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 3만개가 있답니다. 구 소련이 1만6000, 미국 1만2000, 중국 400, 이스라엘 200, 영국 185, 프랑스 385, 파키스탄 40, 인도가 또 40개, 북한은 플라토늄 형태로 6개, 지난 봄에 미국 신문에서 봤으니까 이 자료가 아마 정확할 겁니다.”
숫자를 잘도 기억한다고 감탄하자 그는 얼른 인간의 뇌는 100세까지 발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 학자의 이름을 말한다.
“단 세 가지 조건이 있대요. 난해한 책을 읽고 명상을 하고 퍼즐이나 수학 문제를 풀면 나이 들어도 인간 두뇌는 퇴보하지 않는답니다.”
그의 이야기는 종횡무진, 천의무봉했다. 정치·사회·경제·문화를 넘나들며 정확한 통계가 언급되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일목요연하게 세상풍경이 조감되고 통시적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한 공간에서 읽혔다. 박람(博覽)하고 강기(强記)했다.
냉전체제가 무너진 계기가 있었는데 기억하십니까? 연이은 질문에 나는 대답 대신 귀만 곧추세운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한 일이랍니다. 고르비(고르바초프 전 공산당 서기장)가 신문에 기고한 글을 읽었어요. 그는 사고난 지 3일이 지난 뒤에야 폭발 소식을 들었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아비규환을 이뤘겠습니까. 원자탄을 1만6000개나 가진 나라 아닙니까. 앞으로 이런 식의 무기경쟁에 휘말리다가는 인류 종말이 금방 오겠다 싶더래요. 물론 공산주의 경제가 실패한 것도 이유겠지만 냉전을 마감하고 개방해야겠다는 결심을 그때 했더랍니다. 폴 케네디의 ‘강대국의 흥망’에 보면 ‘비경제적 요소에 투입하는 국가예산이 지나치면 그 국가는 반드시 망한다’는 내용이 나오거든요. 구 소련은 무기개발, 우주개척에 너무 많은 예산을 쓰고 있었으니 뜨끔했을 겁니다.”
아닌 게 아니라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의 소문은 진작에 듣고 있었다. 공부를 하는데, 도무지 끝간 데 없이 책을 읽는 공무원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공무원으로 정년 퇴직한 후에 대학을 세 개나 더 다녔으며 그 공부의 덕으로 미래를 훤하게 읽어낼 줄 알아 다시 공직에 불려나오게 됐다 했다.
만학도의 혜안
제타룡(諸他龍). 1938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올해 일흔. 남 타(他)자, 용 룡(龍)자. 한번 들으면 잊기 어려운 독특한 이름을 가진 그는 오랫동안 공부에 매달린 사람이 갖는 온화하고 겸허한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달변은 아닌데 이야기의 밀도가 높아 상대방의 주목을 이끌어내는 힘이 있었고 선비 같은 외양인데 알고보니 골프 코치 자격이 있었고 테니스와 스키와 스케이트에도 두루 능한 스포츠맨이었다.
공부 가운데 최상의 공부는 무지를 참을 수 없는 자발적인 욕구와 앎의 필요를 절실하게 느껴서 하는 공부라고 생각한다. 제타룡 선생이 바로 그런 공부를 했다. 호기심이 끊임없이 솟아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어려서부터 해왔던 습관의 일종이었다.
“궁금증이 솟아나면 답을 알 때까지 책을 찾아봤어요. 하다 보니 그게 습관이 되데요. 플라톤이 그랬던가요. 반복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운명을 만든다고요. 좋은 습관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매사에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무언가를 탐구하는 것이 버릇이 돼버렸어요. 공무원이 되고 정책 입안자의 역할이 주어지면서 내 관심은 자연스럽게 미래사회로 옮겨갔어요. 정치·경제·사회의 미래 트렌드 읽기가 나의 주종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