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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호 특별부록 | 한국의 核주권

세계 원자력史 속에서 본 한국 원자력史 - 제4부

한반도 核 게임! 南 140만㎾급 원자로 vs 北 조악한 원자폭탄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세계 원자력史 속에서 본 한국 원자력史 - 제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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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팅하우스로의 기술 종속 우려

세계 원자력史 속에서 본 한국 원자력史 - 제4부

APR-1400 원자로 그래픽.

고리 1·2·3·4호기와 영광 1·2호기는 모두 미국 웨스팅하우스사(社)의 경수로로 만들어졌다. 월성 1호기만 캐나다 AECL사의 것이고 나머지는 미국, 그 가운데에서 웨스팅하우스라는 한 회사 제품으로 깔리게 됐으니, 웨스팅하우스사에 대한 기술 종속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탈(脫)웨스팅하우스를 위한 시도는 울진원전 1·2호기를 준비하면서 본격화했다. 계기는 쉽게 찾아왔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 시절인 1975년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가 유럽을 순방하며 프랑스를 방문한 적이 있다. 박정희 정부는 북한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프랑스에 많은 부탁을 했으므로 그에 대한 답례를 해야 할 처지였다. 그 무렵 프랑스의 원자로 제작사인 프라마톰(Framatome, 지금은 AREVA)사는 독자적인 원자로를 개발해놓고 있었다.

과거 프라마톰사는 영국이 주도한 가스 냉각로 제작에 참여했는데, 가스냉각로 사업이 실패하자 미국 웨스팅하우스사 기술을 도입해 원자로를 제작했다. 처음에는 기술을 도입해 생산했는데 프랑스 정부측은 프라마톰사가 기술을 습득할 수 있도록 동일한 원자로를 계속 발주했다. 덕분에 프라마톰사는 충분한 기술을 익혀 독자 모델의 원자로를 내놓게 되었다.

프랑스는 원자력을 독점하지 않았다. 원자로를 프라마톰에서 만들면 터빈과 발전기는 이탈리아나 벨기에 회사가 제작케 했으므로, 유럽 국가들도 프랑스와 프라마톰 사를 지원했다. 프라마톰사는 한국에서 발주한 원전 공사 입찰에 응했으나 번번이 웨스팅하우스에 밀려 탈락했다.



이러한 때 김종필 총리가 유럽 방문에 나섰으니, 그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무언의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 프랑스가 중심이 된 유럽 여러 나라가 생산한 민항기 ‘에어버스’나 원자로를 사줘야 할 처지였다. 프랑스 요인을 만난 김 총리는 프랑스 원자로를 사겠다는 언질을 주었다. 그리하여 1975년 11월 주한 유럽상공회의소 주관으로 한국 조사단이 유럽을 방문했다.

중수로 도입을 주도했던 원자력연구소의 현경호 박사가 단장이었다. 프랑스와 벨기에 등을 방문한 이들은 유럽 국가들이 한국에 원자로를 제공하고자 하는 열망이 강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프랑스제 원자로를 도입하는 토대가 되었다.

1980년 권력을 잡은 신군부는 세상에 알려진 것과 달리 친미(親美) 정책으로만 흐르지 않았다. ‘웨스팅하우스가 너무 오만하다’ ‘프랑스제 원자로를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올라오자 전두환 정부는 울진원전 1·2호기를 프라마톰사에 주도록 했다.

프라마톰에 선물을 주다

그런데 엉뚱한 곳에서 반격이 들어왔다. 10·26사건 이후 경제 사정이 나빠졌기에 한국의 전기 사정은 여유가 있었다. 그로 인해 국회에서 “전기가 풍족한데 왜 원자력발전소를 짓느냐”란 반론이 제기된 것. 이에 대해 이종훈 당시 한전 원자력건설처장은 “10년 후에는 전기 소비량이 2배로 늘어난다. 원전을 지어 가동에 들어가는 데는 10여 년의 세월이 걸리니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프라마톰사는 세계시장 진출을 노리고 있었으므로 울진 1·2호기를 비교적 싼 값에 제공했다. 당시 한국은 울진에 최대 10개의 원전을 짓는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으므로, 프라마톰사는 울진원전 단지 전체에 자사 제품을 설치하겠다는 생각이 있어 비교적 싼 값에 응찰했던 것이다. 울진 1·2호기를 프라마톰이 가져갔을 때만 해도 미국의 웨스팅하우스사는 큰 위기를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웨스팅하우스의 방심(放心)이 엄청난 결과를 몰고왔다. 한국원자력연구소는 웨스팅하우스사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으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웨스팅하우스측은 비협조적으로 나왔다. 한국이 프라마톰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도 이들은 불만을 표시했다. 이러한 불만이 원자력연구소와 한전 내부에서 ‘웨스팅하우스는 안 돼’라는 여론을 일으켰다. 이때쯤 논 턴키 방식으로 기술을 익혀온 한국은 원전 기술 자립을 꿈꾸게 되었다.

1980년대 중반 한국은 영광 3·4호기 건설을 준비하며, 공동제작을 통한 기술 자립을 계획했다. 영광 3·4호기 제작에 도전할 외국업체는 한국과 공동으로 원자로를 설계함으로써 설계 기술을 한국에 제공해야 한다는 단서를 붙인 것이다. 이때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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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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