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주로 가는 열차식당 풍경
한국 최초로 등장한 근대식 호텔은 1889년 인천 서린동에서 개관한 대불호텔이다. 그러나 서양식으로 세워진 호텔은 1902년 서울 정동의 손탁호텔을 효시로 본다. 1909년에는 고종 황제가 프랑스 여성에게 희사한 하남호텔(이화여고 정문 앞)이 개업했다.
나라를 빼앗긴 뒤인 1912년 일제가 부설한 경의선 철도를 중심으로 부산 철도호텔과 신의주 철도호텔이 문을 열었다. 조선호텔은 1914년 개관했다. 북한 지역에서는 1915년 금강산 온정리에 금강호텔, 1918년 내금강에 장안사호텔, 1922년 평양에 유옥호텔이 설립됐다.
일제 강점기의 호텔리어 사이에는 규율과 기강이 대단했다. 당시 신의주 철도호텔은 한국에서 만주로 가는 열차식당을 운영했는데, 이 식당의 캡틴은 강모씨(후에 서울 C호텔 커피숍 지배인 역임)였고, 최모씨(후에 서울 N호텔 총지배인 역임)는 그의 밑에서 일했다. 최씨는 그후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강씨를 만나면 ‘수장님’이라고 깍듯이 호칭했다.
당시 열차식당에서는 햄버거스테이크가 손님들에게 가장 인기였는데, 호텔측은 이를 ‘개떡’이라고 불렀다. 열차식당에서 일하는 일부 호텔 직원들은 고기 대신 밀가루를 규정보다 더 많이 섞는 방식으로, 원래 100개를 만들도록 한 햄버거스테이크를 120개로 늘려 만들었다. 이를 적발하기란 쉽지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 직원들이 챙기는 수입이 꽤 짭짤했다고 한다. 직원들이 돈을 많이 만지게 되어 만주에 ‘꾸냥(기생)’을 두고 있다는 얘기도 나왔다. 광복이 된 뒤 열차식당은 주로 공무원이 운영하다 1990년대 들어 한화 프라자호텔이 맡았다. 열차식당은 프라자호텔의 효자산업이 됐다.
1936년 반도호텔이 ‘탄생’했다. ‘탄생’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이 호텔이 비로소 한국 사회에 호텔산업의 진면목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반도호텔은 정치·경제·사회 지도층이 만나는 공간이 되어갔고, 한국 상용호텔(commercial hotel)의 대표적인 숙박시설로 손색이 없었다.
광복 직후 반도호텔의 룸서비스 웨이터이던 민모씨는 이승만 대통령의 눈에 들었다. 호텔이 많지 않던 시절이라 호텔을 이용하는 것은 일종의 특권이었다. 자연히 권력과 호텔리어는 가까운 관계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민씨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후원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주미 한국대사관 소속으로 머물게 됐다. 가끔 대통령 부처가 대사관으로 전화해 민씨의 안부를 묻자 대사관에서는 그를 무척 떠받들었다고 한다. 민씨가 귀국한 후 대통령 주변에선 청와대 근무를 권유했으나 그는 이를 사양하고 호텔에 남았다. 뒤에 그는 모 호텔 총지배인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