았다.

    그러나 잃은 게 있으면 분명 얻는 것도 있다. 당시 관련자들을 만나 채록한 갖가지 증언들은 그로부터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단 한 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필자의 머릿속에 고스란히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 증언에는 아직까지 빈 채로 남은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채우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 담겨 있다. 그것이 바로 이 글을 쓰는 목적이자 의도다.

    필자가 관련자들을 만난 시기는 5공화국이 수립된 직후인 1980년 3월초부터 그해 말까지다. 당시는 신군부가 한창 득세하던 참이었으므로, 관련자들은 필자에게 ‘각하가 얼마나 훌륭한 군인’이며, ‘자신이 얼마나 각하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며, 또 그날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했는지 열성을 다해 말했다. ‘그날의 감동’에 겨워 울먹이는 이, “이제 국가가 반석 위에 올라섰으니 죽어도 좋다”고 말하는 ‘새파란 별’도 있을 정도였다. 그들에게는 두려운 것도, 감출 것도 없을 때였다.

    이제부터는 이때 필자가 직접 들은 12·12 주역들의 ‘무용담’을 통해 그날 최규하 대통령 주변에서 벌어진 일을 본격적으로 되짚어보려 한다. 우선 살펴볼 것은 그날 최 대통령을 찾아가는 신군부 일파의 움직임과 분위기다. 다음 내용은 12·12 당시 보안사령부 대공처장으로 합동수사본부의 수사국장을 맡았던 이학봉 중령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체포조였던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군본부 헌병단장 우경윤 대령의 증언을 통해 당시 상황을 정리한 것이다.

    12월12일 밤, 삼청동 총리공관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져 있던 1979년 12월12일 저녁 6시30분. 전두환 합수본부장은 수사국장 이학봉 중령을 대동하고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들어섰다. 대통령 최규하는 며칠 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됨으로써 ‘권한대행’ 꼬리표를 떼었지만, 아직 총리공관에 머물고 있었다.

    대문까지 마중을 나온 최광수 비서실장은 전 본부장을 곧 응접실로 안내했다. 그날 오후 전 본부장은 일방적으로 최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중요한 보고사안이 있으니 조용한 시간에 각하를 뵙고자 한다’고 요청했다. 일견 무례한 청이지만, ‘국가가 비상사태에 돌입하면 보안사령관이 군·검·경 및 중앙정보부 등 모든 수사기관을 망라한 합동수사본부장에 자동적으로 임한다’는 대통령령에 따라 ‘부마사태’를 계기로 발동된 위수령 이후 헌정사상 최초로 가동한 합동수사본부 장(長)의 요청을 거절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전 본부장이 공관 응접실로 들어간 다음 현관에 남게 된 이학봉 국장의 허리춤에는 권총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그날 오후 4시 정승화 육참총장이 전 본부장을 호출하던 순간부터 소지하고 있던 것이었다.

    육참총장의 예기치 않은 부름에 전 본부장은 저녁에 있을 ‘거사’ 비밀이 새나간 것은 아닌지 우려했다. 그런데 정작 전 본부장을 불러 앉힌 정 총장은 “요즈음 왜 그리 뜸한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수시로 보고할 사안이 있을 것 아닌가?”라며 안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 본부장은 절호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렇잖아도 마침 중요한 보고 사항이 있습니다. 지금 서류로 정리 중인데 총장님께서 퇴청하신 다음 공관으로 갖다드리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야말로 순간적인 계략이었다.

    그 말을 들은 정 총장은 “오늘 처가에 가기로 했으니 좀 빨리 왔으면 좋겠네” 하고 쉽게 응했다. 그로부터 두어 시간 후 정 총장 자신을 나락으로 굴려 떨어뜨리는 단초가 된 승낙이었다.

    합수본부장의 계략

    전 본부장이 정 총장에게 한 허위보고를 ‘계략’이라고 단정한 것은 그 ‘서류를 전달하러 갈 사람들’이 곧 정 총장을 연행할 체포조였기 때문이다. 총리공관으로 출발하기 직전 전 본부장은 ‘후보계획’으로 육본 헌병 1개 분대와 함께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와 육본 헌병단장 우경윤 두 대령을 막 육참총장 공관이 있는 한남동으로 출발시킨 참이었다. 두 합수부 수사관은 이미 며칠 전부터 정 총장 연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한낱 대령에 불과한 두 사람이지만 하늘과 같은 육군 최고 지휘권자이자 계엄사령관을 체포한다는 엄청난 거사에 전혀 주눅들지 않았다. 전 본부장이 곧바로 대통령의 재가(裁可)를 받아내겠다고 공언한 터였다.

    신군부 주역들의 ‘무용담’ 통해 본 12·12 그날 밤, 최규하의 진실

    삼청동 국무총리 관저.

    그러나 총리공관에서 전 본부장을 마주한 최 대통령은 이런저런 이유를 둘러대며 고집스럽게 재가를 내리지 않았다. 그렇게 지연된 시간이 다음날 새벽 다섯 시까지 무려 10시간 이상이었다. 그 10시간이 곧 정 총장쪽 지휘관인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에게 ‘원상회복’을 내세운 반격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 상황에서 합수부쪽 지휘관들은 결과적으로 아군끼리의 정면충돌을 막기 위해 온갖 회유와 협박을 반복했으며, 그래도 여의치 않자 필경에는 수도권 외곽에 포진한 3개 공수특전단 병력을 수도 서울 한복판으로 진입시켜 밤새 총성을 울려댔다. 이것이 곧 전대미문(前代未聞)의 ‘12·12 대충돌’의 개요다.

    ‘불행한 최고통수권자’로 기록된 최규하 대통령과 재가를 요청한 전두환 합수본부장 두 사람이 독대한 자리에서 정확히 어떤 상황이 전개됐는지를 그대로 재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특히 여전히 논란의 핵심으로 남아 있는 두 사람 사이의 대화내용은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필자가 만난 관련자 가운데 결과적으로 ‘일등공신’으로 평가받으면서 전두환 소장의 대를 이어 보안사령관으로 중용된 노태우 소장과 그날 하루 종일 전 본부장을 수행한 이학봉 수사국장의 증언을 종합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분위기가 조성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랜 외교관 생활이 몸에 밴 최 대통령은 정장 차림인 채, 결재서류 파일을 옆구리에 끼고 응접실로 들어서는 전 본부장을 무뚝뚝하게 맞이했다.

    “각하께서 쉬셔야 할 시간에 대단히 죄송합니다.”

    전 본부장의 인사에 최 대통령도 의례적인 인사를 건넸다.

    “아니 당신이 늦게까지 더 고생이지 않소?”

    최 대통령의 판단

    인사가 끝나자마자 전 본부장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가 이렇게 각하를 뵈러 온 것은 긴급히 재가를 받아야 할 일이 있어서입니다.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희 합수부는 지난 40여 일 동안 불철주야 시해사건을 수사해왔습니다만, 지금에 와서 사건이 조금 미묘해지고 있어서….”

    전 본부장이 잠시 말을 중단하고 최 대통령의 표정을 살폈으나 별다른 반응이 없자 말을 이어 나갔다.

    “저희들이 수사를 해본 결과, 놀랍게도 참모총장님이 사건에 깊이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그래서 부득이 따로 모시고 조사를 좀 해야 할 필요성이….”

    그러자 최 대통령이 제동을 걸었다.

    “아니, 잠깐! 따로 모시고…라고요?”

    그러면서 최 대통령은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표정은 여전했으나 음성이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군 출신이 아닌 최 대통령으로선 전 본부장이 하는 이 보고가 지금 군부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떤 ‘헤게모니 다툼’과 관련 있는게 아닌가 싶었을 테고, 난생 처음으로 그것을 재가해야 하는 지극히 난처한 상황에 봉착했음을 인식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최 대통령은 이 난감한 문제를 즉석에서 처리하지 않고 가능한 한 시간을 끌어야겠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렇습니다. 수사상 말입니다.”

    전 본부장은 유독 ‘수사’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그 양반은 지금 계엄사령관이지 않소?”

    대통령이 의외의 반응을 보이자, 전 본부장은 상체를 더욱 곧추세웠다.

    신군부 주역들의 ‘무용담’ 통해 본 12·12 그날 밤, 최규하의 진실

    청와대 앞길 건너 경복궁 뒤뜰에 위치한 수방사 30경비단. 12·12 주역들이 모여 거사를 도모한 문제의 장소다. 이후 30경비단장을 거쳐간 지휘관들은 하나회의 핵심 인물들로 5·6공 당시 군부의 실세노릇을 했다.

    “각하,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대통령을 시해한 사람이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하게 조사하여….”

    최 대통령이 말을 중단시켰다.

    “그래도 그렇지요. 나로선 우선 국가전체에 미칠 파장이 염려스럽단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각하. 사건에 연루된 자가 도의적 책임감도 없이 여전히 군 최고지휘자로 군림하고 있고, 그 때문에 시국이 이처럼 시끌시끌해지고…그 때문에 군부는 두 동강이 나고…일선 지휘관들 말을 들어보면 이래 가지고는 도무지 기강을 잡을 수 없다는 겁니다. 주범 김재규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한쪽에서는 패륜아라 그러는데, 다른 쪽에서는 영웅이라고까지…이 모든 게 다 사건에 연루된 총장 때문이라는 게 저희 수사관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시험대 오른 대통령의 고집

    전 본부장은 아예 총장 호칭 다음의 ‘님’ 자도 빼버렸다.

    “아니, 시국이 왜 시끌시끌하단 말이요? 이렇게 조용하기만 하지 않소?”

    최 대통령의 태평스러움을 확인한 전 본부장은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시국이 조용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기는 대통령뿐 아니라 정승화 총장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토요일 노태우 사단장이 육본을 찾았을 때도 정 총장은 “전방도 별일 없지요? 서울도 평온해요”라고 말했다. 두 육사 동기생은 “그렇게 천하태평이더라”며 허탈해하던 차였다.

    “아닙니다, 각하!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 저희들이 제대로 수사할 수 있도록 재가를….”

    전 본부장은 가슴을 활짝 펴고 결재서류 파일을 열었으나, 대통령은 거들떠볼 생각도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거 보세요! 합수부 의견은 그렇다 칩시다. 하지만 지금 조사를 하겠다는 정 총장은 계엄사령관 아니오? 계엄사령관을 잡아넣으면 도대체 국민이 뭐라고 그러겠소? 이건 나라의 체통에 관련된 문제요. 그러니 나로서는…아무리 생각해봐도 전 본부장 말만 듣고는 얼른 단안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지금 당장 연락하여 국방장관을 이리 오도록 하시오. 장관 말을 들어본 다음 결정을 내리겠소.”

    고집불통인 최 대통령이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버티자 전 본부장은 난감해졌다. 여기서 물러나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때렸다. 지금 이 시각 한남동에서는 수사관들이 틀림없이 정 총장을 엄중하게 다스리고 있을 터였다.

    “각하, 이번 사건은 보안이 첫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재가를 받지 않고 막바로 조사하려고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런 전례도 있고요. 아시겠지만 수경사령관을 하던 윤필용 장군이…그래서 바로 잡아넣고 다음날 각하께 보고한 예도 있습니다.”

    “어허 나 참. 그건 그거지요. 하지만 이 건은 내가 안 이상 절차에 따라 먼저 장관 의견을 들어보고 나서 결정하겠다, 그거 아뇨? 그래도 못 알아듣겠소?…마,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두 사람의 승강이는 그렇게 한 시간 가량 계속됐다.

    그동안 이학봉 국장은 현관에서 응접실 분위기를 염탐하고 있었다. 시간이 길어지고 때때로 전 본부장의 음성이 밖으로까지 새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일이 잘 안 풀리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 순간 무전기가 울어 버튼을 누르니 비서실장 허화평 대령이었다. ‘한남동으로 간 체포조가 총장 연행에는 성공했으나 상호 총격전이 벌어지는 바람에 우 대령이 총을 맞았고, 지금은 우리측 요원들이 공관 외곽경계를 담당하고 있던 해병대원들에게 포위되어 일촉즉발로 대치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재차 응접실로 들어간 이 국장은 일부러 대통령도 들을 수 있게끔 큰 소리로 방금 들은 내용을 전 본부장에게 전했다. 그때 이 국장은 허리춤 앞쪽에 권총을 꽂아 최 대통령이 충분히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도 최 대통령은 눈만 끔벅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사태는 이제 본격적으로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더는 지체할 수가 없게 된 전 본부장은 대통령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응접실을 뛰쳐나와 그 길로 경복궁 제30경비단으로 차를 몰았다.

    시각은 어느새 저녁 8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경복궁에 합류한 장군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전 본부장을 포함한 신군부 인사들이 단체로 총리공관을 찾아간 밤 9시 이후까지의 상황이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 역시 아래에서 실명으로 거론되는 신군부측 관련자 10여 명의 증언을 토대로 한다.

    30경비단에는 여남은 명의 장군이 사태의 흐름을 까마득히 모르는 채 전 본부장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군단장급인 차규헌 유학성 황영시 중장을 비롯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실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9사단장 노태우와 20사단장 박준병 소장, 그리고 수도권 외곽에 빙 둘러 포진하고 있는 3개 공수특전단 여단장인 박희도(1여단) 최세창(3여단) 장기오(5여단) 준장, 이번 거사의 기획단계에서부터 적극적으로 가담한 79방위사단장 백운택 준장 등이었다.

    여기에 친위부대라 할 만한 수경사 예하 30경비단장 장세동과 33경비단장 김진영 대령도 일찌감치 권총을 휴대한 채 근무복(전투복) 차림으로 가세해 있었다. 이로써 비상시 수도권에 투입될 전체 계엄병력의 90% 이상이 전 본부장의 합수부쪽에 가담한 상황이었다.

    전 본부장이 들어서자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 본부장의 얼굴은 매우 창백했다.

    “총장님은 오시는 거요?”

    차규헌 수도군단장이 먼저 물었다. 차 중장은 전날 장군심사에 참석했는데, 오후 늦게 전 본부장이 “내일 저녁 총장님을 모시고 시국상황이나 허심탄회하게 논의했으면 하는데, 선배님도 참석하셔서 이참에(12월13일로 예정돼 있던 개각을 뜻함) 시해사건의 도의적 책임을 지고 총장직에서 용퇴하시도록 진언했으면 합니다”라고 전화해 쾌히 응낙한 참이었다.

    “그런데 그게…총장님을 모시러 참모들을 보냈는데…그런데 저쪽에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여 그만 공관 경계병들과 충돌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자신만이 아는 계략에다 조금 전 이학봉 국장으로부터 들은 보고를 그럴듯하게 혼합한 말이었다.

    “신경질적인 반응?”

    차 군단장이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쨍그랑 하고 났다. 시간이 지체되자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장세동 단장이 내놓은 위스키를 장군들은 커피잔에 부어 마시고 있던 참이었다.

    차 군단장의 얼굴에 ‘아차!’하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돌아가는 상황이 어제 전 본부장의 ‘총장님을 모시고…진언했으면 합니다’라는 말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럼 총장님은?”

    황영시 1군단장은 차 군단장과는 조금 달랐다. 그는 외박에서 돌아온 예하 9사단 노태우 사단장으로부터 ‘정 총장 제거’라는 어렴풋한 말을 듣고는, ‘후배들이 하겠다면 나도 응해야지’하고 동조했던 것이다.

    신군부 주역들의 ‘무용담’ 통해 본 12·12 그날 밤, 최규하의 진실

    1980년 6월 최규하 대통령은 ”내년 봄 새 헌법에 따라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이미 조기집권 방침을 세우고 신당 창당작업을 서둘렀다.

    “우선 안가(서빙고 분실)로 모셨습니다.”

    황 1군단장의 물음에 전 본부장이 답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허삼수 대령은 체구가 작은 총장을 번쩍 들어 처가로 가기 위해 시동을 걸고 있던 총장 승용차에 밀어넣고는, 막 닫히고 있는 공관 정문을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와 서빙고 분실로 내달렸던 것이다.

    장군들의 행동통일

    연행에 성공했다는 전 본부장의 말에 장군들은 안도했다. 참모총장은 이미 인질이 된 셈이었다. 이제 길은 하나뿐이었다. 총장 제거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것. 그렇지 않으면 모두 파멸을 맞을 것임이 분명했다. 만일 날이 밝는 대로 정 총장이 자유를 얻는다면 이들은 모두 목이 남아 있기 어려울 터였다.

    “그렇잖아도 조사할 일이 있었는데, 그만 일이 앞당겨지고 말았습니다.”

    “그럼 한남동은? 우리 아군끼리 총격전을 벌이고 있단 말인가?”

    차 수도군단장의 우려였다. 차 군단장의 그 말로 분위기는 조속히 사태를 해결하자는 쪽으로 돌아갔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수습책은 오로지 총장을 연행해도 좋다는 대통령 재가를 받아내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통 듣지를 않습니다.”

    “최 대통령이?”

    “아니, 사태가 이 지경인데도 재가를 않는다고?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군.”

    “그럼 이러지들 말고…우리 모두 함께 가서 각하를 설득하기로 하자고.”

    “그래야지.”

    차·황 두 군단장의 말에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것으로 행동통일이 이뤄졌다. 곧 총장 연행이 전 본부장 혼자만의 결정이 아니라 전군(全軍)의 뜻임을 대통령에게 분명히 하자는 것이었다.

    그 시각 광화문쪽에서 전차 캐터필러 소리가 들려왔다.

    “저건 필동으로 집결하는 우리 전차대입니다. 단장인 나는 여기 있는데!”

    불광동에 주둔하는 33경비단장 김진영 대령의 한탄이었다.

    전 본부장은 정 총장을 연행할 경우 그의 양팔 격인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저항을 차단하기 위해 사전에 조치를 취해두었다. 어제 장군 승진심사에 이름이 오른 수경사 헌병단장 조홍 대령을 축하한다는 거짓 핑계로 두 지휘관을 부대로부터 멀리 떨어진 신촌 근처의 한 방석집으로 초대해 격리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총장 피랍(被拉) 보고를 접수한 국방부 당직사령이 지체 없이 ‘진돗개 하나’를 발령했고, 수행부관으로부터 그 보고를 받은 두 사람은 곧장 음식점을 뛰쳐나옴으로써 전 본부장의 또 하나의 계략은 수포로 돌아갔다.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쌍방의 기싸움이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그럼 빨리 가도록 하지.”

    차·유·황 군단장과 79사단장 백 준장, 1여단장 박희도 준장이 전 본부장을 따라나섰고, 노태우·박준병 두 사단장과 장·김 두 경비단장은 그곳에 남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는 것으로 전열을 가다듬었다. 시각은 밤 9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 시각 최 대통령은 연락을 받고 달려온 신현확 총리와 함께 응접실에 머무르면서 전 본부장이 곧 국방장관을 데려올 것으로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최 대통령은 신 총리에게 그간의 상황을 설명했고, 신 총리는 “아주 잘하신 조치입니다”라고 동조했다.

    이윽고 최광수 비서실장이 전 본부장의 재방문을 보고했다. 그러나 기다리던 국방장관 대신 낯이 익지 않은 장군 몇 명이 전투복 차림으로 떼를 지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장군들은 권총 등의 무장을 모두 현관 신발장 위에 올려놓았지만, 허리에는 장군용 혁대가 둘러처져 있어서 그 외양만으로도 위협을 주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국방장관을 데려오시오!”

    특히 백운택 준장은 맨 먼저 거사를 유도한 장본인인지라 부관을 시켜 염창동 구둣방에 주문, 군용도 되고 일반용도 되도록 뒤집어 입을 수 있는 이중 점퍼를 별도로 만들어 그 안주머니에다 권총을 넣어 갖고 있었다. 나중 일이지만, 생일기념으로 아내가 마련해준 지휘봉만 신발장 위에 올려두었다가 공관을 물러나올 때 너무 흥분해 그냥 나오는 바람에 그걸 되찾느라 삼청동 일대를 뒤지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각하, 긴히 올릴 말씀이 있습니다.”

    양쪽 어깨에 3성(星) 계급장을 단 장군이 먼저 머리를 숙였다.

    “저는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중장입니다.”

    “그래요? 이리 와서들 앉으시오.”

    그리하여 최 대통령 오른편으로 세 명의 군단장급이 차례로 앉았고, 전 본부장과 박희도 1여단장은 신 총리쪽에 자리를 잡았으며, 좌석이 모자라자 백운택 사단장은 예비의자를 끌고와 최 대통령을 마주 보는 테이블 끄트머리를 채웠다.

    “정 총장은 코드 원(박 대통령)의 시해현장에 김재규와 같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걸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도의적 책임조차 지지 않고 있으니….”

    “김재규는 지금 합수부에 대해 오히려 ‘네놈들 곧 끝장난다! 정승화도 내 말을 듣는단 말이다!’ 그렇게 공갈을 쾅쾅 치고 있다 합니다.”

    “그러니 전 본부장이 제대로 수사할 수 있도록 빨리 재가를 내려주시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아군끼리 총격전이 벌어져 서울은 불바다가 되고 맙니다. 서울은 지금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이 건의는 비단 전 본부장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세 군단장이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했다. 고위 장성들의 그 같은 진언은 틀림없이 효과를 얻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최 대통령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참 만에 최 대통령이 양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이렇게 조용한데도요?”라며 태평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까 전 본부장에게도 말했지만, 그러니 국방장관을 데려오라지 않소?”

    최 대통령이 전 본부장을 빤히 응시하자,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 순간 바닥으로 쇠뭉치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소리 난 쪽으로 모아졌다. 그러자 백운택 장군이 허리를 굽혀 무엇인가를 집어들었는데, 그건 바로 권총이었다. 특별히 만든 점퍼 속에 있던 권총이 그냥 떨어질 리는 없었다. 그 권총을 백 장군은 ‘탁!’ 소리가 나게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말 그대로 공포스러운 분위기였다. 최고선임인 차 군단장이 고함쳤다.

    “야, 백 장군! 각하 앞에서 그게 무슨 짓이야!”

    백 장군은 슬그머니 권총을 점퍼 안으로 쑤셔넣었다.

    그러는 동안 신 총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10월26일, 박 대통령이 시해당한 날 밤 10시가 넘어 국방장관실에서 긴급 개회된 각료회의에서 ‘각하께서 유고(有故)입니다. 이 사실은 극히 보안을 유지해야 합니다. 만약 김일성이가 알면 남침을 해올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지금 당장 계엄을 선포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실내를 왔다갔다하는 김재규 중정부장을 보고(그의 바지 주머니에는 아직도 화약냄새를 풍기는 권총이 들어 있는 채였다), 당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었던 신현확은 “보소, 김 부장! 그렇게 왔다갔다하지만 말고 ‘각하 유고’가 무슨 말인지 그것부터 말해보소!” 하고 소리쳤다. 10·26과 12·12의 두 밤, 그의 행동은 그렇듯 전혀 딴판이었다.

    후일담이지만, 그처럼 유구무언으로 일관한 신 총리가 ‘신군부’에게는 예뻐 보일 리 만무했다. 눈치 빠른 전 본부장은 우호적인 발언을 한마디도 하지 않은 신 총리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었다. 그 결과 신 총리는 이듬해 5월 광주에서 벌어진 일에 책임을 지고 내각 총사퇴 수순을 밟고 말았다.

    “나를 체포하는 건가?”

    물론 전 본부장은 국방장관의 소재를 조속히 파악해 연락이 닿는 대로 모셔오라고 지시해둔 터였다. 하지만 장관의 종적은 묘연했다.

    “조용하다고요? 각하께는 탱크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까? 저건 시방 장태완이가 청와대와 합수부를 공격하기 위해 탱크를 집결시키고 있는 소리란 말입니다.”

    유학성 군수차관보가 그렇게 말해도 최 대통령은 “전차는 무슨!”이라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장관을 데려오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말 그대로 ‘최고집’이었다. 밤 10시가 가까워 아무 소득도 얻어내지 못한 장군들은 부득불 공관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백운택 당시 준장의 증언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요청을 거절당한 전 본부장은 곧 ‘물리력에 의한 압박’을 결심했다. 먼저 청와대 경호실 상황실장 고명승 대령에게는 계엄발령과 동시에 추가로 배치된 기존 공관경계병(육본 헌병단)들을 제압해 자신의 허락이 없는 한 어느 누구의 출입도 허용치 말 것을 엄명했다. 사실상 국가원수를 연금상태로 몰아넣은 것이었다. 공관을 나서면서 박희도 1여단장에게는 직접 병력을 이끌고 육본을 포함한 국방부를 장악하도록 지시했다. 그런 다음 전 본부장은 동행했던 세 명의 군단장을 보안사로 안내함으로써 빠져나가기 어려운 동조자로 만들었다.

    이후의 사태는 전적으로 진작부터 도상계획을 수립한 합수부 의도대로 전개됐다. 마치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전 본부장의 순간적인 기지와 판단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빛을 발했다. 대통령 관저를 에워싼 고 대령은 새벽 2시경 ‘진돗개 하나’ 발령을 듣고 공관으로 달려온 이희성 중정부장서리를 엄중히 보안사로 인도함으로써 우군으로 끌어들이는 데 기여했고, 제1한강교가 막혀 멀리 행주대교를 돌아 자정께 여단에 도착한 박희도는 특전사 부사령관의 만류에도 출동을 감행해 자정 무렵에는 아주 손쉽게 육본과 국방부 청사를 장악했다. 사실 박 여단장의 부대 출동은 사지(死地) 돌파나 다름없었다. 장태완 사령관은 이미 ‘불법적으로 총장을 체포한 반란군(합수부 합류자) 놈들을 하나 남김없이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이에 더해 전 본부장은 수경사 헌병부단장인 신윤희 중령과 특전사 최세창 3여단장에게 은밀히 지시를 내렸다. 자신들의 직속상관인 장태완과 정병주 두 사령관을 제압하라는 것이었다. 이로써 합수부측은 ‘정 총장 추종세력의 반격’을 무산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날 밤 사태가 ‘합수부 승리’로 기울게 된 결정적인 사안은 박희도의 1여단 수색조가 종적이 묘연했던 국방장관을 찾아낸 일이었다.

    저녁 7시, TV뉴스를 보고 있던 노재현 장관은 갑자기 담 너머 육참총장 공관 쪽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총성을 들었다. 순간 그는 그 총성이 현재 성남 육군교도소에 구금 중인 시해범 일당을 구출하기 위해 육참총장을 인질로 잡으려는 괴한들의 행위로 판단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자기도 그 꼴이 될 것이라고 지레 겁을 먹은 노 장관은 그 길로 담장을 넘어 택시를 타고 미8군 영내로 도망을 쳤다. 그곳에서 두어 시간을 보낸 그는 밤 10시경 조심조심 국방부 청사로 숨어들어갔는데, 자정 무렵 박희도의 1여단 병력이 국방부에 진입한다고 하자 다시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조속히 사태 종결지으시오”

    새벽 4시반경, 1여단 수색조가 노 장관을 찾아냈다. 그는 장관 체통에 걸맞지 않게 청사 지하실로 숨어들어 냄새 나고 컴컴한 계단 아래쪽에 숨 죽인 채 웅크리고 있었다. “손을 들라!”는 병사의 말을 듣고 노 장관은 “나를 체포하는 건가?”라고 되물었다. 박 여단장은 “아닙니다. 각하께서 밤새도록 찾고 계시니 빨리 가십시다”라고 답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 합수부로 안내된 노 장관은 정 총장 연행의 불가피성과 이를 합법화할 대통령 재가의 필요성에 대해 설득당했고, 이후 대통령 면전에 모습을 나타냄으로써 10시간 넘게 총성으로 얼룩진 수도서울은 비로소 평온한 상태로 돌아갔다.

    노 장관과 이희성 중정부장서리가 동석한 가운데 최 대통령이 서류에 사인을 한 것은 새벽 다섯 시였다.

    “그럼 조속히 사태를 종결지으시오.”

    최 대통령의 마지막 지시였다.

    모두 물러간 다음에도 최 대통령은 잠들 수 없었다. 이것으로 사태가 완전히 끝날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날이 부옇게 밝아올 무렵 최 대통령은 김종필 공화당 총재의 전화를 받았다. 박 대통령 사망 직전까지 부총재이던 그는 곧 총재직을 이어받은 터였다.

    김 총재는 최 대통령에게 무언가를 끈질기게 물었다. 그러나 최 대통령은 별 말이 없다가 저쪽의 입을 막으려는 의도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 총재, 나 어젯밤에 아주 죽을 뻔했소.”

    노 장관 수색 관련 소동에 대한 묘사는 전적으로 노태우 사령관의 막힘 없는 증언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와의 인터뷰 당시 필자가 부지런히 메모를 하다가 언뜻 훔쳐보니, 상체를 뒤로 젖히고 아주 편안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그는 연신 혀를 끌끌 차며 몇 번이나 머리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노 사령관의 그 같은 몸짓은 노재현 장관의 못난 처신을 두고 한 게 분명했다. 그 상황을 전해듣던 필자 역시 ‘그런 겁쟁이를 국방장관으로 앉혔다니!’하고 통탄을 금할 수 없었던 기억이 새롭다.

    역시 후일담이지만, 만일 최 대통령이 서슬 퍼런 장군들의 공포 분위기 조성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재가를 않고 버텼다면 그 뒤의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굴러갔을 것이다. 아무리 궁지에 몰린 합수부라지만 그렇다고 국가원수에게 마구잡이로 총격을 가하기는 어려웠을 터였다. 대통령 재가도 받지 않고 월권 행위를 자행한 합수부 장군들은 한순간에 반란군으로 몰리면서 파멸을 맞았을 게 분명하다. 그랬다면 최 대통령은 ‘불행한 대통령’이 아닌 ‘방자한 정치군인들을 처단하고 국권(國權)을 수호한 불세출의 영웅’으로 기록됐을 것이다.

    왜 갑자기 무력해졌나

    최 대통령의 못 말리는 고집에도 불구하고, 이후 일어난 일련의 행적에서 우리는 몇 가지 미스터리를 발견하게 된다. 남이 흉내내기 어려운 무서운 끈기와 고집을 가졌던 그가 왜 예전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는가 하는 점이다. 4년이라는 긴 기간 총리로 재임하면서 카리스마 넘치는 박 대통령의 통치방식을 지근거리에서 견문한 그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전 본부장의 위법적이면서도 초법적인 제의를 윤허했는지가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것이다.

    다음해 4월, 그러니까 시해범 김재규를 처형하기 한 달 앞서 전두환 본부장은 느닷없이 “중정부장을 겸직하고 싶다”고 요구했다. 최 대통령은 처음에는 그 요구에 난색을 표했다. 겸직은 법적으로 당연히 위헌(違憲)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 본부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국가정보의 중추기관인 중앙정보부의 정상 가동이야말로 국가운영의 요체이며, 그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게임에서 최 대통령은 ‘서리’ 꼬리를 다는 조건으로 승낙함으로써 지고 말았다. 그것으로 전 본부장은 날개를 달았다.

    최 대통령이 ‘허수아비’라는 비아냥을 듣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대통령이 처리해야 할 의례적인 재가말고 그가 한 일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이듬해 광주민주화운동이 진정된 5월27일 ‘헌법 개정과 관련한 비전 제시’를 주내용으로 하는 담화를 발표했으나, 그것은 자신의 무능과 무력을 표출한 데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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