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호

서독 동방정책 파고든 동독 슈타지의 공작비법

“여자는 일보다 사랑이 먼저라는 걸 노려라”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입력2006-12-07 16:5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性을 무기로 서독 실력자 여비서 포섭한 슈타지
    • 외도 현장 사진 찍어 코 꿰기
    • 슈타지는 왜 동독에서 협조자를 포섭했나
    • 슈타지 요원들, 동독 붕괴 조짐 보이자 서독行
    • 통일 직전 슈타지 문서 폐기한 동독 민주정부
    • 서독 강경파 고립시키는 슈타지 비밀공작은 성공
    • 보수 정당과 극우파에도 협조자 침입시켜
    • 이념보다는 경제적 대가 때문에 협조한 경우 많아
    • 특정 정보 흘려주며 서독 언론인 포섭
    서독 동방정책 파고든 동독 슈타지의 공작비법

    동베를린에 있는 구 슈타지 본부 건물(왼쪽 사진). 동서독 화해의 물꼬를 튼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그의 보좌관인 권터 기욤(오른쪽 사진)이 1956년 동독에서 위장 귀순한 간첩으로 밝혀져 위기에 처했다.

    10월26일 검찰의 영장 청구로 세상에 알려진 일심회 사건과 북한 직파 간첩으로는 만 9년만에 검거된 정경학 사건은 북한의 대남(對南) 공작 의지를 새삼 돌아보게 한다. 북핵 실험에도 불구하고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이 진행되고 있고 사업차 남북을 왕래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왜 북한은 한국에 지하조직을 만들고 간첩을 직파하는 것일까.

    지금의 한반도 상황은 1960년 중반부터 통일될 때까지의 독일 사정과 흡사한 면이 많다. 서독이 동방정책(Ostpolitik)을 펼친 1960년대 중반 이후 양독(兩獨) 간의 긴장은 외견상 크게 완화되었다. 그러나 이면에서는 양쪽 정보기관의 치열한 공작과 정보활동이 펼쳐졌다. 서독이 동방정책을 펴던 시절 동독이 감행한 대(對)서독 공작에 대한 연구는 ‘평화와 번영 정책’이 펼쳐지는 지금 북한이 벌이는 공작의 실체와 규모를 짐작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지난 8월 만프레드 빌케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교수는 미하엘 쿠비나, 빌헬름 멘징 연구원과 함께 ‘동독의 대(對)서독 간첩활동 실태 및 서독의 대응조치’란 제목의 논문을 베를린 자유대 산하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독재체제 연구협회를 통해 출간했다. 이 논문을 토대로 동방정책이 펼쳐진 시기 동독의 대서독 정보활동을 분석해보고 북한의 대남공작 정도를 가늠해보기로 하자.

    동독 공산당, 서독 사민당은 같은 뿌리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은 사회민주당(사민당)이다. 1875년 전(全)독일노동자연맹과 사회민주노동당이 통합함으로써 생겨난 사민당은, 나치 시절 활동을 금지당했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부활했다.



    그 후 동서독이 갈리자, 1946년 동독의 사민당은 소련이 부활시킨 독일공산당과 합당해 사회주의통일당(SED)이 되었다. 사회주의통일당은 동독 정부가 세워진 1949년부터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중 봉기로 호네커 총비서가 사임한 1989년까지 40년간 동독을 이끌었으므로, ‘동독 공산당’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북한의 조선노동당이 이와 유사한 길을 걸어왔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다. 공산당은 1당 독재를 하므로 한 나라에는 하나의 공산당만 두는 ‘1국1당(一國一黨)’ 체제를 고수한다. 따라서 소련이 군정을 한 북한 지역에서는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分局)’이 생겨났다. 그런데 조선공산당이 미 군정의 추적으로 약화되자 소련은 분국을 북조선공산당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소소한 정당 몇 개를 합당해 ‘북조선노동당(북로당)’을 만들고, 남쪽에 있는 조선공산당은 남조선노동당(남로당)으로 개칭케 했다. 그 후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수뇌부가 미 군정의 추적을 피해 월북하자, 두 당을 합당해 조선노동당을 만들었다. 조선노동당과 사회주의통일당은 공산당과 다른 정당을 통합해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서독 지역에서도 사민당이 부활했다. 그러나 1949년 서독 정부 출범시 권력을 잡은 것은 아데나워가 이끄는 기독교민주당(기민당)이었다. 아데나워 총리는 1963년까지 14년간 서독을 통치하며 ‘라인강의 기적’을 일궜다. 그 후 기민당은 에르하르트와 키징거가 총리를 이었지만, 이들의 힘은 아데나워에 비해 약했고 대신 사민당 세력이 확대되었다.

    1966년 선거에서 기민당은 덩치가 커진 사민당을 파트너로 삼아 연정을 구성했다. 이때 총리를 맡은 이가 기민당의 키징거였고, 외무장관에는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가 취임했다. 브란트 외무장관은 “동독을 통일 대상이 아닌 독립국가로 인정해야 한다”며 ‘두 개의 독일’을 주장해왔다. 이때부터 브란트는 자신의 ‘등록상표’이기도 한 동방정책을 펼쳤다. 동유럽 접근정책을 시도해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와 국교를 맺은 것이다.

    1969년 치러진 선거에서 사민당은 기민당을 버리고 자유민주당(자민당)을 파트너로 삼아 집권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총리에 오른 브란트는 ‘할슈타인 원칙’의 포기를 선언했다. 할슈타인은 아데나워 총리 시절 외무차관을 지낸 사람으로, 그는 “소련을 제외하고 동독을 승인한 나라와는 외교관계를 맺지 않겠다”고 천명한 바 있다.

    불신임 위기 겨우 넘긴 브란트

    할슈타인 원칙의 철회는 곧 동방정책을 ‘내놓고’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1970년 3월19일 빌리 브란트는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동독의 에르푸르트를 방문해,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와 역사적인 ‘동서독 정상회담’을 가졌다. 양독 정상회담이 열린 에르푸르트는 사민당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1871년 독일을 통일한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 정권은 1878년 ‘사회주의 진압법’을 만들었다. 그로 인해 사민당은 비합법 정당이 됐는데 1890년 비스마르크가 총리에서 물러나면서 이 법이 폐지되었다. 그러자 사민당 관계자들이 1891년 10월 에르푸르트에 모여 당 대회를 열고 마르크스주의적 원칙을 따르는 강령(일명 에르푸르트 강령)을 채택했다.

    동독의 슈토프 총리는 사회주의통일당과 사민당이 공유하는 역사의 공간으로 브란트 서독 총리를 불러들인 것이다. 그러나 양 총리는 합의점을 찾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브란트는 동방정책을 이어가 소련 폴란드와 외교관계를 맺고,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1971). 이듬해 동독과 기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동독을 통일의 대상이 아닌 독립된 국가로 인정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어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불가리아 등과도 국교를 맺었다.

    그러나 브란트 정권은 매우 불안정했다. 1972년 그의 비서인 권터 기욤이 동독 간첩인 것으로 밝혀져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권터 기욤은 체포되는 순간 “나는 동독군의 장교다”라고 외친 것으로 확인돼, 브란트는 위기를 빠져나갈 수 없었다. 기민당을 필두로 한 야당은 ‘탄핵’에 해당하는 불신임안을 제출했으나, 브란트는 간발의 표차로 ‘낙마’를 모면했다.

    미·독 공조 확고할 때 통일 맞아

    이 사건의 여파로 1974년 브란트가 물러나고 사민당의 슈미트가 새 총리가 돼 1982년까지 서독을 이끌었다. 그리고 1982년 기민당·기사당(기독교사회당)·자민당 연합을 이끈 콜이 총리가 돼 아데나워보다 긴 17년을 통치하게 되었다. 콜은 총리 7년차 되는 해(1989년) 동독의 사회주의통일당 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고, 8년차 때(1990년)는 동독이 국민투표로 서독에 합병되겠다고 결의하는 것을 목도했다. 그리고 1999년까지 통일 독일의 총리로 재임하다 물러났다.

    기민당 정권이 보수적이라면 사민당 세력은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데나워 총리가 이끈 기민당 정권은 동독과 치열한 냉전을 펼쳤다. 콜 총리는 레이건에서 아버지 부시로 이어지는 미국의 공화당 정권과 호흡을 맞춰, 요즘 회자되는 ‘미·일 공조’ 이상으로 돈독한 ‘미·독 공조’ 체제를 만들었다. 국제정치학자들은 미독 공조 덕분에 소련이 동독을 포기하고 굴복하게 됐다고 말한다.

    브란트가 이끈 사민당 정권은 긴장완화로 번역되는 ‘데탕트(detente)’를 이끌었다. 동서독이 기본조약을 맺은 해(1972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6·25전쟁 때 맞붙어 싸운 중국을 방문했고, 길고 긴 중일전쟁을 치른 일본도 중국과 국교를 회복했으니, 데탕트는 세계적인 물결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직후 인도차이나에서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 등이 공산화하는 도미노 현상이 일어났다.

    서독 동방정책 파고든 동독 슈타지의 공작비법

    1970년 3월19일 동독의 에르푸르트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맨 왼쪽)와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맨 오른쪽).

    ‘한강의 기적’을 일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정권을 강경 보수로 본다면, 노태우를 시작으로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으로 연결된 권력은 ‘민주화’를 만들었으니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노(盧)에서 노(盧)’로 이어진 20년간은 브란트에서 슈미트로 이어진 13년간의 사민당 통치 시절의 독일과 비교해볼 수 있다(브란트가 외무장관이 된 때로부터 따지면 17년간과 비교 가능).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에 영향을 받은 한국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73년 6·23선언을 통해 할슈타인 원칙의 포기를 밝혔다. 그리고 6·23선언 10주년인 1983년 이범석 당시 외무장관이 국방대학원 강연에서 북방정책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으나 성과는 전혀 없었다. ‘박제’가 된 이 말을 살려낸 이는 1988년 취임한 노태우 대통령이다.

    대통령 취임사에서 북방외교를 거론한 노태우 정부는 88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본격적인 북방외교에 나섰다. 때마침 동유럽에서는 민주화 바람이 일었다. 한국은 그 틈을 파고들어 1989년 헝가리 폴란드 유고와 수교하고, 1990년 소련, 1992년 중국과 국교를 맺어 북방정책의 꽃을 피웠다. 그리고 1991년 9월17일엔 북한과 유엔에 동시 가입함으로써 실질적으로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해 연말엔 남북한 총리가 국회 비준이 생략된 기본합의서에 서명하는 ‘업적’을 이뤄냈다. 지난 일이긴 하지만 이때 남북이 각각 국회에서 비준을 받아 기본합의서를 기본조약으로 ‘승격’시켰다면, 남북한은 국교를 맺고 양쪽 국민이 여권을 들고 방문하는 단계로 들어섰을 것이다.

    동서독과 남북한, 공통점과 차이점

    독일을 모델로 삼아 착착 진행되던 한반도 화해무드는 북한의 핵 개발 시도로 급제동이 걸렸다. 독일에서는 핵이 등장하지 않았는데 왜 한반도에서는 등장한 것일까.

    1970년대 초 동독은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기구라는 거대한 후원 세력을 업고 있었다. 당시 동독의 정규군은 36만여 명이었는데 소련은 이보다 많은 40여만명을 동독에 주둔시켰다. 또 폴란드 체코 등의 바르샤바조약기구 군(軍)이 뒤를 받쳐주었고, 소련은 동독에 핵우산을 제공했다.

    그러나 1990년대의 북한은 이렇다 할 동맹국과 핵우산을 제공해줄 나라를 갖고 있지 못했다. 동유럽과 소련이 해체됨으로써 사회주의 우군도 사라져버렸다. 이 상황이 북한을 자체 핵 개발쪽으로 내몰았다. 그런데 경제가 거덜났으니 북한은 한국이 비춘 ‘햇볕’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오래 쪼이면 북한 주민의 마음은 한국쪽으로 이동할 수가 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상납론(上納論)’이다. 북한은 가난해서 받아먹는 게 아니라 한국을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줄 정도로 강하기 때문에 한국이 바치는 것을 받아먹는다는 주장이다. 7월12일 부산에서 열린 남북장관급 회담에서 권호웅 북측 단장은 “선군(先軍)정치가 남측의 안전을 지켜준다”고 한 후, 북한의 무더기 미사일 발사로 유예시킨 50만t의 쌀을 지원해달라고 요구했다.

    핵은 북한 주민의 봉기도 막아준다. 핵 때문에 북한 주민들은 김정일 정권이 여전히 강한 것으로 생각해 배신할 마음을 먹지 못하는 것이다.

    핵 무장은 미국과 대화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핵을 만든다고 하자 북한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미국이 클린턴 대통령 시절 북한을 대화 상대로 인정했다. 이 회담이 길어졌다면 양국은 대립을 풀고 평화관계로 들어가는 조약(미-북 기본조약 또는 평화조약)을 맺었을지도 모른다. 미국과 평화조약을 맺는 것은 한국과 평화조약을 맺는 것보다 김정일 정권을 유지하는 데 훨씬 더 도움이 된다.

    이런 생각을 한 북한이라면 ‘햇볕’과 ‘평화와 번영’ 정책이 펼쳐지는 공간을 집요하게 파고들 필요가 있다. 동독도 서독의 사민당 정부가 만들어준 ‘데탕트’라는 공간을 적극적으로 파고들었었다.

    동독의 사회주의통일당은 대(對)서독 공작을 위한 지도부로 당 중앙위원회에 ‘대서독국(Westabteilung)’을 두었다. 동독 실력자들은 ‘라인강의 기적’을 만든 서독을 흡수 통일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961년 동독은 서독으로 탈출하는 동독인들을 막기 위해 베를린 장벽을 쌓았는데, 이는 서독을 흡수 통일하는 것이 어려움을 자인한 행동이었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 대서독국은 내각 직속의 국제정치경제연구소에 서독 체제의 강점과 약점을 집중 연구케 하였다. 그리고 반공과 통일로 점철된 서독 여론을 바꾸는 방법을 찾아달라고 주문했다.

    빌케 교수의 논문은 ‘이때부터 사회주의통일당은 독일을 통일하겠다는 꿈을 포기하고 동독의 국가적 지위를 국제법적으로, 국제정치적으로 굳히는 데 주력하게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때 브란트가 외무장관과 총리에 올라 동방정책을 펼쳤으니, 동독으로서는 ‘불감청 고소원(不敢請 固所願)’이었다.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로 양쪽 주민이 여권을 들고 상대쪽을 여행할 수 있게 되자 사회주의통일당은 서독의 집권 사민당 안에서 반공과 통일을 외치는 반동세력을 고립시키는 공작에 주력했다. 이들은 국제사회가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는 것을 막으려 한 사람들이었다.

    사회주의통일당은 동독의 국가정보기관인 슈타지(Stasi) 등을 활용해 이들의 주장을 최소화하는 공작에 주력했다. 그 결과 1980년대가 되자 서독의 엘리트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회주의통일당의 주장을 수용하게 되었다. 사회주의통일당은 서독 안에서 그들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된 것이다.

    동독의 분단 고착화 전략에 말린 서독

    시간이 지나자 서독에서는 통일을 주장하는 세력은 점점 소수가 되고 분단이 불가피하다고 인식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서독에서는 서독기본법(잠정헌법) 23조에 있는 독일 통일의 원칙을 버리고 동서독 기본조약대로 분단을 현실로 수용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등장했다. 빌케 교수는 ‘이러한 변화가 사회주의통일당의 공작에 의해서만 이뤄진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일부 서독 엘리트는 동독 체제를 전체 독일의 사회주의 대안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서독이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서 탈퇴해야 한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 노력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이 노력이 실패한 것은 서독의 반동세력이 강하게 결집했기 때문이 아니라, 소련과 동구제국이 안고 있던 모순이 극대화함으로써 초래되었다. 1989년 동독의 사회주의통일당은 동독 주민에 대한 통제력를 상실함으로써 서독을 이념적으로 무장해제해놓은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서독의 정치 문화 엘리트 가운데 상당수가 독일이 통일되는 과정을 멍하니,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들이 ‘역사의 키(Rudder)’를 쥘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버린 것이다. 반면 동독의 주민들은 처음에는 서독을 탈출하고 이어 동독에서 벌어진 거리 시위에 가담함으로써 역사의 주체로 떠올랐다.

    사민당 정권을 상대로 한 동독의 이념 무장해제 공작보다 더욱 궁금한 것은 슈타지를 비롯한 동독 정보기관들의 공작특성이다. 서독과 NATO를 상대로 공작과 정보활동을 한 동독의 대표적인 정보기관은 슈타지(국가안전부) 산하의 해외정보총국(HVA)과 동독군 정보본부(NAV), 그리고 슈타지와 동급으로 설립된 해외첩보국(APN)이었다. 그러나 해외첩보국의 활동은 미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독이 무너지기 전 슈타지 산하 해외정보총국의 정직원 수는 4000여 명이었다. 해외정보총국은 목표로 정한 기관 안에 공작관이나 에이전트를 투입해 첩보를 수집하는 휴민트(HUMINT·인간정보)와 함께 무선감청 같은 테킨트(TECHINT·기술정보)에도 큰 비중을 두었다. 테킨트는 슈타지 안에 해외정보총국과 동급으로 있는 제3국(과학기술국)에서 정보를 수집 분석해, 해외정보총국에 제공했다.

    동독군 정보본부의 정직원 수는 슈타지 해외정보총국의 4분의 1 규모인 1000여 명이었다. 이 본부는 서독군은 물론이고 베네룩스 3개국 군 그리고 덴마크 군에 관한 정보를 주로 수집했다. 유사시 직접 맞붙는 서독 군과 그 바로 뒤에 있는 나라의 군사 정보 습득에 주력한 것이다. 정보본부는 휴민트와 테킨트를 기본으로 하고 여기에 해외에 파견한 무관과 군 자산을 이용한 정찰 정보를 더해 정보분석을 해왔다.

    동독, 공산정권 붕괴 후 정보문서 파기

    독일이 통일되자 서독의 방첩기관인 헌법보호청(BVS)은 가장 먼저 두 기관이 어떠한 활동을 해왔는지 알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통일되기 전 두 기관이 상당량의 자료를 파기해버렸기에 정확한 증거 확보에 실패했다. 1989년 동독에서 사회주의통일당 정부가 무너지자 동독 주민들은 자유투표를 통해 민주 정부를 구성했다. 그리고 민주 정부가 동독을 이끌던 1990년 동독 주민들은 국민투표를 통해 서독연방에 편입하겠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독일은 평화적인 통일을 맞게 되었다.

    통일이 산사태처럼 한순간에 다가오지 않고 1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이뤄지다보니 동독 정보기관들은 중요한 문서를 폐기할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문서 폐기가 동독을 민주화로 이끈 세력에 의해 집행됐다는 사실이다. 1989년 사회주의통일당 정부가 무너지자 동독의 엘리트들은 민주 정부를 만들기 위한 자유선거를 관리하려고 ‘중앙원탁회의’라는 기구를 만들었다.

    서독 동방정책 파고든 동독 슈타지의 공작비법

    일심회 사건에 연루된 민노당 관계자에 대한 수사를 촉구하는 단체의 시위.

    중앙원탁회의는 동독에서 가장 큰 두 교회의 지도자가 중심이 되고 여기에 시민운동가와 사회주의통일당과 기타 정당의 인사 등이 참여했다. 1990년 중앙원탁회의에서 ‘슈타지 해외공작총국이 갖고 있는 방대한 해외공작 문서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벌어졌다. 결론은 ‘폐기’였다. 중앙원탁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이 문서가 국외로 유출될 경우 몰고올 엄청난 파장을 염려해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동독군 정보본부의 활동을 기록한 막대한 양의 문서도 폐기되었다. 정보본부의 문서는 자유선거를 통해 민주 정부를 구성한 후, 이 정부의 국방장관이 동의하는 형식을 통해 폐기되었다. 헌법보호청은 슈타지 해외정보총국의 전직 간부와 동독군의 마지막 정보본부장 알프레드 카우세 장군 등의 증언을 통해 이들이 펼친 정보 활동의 규모와 범위를 유추했다.

    민주화한 동독이 정보문서의 폐기를 결정한 것은 내부 불안이 극대화하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슈타지 해외정보총국의 정직원은 4000여 명이었지만, 슈타지 전체의 정직원 수는 무려 9만여 명에 이르렀다(참고로 한국 육군의 1군 규모가 이와 비슷하다. 동독은 군사령부급 규모의 정보기관을 유지했다).

    슈타지는 해외공작보다는 내부 단속에 더 집중했다. 슈타지는 정직원 외에 우리말로는 ‘세포’로 표현할 수 있는 17만여 명의 협조자를 두고 있었다. 통일되기 전의 동독 인구가 1700만명이었으니 100명당 한 명꼴로 슈타지 사람을 심어놓은 것이다.

    여기에 인민경찰과 국경수비대(서독 및 NATO 국가와 맞선 곳에는 동독군이 주둔하나, 바르샤바조약기구 국가와 맞닿은 국경은 국경수비대가 지켰다)를 더하면 동독 안보기관원의 수는 21만8000여 명으로 늘어난다. 1700여만의 동독 인구 가운데 18세 이상의 성인은 1200여만명이었으니, 동독은 성인 60명당 한 명꼴로 감시자를 심어놓고 있었다.

    칠레로 망명한 호네커

    슈타지 문서의 공개는 곧 동독 주민에 대한 감시 체제를 폭로하는 것이 된다. 이 감시 체제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자료가 공개되면, 피해를 본 사람이 신고자를 찾아내 피 비린내 나는 보복을 가할 수도 있다. 중앙원탁회의 관계자들은 이러한 사태가 벌어져 안정을 찾아가는 동독이 다시 불안해질 것을 염려해 슈타지 문서의 폐기를 결정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동독의 대서독 공작 문서도 상당부분 사라지게 되었다.

    지금 북한은 무리해서 핵실험을 해야 겨우 정권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내부 모순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 김정일 정권이 민중봉기에 의해 무너진다면 많은 사람의 관심은 조선노동당 직속의 35호실과 통일전선부·사회문화부·작전부, 인민군 작전국과 보위사령부, 그리고 북한의 국가정보기관인 국가안전보위부, 북한 경찰인 인민보안성이 갖고 있는 대내외 정보활동 자료에 쏠릴 수밖에 없다.

    한국이 이러한 정보를 확보할 수 있는지는 김정일 정권을 역사적으로 단죄할 수 있느냐를 결정하는 요소가 될 것이다. 베를린 장벽 붕괴로 실각한 호네커는 한동안 동독에 머물렀으나 권력남용 등 범죄 사실이 드러나자 소련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동독에 돌아와 잠시 머물다 칠레로 망명해 1993년 칠레에서 사망했다.

    18년간 통치한 호네커의 비리와 부자(父子)가 권력을 주고받으며 60여년간 통치해온 김정일 정권의 비리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남북통일이 이뤄지는 시기 한국은 북한 정보기관의 기밀문서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서독은 동독 정보기관원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동독의 대서독 공작 실태를 복원해냈다. 슈타지 해외정보총국은 베를린 장벽이 구축(1961년)되기 전인 1950년대엔 주로 서독으로 탈출하는 동독인으로 가장해 공작원을 침투시켰다. 그러다 동방정책으로 여행이 자유화되자 여행자로 가장한 공작원을 많이 투입했다. 서독에 들어온 공작원들은 서독 정보기관에 거짓 정보를 흘리는 ‘역용(逆用)공작’, 반공단체나 언론기관에 침투해 이들의 활동을 저해하는 공작, 테러나 사보타주를 통해 위기를 조장하는 공작을 펼쳤다.

    여비서를 집중 포섭

    서독 유력 정치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공작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탈동자(脫東者)’라고 할 수 있는 동독 탈주자 가운데 반(反)동독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이가 있으면, 이들을 납치해 활동을 위축시키는 공작도 했다. 빌케 교수는 논문에서 ‘1949년부터 1969년 사이 700여 건의 납치 사건이 있었다. 서독으로 탈출한 슈타지 요원 500명 가운데 120명이 동독으로 납치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동독 정보기관은 사회주의통일당의 지령과 함께 소련의 KGB 지령을 받아 활동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경우는 슈타지 해외정보총국보다는 동독군 정보본부에서 더 많았다. 마지막 정보본부장이었던 알프레드 카우제 장군에 따르면 정보본부는 20년에 걸쳐 NATO의 군사기동훈련과 작전계획, 회의 정보, 훈련 정보, 군수품 현황과 서독 정보기관이 파악하고 있는 바르샤바 조약기구 내용, 서독 국방장관의 보고서, 독일연방군 및 나토군의 군사계획과 종합방위계획·동원계획 등의 정보를 수집해 놓고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정보는 바르샤바조약기구 군을 지휘하는 소련군 수뇌부에 제공되었을 것이다. 유럽에서 또다시 전쟁이 일어났다면 나토군은 바르샤바조약기구 군에 제공된 이 정보 때문에 상당한 피해를 보았을 것이다.

    슈타지 해외정보총국과 동독군 정보본부는 때때로 일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정보본부 간부가 스캔들을 일으키는 바람에 정보본부는 슈타지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슈타지 해외정보총국과 동독군 정보본부는 자체 요원만으로 정보와 공작활동을 할 수가 없다. 서독이나 NATO 지역에서 이들을 도와주는 ‘협조자’가 있어야 제대로 활동할 수 있다.

    동독 정보기관은 협조자를 확보하기 위해 종종 ‘포섭관’을 서독 등으로 침투시켰다. 슈타지 해외정보총국은 동독을 방문한 서독인의 입국서류, 서독인 인명자료, 기타 동독인과 인적 관계를 갖고 있는 서독인에 대한 자료 등을 토대로 포섭해야 할 협조자 명단을 뽑았다.

    이러한 대상자 가운데 슈타지 해외정보총국이 가장 관심을 기울인 사람이 최고 책임자 밑에서 근무하는 비서들이었다. 비서는 상관과 특수한 관계에 있어 보안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상관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사고방식이 어떠한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으므로 이들을 포섭하면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비서들은 여성인 경우가 많은데, 슈타지는 서독의 정당이나 정부기관에서 일하는 비서 가운데 3분의 1 정도가 미혼이거나 이혼 상태인 것으로 파악했다.

    포섭관으로 선발된 요원에게는 여성의 감정을 이용한 접근법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여성은 자기가 하는 일보다는 자신이 소중히 여기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특징이 있다. 통일 후 발견된 슈타지의 교육자료는 ‘포섭관은 여성의 섬세한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사려가 깊고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 여자가 관심을 갖는 문제에 시간을 투자할 줄 알고, 여자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서술해놓고 있었다.

    많은 자료를 폐기했음에도 동독 정보기관이 갖고 있던 자료가 발견되었다. 이 자료 가운데 정보기관에 협조한 서독인들에 대한 자료도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주요 기관장의 비서들에 대한 것이 많았다. 1987년까지 동독 정보기관에 포섭된 서독 주요기관의 비서는 58명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슈타지는 이데올로기보다는 사랑과 성(性)을 활용해 여성 비서를 포섭했다. 따라서 사랑이 끝나면 여성 비서들의 협조도 중단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마가레테라는 이름의 여비서인데, 슈타지는 이 여성이 사랑하는 포섭관을 동독으로 불러들이고 새로운 포섭관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마가레테는 더 이상 협조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랑을 위해 정보를 제공한 것이지 이념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다.

    동독 정보기관은 학생과 언론인을 포섭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했다. 학생은 졸업 후 안보를 다루는 곳에 취직할 수 있고, 언론인은 정보를 많이 다루기 때문이다. 서독 대학생을 포섭하기 위해 슈타지 해외정보총국은 서독의 특정 대학을 담당하는 부서까지 두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봉하는 학생들은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사회주의 진영의 평화정책에 원칙적으로 동의하는 경우가 많아 포섭하기가 쉬웠다.

    외도 증거 이용해 배신 막아

    흥미로운 것은 극우주의 운동권에 대한 슈타지의 시각이다. 슈타지는 민족통일투쟁(독일통일투쟁)에 참여한 국수주의와 극우주의 학생들도 잠정적으로는 협조자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순수 공산당원은 포섭하지 않으려 했다. 서독 공산당은 서독 정보기관원에게 감시를 받고 있어 이들에 대한 포섭은 금기시했다.

    개중에는 특별한 기관과 일한다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에 자발적으로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슈타지가 목표로 하는 기관의 내부까지 침투할 능력이 없어 큰 가치는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부류에 속하는 다양한 협조자가 제공한 정보를 모아보면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어 가볍게 끊어버리진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다른 곳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채워주면 그쪽에 붙어버리기 때문에 무조건 신뢰하지 않았다.

    갖가지 노력으로 협조자와 가까워지면 그를 협조자로 계속 사용하기 위한 포섭 작업에 들어간다. 이를 위해서는 협조자가 공작임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계속 공작에 빠져들게 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반복되면 협조자는 포섭관에게 신뢰를 갖게 되고, 포섭관의 지시에 따라 불법행동을 하는 것에도 익숙해지게 된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을 때 포섭관은 정체를 밝히고 “슈타지와 함께 일하자”고 제의한다. 슈타지는 이 제의의 80% 이상을 동독 지역에서 했다. 이유는 협조자가 제의를 거부할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서이다. 제의를 받은 협조자는 고민하는데, 이때 슈타지는 생각할 시간을 주어 협조자가 심사숙고 끝에 동의했다는 느낌을 가지게 만든다. 그리고 최종 동의는 서면이나 구두로 받아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협조자가 협력을 거부하거나 관계를 파기할 수도 있다. 따라서 사전에 그에 대한 약점을 수집해둔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 이들이 동독에 들어왔을 때 외도(外道)를 하게 한 뒤 그 현장을 사진으로 찍어두는 것이었다. 그가 동독 지역에서 저지른 불법 행위 자료도 축적해두었고, 동독에 살고 있는 이들의 친척을 협박해 협조를 계속하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압박은 상당한 효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협조자가 동독 법을 위반한 경우가 아니면 동독 정보기관은 외도 사진 등 비리 증거를 공개한 경우가 적었다.

    빌케 교수의 논문은 ‘서독인이 슈타지의 공작원으로 포섭된 이유’에 대해서도 분석을 했다. 1988년에 나온 슈타지의 자료는 서독인 협조자의 60% 정도가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신념에 의해 협조하고, 27% 정도만 물질적인 욕심으로 협조하고 있다고 분석해놓았다. 그리고 7%가 포섭관에 대한 개인적 호감 때문에, 1%가 압력을 받아서, 그리고 4%는 자신이 포섭된 것도 모른 채 포섭됐다고 밝혀놓았다.

    그러나 실제적인 조사를 해보자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신념에 따라 협조한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협조자들은 간첩행위를 할 때마다 경제적인 대가를 받았다. 경제적인 대가가 없으면 이들은 배신할 수 있으므로, 동독의 정보기관은 이들이 계속 협조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다양한 약점을 확보했다.

    정보 흘리고 서독 언론인 포섭

    해외정보총국은 동독 안에도 협조자를 두고 있었다. 1만여 명에 달한 이들은 사회적 지위가 높았으므로 그만한 지위에 있는 서독인을 접촉할 수 있었다. 이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무장했기에 그 지위까지 오른 것이었다. 슈타지는 이들에게 서방세계를 여행할 수 있는 특권을 주고 대신 공작활동을 하라고 요구했다. 슈타지는 이들에게 특별 정보를 흘려주고 서독 언론인과 접촉하게 했다.

    슈타지 등은 포섭관을 보내 협조자를 구했지만, 포섭관이 협조자를 구하는 비율은 10분의 1도 되지 못했다. 포섭관의 전문적인 포섭 공작보다는 친척 관계 등으로 인해 협조자로 돌아서는 서독인이 훨씬 더 많았던 것이다.

    서독인 협조자 가운데는 정당 당원으로 등록한 사람이 많았다. 1980년대 말 서독인 가운데 정당에 가입한 사람은 4%에 불과했다. 그런데 슈타지 등에 협조해 처벌받은 서독인 499명을 분석해보자 3분의 1에 해당하는 135명이 당적을 갖고 있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사민당(42.2%)이고, 이어 기민/기사당(25.2%), 자민당(6.1%), 녹색당( 4.1%) 순이었다. 극우파도 10.2%를 차지했다.

    흥미로운 것은 37명으로 25.2%를 차지한 기민/기사당 계열의 협조자들인데, 이들 가운데 절반인 19명이 슈타지의 명령에 따라 기민/기사당에 입당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들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슈타지의 지시에 따라 기민/기사당에 위장 입당한 것으로 조사됐다.

    독재정권이 붕괴할 조짐을 보이면 독재정권 수호에 앞장선 조직이 먼저 배신한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몇 주가 지나자 슈타지 조직이 와해되면서 슈타지 정직원 가운데 일부가 서독으로 넘어와 정보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과거사 청산 같은 근본적인 문제에는 기여하지 않고 자신이 제공한 정보에 대한 물질적인 대가를 기대하거나 서독 보안당국과의 연결고리를 확보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1990년 10월3일 독일이 평화적으로 통일되자 서독 방첩기관인 헌법보호청은 슈타지 해외정보총국의 간부를 만나 ‘서독과 나토 지역에 갖고 있던 정보원(협조자 등)을 밝히라’라고 종용했다. 그러나 대부분 입을 열지 않았다. 이들은 정보기관의 간부였다는 자부심과 정보원들에 대한 약속, 그리고 정보원들을 밝혔을 때 따라올 형사처벌 문제 등을 의식해 입을 열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슈타지의 중간급 간부였던 사람들은 신뢰관계가 형성되자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들은 정보원의 암호명과 정보원에게 접근하는 루트만 알고 있어 이들로부터 정보원의 전모를 파악하기는 불가능했다.

    동독이 민주 정부를 만들기 위해 중앙원탁회의를 구성했을 때 슈타지측은 동독의 민권운동세력에게 ‘우리는 더 이상 독재체제에 협조하는 기관이 아니다. 우리는 서독의 정보기관처럼 평화의 척후병으로 활동할 수 있다. 우리를 법적으로 보호해달라’라며 방대한 슈타지 문서의 폐기를 유도했다. 그러나 라이프치히에 있던 민권운동가들은 이 결정을 지키지 않고 이 지역 15과(첩보과)에 있던 문서를 보관했다.

    한국, DJ 이후 간첩수사 적어

    빌케 교수의 논문은 통일 이전 동독 정보기관의 규모와 활동, 통일 이후 이들이 보인 행태와 이들에 대한 사법처리까지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 북한이 붕괴될 경우 한국은 1990년의 서독처럼 혼란을 겪을 수 있다. 이 혼란 속에 김정일 체제 구축에 협조했던 세력이 한국 정보기관에 접근해 살길을 모색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자료를 폐기하는 방법으로 처벌을 모면하려고 할 가능성이 높다.

    이 논문을 일독한 관계자들은 “김정일 정권은 핵실험 강행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김정일 정권의 붕괴가 가져올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이 논문은 관계기관에 있는 많은 사람이 읽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이들은 “과거 북한쪽 주장대로 통일을 주장하던 이들이 지금은 분단 고착화를 뜻하는 평화공존을 주장하는 이유도 이 논문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심회 사건과 정경학 간첩 사건은 북한이 햇볕과 평화번영 정책을 이용해 공작과 정보활동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이다.

    서독 방첩기관은 국정 최고 책임자가 동방정책을 펼치고 있음에도 권터 기욤을 검거함으로써 ‘정책은 정책이고, 안보는 안보다’라는 확실한 선을 그었다. 그러나 한국의 방첩기관은 햇볕정책을 펼친 이후 간첩사건을 거의 수사하지 않았다.

    일심회 사건이 발표되자 많은 사람은 정권 실세도 이 조직에 연루돼 있는지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국회를 중심으로 한 정치권에서 반발의 목소리가 나오고 김승규 국정원장이 사퇴하자 더는 수사가 이뤄지지 못했다. 한국은 아직도 ‘안보가 정치에 종속돼 있는 나라’이다.

    한국이 서독이 범한 우(愚)를 피해가며 평화통일을 이룩하려면 독일 통일기의 정보 공작 상황을 상세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 ‘평화와 번영 정책’을 내놓은 한국의 정치인들은 자유로운 방첩수사를 허용할 용기는 없는가.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