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호

DJ의 정치 고향 목포 민심 기행

“이제 투사는 필요 읎어라, 목포는 ‘경제 1번지’가 되고프요”

  • 윤진호 미래재단 이사 icental@hanmail.net 박성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parker49@donga.com

    입력2006-12-07 15: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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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년 11월 현재 목포의 열망은 ‘잘사는 것’이다. 이런 열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알고 있을까. 그의 정치적 고향이자, 그를 시대의 지도자로 만들어준 목포시민의 고민을 알고 있을까. 그는 왜 8년 만에 목포를 방문했던 것일까. 정치도시에서 경제도시로 변해가는 목포에서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목포시민은 아직도 그를 무흠결의 지도자로 여기고 있을까.
    DJ의 정치 고향 목포 민심 기행

    10월28일 목포를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환영 나온 목포시민에게 답하고 있다.

    목포의 한 경제연구소에서 근무한다는 김인준(35)씨는 우리가 세발낙지를 한창 입으로 들이밀고 있을 때 들어왔다.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이 “목포의 명물 세발낙지를 먹지 않고는 서울로 올라갈 수 없다”고 버티는 바람에 시키긴 했지만 막상 꿈틀거리는 낙지를 보자 식욕이 싹 사라졌다. 그래도 경험 삼아 먹어보자는 생각에 한 마리를 잡아 나무젓가락으로 머리를 꿰고 몸통을 뚤뚤 말아 입에 넣는데, 꼼지락거리는 다리가 얼굴에 마구 달라붙었다. 다리가 콧구멍으로 들어가면 큰일 난다는 말에 그놈과 사투를 벌이듯 하면서 결국 한 마리를 꿀꺽 삼켰다.

    김인준씨는 서울의 명문대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고향에선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의 가족과 이웃은 그에게 거는 기대가 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서울에서 몇 년 살다가 3년 전 덜컥 고향으로 돌아왔다. 깜짝 놀란 동네 어른들이 그의 귀향을 나무랐다. 서울에서 성공해 내려와도 늦지 않을 텐데 너무 일찍 내려왔다는 것이었다.

    한 엘리트 청년의 귀향

    그가 “10년 앞을 보고 내려왔다”고 하자, 동네 어른들은 “김대중 정부 때도 소외됐던 목포가 10년 뒤라고 달라지겠냐”며 혀를 찼다. 그 말을 듣고 인준씨는 잠시 대답을 망설이다 그냥 말없이 웃는 것으로 주위의 걱정 어린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그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목포는 대한민국이 아껴둔 천혜의 땅입니다.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무한합니다. 그걸 보고 내려왔습니다.’



    그가 이 말을 아낀 것은 고향사람들의 뿌리 깊은 좌절감 때문이다. 194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6대 도시 중 하나였던 목포는 쇠락을 거듭, 지금은 가장 낙후한 지역으로 꼽힌다. 목포가 키웠다는 DJ도 대통령 시절 목포에 이렇다 할 선물을 안겨주지 않았다. 오히려 역차별이라 할 만큼 경제적으로 소외됐다. 일자리가 부족한 목포에 인구는 유입되지 않았고, 그나마 유능한 인재들은 기회를 찾아 고향을 떠났다. 동네 사람들이 보기에 인준씨의 귀향은 ‘가상한’ 행동이지만, 바다에 떨어진 한 방울의 물로 시름에 잠긴 목포를 변화시킬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목포에 도착한 첫날, 우리는 인준씨와 헤어진 뒤 목포 토박이들과 저녁을 먹기로 했다. 여행은 먹는 것에서 시작해 먹는 것으로 끝난다. 잘 먹어야 여행이 즐겁다. 첫날 저녁은 목포 사정을 훤히 꿰뚫는 사람들과 약속한 덕분에 식당을 고르는 데 문제가 없었다. 목포 경제를 뒷받침하는 어선이 들어오는 곳, 북항 근처의 횟집에 자리를 잡았다. 북항을 통해 들어오는 해산물은 한 해 1200억원어치에 달한다. 이 덕분에 24만 목포시민이 먹고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DJ의 정치 고향 목포 민심 기행

    목포역에서 가까운 구도심은 일제 강점기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개발되지 않은 탓이다.

    항구도시 목포는 선원들이 경제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 선원들이 항구에 들어와야 술집, 밥집, 여관이 들썩거린다. 이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으로 시민들은 가게도 운영하고 아이들 공부도 시킨다. 선원들은 때로 아이들의 영어교사가 되기도 한다. 한화갑 민주당 대표는 목포 유달중학교에 다닐 때 영어를 배우려고 외국 선원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고 한다. 선원을 따라 술집까지 들어갔다가 쫓겨나기도 했다.

    횟집에서 우리와 소주잔을 기울인 사람들은 서남권균형발전연구소의 이승룡(41) 대외협력팀장과 손문선(34) 연구원, 그리고 한국청년연합회(KYC) 목포지부의 박찬웅(37) 지부장과 이도경(37) 역사문화팀장이었다. 박찬웅 지부장에게 “목포의 ‘젊은 민심’을 읽으려면 누굴 만나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사람을 모았다. 이승룡 팀장과 손문선 연구원은 열린우리당 당원으로 활동했으며, 이도경 팀장은 시민을 대상으로 목포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늘 주위의 얘기를 듣고 토론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

    서남권균형발전연구소는 지난 40년 동안 소외됐던 서남권의 경제발전을 중앙정부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일궈내겠다는 취지로 지난해 설립됐다. 지역을 살릴 일꾼은 고향 출신의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아니라 목포시민이라는 얘기다. 이런 이유로 연구소는 지역사회에서 일할 인재를 발굴하고, 시민의 참여의식을 고양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한국청년연합회는 1983년 출범한 민주화운동청년연합과 1994년 청년정보문화센터, 그리고 전국대학생협의회 출신 인사들이 1999년에 만든 시민운동단체다. KYC 목포지부는 1985년 목포사회운동청년연합 창립 이후 목포지역과 전남 서남지역의 대표적인 청년단체로 성장했고, 현재 평화 통일과 공동체 사회구현을 목표로 일하고 있다. 이들이 목포의 여론을 형성한다는 측면에서 이들이 전해줄 얘기가 궁금했다. 이들과 술잔을 기울이면서 나눈 얘기는 ‘목포 민심 기행’ 곳곳에 드러낼 것이다. 목포는 청년의 도시였다.

    이승룡 팀장은 연구소에 들어오기 전 열린우리당 목포지부에서 조직국장을 맡았다고 한다. 노무현 정부가 내세운 정치개혁의 취지에 공감해 열린우리당에 들어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선택은 실패로 끝났다. 지난 5·31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은 완패했기 때문이다. 그는 내년 대통령선거에서도 열린우리당이 이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분석이 궁금했다.

    “몇 년 전 제가 목포시내에 어린이 전문서점을 연 적이 있어요. 서울 북아현동에 있는 ‘초방’이라는 서점을 본떠 시작한 거죠. 부모가 아이와 함께 서점에 들러 토론하면서 좋은 책을 골라주는 게 콘셉트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실패였어요. 목포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전집으로 책을 사주고 끝나요. 복잡한 토론 과정은 좋아하지 않아요. 저는 목포 실정에 맞지 않는 사업을 한 겁니다.

    열린우리당도 마찬가지예요. 정치개혁의 명분은 좋았지만, 목포시민이 바라는 것은 잘 먹고 잘사는 거예요. 목포가 전국에서 1등 하는 게 뭔지 아세요? 자영업 비율이 24%에 달한다는 겁니다. 전국 평균은 18%예요. 일자리가 없으니까 구멍가게라도 여는 거죠. 저는 열린우리당에 있으면서도 목포가 당면한 경제 문제가 뭔지 잘 몰랐어요. 안다고 해도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할지도 몰랐고요. 지역주민의 필요를 파악하지 않는데 누가 지지하겠습니까.”

    이 팀장이 연구소에 합류한 것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현실을 직시하고 문제를 풀어갈 방법을 찾아보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는 열린우리당 당원이었을 때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좁히는 데 실패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젠 배불러야지라”

    우리는 목포에서 4박5일을 지내면서 ‘먹고사는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듣고 또 들었다. 목포의 구도심(목포역 앞)엔 신용불량자가 즐비하다는 얘기, 투자할 곳이 마땅치 않아 금융기관의 이자율은 비과세 상품도 5%를 넘지 못한다는 얘기, 대형 사업체가 없어 노동운동이 절대 일어날 수 없다는 ‘뼈 있는’ 농담도 들었다.

    삼호중공업 협력업체인 한국메이드 최창석(55) 사장은 1997년 금융위기 직후 부도를 맞았다. 삼호중공업의 전신인 한라중공업이 부도 나자 최 사장은 7억원의 빚을 졌다. 앞이 캄캄했다. 가족은 물론 직원들까지 한동안 절망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현대중공업이 삼호중공업을 위탁경영하면서 경영이 정상화되자 그의 사업도 함께 일어섰다. 선박건조, 철구조물설계 전문업체로 발돋움했고, 현재 직원은 150명에 달한다.

    “이젠 가난이 싫어라우. 배불러야지라. 우리에게 투사는 필요 읎어라. 어찌됐건 우리 같은 사업가가 일할 수 있도록 해줘야지우. 그게 정치인의 할 일이어라.”

    2006년 11월 현재, 목포의 열망은 ‘잘 사는 것’이다. 이런 열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알고 있을까. 그의 정치적 고향이자, 그를 시대의 지도자로 ‘만들어준’ 목포시민의 고민을 알고 있을까. 그는 왜 8년 만에 목포를 방문했던 것일까. 정치도시에서 경제도시로 변화하는 목포에서 그는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목포시민은 아직도 그를 지도자로 생각하는가. 여전히 그를 지지하는가. DJ에겐 지금도 호남의 민심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이 있는가. 우리가 목포 취재를 기획한 것은 이런 궁금증 때문이었다.

    10월28일 토요일 오후 2시, 김대중 전 대통령은 KTX를 타고 목포에 도착했다. 목포역 앞은 이미 3000여 명의 시민으로 가득찬 상태. 하늘 곳곳에 그의 귀향을 반기는 현수막이 나부껴 목포는 다시 전국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눈빛을 반짝이며 DJ의 귀향을 지켜보는 노인이 있었다.

    서한태(79) 목포 환경과건강연구소 이사장.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의 장인으로 ‘목포의 어른’으로 통한다. 서 이사장은 의학박사 출신으로 김대중 정부 시절, 대통령지속가능발전위원회 초대 위원으로 활동한 적도 있다. 역 앞에서 DJ의 연설을 기다리던 서 이사장은 곁에 있던 사람들처럼 DJ가 왜 목포를 방문했는지 궁금했다. 여든을 바라보는 고령인데도 그는 DJ의 연설 주제는 물론, 주제별로 얼마의 시간을 할당하는지도 확인했다. 이를 통해 DJ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려고 했다.

    “예전에 왔을 때보다는 못하지만 예상보다 사람이 많이 왔어요. 지금도 여전히 말씀은 잘하시더구먼. 군말이 없어. 짤막하면서도 알아듣기 쉬운 말이었어. 연설의 시작은 어렵던 시절 얘기였어요. 영광의 시절도 있었다고 하더구먼. 노벨평화상 받은 업적도 얘기했지만, 모두 간단하게 언급하는 정도였어요. 마지막에 햇볕정책을 얘기할 때는 앞서 얘기한 시간만큼을 할애하더군. 하고 싶었던 얘기였나봐.

    DJ는 쿠바의 예를 들면서 북한을 변화시키려면 무력으로는 안 된다, 대화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지. 그러면서 북한이 핵 실험까지 하게 된 거는 미국이 대화로 문제를 풀지 않아서라고 했어. 이 연설을 듣던 군중의 반응은 ‘DJ는 어른 노릇을 한다’는 것이었어요. 지도자는 문제를 풀 수 있는 방향을 분명하게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해. 모든 판단은 국민이 해야 한다는 식의 애매한 태도는 지도자로서 자격이 없는 거지.”

    “DJ는 마술사랑께”

    그가 열린우리당 천정배 의원의 장인이자 한때 김대중 정부에서 일했던 것을 감안하고 듣더라도 ‘당시 DJ가 한 연설의 핵심은 햇볕정책의 옹호였다’는 그의 시각은 정확한 것 같다. 이는 DJ가 일산 자택에 거주하고 있을 때 수행비서였고, DJ의 장남 김홍일 의원의 보좌관을 지낸 박성원 목포시민신문 편집국장의 설명에서도 드러난다. 박 국장은 DJ가 목포를 방문한 이유에 대해 “햇볕정책이 폄하되고 훼손될 위기에 있자 고향의 지지를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했다. 둘 다 DJ의 심중을 비교적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니 참고할 만하다.

    그렇다면 DJ의 목포 방문 하루 뒤, 그와 함께 왔던 천정배 의원의 ‘신당 창당’ 발언은 어떻게 봐야 할까. DJ와 모종의 협의라도 있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 서 이사장은 말을 아꼈다. ‘특수관계인’이라는 점이 부담스러운 것 같았다. 박 국장은 DJ가 햇볕정책 옹호 외에 또 다른 정치적 목적 때문에 방문한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생애 마지막 방문이란 심정으로 고향에 내려왔을 것”이라며 “뱃길에 흔적이 남지 않듯, 그렇게 다녀갔다”고 했다.

    DJ의 정치 고향 목포 민심 기행

    목포시는 인구가 줄어드는 구도심을 살리기 위해 루미나리를 설치했다(왼쪽). 오른쪽은 주말에 길거리에 나온 시민들.

    그러나 정치인의 정치적 의도가 무엇이었든, 그 의도가 낳는 결과와 파장은 180도 달라질 수 있다. DJ의 정치적 의도가 있든 없든, 문제는 그의 움직임 자체가 정치적 해석을 불러일으키고 영향력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목포시민들은 그의 방문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

    목포 구도심에서 화랑을 경영하는 최왕삼(57)씨는 “(DJ가) 신당 창당이라는 명확한 정치적 목적을 갖고 왔다”고 해석했다. 그는 “화랑을 드나드는 정치권 인사가 많아 DJ의 방문 목적을 놓고 토론을 벌였는데, 역시 신당 창당 때문에 왔다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고 말했다.

    “일부에선 이명박이나 박근혜가 다음 대통령이 됐으면 바라지라. 이명박은 눈물의 밥을 먹어본 사람잉께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라. 지금 목포에선 이 정권이 엎어진다는 소문이 파다합디요. 긍께, 다음 대선에 진다는 얘기지라. 얼마 전부터 한나라당에 입당하는 사람도 늘고 있어라. 근디, DJ가 목포에 온 뒤로는 조금 주춤허요. DJ는 마술사랑께. 오면 달라져. 그래도 다음 정권을 한나라당이 잡는다는 것은 확신하는 분위기요. 앞으로 목포에선 특정 정당에 몰표를 주는 일은 읎을 거구먼.”

    그의 얘기는 민주당이나 열린우리당이나 목포시민의 커다란 관심을 끌 만한 정당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세력은 아직 소수다. 목포는 ‘큰 판’을 흔들 수 있는 대권 선거가 있을 때, 전략적으로 지역정당을 지지할 확률이 높다. 역대 선거 결과가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최근 들어 달라진 건, 지역의 일꾼을 선출하는 경우엔 후보의 자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소속을 택한다는 점이다.

    정치엔 개입하지 않겠다?

    실제 지난 지방선거 때, 한화갑 민주당 대표가 내세운 후보들이 한 대표의 지역구인 무안군과 신안군에서 모두 낙선했다. 이를 두고 전남지역 신문사들은 ‘한화갑의 완패’라는 제목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후보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엔 지역 정당이라도 배제하고 무소속 후보를 선택한 것이다. 한나라당 출신 후보들도 10%에 가까운 지지를 획득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목포시민 중 일부는 DJ가 분명한 정치적 목적을 갖고 왔다고 보고 있었다.

    DJ는 목포 방문 연설에서 두 차례나 “정치엔 개입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시민들이 이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이유는 좀전에 언급한 대로 천 의원이 DJ를 만난 뒤 신당 창당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물론 DJ 스스로 신당 창당을 거론한 적은 없다. 그렇다면 DJ와 천 의원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갔던 것일까. 이를 추정해 볼 만한 장면이 있다.

    DJ는 10월28일 목포에 도착한 뒤, 목포 역사 안에서 10여 분 동안 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엔 한화갑, 유선호, 천정배, 김원웅 등 민주당과 열린우리당 의원, 그리고 전남도지사와 목포시장이 참석했다. 기자들은 일절 출입이 배제된 간담회장에 목포MBC 보도부 김윤 기자만이 유일하게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키가 훤칠하고 서글서글한 인상 때문인지 누구도 그를 제지하지 않아 그는 자연스럽게 간담회장으로 따라들어간 것이다. 다음은 김 기자가 전해준 얘기다.

    DJ의 정치 고향 목포 민심 기행

    일제 강점기 일본인 여성 윤학자씨와 함께 아동복지사업에 헌신한 윤치호씨를 기리는 기념비(위). 목포의 경제를 일으키고 있는 삼호중공업 조업현장(아래).

    “간담회장에서 천 의원은 맨 끝자리에 앉아 있었어요. 선배 의원이 많아서 그랬던 것 같아요. 도지사와 시장이 목포의 현황에 대해 간략하게 보고하고 있었어요. DJ는 별말 없이 듣고 있었죠. 그런데 느닷없이, 그리고 유일하게 천 의원을 부르면서 ‘고향이 어딘가’라고 묻는 겁니다. 순간, DJ가 뭘 착각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DJ가 자신의 보좌역까지 지낸 천 의원의 고향을 모를 리가 없거든요. 천 의원은 ‘신안군 암태면입니다. 가족들도 대부분 이곳에서 삽니다’라고 대답했어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질문이 천 의원을 움직이지 않았나 싶어요.”

    이에 대해 목포MBC 장용기 보도부장은 “호남의 정치의식이 이분화하는 것을 DJ가 참지 못해 했던 말 같다”고 해석했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신안군을 무소속 후보에게 내준 것은 뭔가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지적이란 얘기다. 장 부장은 “예로부터 신안군 내 14개 섬을 통합하는 사람은 나라의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얘기가 있다”며 “섬마다 특성이 달라 이해관계를 조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DJ는 통합했지만, 한화갑 대표는 실패했다. DJ는 천 의원에게 이런 메시지를 던지려 했던 것일까. 이해관계가 달라 갈라진 당을 이젠 통합해야 한다는?

    호남의 자부심

    ‘정치인의 움직임 자체가 정치’라는 말에 비춰 DJ의 목포 방문은 분명한 정치적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부인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민심이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게 더 진실에 가깝다. DJ가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렇다면 그는 목적을 달성한 것일까. 노무현 대통령을 배제한 신당 창당, 갈라진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통합은 가능할까. DJ에겐 아직 그런 힘이 있는가.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긴다’는 책을 펴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MIN컨설팅 박성민 대표는 DJ의 의도가 실패했다고 평가한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DJ는 햇볕정책을 옹호해줄 정치세력이 필요했고, 호남을 교두보로 이 같은 세력을 만들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햇볕정책을 엄호해줄 세력을 규합한다는 측면에서 이는 국내 정치에 개입한 거나 다름없죠. 한나라당의 박근혜라도 햇볕정책을 옹호한다면 연대할 가능성을 내포하면서 말이죠. 결국 DJ는 ‘호남에 관심이 있다면 나를 통해야 한다’는 의사를 암묵적으로 표현한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전처럼 그의 파워가 강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가 목포를 방문했을 때 목포시가 군중을 동원했다거나 목포 시의원들이 일본으로 대거 출장을 떠났다든가 하는 건 예전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죠(일부 군중 동원과 의원 외유는 현지 취재 중 확인됐다).

    이걸 노무현 대통령이 안 것 같아요. 그래서 동교동을 방문했죠. 추측건대 노 대통령은 DJ에게 ‘대북 포용정책은 계승할 테니 국내 정치엔 개입하지 말라’고 요청했을 겁니다. 국내 정치에 개입할 만큼의 힘은 안 되니까 그건 노 대통령이 하겠다는 의미죠.

    저는 목포 방문이 DJ의 실수였다고 봅니다. 이미 북핵과 부동산 문제로 노 대통령이 정치적 힘을 행사할 수 없는 지경인데, DJ가 노 대통령에게 활동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만들어준 거죠. DJ의 움직임에 국민이 ‘또 DJ가 지역정서를 자극하는구나, 그래선 안 되는데’ 하는 반응을 보이자 노 대통령이 그 틈을 파고든 거죠. 그의 입지를 강화해준 꼴입니다. 차라리 더 기다렸다면 DJ의 의중대로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천 의원도 이젠 신당 창당 얘기 꺼내지 않잖아요. 그런 점에서 DJ의 의도는 실패했다고 봅니다.”

    호남은 죽은 권력을 반기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어느 지역인들 그렇지 않은가 싶지만, DJ까지 그럴까 하는 데선 쉽게 단정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DJ는 호남의 상징이자, 자부심이다. 대한민국 유일의 노벨평화상 수상자다. 호남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비난하는 이유 중 하나는 노벨평화상 수상의 의미를 폄하했다는 것이다. 2003년 노무현 정부 초기, ‘대북 특검’을 실시한 것은 호남의 자부심에 먹칠을 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DJ의 정치 고향 목포 민심 기행

    서한태(79) 이사장

    그러나 DJ의 귀향은 시민들에게 그다지 반가운 일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아들을 둔 이현주씨는 DJ의 방문을 어떻게 보냐는 질문에 “그냥 오시는 갑다고 생각했소”라고 했다. 이씨는 목포에서 10년 넘게 시민운동을 한 여성이다. 그랬던 그가 이토록 냉소적으로 말한 것은 “DJ가 목포를 정치적으로 이용했지, 도움은 주지 않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번엔 목포 구도심의 오래된 호프집을 찾아갔다. 택시 기사들과 언론사 기자들의 단골집으로 소문난 곳이었다.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답게 여주인은 생글생글한 얼굴에 재치 있는 답변으로 손님들의 장단을 맞출 줄 알았다. 그에게 DJ 귀향에 대해 물어봤다.

    “그냥 조용히 왔다 가셨으면 감동했제. 왜 길 막히게 하고, 돈 쓰게 하는지 이해가 안 가요. 우리 가게는 새벽 3시까지 택시 기사들이 있다가 가는데, 만날 하는 얘기가 먹고살기 힘들다는 것이제. DJ 방문이 뭔 의미가 있다요?”

    이 호프집에서 함께 맥주를 마신 이도경 KYC 역사문화팀장은 어릴 때 중학교 선생님에게 혼난 일화를 들려줬다. 친구들과 논쟁을 하면서 이 팀장은 ‘김대중씨’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이를 듣던 선생님이 그를 야단치면서 “김대중 선생님이지” 하고 고쳐줬다.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던 이 팀장은 시간이 가면서 선생님의 지적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김대중 선생님’엔 목포의 한(恨)이 응축돼 있다는 것이다.

    “목포시민에게 김대중이란 이름 석 자는 신앙의 대상이었죠. 이름을 부르는 것 자체가 주문(呪文)을 외우는 것이고, ‘할렐루야’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맺힌 것을 풀어주는 존재, 그래서 김대중은 ‘씨’가 아니고 ‘선생님’으로 불러야 하죠. 나이가 들면서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DJ를 존경하지는 않습니다. 길거리에 플래카드가 걸리고 사람들이 광장에 나가는 걸 보고 DJ가 왔다는 사실을 알았을 정도니까요. 문제는 경제예요. 손가락만 빨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20대 젊은이 몇 명을 인터뷰했지만, DJ에 대한 기억도, 관심도 없었다. 목포과학대학에 다닌다는 학생은 “DJ는 몰라도 슈퍼주니어의 동해는 좋아한다”고 말했다. 12인조 댄스가수 그룹 슈퍼주니어의 멤버, 이동해는 목포가 고향이다. 그 대학생은 지난 8월 동해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동해의 집으로 찾아갔다고 한다. 어디서 소식을 듣고 왔는지, 빈소엔 전국에서 찾아온 수많은 슈퍼주니어의 팬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슈퍼주니어의 다른 멤버들이 빈소를 찾는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를 보기 위해 팬들이 몰려온 것이다. 알리지 않아도 소식을 듣고 찾아오는 젊은이들, 군중을 동원해야 모이는 DJ의 방문길. 시대의 변화를 짐작케 했다.

    “혼이 외치는 소리에 답하라!”

    목포의 삼학새마을금고 박찬옥 전무는 경제적인 관점에서 젊은이들의 탈(脫)정치 성향에 대해 설명해줬다. 그에 따르면 “요즘 젊은이들은 이자율 0.1%라도 더 주는 금융기관이 있다면 단숨에 그곳으로 옮긴다”며 “부모의 말보다 세상에서 얻는 정보를 더 신뢰하기 때문에 가정에 대화가 단절되고 정치 토론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박 전무는 계산기를 두드려서 좀더 이익이 되는 쪽으로 움직이는 젊은이들에게 부모 세대가 예전의 향수를 들이대며 DJ에 대한 지지를 호소해도 먹혀들지 않는다고 했다.

    목포시민은 DJ를 목포의 자랑으로 내세우지만, 소주 한잔 하고, 2차로 맥주까지 한잔 하면 나오는 얘기는 좀 다르다.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속내를 묻는 질문을 하면 DJ에 대한 섭섭한 감정이 조금씩 묻어나온다. 섭섭한 감정을 종합해보면 DJ에게 바라는 것이 된다. 어떤 얘기들을 하는지 들어보자.

    서한태 이사장은 “(DJ가)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 목포에 한옥 한 채 짓고 1년이면 두세 차례 내려와 시민들과 자유롭게 대화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 이사장은 그를 무조건 지지한, 더러는 전재산을 DJ에게 헌금한 고향사람에게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으냐고 했다. 그는 “아직 목포엔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이 많아 이들이 자유롭게 공부할 도서관이 필요하다”며 “DJ의 아호를 따 ‘후광 도서관’을 짓고, DJ 사후엔 기념관으로 사용하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목포YMCA가 목포시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는 목포시청소년수련관의 김종현(54) 관장은 “DJ 때문에 목포는 다른 지역보다 오히려 더 소외되고 차별받았다”며 “자연인 DJ를 세계인 DJ로 만드는 데 몸과 혼을 바친 목포를 위해 보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얘기를 좀더 들어보자. 목포에서 만난 사람 중 그만큼 DJ의 성장과 그 의미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한 인사는 만나지 못했다. 그의 설명을 통해 목포와 DJ, 그리고 DJ 없는 목포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1940년까지만 해도 목포는 남북한을 합쳐 6대 도시 중 하나였어요. 그러나 6·25전쟁 뒤 중국과 관계가 단절되면서 목포는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5·16 군사정변 이후엔 새로운 세력이 국가를 경영하게 되고, 목포는 끝없이 소외됩니다. 1968년 DJ가 군사 쿠데타는 옳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DJ는 목포의 희망으로, 또 대한민국의 희망으로 떠오릅니다.

    그는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순간을 수차례 겪었지만 그를 ‘메시아’로 따라준 목포시민 덕분에 고비를 넘겼어요. DJ는 스스로 일어선 사람이 아닙니다. 목포가 만들어준 정치인이요. 목포 자체가 스스로 생겨난 도시가 아니에요. 역사적으로 보면 새로운 사람들이 반도에 와서 살던 곳이죠. 이들이 외부에서 동력을 가져와 삶의 터전을 만든 겁니다. 중국 산둥반도에서 무동력선을 띄우면 조류의 흐름을 따라 목포에 도착하고, 다시 일본으로 빠져나갑니다. 목포에 처음 터를 잡은 사람들은 외지인이라고 생각해요.

    목포는 한반도의 끝이자, 유라시아 대륙으로 나아가는 시작점이에요. 신의주까지 뻗은 1번 국도의 시작이 목포잖아요. 이런 기운을 타고 DJ가 세계적인 정치인이 된 겁니다. 목포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대를 이어 정치인을 키운 곳이에요. 목포시민들은 DJ가 지목한 정치인을 차세대 인재로 생각하고 혼을 줬습니다. DJ는 죽기 전에 이런 혼이 외치는 소리에 보답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도서관 같은 인재육성기관을 짓는 것이 좋겠죠. 또는 DJ 생가(전남 신안군 하의도)를 노벨평화상 기념관으로 지어도 좋겠습니다. 굳이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말고, 말없이 목포에 내려와 살면 오해가 없습니다.”

    목포가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하는 기점이 돼야 한다는 것은 DJ가 2004년 펴낸 ‘21세기와 한민족’이란 책에 잘 나와 있다. 그는 “목포와 부산에서 시작해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하는 철의 실크로드를 열어야 한다”며 “북한을 거쳐 대륙으로 나가야 물류비용과 기간을 30% 단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현대삼호중공업의 성공

    김 관장과 얘기를 나눈 뒤, 바다가 보이는 대반동으로 향했다. DJ가 1980년 옥중에서 썼다는 편지엔 “목포 대반동 언덕에 기와집을 짓고 사는 게 꿈”이라는 대목이 있다. 그가 목포를 방문할 때면 언제나 대반동의 신안비치호텔에 묵는 것도 그때의 꿈 때문일 것이다. 대반동에 가면 전망이 탁 트인 바다를 마주할 수 있다. DJ는 어렵던 시절, 바다 너머 세상에 대한 꿈을 꿨을 것이다.

    대반동은 한국 청년과 일본 처녀가 만나 인류애의 꿈을 이룬 곳이기도 하다. ‘거지대장’으로 불리던 윤치호 전도사가 1928년 7명의 고아를 데리고 공생원을 설립한 뒤, 일본인 여성 다우치 시즈코(윤학자)와 함께 아동복지사업에 헌신했다. 이들의 아름다운 사랑은 1995년 김수용 감독이 ‘사랑의 묵시록’이란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 일본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DJ가 살고 싶다던 대반동은 현재 몇 가구만이 살고 있는 조그마한 동네다. 요즘 목포 사람들은 하당과 남악 신도시, 삼무(三無)라고 불리는 옥암지구에 살고 싶어 한다. 옥암지구는 담이 없고, 돌출 간판이 없으며, 전봇대가 없다고 해서 삼무지구로 불린다. 이곳의 아파트 가격은 구도심보다 평당 200만원가량 더 비싸다. 30평대 아파트의 경우 구도심에선 7000만원대지만 신도심에선 1억3000만원이 넘는다.

    인구가 정체돼 활력을 잃은 목포에 활기를 불어넣은 것은 삼호중공업이다. 2000년 이후 조선업이 활황을 보이고, 현대중공업계열로 편입되면서 삼호중공업은 세계 5위 선박건조업체로 성장했다. 지금도 3년6개월치 일감을 확보했으며, 작업장에선 길이가 320m나 되는 32만t급 선박을 건조하고 있다. 종업원은 협력사를 포함해 9300명에 달한다.

    삼호중공업의 성장으로 대불산업단지도 활기를 띠고 있다. 이 단지는 1996년 목포권역의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준공됐으나 2000년 초까지만 해도 공장 입주율은 30%를 밑돌았다. 그러나 삼호중공업이 일어서고 협력업체들이 입주하자 입주율은 90%까지 올랐다. 삼호중공업만 50개의 협력업체를 유치했으니 목포시민이 자랑할 만하다.

    지난해 9300명 직원에게 나간 월급은 3500억원, 삼호중공업 직원의 평균 연봉은 5400만원에 이른다. 이들이 목포의 신도심을 만든 주역인 셈이다. 직원의 40%가 목포 신도심에 거주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삼호중공업의 성공으로 목포시민들은 경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잘 길러낸 정치인사를 중앙에 내보내 지역을 개발하는 것보다, 기업 한 곳을 유치하는 것이 진짜 도움이 된다는 것을 직접 체험한 것이다.

    하당 신도심에서 만난 한겨레부동산 안문기(52) 대표는 요즘 이웃들과 술 한 잔 하면 온통 아파트 얘기뿐이라고 했다. 서울에 아파트 사서 떼돈을 벌었다는 얘기, 보름 만에 1억5000만원이 오른 서울의 아파트 가격을 보고 기겁을 했다는 얘기, 서울에서 목포에 땅을 사려고 문의가 오고 있다는 얘기 등이다. 안 대표는 “요즘 목포 사람들은 돈 버는 얘기뿐”이라며 “돈 벌면 해외여행 가는 게 대부분의 꿈이고 실제 해외여행 한 번 안 가본 사람은 드물다”고 말했다.

    “목포학(學) 만드는 게 꿈”

    우리가 목포를 떠나기 전, 조촐한 술자리가 마련됐다. 허름한 족발집이었지만 맛은 정갈했다. 주인아주머니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 주인은 김종현 관장이 왔다며 귀한 갈치젓을 내놓았다. 숟가락으로 조금 떠서 맛을 보았다. 짜지 않으면서 깔끔했다. 비린내는 나지 않았고, 곰삭은 맛이 구수했다. 막 지은 밥 한 공기를 받아들고 쓱쓱 비벼 먹었더니 금세 한 그릇을 비웠다.

    김 관장은 DJ가 목포에 왔을 때 부른 ‘목포의 눈물’은 단순한 대중가요가 아니라고 말했다. 이난영이 1935년에 부른 이 노래는 당시 나라를 잃은 한국인에겐 애국가 대용이었다. 그 무렵 안익태의 애국가는 없었으니까. 따라서 DJ는 ‘목포의 눈물’을 부른 것이 아니라 애국가를 부른 것이라고 해석했다. 설명이 그럴 듯했다.

    박찬웅 KYC 목포지부장은 “목포학(學)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한국 최초의 여류 소설가 박화성이 태어나고 활동한 곳, 한국화의 거대 산맥 ‘남농 허건’ 선생이 남종화의 화법을 계승한 곳, ‘사의 찬미’ 윤심덕의 애인이자 신극 운동의 선구자 김우진이 태어난 곳, 목포의 눈물 이난영이 살던 곳이 목포라고 말했다. 노동운동에 몰두했던 박 지부장은 목포의 문화사회적 가치를 재발견해 그 분야에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싶다고 했다.

    이도경 팀장은 최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자동차경주 ‘F1’을 보고 왔다고 했다. 그는 목포시를 설득해 경주용 자동차 대회를 목포에 유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팀장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한다”고 거듭 말했다.

    1차에서 시작한 술자리는 3차로 이어져 새벽 1시에나 끝났다. 상당히 마신 것 같은데 누구 하나 취한 사람은 없어 보였다. 밖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도시가 깨끗하게 씻기는 느낌이었다. 새벽 공기가 상쾌했다. 아마 좋은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셨기 때문일 것이다. 숙소까지 데려다 준 그들과 작별인사를 나누면서 우린 이들이 만들어갈 목포의 미래가 벌써부터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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