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전쟁에 참전한 중국 인민지원군이 북한 주민의 농사를 돕는 광경. 1959년 중국 당국이 펴낸 사진집에 실린 장면이다.
마오안잉이 전사하던 날, 덩샤오핑이 ‘아들 사망’ 소식을 간단히 메모하여 회의 중이던 마오쩌둥에게 전했다. 메모를 본 마오쩌둥이 메모지를 옆으로 밀어놓고는 표정도 바꾸지 않고 회의를 진행했다. 신의주와 단둥(丹東)을 잇는 중조우의교(中朝友誼橋)의 중국 쪽에는 마오안잉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전쟁으로 피를 나눈 관계의 상징물이다.
6·25전쟁이 끝난 지 50여 년을 넘긴 지금, 북중관계는 과연 ‘혈맹’인가. 최근 김정일 정권의 미래, 그리고 한반도의 운명과 관련해 북중관계는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7월5일 북한의 미사일 발사 후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채택과정에서 중국은 대북제재 ‘찬성’에 손을 들었다. 제비 한 마리 날아들었다고 봄이 온 것은 아니겠지만, 이날 중국의 찬성은 과거의 북중관계를 고려할 때 분명히 ‘파격’이었다. 이후 북한의 핵실험에 이어진 10월15일 유엔안보리결의 1718호 채택에도 중국은 찬성했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만일 북중관계가 중대한 파국으로 치닫는다면, 중국이 유엔 대북제재에 처음으로 찬성한 2006년 7월15일은 양국관계의 작은 분수령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의 북중관계가 일관된 혈맹관계로만 이어져온 것은 아니다. 1970년대 말 중국의 개혁개방, 그리고 1992년 한중수교는 북중관계에 중요한 전환을 가져왔다. 통상적으로 국가간의 관계는 서로의 공통성을 넓혀가면서 변화, 발전한다. 사상과 이념의 공통성에 근거해 경제-사회문화-정치-군사 분야로 확대되면서 양적·질적으로 깊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중에서도 사상과 이념의 공통성 유지가 가장 중요하다. 한·미·일의 관계가 협력과 갈등을 이어오면서도 파국으로 가지 않은 근본 이유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사상과 이념의 공통성이 유지돼왔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중국의 개혁개방은 그전까지의 북중관계에서 ‘이제부터 너와 나는 생각(사상)이 다르다’는 사실을 선언한 뚜렷한 분수령이었다. 1992년 한중수교는 중국 개혁개방의 연장선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이제 중국은 개혁개방을 통해 세계 제2의 강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바로 이웃한 북한은 아직 20세기에 머물러 있다. 한때의 사상적 동지는 전혀 다른 길을 가는 엄청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왜 이렇게 됐을까. 무엇 때문에 두 나라의 길은 이렇게 달라진 것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60년 가까이 같이 걸어온 양국의 협력과 갈등의 과정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한·미·일의 협력과 갈등의 역사와 북·중·러의 그것은 다르다. 사상의 출발부터 다르기 때문이다. 또 무엇보다 사상의 변화가 북중관계에 결정적 영향을 끼쳐왔기 때문이다.
中蘇분쟁과 김일성의 선택
1948년 9월9일 수립된 북한 정권의 강력한 ‘동맹’은 소련이었다. 북한 정권은 스탈린이 공산주의의 세계화를 위해 김일성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세운 것이었다. 스탈린은 광복 직후부터 당과 주요기관에 소련 고문을 보냈다. 그해 말 소련군을 철수하면서 당과 주요 국가기관에 소련 출신 조선인들을 요직에 배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