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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 동방정책 파고든 동독 슈타지의 공작비법

“여자는 일보다 사랑이 먼저라는 걸 노려라”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서독 동방정책 파고든 동독 슈타지의 공작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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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소한 정당 몇 개를 합당해 ‘북조선노동당(북로당)’을 만들고, 남쪽에 있는 조선공산당은 남조선노동당(남로당)으로 개칭케 했다. 그 후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수뇌부가 미 군정의 추적을 피해 월북하자, 두 당을 합당해 조선노동당을 만들었다. 조선노동당과 사회주의통일당은 공산당과 다른 정당을 통합해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서독 지역에서도 사민당이 부활했다. 그러나 1949년 서독 정부 출범시 권력을 잡은 것은 아데나워가 이끄는 기독교민주당(기민당)이었다. 아데나워 총리는 1963년까지 14년간 서독을 통치하며 ‘라인강의 기적’을 일궜다. 그 후 기민당은 에르하르트와 키징거가 총리를 이었지만, 이들의 힘은 아데나워에 비해 약했고 대신 사민당 세력이 확대되었다.

1966년 선거에서 기민당은 덩치가 커진 사민당을 파트너로 삼아 연정을 구성했다. 이때 총리를 맡은 이가 기민당의 키징거였고, 외무장관에는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가 취임했다. 브란트 외무장관은 “동독을 통일 대상이 아닌 독립국가로 인정해야 한다”며 ‘두 개의 독일’을 주장해왔다. 이때부터 브란트는 자신의 ‘등록상표’이기도 한 동방정책을 펼쳤다. 동유럽 접근정책을 시도해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와 국교를 맺은 것이다.

1969년 치러진 선거에서 사민당은 기민당을 버리고 자유민주당(자민당)을 파트너로 삼아 집권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총리에 오른 브란트는 ‘할슈타인 원칙’의 포기를 선언했다. 할슈타인은 아데나워 총리 시절 외무차관을 지낸 사람으로, 그는 “소련을 제외하고 동독을 승인한 나라와는 외교관계를 맺지 않겠다”고 천명한 바 있다.

불신임 위기 겨우 넘긴 브란트



할슈타인 원칙의 철회는 곧 동방정책을 ‘내놓고’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1970년 3월19일 빌리 브란트는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동독의 에르푸르트를 방문해,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와 역사적인 ‘동서독 정상회담’을 가졌다. 양독 정상회담이 열린 에르푸르트는 사민당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1871년 독일을 통일한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 정권은 1878년 ‘사회주의 진압법’을 만들었다. 그로 인해 사민당은 비합법 정당이 됐는데 1890년 비스마르크가 총리에서 물러나면서 이 법이 폐지되었다. 그러자 사민당 관계자들이 1891년 10월 에르푸르트에 모여 당 대회를 열고 마르크스주의적 원칙을 따르는 강령(일명 에르푸르트 강령)을 채택했다.

동독의 슈토프 총리는 사회주의통일당과 사민당이 공유하는 역사의 공간으로 브란트 서독 총리를 불러들인 것이다. 그러나 양 총리는 합의점을 찾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브란트는 동방정책을 이어가 소련 폴란드와 외교관계를 맺고,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1971). 이듬해 동독과 기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동독을 통일의 대상이 아닌 독립된 국가로 인정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어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불가리아 등과도 국교를 맺었다.

그러나 브란트 정권은 매우 불안정했다. 1972년 그의 비서인 권터 기욤이 동독 간첩인 것으로 밝혀져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권터 기욤은 체포되는 순간 “나는 동독군의 장교다”라고 외친 것으로 확인돼, 브란트는 위기를 빠져나갈 수 없었다. 기민당을 필두로 한 야당은 ‘탄핵’에 해당하는 불신임안을 제출했으나, 브란트는 간발의 표차로 ‘낙마’를 모면했다.

미·독 공조 확고할 때 통일 맞아

이 사건의 여파로 1974년 브란트가 물러나고 사민당의 슈미트가 새 총리가 돼 1982년까지 서독을 이끌었다. 그리고 1982년 기민당·기사당(기독교사회당)·자민당 연합을 이끈 콜이 총리가 돼 아데나워보다 긴 17년을 통치하게 되었다. 콜은 총리 7년차 되는 해(1989년) 동독의 사회주의통일당 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고, 8년차 때(1990년)는 동독이 국민투표로 서독에 합병되겠다고 결의하는 것을 목도했다. 그리고 1999년까지 통일 독일의 총리로 재임하다 물러났다.

기민당 정권이 보수적이라면 사민당 세력은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데나워 총리가 이끈 기민당 정권은 동독과 치열한 냉전을 펼쳤다. 콜 총리는 레이건에서 아버지 부시로 이어지는 미국의 공화당 정권과 호흡을 맞춰, 요즘 회자되는 ‘미·일 공조’ 이상으로 돈독한 ‘미·독 공조’ 체제를 만들었다. 국제정치학자들은 미독 공조 덕분에 소련이 동독을 포기하고 굴복하게 됐다고 말한다.

브란트가 이끈 사민당 정권은 긴장완화로 번역되는 ‘데탕트(detente)’를 이끌었다. 동서독이 기본조약을 맺은 해(1972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6·25전쟁 때 맞붙어 싸운 중국을 방문했고, 길고 긴 중일전쟁을 치른 일본도 중국과 국교를 회복했으니, 데탕트는 세계적인 물결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직후 인도차이나에서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 등이 공산화하는 도미노 현상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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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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