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두환 전 대통령이 10월23일 오후 서울대병원 영안실을 방문해 故 최규하 전 대통령 빈소에 분향하고 있다.
이 ‘불행’이라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다. 헌정사상 최단기 재임, 외압설이 지배적인 하야가 그 한 축이다. 그러나 장안의 장삼이사들이 느끼는 또 하나의 불행은 그가 자신을 둘러싼 갖가지 미스터리에 대해 끝내 해명을 거부했다는 점일 것이다. 고인의 빈소를 찾은 전두환 전 대통령은 ‘그 진실은 고인이 남긴 글에서 소상하게 밝혀질 것’이라고 말해 궁금증을 더욱 증폭시켰다. 12·12 이후 사반세기, 미스터리는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그렇다고 안개 속에 숨겨진 당시의 내막을 추측만으로 얼버무릴 수는 없는 일이다. 아직 고인의 증언은 공개되지 않고 있지만, 우리는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몇 가지 근거를 갖고 있다. 1979년 12월12일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벌어진 일련의 일들과, 이듬해 8월 그가 하야할 때까지 청와대를 중심으로 벌어진 갖가지 사건들의 ‘또 다른 당사자들’은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 필자는 운 좋게도 이들 신군부측 인사들의 직접증언을 청취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새로 획득한 권력의 맛에 취해 있던 그들은 숨길 것 없다는 듯 과감하게 그날의 일들을 증언했다. 이들의 증언은 당시 최 전 대통령 주변에서 벌어진 일들을 재현하고 진실에 접근하는 데 있어 근거가 되리라고 믿는다.
“전기를 써달라”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필자가 어떻게 ‘12·12쿠데타의 본질’에 접근하게 됐는지부터 밝히는 게 순서일 듯하다.
10여 년간 외항선을 탄 필자는 1970년대 말 ‘경향신문’에 ‘표류도’라는 해양소설을 연재하느라 서울에 머무르고 있었다. 1980년 8월11일 아침 7시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선수는 그동안 일본인들이 수차례 도전했으나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대한해협 도영(渡泳)을 위해 부산 다대포를 출발했다. 이 이벤트는 ‘동아일보’가 창간 50주년을 맞아 기획한 여러 행사 가운데 하나였고, 조오련은 사상 최초로 4시간30분 만에 대마도 해안에 당도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해양작가인 필자는 동아일보의 요청에 따라 이 사건에 대한 글을 8월13일자에 기고했다.
대학선배인 허문도씨가 연락을 해온 것은 바로 그 글을 보고서였다. ‘조선일보’ 외신부 차장을 그만둔 후, ‘한국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이원홍씨의 주선으로 주(駐)일본대사관 공보관으로 근무했던 그는 이 무렵 중앙정보부장 특별보좌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요청에 따라 남산 그의 집무실로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며 그가 간간이 외부와 하는 통화를 엿들어보니, 그가 하는 일이란 각 언론매체에 대한 통제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