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에 있는 링컨 생가.
1865년 4월14일 한 광신적인 남부연합 지지자가 쏜 총탄에 쓰러진 이후 그는 이런 유의 조사에서 거의 언제나 앞자리를 차지해왔다. 링컨 탄생 100주년에 즈음하여 톨스토이는 그를 작은 예수로 칭하면서 인류의 성자로서 그에 대한 평가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빛을 발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 톨스토이의 예측이 빗나가지 않았음을 ‘애틀랜틱 먼슬리’는 거듭 확인해준다.
링컨이 오랜 세월 사람들의 변함없는 존경을 받아온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단테의 ‘신곡’에 따르면, 장군, 황제, 주교, 교황 같은 세속의 정치지도자 대다수가 사후에 가는 곳은 지옥이다. 가령 알렉산더 대왕과 훈족의 아틸라왕은 제7옥(獄)의 제1원에서 뜨겁게 끓고 있는 피의 강물에 잠겨서 가라앉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으로 그려졌다.
단테는 정치의 요체는 마키아벨리적 권모술수요, 권력은 필연적으로 폭력과 살상을 동반하는 것임을 간파한 것이다. 정치가로서 링컨 또한 권력을 탐했고 그것을 얻기 위해 정치적 책략에 의탁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스프링필드에서 링컨과 동업했던 변호사이자 그의 전기를 쓴 윌리엄 헌돈(William Herndon)은 링컨이 일리노이 의회에서 “가장 똑똑하고 가장 교활한 로그롤러(logroller)”였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가령 시저, 알렉산더, 나폴레옹과 같은 정치가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어떤 종교적 후광, 곧 톨스토이가 말한 성자의 이미지가 어른거린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빌리자면, 링컨은 ‘세속 도시’에 몸담았으면서도 ‘신의 도시’에 속한 인물이었다는 인상을 주는 드문 정치가다.
링컨의 이러한 이미지가 미국의 대중적 상상력을 사로잡아 왔음은 워싱턴의 링컨 기념관(Lincoln Memorial)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링컨 사후 50여 년 만인 1914년에 착공되어 1922년 워런 하딩 대통령에 의해 봉헌된 링컨 기념관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기념관 전체가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는 점과 그리스 신전 양식이라는 점이다.
장엄한 순백의 건물 앞에서 관람객들은 흠 없이 순수한 삶을 살다 간 성자의 신전을 참배하고 있다는 느낌에 젖는다. 여기에 멀리 정면에 우뚝 서 있는 국부(國父) 워싱턴 기념탑(Washington Monument)의 위용과 그것을 응시하는 링컨 좌상의 위용에 자극된 숭엄한 감정이 보태지면서 성자 대통령에 대한 관람객의 외경심은 한층 고조된다.
이런 숭경심은 켄터키 변방에서 태어나 초등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으나 독학으로 변호사가 되고, 이어 동부의 쟁쟁한 브라만 정객들을 제치고 마침내 권좌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로서 그의 또 다른 이미지와 합치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복합적이고 상반된 이 인상이 이른바 ‘링컨 불가사의(Lincoln enigma)’ 현상의 본질이다. 그러나 이 또한 필경 그를 신비스러운 베일로 감싸서 결과적으로 그의 성자적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성자(聖者) 정치가
링컨 기념관 내의 링컨 좌상 뒤 벽면에는 연방을 구한 그를 추모하기 위해 성전을 세웠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남북전쟁이 발발했을 때 링컨은 연방의 와해를 막는 것이 대통령의 으뜸가는 책무라고 천명했다. 만일 미국이 남북전쟁 수습에 실패해 남북으로 나뉘었다면 미국의 운명은 물론 세계사의 흐름도 달라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