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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미원조(抗美援朝)에서 경제제재까지 북중관계 60년

중국 개방정책 보고받은 김정일, “흑묘백묘론은 명백한 기회주의, 수정주의”

  • 손광주 데일리NK 편집인 sohnkj21@hanmail.net

항미원조(抗美援朝)에서 경제제재까지 북중관계 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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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일성은 6·25전쟁을 일으키면서 스탈린의 지원을 받고 동시에 소련의 종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기회를 마련했다. 김일성은 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군권을 장악하면서 자신의 정치적인 기반도 강화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국군과 연합군이 승승장구하면서 압록강까지 빠르게 치고 올라갔다. 만주까지 쫓겨간 김일성은 마오쩌둥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마오쩌둥은 최고의 정예병인 팔로군 출신들을 전선에 투입했다.

중국 지원군은 1945년 급조되어 북한에 투입된 소련 점령군과는 근본이 달랐다. 당시 북한에 투입된 소련군은 극동군 중에서도 범죄자 출신이 많아 강간, 약탈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중국 지원군은 북한 주민들과 같이 먹고 자면서 아침에는 주민들의 집 마당까지 쓸어주며 마음으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김일성은 정전(停戰) 후 중국 지원군이 철수할 때 환송단에 첫딸인 김경희를 내보냈다.

6·25전쟁은 김일성이 소련과의 일방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중·소 양다리 외교를 시작할 수 있는 중대한 계기가 됐다. 1953년 국제공산주의의 수령인 스탈린의 사망과 중국의 도전으로 소련은 공산주의 종주국으로서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스탈린 사망 후 전개된 중소 이데올로기 논쟁은 김일성에게는 중요한 기회였다.

넓은 의미에서 중소 이데올로기 논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복잡한 이론투쟁으로 볼 수 있다. 핵심은 사회주의-공산주의로 가는 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과도기’를 어디까지로 설정할 것인지의 문제와, 이와 연동해 스탈린이 창시한 수령론(개인숭배)을 계속 인정할 것인지 여부였다. 스탈린 사망 후 흐루시초프의 소련 공산당은 사회주의 경제제도가 수립되면 과도기를 끝내고 이때부터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개인숭배를 약화해도 된다는 주장이었다. 반면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계속돼야 하며 개인숭배를 약화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여기에서 김일성은 베트남, 알바니아와 함께 중국 편에 섰다.



김일성은 공산권의 이 같은 정치사상적 변화의 흐름을 타고 6·25전쟁을 계기로 가까워진 중국을 활용하면서 자신의 독재체계를 굳건히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상징이 1955년 12월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라는 연설이다. 이 연설은 주체사상이 형성되는 ‘맹아’였다. ‘주체를 세우자’는 김일성의 이 연설은 쉽게 말해 소련과 중국의 눈치를 보지 말고 우리식대로 해나가자는 주장이었다.

이는 이론적으로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북한의 실정에 맞게 구현하자는 주장이었지만, 국내 정치적으로는 김일성의 개인 권력강화를 의미했다. 중소 이념분쟁 속에서 김일성은 소련·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가는 방법으로서 ‘주체’를 내건 것이다. 이를 계기로 김일성은 조선노동당 내부의 중요한 파벌이던 소련파, 연안파(중국파)를 모두 제거하고 1958년 말 독재체계를 거의 수립했다.

이후 1960년대를 거치며 북한의 외교노선은 중국과 소련 어디에도 결정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두 대국 간의 이해관계를 이용한 이른바 ‘주체외교’를 편다. ‘주체외교’라고 해서 어떤 고도의 이론틀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작은 나라가 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국익을 최대한 증진시키자는 것이다. 국익을 최우선한다는 것은 사실 모든 국가의 외교노선이 마찬가지다. 이는 오히려 김일성이 창시한 주체사상을 숭배하기 위한 국내용 성격이 강하다. 최근 김정일이 중국의 지원에 의존하면서도 6자회담 등에서 러시아를 활용해보려는 의도를 보여주는 뿌리도 여기에 닿아 있다.

‘자주성을 옹호하자’

중국과 북한은 1960년대를 거치며 각각 내부적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되고, 이는 양국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의 인민공사, 대약진운동이 잇따라 실패하면서 무려 3000만명이 굶어죽는 대참사가 일어났으며 1966년 촉발된 문화대혁명은 전국을 광기(狂氣)의 계급투쟁으로 몰아넣었다. 마오쩌둥은 공산주의 단계에 이를 때까지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혁명이 계속돼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이었다. 당시의 문화대혁명은 거듭된 실책으로 수령으로서의 권위가 추락한 마오쩌둥이 권력을 만회하기 위해 류샤오치, 덩샤오핑 등을 숙청하는 권력투쟁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김일성은 공식적으로 중국의 문화혁명을 지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굶주림과 핍박을 피해 북한으로 도피해온 중국 사람들을 보호해줬다. 그러자 중국은 김일성을 수정주의자로 비판했다. 이에 김일성은 1966년 8월 ‘자주성을 옹호하자’는 ‘로동신문’ 논설을 통해 소련을 ‘수정주의’로, 중국을 ‘교조주의’로 동시에 비판하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대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언급했다.

다른 한편으로 김일성은 중국 문화혁명의 분위기를 이용해 독재권력을 더욱 강화하고 국방경제 병진(竝進)을 추진하면서 군국주의 노선에 박차를 가했다. 1967년 3월 당중앙위 4기 15차 전원회의를 비밀리에 열고, 군사력 증강을 줄이고 인민경제를 중시하자는 갑산파들을 모조리 숙청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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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광주 데일리NK 편집인 sohnkj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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