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호

당신, 감정 불감증이신가요?

  • 김현미│동아일보 출판팀장 khmzip@donga.com

    입력2009-01-30 15: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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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 나이 마흔 중반 무렵부터 슬금슬금 달라지는 것이 있다. 첫째, TV 드라마에 빠진다. 사랑, 실연, 불륜 이런 이야기는 할 일 없는 여자들이나 보는 것이라며 눈길도 주지 않던 사람이 언제부턴가 아내 옆에서 드라마 쪽에 곁눈질하다가 나중에는 누구보다 먼저 채널을 챙기는 성의를 보인다.

    그 나이쯤 해서 남자들이 은근히 밝히는 게 또 있다. 점집이다. 사주 보는 집이라고 해도 좋다. 젊은 시절 점 이야기만 꺼내도 미신이라며 펄쩍 뛰던 사람이 이제는 “한번 가서 물어보지 그래?” 하며 슬쩍 아내를 부추긴다.

    한 가지 더, 중년의 남자는 수다스러워진다. ‘노래방에서 애국가만 부르던 사람(회사 밖에서도 일 이야기만 하던 사람)’이 온갖 장르의 유행가를 뽑는 수다쟁이가 된다. 자식 자랑, 건강 자랑, 인기 드라마에 연예인들의 사생활까지 즐겁게 떠든다. 그이가 주책없어진 것일까, 나약해진 것일까. 걱정할 것 없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졌을 뿐이다. 세월이 그를 ‘사내다움’이란 굴레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엘리트 남성들은 오랫동안 ‘stiff up-per lip’(윗입술을 고정시킨다는 말로, 모름지기 남자란 어떤 상황에서도 표정에 감정의 동요를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다)의 교육을 받아왔다. “남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말처럼 감정을 늘 통제 상태에 두는 것이 ‘사내다움’의 징표라 여겼다. “슬플 때 쥐 죽은 듯이 있고, 화가 날 때는 조용히 꾹 참고, 무서움을 느낄 때는 밀쳐내도록 배워왔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통제하거나 혹은 남이 보지 못하도록 숨기라고 교육받아왔다.”

    ‘감정공부’의 저자이며 심리치료가인 미리암 그린스팬은 그러한 오랜 관행이 남성을 감정 불감증 환자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감정 불감증이란 자신의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데도 서툴 뿐만 아니라 타인의 감정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여성들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린스팬에 따르면, 여자아이들은 침묵 속에서 괴로워하는 방법을 배웠고, 남자아이들은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도록 학습받은 것의 차이일 뿐이다. 만일 있는 그대로 감정을 드러냈다면 당신에게 당장 ‘과민’이라는 딱지가 붙을 것이다.



    오늘날 심리학자나 정신과 전문의들은 현대인이 좀 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감정의 통제에는 한계가 있으며, 찰랑거리는 컵에 한 방울의 물이 떨어지는 순간 넘쳐흐르는 것처럼 돌발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감정의 부메랑 효과’라고 한다. 그린스팬은 “감정에 대한 두려움과 평가절하의 바로 뒤편에서 우리는 자신들의 감정을 인공적으로 자극할 거리를 필요로 한다. 이는 일종의 감정적 포르노에 대한 중독”이라고 말했다. 최근 들어 TV에서 쉼 없이 소리를 질러대는 가학성 코미디와 불륜과 학대로 점철되는 ‘막장’ 드라마가 높은 인기를 얻고 있는 것도 ‘감정적 포르노에 대한 중독’이 아닐까.

    당신, 감정 불감증이신가요?

    감정공부 미리암 그린스팬 지음/ 이종복 옮김/ 뜰/ 382쪽/ 1만3500원

    분노와 수치심도 쓸모가 있다

    ‘감정공부’는 슬플 때는 울고, 기쁠 때는 웃고, 화가 날 때는 소리치는 감정의 해방을 주장한다. 특히 슬픔, 절망, 두려움처럼 소위 드러내지 말아야 할 ‘나쁜 감정’으로 취급당해온 것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라고 충고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슬픔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당연하다. 애써 눈물을 감추지 마라. 그린스팬은 상실, 슬픔의 유용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감사는 슬픔의 눈을 통해 바라볼 때 일어난다. 삶에 집착하는 것을 그만두고 삶에 그저 감사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감정공부’가 명상적인 방법으로 이성에 의해 억압된 감정을 해방시켜 삶의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꿀 것을 제안한 책이라면, 프랑스의 정신과 전문의인 프랑수아 를로르와 크리스토프 앙드레가 함께 쓴 ‘내 감정사용법’은 분노, 시기, 기쁨, 슬픔, 수치심, 질투, 두려움, 사랑 등 8개의 감정을 기능별로 살펴보고 이러한 감정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알려주는 매뉴얼 같은 책이다.

    당신, 감정 불감증이신가요?

    내 감정 사용법 프랑수아 를로르· 크리스토프 앙드레 지음/ 배영란 옮김/ 위즈덤하우스/ 480쪽/ 1만7000원

    만화가들은 화가 난 사람을 표현할 때 머리 위로 연기가 피어오르거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근육이 울근불근해진 모습을 그린다. 사실 입으로는 “화 안 났어”라고 해도 몸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화를 낼까? 나의 가치체계와 부딪치는 부당한 일이, 그것도 고의적으로 발생했을 때 나는 분노로 상대를 위협하여 그 문제를 시정하거나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만들고자 한다. 간단히 말해 분노는 나를 만만하게 보지 않도록 만드는 데 유용한 감정이다.

    이처럼 분노의 표현이 상황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적절한 분노는 필요하다. 오히려 “화를 내면 품위가 손상될까 봐” “화를 낸 뒤 죄책감을 느낄까 봐” “나는 언제나 좋은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 등의 의식 때문에 과도하게 화를 억누르는 태도가 문제다. 이 책은 화를 잘못 내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분노의 표현을 두려워하지 마라” “화를 내려고 시도했다가 당황해서 중간에 그만두는 행동을 하지 마라” “너무 빨리 화해를 받아들이지 마라” “분노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라”.

    두 번째 감정인 ‘시기심’은 도대체 어디에 쓰는 것일까? 시기심은 3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상대에 비해 자신의 열등함을 확인한 뒤 우울함과 무기력함이 찾아오는 침체적 시기심, 상대를 골탕 먹이거나 나쁘게 말하는 적대적 시기심, 상대의 우월함을 칭찬하거나 존경하며 자신도 그만큼 되고자 노력하는 경외적 또는 경쟁적 시기심이 있다.

    시기심 중에서도 특히 경쟁적 시기심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초월하게 해주기 때문에 개인이나 사회 전체에 이롭게 작용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므로 시기심이라는 감정을 숨기려 하기보다는 ‘인정’하는 쪽이 효과적이다. 또한 시기심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자기만의 방법을 마련해두는 것이 좋다. 상대방의 이점을 상대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방법도 있다.

    당신, 감정 불감증이신가요?

    뇌과학으로 풀어보는 감정의 비밀 마르코 라울란트 지음/ 전옥례 옮김/ 동아일보사/ 233쪽/ 1만2000원

    슬픔 역시 피할 수 없는 감정이다. 그렇다면 슬픔을 이용하라. 상실, 실연, 패배로 인한 슬픔은 패배의 원인을 헤아리게 만들고 자아 성찰의 기회로 이어지기도 한다. 또한 슬픔은 타인의 관심과 동정심을 유발하며, 아울러 타인의 공격성을 일시적으로 누그러뜨리는 효과도 있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슬픔 속에 자신을 방치하면 우울증이 생기거나 그것이 분노로 바뀔 수도 있다.

    만들어낸 감정은 진짜일까

    그 밖에 ‘내 감정 사용법’은 상대방의 적개심을 완화시키는 수치심,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사고를 가능케 하는 기쁨, 나의 가치를 높이고 더 나은 배우자를 찾게 만드는 질투,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두려움, 모든 한계를 뛰어넘게 하는 가장 훌륭한 감정적 경험인 사랑 등에 대해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감정의 실체를 화학적으로 분석한 ‘뇌과학으로 풀어보는 감정의 비밀’을 살펴보자. 감정이 무엇인가에 대해 4가지 주요 관점이 있는데, 그중 우리의 몸이 느끼기 때문에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생리학적 관점’이고, 우리가 생각하기 때문에 감정이 생긴다는 것이 ‘인지론적 관점’이다(‘내 감정 사용법’ 중에서). ‘뇌과학으로 풀어보는 감정의 비밀’은 생리학적 관점에 가깝다. 즉 어떤 감정을 느끼는 순간 우리 몸의 생리적 상태 또는 특정한 감정을 일으키는 호르몬의 작용 등에 대해 설명한다.

    예를 들어 우리를 사랑에 눈멀게 만드는 ‘사랑의 묘약’이란 무엇일까. 첫째 아드레날린이다. 이것은 긴박하고 두려운 스트레스 상황에서 분비되는 것과 비슷하다. 맥박이 뛰고 체온이 올라가고 땀을 흘리게 한다. 사랑하는 순간 우리 몸에는 평소보다 10배쯤 많은 아드레날린이 분비된다. 둘째 페닐에틸아민(PEA)이다. 이 호르몬은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 유쾌하고 행복한 느낌이 들게 해준다. 혈중 PEA 농도가 상승하면 온몸에 기분 좋은 느낌이 퍼진다. 반대로 이별 뒤에는 혈중 PEA 농도가 급격히 떨어진다. 셋째 옥시토신이다. 마사지나 애무와 같은 접촉을 할 때 감각을 통해 전해지는 좋은 느낌은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의 작용이다. 연인들끼리 전희를 할 때 행복의 옥시토신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온다. 그 밖에도 ‘사랑의 묘약’에는 다양한 호르몬이 혼합돼 있다.

    그렇다면 이 묘약을 마시면 사랑에 빠지게 될까?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한 실험에서 옥시토신을 코로 흡입한 뒤 성행위를 한 사람들은 성적 만족감을 느꼈고 그중에는 평생 최고의 오르가슴을 느꼈다고 대답한 사람도 있었다. 반대로 옥시토신 분비를 억제하면 성적 만족감이 그리 크지 않았다. ‘뇌과학으로 풀어보는 감정의 비밀’의 저자는, 우리 몸에서 생성되는 전달물질에 대해 감정 상태를 전하는 ‘생화학적 배달부’라고 말한다. 그러나 전달물질 자체가 감정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전달물질을 인위적으로 투여해서 감정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는 오용과 중독 등 크나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인간의 감정을 다루는 책이 많이 발간되고 있는 것은, 여전히 감정의 실체는 모호하고, 유리처럼 다루기 조심스러운 대상이기 때문이다. 감정은 지나치게 드러내서도, 깊이 감추어서도 안 된다. 그럼에도 기쁨이나 사랑과 같은 긍정의 감정이든, 슬픔과 두려움과 같은 부정의 감정이든 인간은 내 안에 있는 수많은 감정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고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사람만이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고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심리학자 피터 샐로비와 존 메이어가 제시하고, 대니얼 골먼의 베스트셀러를 통해 널리 알려진 ‘감성지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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