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월초, 보름 동안의 시간을 여투어 인도네시아에 다녀왔다. 보름, 아니 반 달이라면 집 떠나 있었던 시간으로야 짧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도네시아 여행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내가 자카르타의 코린도그룹 총무부에 들렀다가 현지인 여직원이 흥얼거리는 노래가 하도 흥겹게 들리기에 그 제목을 물었더니 ‘메단에서 머라우케까지’라고 했다. 세계 최대의 회교국가인 인도네시아는 2억2000여 명의 인구에다 1만70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도서국가다.
그 많은 섬 중에서 아주 ‘굵은 놈들’만 몇몇 거론하자면 말레이시아와 경계를 이루는 서쪽 끝에 수마트라(Sumatra)가 있고, 수도 자카르타(Jakarta)가 위치한 자바(Java), 우리에게 보르네오 섬으로 더 잘 알려진 칼리만탄(Kalimantan)과 그 동쪽의 술라웨시(Sulawesi), 그리고 동쪽 끝에 이리안자야(Irian Jaya)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더욱 친숙한 파푸아(Papua)가 있다.
메단(Medan)은 수도 자카르타를 기준으로 할 때 서북쪽 끝에 있는 수마트라의 중심도시이고, 머라우케(Merauke)는 동쪽 끝에 자리 잡은 파푸아 섬의 남단에 있는 도시 이름이다. 그러니까 ‘메단에서 머라우케까지’라는 노래 제목은 인도네시아의 서북쪽 끝에서 동남쪽 끝을 나타내기 때문에 우리 식으로 하자면 ‘백두에서 한라까지’쯤이 될 것이다. 그 말이 남녀의 사랑을 읊조리는 노랫말에 차용되어서 ‘이 세상 끝까지’와 비슷한 의미로 쓰인 것이다.
그런데 사실 메단은 수마트라의 수도격인 대도시이고, 인도네시아 영토의 서북쪽 맨 끝에 있는 지역의 실질적인 이름을 대자면 사방(Sabang)이다. 그래서 유행가 제목은 ‘메단에서 머라우케까지’이지만 우리의 ‘삼천리 방방곡곡’이나 ‘백두에서 한라까지’에 해당하는 실제 표현은 ‘사방에서 머라우케까지’이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 말까지 장기 집권한 수하르토는 자국 영토에 대한 자부심을 앞세워 ‘사방에서 머라우케까지’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사방에서 머라우케까지의 실제 거리는 5120km나 되는데, 이는 유럽과 단순비교하면 영국 런던에서 터키 앙카라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고 한다.
무슨 얘기냐 하면 이처럼 광활한 영토를 가진 인도네시아 전체를 기껏 보름 동안 둘러보고 기행문을 쓰겠다고 나선다면 몰매 맞을 일일 터, 나는 올해 여름에 내가 둘러볼 권역을 바로 그 머라우케가 있는 파푸아(옛 이리안자야)로 한정했다. 그래봐야 주마간산이겠지만.
‘현지화 신화’와 재회
자, 이제 이 여행을 누구와 어떻게 떠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할 차례다. 나는 꽤 여러 해 동안 ‘신동아’의 인물탐방 꼭지인 ‘이 사람의 삶’을 맡아 쓴 적이 있다. 서기 2000년의 마지막 호인 12월호에 소개한 인물은 인도네시아에서 ‘코린도’라는 목재회사를 창업하여 굴지의 기업집단으로 키워낸 한국인 승은호(承銀鎬·65) 회장이다.
부친이 경영하던 목재회사(동화기업)의 미국 LA지사장으로 근무하던 1970년대 중반 아버지가 ‘시대와의 불화’를 모질게 겪게 되면서 부도사태에 직면, 그 동안 거래해오던 일본 회사로부터 순전히 신용을 담보로 원목 벌채장비 구입비를 얻어 인도네시아에 ‘망명기업’ 코린도 창업, 인도네시아 각지에 네 군데의 합판공장을 비롯하여 제지·조림·금융·화학·운송 등 30개가 넘는 기업군을 거느린 거대 그룹으로 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