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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21세기 중국 문화 7 - 음식

高성장 바람 타고 화려해진 식탁, 그 아래엔 상실과 박탈의 그림자

  •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부교수·민속학 duruju@aks.ac.kr

高성장 바람 타고 화려해진 식탁, 그 아래엔 상실과 박탈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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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성장 바람 타고 화려해진 식탁, 그 아래엔 상실과 박탈의 그림자

최근 중국에서 복원된 중국 전통음식 자장몐. 예전 베이징 사람들은 여름엔 자장몐을, 겨울엔 다루몐을 즐겨 먹었다.

나는 이미 졸저 ‘중국 중국인 중국음식’(2000년)에서 중국에는 자장면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계속 있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중국의 북방인들, 특히 베이징이나 산둥(山東)의 노인들은 “여름에는 자장·#47760;(炸醬麵), 겨울에는 다루·#47760;을 먹어야 제격이다”라고 말한다. 자장·#47760;은 국물이 없어서 여름에 먹기 적당하고, 다루은 돼지고기를 기름에 볶은 후 물을 붓고 각종 채소, 달걀 푼 것, 석이버섯 등을 넣어 끓인 국물에 면을 만 것이라 추운 겨울에 체온을 따뜻하게 하는데 안성맞춤이라고 여긴 사람들이 바로 베이징 토박이들이었다.

1996년, 베이징 중심가인 중국미술관 정문 건너편에 한국식 자장면 식당이 문을 열었다. 서울 신당동에 살던 화교 부부가, 한국인이 베이징에 많이 사는데 그들이 한국식 자장면을 그리워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자장·#47760;의 고장에 한국식 자장면 식당을 차린 것. 대성공이었다. 마침 그 식당이 베이징의 명동인 자금성 동편 왕푸징(王府井) 북쪽 끝 네거리에 위치해 손님 중에는 중국 젊은이들도 간혹 있었다. 그들 역시 한국식 자장·#47760;을 먹어보고는 찬사를 보냈다.

1996년 어느 날 그 식당에서 만난 27세의 왕씨는 격분했다. “왜 중국음식인 자장·#47760;을 한국식으로 바꾸어 베이징에서 파느냐. 그동안 우리는 뭘 했기에 자장·#47760;을 한국에 빼앗기고 말았나.”

당시만 해도 중국에선 한국의 경제발전 비결을 배워야 한다는 다급한 목소리가 일었다. 경제도 그러한데, 심지어 중국인의 자존심인 음식까지 한국에 빼앗겼다고 한탄하는 젊은이의 안타까움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이런 분노는 오래가지 않았다. 중국 경제가 세계 대국의 위상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중국 것’을 빼앗겼다는 생각을 하는 대도시 젊은이를 만나기는 어렵다.

여기서 자장면에 대한 한국인의 오해를 풀고 가자. 1882년 임오군란에 개입한 청나라의 리훙장(李鴻章·1823~1902)은 군사를 이끌고 제물포를 통해 서울에 입성했다. 제물포는 갑오농민전쟁 이후 일본과 중국, 그리고 유럽 국가들의 조차지가 됐다. 자연스럽게 산둥 출신 중국인 노무자들이 하역작업에 동원됐다.



중국 노무자들을 위해 중국식당이 생겼고, 그곳에서 가장 값싼 음식이 자장·#47760;이었다. 일제 강점기엔 화교를 ‘제비’라고 불렀다. 이들은 돈을 벌어 설날인 춘절만 되면 마치 강남 가는 제비처럼 고향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산둥 출신에 비해 푸젠(福建)이나 광둥(廣東)에서 온 중국인은 대부분 거상(巨商)이었다. 이들을 위해 운영된 식당이 바로 ‘청요리(淸料理) 집’이었다. 청요릿집은 기생집이나 요정처럼 시설 규모도 크고, 메뉴도 대부분 요리라고 할만한 것이었다.

자장·#47760;이 본격적인 대중음식으로 한국에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때는 1960년대 이후다. 농업, 그중에서도 채소 농사를 많이 짓던 화교들에게 농토를 가지지 못하도록 법적 규제를 하자 그들이 중국식당을 차렸고, 그때부터 한국에서 ‘중국인’하면 중국식당 주방장으로 인식됐다.

이때 주된 메뉴가 바로 자장면·짬뽕·우동이다. 짬뽕과 우동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 화교를 통해 들어온 음식이라 일본식 이름이 붙었다. 특히 자장면이 인기를 누리자 맛과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면서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진화하기 시작했다. 감자나 양파가 들어가고, 중국 된장도 단맛이 나면서 걸쭉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중국에는 한국식 자장면’이 없다는 말이 옳다. 한국식 자장면의 진화는, 중심부에서는 사라진 문화적 요소가 주변부에서 강세를 보이는 대표적인 문화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적어도 1990년대 베이징의 일반 식당에서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던 ‘자장·#47760;’이 왜 2006년에 부활했을까.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중국인들은 더 이상 아시아의 작은 용들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부담을 갖지 않게 됐다. 아시아를 강타한 ‘IMF 구제금융’ 사태 때 한국은 중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처지에 몰렸다. 중국 인민들은 당시에 자신의 조국이 아시아를 지켜주었다고 생각한다. 1980년대 개혁개방을 하면서 외부를 향해 끝없는 경제적 구애를 펼치던 중국이 2000년이 되면서 미국과 경쟁하는 유일한 대국이 됐다. 덩달아 주머니도 두둑해진 중국인, 특히 베이징이나 상하이의 젊은이들은 더는 자신의 조국을 후진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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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부교수·민속학 duruju@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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