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피서산장과 주변 사원.
궁전의 뜨락이요 사원의 뒤안
그런데 논증에 앞서 빠뜨린 이야기가 있다. 바로 피서산장. 피서산장은 알다시피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 강희 옹정 건륭 3대 제왕이 1703년부터 1792년까지 온 나라의 인력·재력을 동원해 건설한 것이다.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뉜다. 담박경성, 연파치상(煙波致爽) 같은 궁전과 보타종승지묘, 수미복수지묘 같은 사원, 그리고 열하천(熱河泉)을 비롯한 여의호(如意湖), 이화반월(梨花伴月) 같은 원림으로 나뉜다. 이 가운데 궁전과 사원에 대해선 앞서 서술했다. 남은 하나, 원림은 궁전의 뜨락이요 사원의 뒤안이다. 연암은 8월9일자 일기에 피서산장 외곽 쌍탑산과 봉추산외포도, 열하성(熱河城)의 높이와 15km의 둘레, 그리고 담에 새겨진 가요문(哥窯紋)에 대해 기록했다. 가요문은 송대 장(章)씨 형제가 구워낸 도자기 무늬로 얼음이 깨지거나 금이 간 모양이다. 연암은 또 그 담 안으로 36경(景)이 조성돼 있노라 했다.
36경은 강희와 건륭이 고른, 궁전과 원림에서 가장 수려한 36개 지점이다. 궁전과 원림을 포함, 소위 36경은 다만 궁전의 환경을 조성한 게 아니었다. 북방 변강을 통일하고 북방 고원에 황궁과 원림을 건설함으로써 태평성대를 만방에 과시하려는 정치적 포부의 구현이었다. 피서산장은 강희 옹주 건륭 3대 황제가 북경의 서쪽 교외에 건조한 소위 ‘삼산오원(三山五園)’의 매머드 플랜과 시기를 함께했다.
만수산, 향산, 옥천산을 일컫는 삼산은 북경의 병풍이요, 오원은 북경 서교에 건조된 황가 원림이다. 강희가 서산 동쪽 기슭, 이화원 서쪽에 최초로 건립한 정명원(靜明園), 강희 29년(1690)에 조성된 창춘원(暢春園), 1709년부터 1744년까지 조성된 원명원(圓明園), 그리고 향산에 조성된 정의원(靜宜園)과 건륭 14년(1749)부터 1764년에 걸쳐 완성된 청의원(淸·#54582;園) 등이다.
피서산장은 오원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으나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가장 큰 규모이고 구색도 가장 다양하다. 564만㎢에 90년의 세월이 소요됐고, 전(殿)·당(堂)·누(樓)·관(·#53949;)·정(亭)·사(?·대 위에 세운 정자)·각(閣)·헌(軒)·재(齋)·사(寺) 등 각양각색의 인문적 건축물 100여 곳 외에 자연 원림을 포함한 36경이다. 요컨대 인문 문화와 자연원림을 융합한 피서산장은 허(虛) 속에 유(有)를 세웠고, 산속에 호수를 두어 산수를 융합했고, 원림 속에 산과 호수를 만들어 대소와 내외의 구분을 없앴다. 그뿐 아니다. 궁전의 정치와 사원의 종교, 원림의 자연, 그 세 가지가 조화된 유일성을 자랑한다.
회유와 통일
그런 점에서 피서산장은 같은 해에 건조된 영국의 버킹엄 궁전,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 동궁과 함께 세계 3대 황가 궁전으로 불리지만 서양의 그것들과 분명 다른 특성을 보인다. 피서산장보다 약간 앞선 1689년에 완공된 프랑스 베르사유궁과도 구별된다. 피서산장과 베르사유궁 모두 제왕이 정무를 관장하고 외교를 유치하면서 원림의 풍치를 누린 점은 같으나, 피서산장은 은밀한 동방의 산수를 수렴하고 있는 반면, 베르사유궁은 화려한 서양 건축미를 외현하고 있다.
여기에 피서산장의 특성이 있다. 우선 강희와 건륭이 36경의 명칭을 시어(詩語)로 지었는데, 모두 상징적인 가치를 추구한다. 나라의 행정과 국제 외교를 관장하는 정전의 이름을 ‘욕심을 줄이고 공경과 정성으로 몸을 닦는’ 담박경성(澹泊敬誠)으로, 황제가 황후와 비빈의 문안을 받는 곳을 ‘안개처럼 자욱한 물결에 상쾌함을 느끼는’ 연파치상(煙波致爽)으로, 황태후가 거처하는 곳을 송학재(松鶴齋)로, 강희황제가 글 읽는 곳을 ‘일만 개 골짜기로부터 몰려오는 솔바람’ 만학송풍(万壑松風)으로, 호수지역에 환벽이나 여의주 같은 섬끼리 이은 둑길을 난초 핀 오솔길이나 구름 피어나는 방축, 곧 지경운제(芝徑雲堤)로 명명한 것 등이 그렇다. 그것은 다만 시적(詩的)인 표현에 그치지 않는다. 청나라 황제들의 반박귀진(返朴歸眞)하려는 정치 철학의 반영이다. 곧 소박과 진실로 회귀하려는 중국 전통 사상의 실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