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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욱 교수의 新열하일기 2

“천이백리 요동벌 마주하니 한바탕 울고 싶어라”

  • 허세욱 전 고려대 교수·중문학

“천이백리 요동벌 마주하니 한바탕 울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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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이백리 요동벌 마주하니 한바탕 울고 싶어라”

중국 랴오양성의 성산산성 서쪽 문에서 바라본 풍경.

하기야 연암은 7월20일자 일기에 29세 때 지은 시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보며’를 수록하면서 ‘창망한 바다 위로 해가 떠오르는 곳은 하늘인지 땅인지 맞닿아 분간할 수 없었노라’고 그 무한성을 찬미했다. 연암의 명시로 꼽히는 ‘요동벌 새벽길(遼野曉行)’이 바로 이때에 씌었는데, 그 공간의 무애성이 진솔하게 드러나 있다.

遼野何時盡, 一旬不見山.

曉星飛馬首, 朝日出田間.

(요동벌은 언제 끝날까?

열흘을 가도 산을 못 보네.



말 머리에 샛별이 날리고

밭두렁에서 아침 해가 돋는다.)

마침내 연암에게 요동벌은 감격의 순간이요, 해방의 현장이다. 지정(至情)과 무한의 미를 발견하는 철학적·예술적 도장이다. 그 현장, 그 도장의 성황당이요 등대가 요양의 백탑이다. 연암은 7월9일자 일기 끝에 따로 ‘요동백탑기’를 덧붙였는데 거기서도 백탑은 천리 망망 요동 대야를 장애 없이 굽어보느라 그 시야가 전체 요동벌 3분의 1에 미칠 정도라 했다. 그리고 연암은 그 글에서 백탑의 신상명세를 이렇게 밝혔다. 8면체, 13층, 71길 높이의 탑신, 탑 꼭대기의 쇠북 3개와 층계의 추녀마다 물통만한 풍경이 달린 것 등을 특기(特記)했다.

월금 뜯는 장님이 부러워라

요동벌에서 연암의 발견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신선한 것은 실학의 바람이 한창 일고 있는 청나라의 문화 현장, 그리고 처음으로 만나는 중국인의 인격과 풍속이었다. 실학의 현장에서 연암은 경악을 실토했다. 그들이 번지레하게 번영하고 시끌벅적하게 풍요를 누리는 것을 보고 차라리 도로 서울로 가고 싶다 했다. 그러면서 비단 주머니를 어깨에 걸친 채 월금(月琴)을 뜯으며 거리를 지나는 장님을 부러워했다. ‘저들은 세상을 한 빛으로 보는 평등의 눈을 갖지 않았는가’하고. 그만큼 풀이 죽고 그만큼 속이 뒤틀렸던 것이다.

연암은 중국출입국관리소 격인 책문(柵門)을 넘으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시 조선에선 빨래터를 방불케 널찍하고 펑퍼짐한 우물에서 아낙네들이 세수대야만한 바가지로 물을 퍼 쓰고 있었는데, 만주 사람들은 벽돌로 쌓은 우물정(井)자 모양의 우물에 먼지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덮개를 씌운 데다, 도르래를 달아 쇠를 두른 물통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아닌가. 어디 그뿐인가. 우리는 머리에 똬리를 얹고 물동이를 이거나 지게에 짊고 비탈길을 비척거리는데, 만주 사람들은 팔뚝만한 몽둥이를 다듬어서 그 양쪽 끝에 물통을 거는 편담(扁擔)으로 좁은 길을 출렁거리며 속도를 낼지언정 자빠지지 않았다. 우리가 미투리나 짚신을 신는 데 반해 저들은 베로 만든 검은 신을 신었음을 지적했다. 이것들이 소소한 이용후생의 방법이라면 큰 것은 벽돌 굽기, 회 이기기, 기와 덮기, 기와 굽기, 구들 놓기, 굴뚝 세우기 등 더욱 후생적이고 구체적인 형태로 발전했다.

연암은 섣부른 목수 뺨치게 흙일에 밝았다. 한양 땅 새문안서 자란 반남 박씨, 떵떵거리던 양반집 막내아들답지 않게. 당시 조선은 토목을 주요 소재로 대문, 담, 행랑, 몸채, 사랑채를 널찍널찍 따로따로 지었던 반면, 청나라 사람들은 우선 수백보의 자리를 준비해 측량기와 나침반으로 그 고저와 방위를 잡고, 거기에 돌을 깔고 다듬어서 기초를 다진 뒤, 한 일자로 집을 짓되 담을 따로 쌓지 않고 집의 좌우와 후면은 서까래 없이 벽돌로 건축함으로써 실용성과 안전성을 최대화했다. 연암은 이 점을 높이 샀다. 회를 이길 때도 굵은 모래나 진흙을 피하고, 검고 부드러운 흙을 회와 함께 이김으로써 건축물의 색채와 강도를 도모한다고 했다.

조선에서 기와를 일 때 진흙을 잔뜩 올리면서 바람벽을 허술하게 만든지라 지붕이 무겁고 기둥이 휘어버리는 반면, 청나라 사람들은 벽돌로 벽을 쌓은 데다 진흙을 바르지 않고 곧장 기와를 올림으로써 기초는 튼튼히, 바람벽은 단단히, 지붕은 가벼이, 그런 안전한 구도를 조성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벽돌이었다. 벽돌은 건축의 핵심이었다. 한 집의 담과 벽을 거의 벽돌로 충당했다. 기둥은 벽 속으로 들어갔고 창이나 문의 틀조차 벽돌이었다. 그래서 화재와 도둑, 그리고 동식물의 침습을 막아주는 일종의 성벽 구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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