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호

② 태사공자서

겨울을 난 벚나무에 향기로운 꽃이 피고

  • 원재훈│시인 whonjh@empal.com

    입력2009-02-03 11: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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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권의 책은, 곧 그 책을 쓴 사람이다. ‘사기’를 읽는 건 사마천을 읽는 것이요, ‘목민심서’를 읽는 건 다산의 생애와 사고를 오롯이 읽는 것이다. 후세에 길이 남을 고전은 결코 순탄하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마천은 가장 치욕스러운 시기를 저술로 견뎌냈고, 정약용은 슬픔과 고독을 책으로 달랬다.
    ② 태사공자서

    일러스트레이션 이우정

    ‘원(怨)은 난(亂)을 만들고 한(恨)은 문화에 통한다.’ 이병주 선생은 사마천에 대한 글을 쓸 당시 나에게 이런 문장을 주었다. 이병주식 촌철살인이다. 이병주 선생 역시 ‘사기(史記)’를 처음 읽은 곳이 경찰서 유치장이었고, 서대문형무소에서 10년형을 살면서 한서(漢書)로 ‘사기’를 읽기 시작했다. 사마천이 억울하게 궁형을 받고 쓴 ‘사기’, 이병주 선생이 억울하게 10년형을 받고 감옥에서 읽은 ‘사기’. 시공간을 뛰어넘는 인간 정신의 교류다.

    ‘사기열전’의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와 반고의 ‘한서’에 수록된 ‘사마천전’을 읽으면서 나는 글쟁이의 운명에 대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독하게 글 쓰는 이들을 얘기하면서, 그 독함은 바로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라는 말도 오갔다. 비록 이름을 널리 알리지는 못했으나, 가난과 슬픔, 고통 속에서 진주 같은 작품을 쓰는 시인이 많다.

    글쟁이의 진정성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문화에 통한다는 한(恨)이 아닌가. 세상에 남은 고전은 작가들이 말로는 전할 수 없는, 말로는 다할 수 없는, 말로 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어둠과 고통 속에서 기어이 하늘로 띄운 별이 아니던가.

    ② 태사공자서

    사마천의 ‘사기열전’.

    사마천 이전에 ‘안 되는 건 죽어도 안 된다’고 목숨 걸고 밝히며 역사가의 전범(典範)을 보여준 용감한 삼형제가 있었다. 제나라의 권력가 최저는 임금인 장공을 죽였다. 이에 제나라의 태사(太史)는 ‘최저, 장공을 시하다’라고 기록을 남겼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깔끔한 문장이다. 최저는 태사가 괘씸해 죽여버렸다. 그러자 이번엔 태사의 동생이 ‘최저, 장공을 시하다’라고 썼다. 최저는 그 동생도 죽였다. 두 형의 죽음을 본 태사의 또 다른 동생도 마찬가지 기록을 남겼다. 잔인무도한 최저라지만, 이번엔 사람도 문장도 죽이지 못했다. ‘사기’의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에 수록된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읽고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너는 문장 하나 때문에 죽을 수 있느냐?’

    죽음보다 더한 치욕



    간혹 죽음이 자비로울 때가 있다. 극심한 고통에 처한 사람은 죽음을 간절히 원하기도 한다. T S 엘리어트의 시 ‘황무지’에 등장하는 항아리 속 할머니에겐 죽음이 자비인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 남근을 거세하는 궁형(宮刑)은 최악의 형벌이었다. 사마천은 문장을 위해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견디며 ‘사기’를 집필했다. 그는 누구인가?

    사마천은 한 경제의 중원 5년(기원전 145년)에 태어났다. 아버지 사마담은 사마천이 다섯 살 때에 태사령(太史令)이 되었다. 태사령은 사관(史官)을 의미하며 아들이 아버지의 직위를 이어받는 세습직이다. 사마천은 20세에 전국을 여행했으니, 그의 문장은 당시 온 세상이나 다름없던 중국을 유람한 경험에서 비롯됐다. 22세에 벼슬을 처음 했고, 38세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됐다. 42세에 ‘사기’를 쓰기 시작했지만 본격적인 저술활동은 하지 못했다. 공사다망했기 때문이다. 48세에 이릉(흉노를 정벌하러 떠났다가 포로가 된 장군)을 변호하다 궁형을 당하고, 50세 무렵 출옥해서야 본격적으로 저술활동에 임할 수 있었다. 55세에 ‘사기’를 완성하고, 62세에 세상을 떴다.

    궁형을 당한 선비들은 으레 자결했지만, 그는 그런 식으로 도피하지 않았다. 한 무제는 궁형을 당하고도 살아남은 사마천에게 중책을 맡기고, 곁에 머물러 역사를 기록하게 했다. 사마천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쓰는지 지켜보고 싶었던 것일까?

    ‘사기열전’의 맨 마지막인 70번째 열전이 ‘태사공자서’다. 사마천은 ‘태사공자서’에 자신의 출생배경과 학문적 배경, 경력 등을 소상히 밝혀놓았고, ‘사기’의 구성에 대해서도 짧게 언급해, 책 전체를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사마천은 사람이 살아 있음은 정신이 살아 있음을 말하고, 따라서 정신과 육체를 잘 운용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정신이 고갈되고 육신이 피폐해져, 결국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면 죽는다는 얘기다. 사마천은 정신이야말로 사람의 근본이며, 육신은 삶의 도구라고 했다. 이 삶의 도구, 그중에서도 남성의 상징이자 중심을 앗아간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사마천은 이릉 장군을 변호하다가 궁형을 당했다. 사마천으로 하여금 이러한 불행을 겪게 한 이릉 장군은 누구인가? 왜 사마천은 조정의 대세를 따르지 않고 무서운 군주 한 무제의 심기를 건드리면서까지 이릉 장군을 변호했을까?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이릉의 화(禍)

    “나와 이릉은 같은 문하에 있었는데 본래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취미도 달라 술잔을 나누며 친하게 환담한 적도 없다. 그러나 그의 사람됨을 볼 적에 본래 예사롭지 않은 선비였다. 효심이 두텁고 신의가 있으며 청렴하여 공연한 선물은 받지 않았다. 물건을 나눌 때에는 제 몫을 남에게 양보하고, 항상 공경하는 마음과 사양하는 몸가짐을 가졌다. 항상 분기하여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국가의 위난에 뛰어들었다. 이것이 그의 평생의 자세였다.”

    사마천은 역사를 기록하는 독수리눈을 가진 선비였다. 그의 눈은 그의 입이기도 했다. 행동과 말이 다르지 않았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전술했듯, 역사가는 단 한 문장 때문에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사마천은 이러한 일이 바로 되지 않으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군주가 군주답고, 신하가 신하답고, 자식이 자식다워야 함은 이러한 정직성과 정확성에 기인한다.

    이릉은 5000 병력으로 흉노를 정벌하러 갔다. 북방의 호랑이 같은 수만의 흉노 대군을 5000 군사로 제압하려다 적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식량과 화살이 떨어지고, 구원병마저 오지 않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이릉이 진중(陣中)을 바라볼 때, ‘병사들은 몸을 일으켜 눈물을 흘리고 피로써 얼굴을 씻고 눈물을 마시며, 살도 없는 활을 당기면서 시퍼런 칼날에 몸을 던지고, 북을 향해 앞 다퉈 죽어’가고 있었다. 그때 궁에서는 이릉이 용맹무쌍하게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일찌감치 승리를 자축하며 술잔을 높이 들고 있었다.

    이릉은 한나라의 장군으로서 적에게 항복했다는 죄목으로 한 무제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이때 사마천이 한 무제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제가 생각하기로 이릉은 평소 맛있는 것도 먹지 않고 부하와 더불어 고난을 함께하니, 모두가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아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옛 명장도 이릉보다 뛰어나지 않았습니다. 몸은 비록 적에게 붙들려 있지만, 당초 생각은 적당한 기회에 한에 은혜를 갚으려 했던 것입니다. 이미 패한 건 어쩔 수 없으나, 흉노를 무찌른 공훈은 천하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세상을 사는 일은 시인에게도 그리 녹록하지 않다. 그러니 정치판 같은 곳에서야 오죽하겠는가. 그의 충성은 호도되었고, 결국 이릉은 온 가족이 사형에 처해졌으며, 사마천은 궁형을 당해 한겨울 벌판에 알몸으로 서 있는 형국이 됐다.

    살아남아야 할 이유

    사마천이 ‘사기’라는 대작을 집필할 수 있었던 것은 가혹한 형벌 궁형 덕분이다. 그는 살아남아야 할 이유로 글쓰기를 택했다. 그러고 나니 육체적인 죽음이라고 할 만한 궁형은 오히려 정신을 되살려냈다. 그는 형벌을 받으면서 심각하게 고민했다. 먼저 억울함을 곱씹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수모를 겪는단 말인가’ 미치기 직전까지 정신이 팽창한다. 몸과 마음은 터져버릴 것 같은 공황상태에 이른다. ‘이것이 내 죄인가? 이것이 내 죄인가? 몸이 망가져 쓸모없게 되었구나.’ 몸의 망가짐이 정신의 죽음으로 이르기 직전에 사마천은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를 극복하고 자신의 쓸모를 찾아냈다.

    “대체로 시경과 서경의 뜻이 은미(隱微)하고 말이 간략한 것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바를 펼쳐 보이려 했기 때문이다. 옛날 서백은 유리에 갇혔기 때문에 ‘주역’을 풀이했고, 공자는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고난을 겪었기에 ‘춘추’를 지었으며, 굴원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이소’를 지었고, 좌구명은 눈이 멀어 ‘국어’를 남겼다.

    손자는 다리가 잘린 후 ‘병법’을 논했고, 여불위는 촉나라로 좌천되자 세상에 ‘여람: 여씨춘추’를 전했고, 한비는 진나라에 갇혀 ‘세난’과 ‘고분’ 두 편을 남겼다. 시 300편은 대체로 현인과 성인이 발분(發憤)하여 지은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에 울분이 맺혀 있는데, 그것을 발산할 수 없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다가올 일을 생각한다. 좌구명이나 손자는 실명하거나 다리가 절단되자 희망을 잃고 물러나 책을 지어 토하고 글에 의지해 깊은 뜻을 세상에 알리려 했던 것이다.”

    궁형, 거세를 당한 것은 그가 이제 더 이상 남성으로서 국정에 나가 이런저런 말을 할 수 없다는 의미기도 하다. 사마천은 이제 사회의 마이너리티로 그림자와 같은 삶을 산다. 그에게 오늘은 사라지고, 대장부의 명분도 없어진 것이다.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과거와 미래뿐이었다. 그래서 ‘지나간 일을 서술해 다가올 일을 생각하는’ 문장을 남긴다. 이것이 바로 역사가의 운명이었다. 그는 벗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런 글을 남기기도 했다.

    ② 태사공자서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여유당 전서’를 지었다.

    “그런데 그 뜻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 이릉의 화(禍)를 입었다. 이대로 미완성인 채로 그만두는 것은 유감천만이다. 그래서 나는 극형을 받으면서도 성난 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내가 만일 이 저작을 완성한 진의를 전하고, 수도 장안을 비롯한 대도시에 유통시킬 수만 있다면, 이때까지의 굴욕이 보상되는 것이며 만 번 형륙(刑戮)을 받아도 한이 없겠다.”

    불가에서는 수도승들이 묵언수행을 한다. 그 기간 자신의 산만한 내면을 살피고, 도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나는 작가에게도 묵언수행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작가의 묵언수행은 바로 집필하는 시기다. 이 시기가 무너지면 작가는 정체성을 잃는다. 그러나 이 수행은 고독하고 고통스럽다. 달콤한 말 한마디가 그립다. 금지된 육욕과 같은 유혹이다.

    하지만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쉽고, 어떤 말은 바로 독이 되며, 또 어떤 말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물론 부처 예수 소크라테스와 성인군자들은 말을 많이 했다. 책을 쓰지는 않았다. 공자역시 역사서인 ‘춘추’를 지었을 뿐이다. 나 역시 강의를 많이 한 날은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 글을 쓰기가 힘들다. 말과 글은 어쩌면 한 치도 양보 않는 대척점에 있는지 모른다.

    사마천은 과거의 인물들을 통해 자신이 갈 길을 찾았다. 선배들의 길을 따라야 한다고 자각한다. 우리의 삶도 ‘사기’의 열전 중 누군가의 길을 되밟는 일이다. 사마천의 위 문장을 이렇게 고쳐 써본다.

    ② 태사공자서

    한센병을 앓은 시인 한하운.

    정약용의 유배, 한하운의 천형

    “옛날 다산 정약용은 참혹한 유배지 생활 동안 ‘여유당 전서’를 지었고,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지에서 ‘세한도’를 그렸다. 시인 한하운은 천형(天刑)이라는 한센병을 앓으면서 시를 지었다. 김지하는 독재정권에 저항하여 ‘오적’을 비롯한 걸작을 남겼으며, 신영복은 젊은 시절을 감옥에서 보낸 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펴냈다.

    황석영도 출감하고 나서 더욱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천형을 앓은 한하운 시인의 정치권력에 희생당한 마음에는 울분이 차고도 넘쳤다. 그것을 발산할 수 없기에 지나간 일들을 문장으로 쓰고 또 쓴 것이다. 이런 선배들 앞에서 내가 갈 길을 보지 못한다면, 나는 장님이 아닌가.”

    정치권력에 희생되어 모진 수난을 겪은 문인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쉽게 찾을 수 있다. 고대 중국에선 신체의 일부를 거세하는 원시적인 형벌을 내렸고, 현대에 와선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감금함으로써 정신적 불구를 만들고자 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세계적인 화학자 프레모 레비도 극단적인 권력의 희생양이었다. 그는 지옥에서 살아남았지만, 자살을 택하고 만다. 한 인생이 넘을 수 없는 산이 있는 법이다.

    나는 사마천과 같은 육체적 고통의 극한을 겪은 시인 한하운을 생각한다. ‘운명은 장담할 수 없는 일…’이라는 탄식으로 시작되는 한하운의 자서전을 살짝 들여다본다.

    “나는 문둥병 선고를 받던 날, 그 순간부터 하늘이 무너지는 주검보다 무서운 절망에 허탈해버렸다. 절망의 수십 년 세월 속에 세상 사람들이 제멋대로 규정한 인간 추방의 잔학성에 인간폐업의 서식조건을 박탈당한 산송장으로 싸워 나온 서글픈 생존자라 할 거다.

    세상은 사람이 사람을 짓밟고 사람 위에 서서 보잘것없는 사람에게는 세상은 함부로 무자비한 학대를 하고 개돼지보다도 더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진다. …전락의 삶과 병과 시혼(詩魂)의 방황 속에 애달프고 서글픈 생존과 자유를 찾는 고고한 생명의 시집이라 하겠다. 그러니 이 ‘고고한 생명’은 나의 인생기록에 해당하겠다. 이 책을 출판하게 됨은 나를 격려해주는 수많은 독자의 간곡한 청에 못 이겨 내놓은 것이다. 다만, 세상에 절망한 사람, 죽고 싶은 사람들이 이 책에서 어떤 용기를 얻게 되면 이 책의 보람을 다한 것이라 하겠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세상사, 절대 맘대로 되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은 세월이 갈수록 나이테처럼 가슴에 새겨진다. 그렇다고 운명론자가 되는 건 아니다. 시인 한하운은 시를 통해 고고한 생명의 기록을 남겼다. 세상에는 그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간절하게 그를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작가의 불행이 독자의 행복이라는 잔인한 말이 틀리지 않다. 불행조차 사마천이나 한하운과 같은 사람을 만나 찬란하게 변화한다. 고통을 통해 인간성을 죽이려던 잔인한 의도는 무산되고, 오히려 찬란한 저서와 시집이 탄생한다. 이 연금술은 고통을 행복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증오를 사랑이라는 거대존재로 변화시킨다. 고통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행복한 순간이 되기도 한다.

    ② 태사공자서

    정약전의 ‘자산어보’.

    그는 한겨울 헌 가마니 한 장에 의지해 서울에서 밤을 지새운 일을 회고하면서 고통이 심하면 인간은, 목소리가 변하고 시력마저 잃어 세상이 잿빛으로 보인다고 회고했다. 온전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한하운은 그때의 심경을 이렇게 적었다. ‘이제는 나는/말도 잊었다/울음도 잊었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 그의 절창(絶唱)이 터져 나왔다. 그의 시 ‘전라도 길’이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찔름거리며/가는 길…//

    신을 벗으면/버드나무 밑에서 자까다비를 벗으면/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한하운의 붉은 황톳길은 이후에 독재 권력에 저항하는 시인들의 길이 되었다. 선배인 김소월 윤동주에서부터 유신독재하의 김지하 황석영과 같은 시인, 소설가들이 이 길을 걸었다. 천형을 받은 건 아니나, 감금되고 통제되는 형벌의 길을 감수했다. 이러한 길은 아마도 인류가 존속하는 한 영원할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이세상과 저세상을 다르게 보지 않았다. 이승과 저승을 동일 선상에 놓고 보았다. 살아서 황제는 죽어서도 황제이고, 신하는 사나 죽으나 신하다. 제후는 노자를 무덤에 들고 들어가고, 법관은 법조문을 안고 들어간다. 무덤 속의 물건을 보면 주인의 정체가 보인다. 중국인은 왜 입신출세하고, 고관대작이 되려 하는가? 단순히 현세의 호의호식을 위해서가 아니다. 현실의 입신출세는 다음 생인 유택의 세계, 명의 세계에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아버지와의 약속

    사마천 역시 이러한 바람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는 ‘사기’를 저술함으로써 후대의 역사서인 반고의 ‘한서’에 이름을 남기고 명예를 되찾았다. 그의 저서 ‘사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불세출의 고전이 되었다. 그는 치욕을 견뎌내고 살아남아 ‘사기’를 쓴 덕분에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자신의 비통에 찬 마음을 집필로 승화시켰으며, 아버지의 마음을 받들어 효를 행한 것이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아들에게 이러한 말을 남겼다.

    “내가 죽으면 너는 반드시 태사가 되리라. 태사가 되거든 내가 쓰고자 했던 것을 잊지 말아라. 효행이란 어버이를 받드는 데서 비롯하며, 임금을 섬기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입신하여 후세에까지 이름을 들날리고, 나아가 죽은 부모를 유명하게 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것이 가장 큰 효행이니라.”

    중국의 역사가 ‘춘추’를 끝으로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것을 한탄하며, 춘추 이래 400년 남짓한 역사를 기록하라고 간곡하게 명한 것이다. 한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였으니, 이제 태사가 되어 그걸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체절명의 바람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공(周公)이 가신 지 500년이 되어 공자가 태어났습니다. 그로부터 500년이 지났습니다. 주공, 공자의 도를 계승하여 이를 밝히고, ‘역(易)’의 해석을 바로잡아 ‘춘추’를 잇고, ‘시·서·예·악’의 전통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가 탄생한다면 바로 지금일 것입니다.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마천이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이렇게 써나간 지 10년 만에 이릉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궁형을 받은 뒤에 중서령이라는 높은 관직에 올랐다. 이때 친구인 임안이 사마천에게 편지를 보내 옥중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다급함을 토로하고, 옛 현신(賢臣)의 도의를 본받으라고 충고했다. 사마천은 ‘임안에게 보내는 글’이라는 답장에서 자신이 비록 중서령의 직책을 맡았으나 쓰레기통에 처박힌 노예나 다름없는 처지라고 했다. 그러면서 ‘사기’를 완성하여 이를 마땅한 자에게 전하고, 큰 마을이나 도시에 퍼져 나가게 할 수만 있다면, 과거의 욕됨을 갚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신은 다만 쓸 뿐이라고. ‘한서’의 ‘사마천전’에 수록된 ‘임안에게 답하는 글’에는 사마천의 절절한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마치 제갈공명의 출사표 같다.

    추사는 제주도 유배지에서 그린 ‘세한도’를 통해 ‘날이 추워야 푸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추사는 시련기에 ‘세한도’를 그렸다.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삼형제의 1801년 수난은 우리 문화사에 길이 남을 명저의 탄생을 예감케 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다산 정약용은 정조의 총애를 받은 뛰어난 신하였다. 이러한 그의 명성이 오히려 화를 불렀다. 뛰어난 재주는 질투와 모함을 낳게 마련이다. 1801년 신유박해로 약전은 아우 약용과 함께 유배 길에 올랐다. 약용은 장기를 거쳐 강진에 유배됐고, 약전은 흑산도에 유배됐다.

    시련은 명작을 꽃피우고

    약전은 절해고도 흑산도에서 ‘자산어보’를 저술한다. ‘자산어보’는 약전이 흑산도 근해의 수산생물을 실지로 조사, 채집하고 분류하여 각 종류의 명칭 분포 형태 습성 및 이용에 관해 상세히 기록한 우리나라 최초의 수산학 관계 명저다. 약전이 유배지에서 살면서 먼 바다를 바라보고 오지도 않을 구조선을 기다리며, 신세 한탄만 했다면 시대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약전은 비통에 찬 세월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가장 가까이 있는 바다로 걸어 나갔다. 바닷가를 걷고, 바닷물에 손을 담그면서 그 걸음걸이로 16년의 세월을 견디다 세상을 달리했다.

    18년 유배지 생활을 견뎌내며 저술한 정약용의 방대한 저서는 오늘날까지 우리 학문의 자존심으로 남아 있다. 다산의 많은 저서 중에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목민심서’도 유배지인 강진에서 씌어졌다. 베트남의 위대한 지도자 호치민도 머리맡에 두고 읽었다는 ‘목민심서’의 서문에 다산은 사마천과 비슷한 심경을 적어놓았다.

    “나의 부친께서는 성조(聖祖)의 지우(知遇)를 받아 이현(二縣)의 감(監)을, 일군(一郡)의 수(守)를, 한 부(府)의 호(護)를, 일주(一州)의 목(牧)을 지낸 바 있는데 성적이 좋았다. 용(정약용)은 비록 불초(不肖)하지만 부친을 따라다니면서 들은 바, 본 바, 깨달은 바가 있었고, 물러나와 이를 시험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유락한 몸이 되어 이를 쓸 곳조차 없게 되었다. 18년 동안 외롭고 가난하게 오경사서(五經四書)를 되풀이 연구하고 수기지학(修己之學)을 강론했다고 하는 등 배웠다고 하지만 그 학이란 반뿐이다. 옛날 부염(傅琰)은 ‘이현보(理縣譜)’를 작(作)하고 유이(劉彛)는 ‘법범(法範)’을 작하고, 왕소(王素)에겐 ‘독단(獨斷)’이 있고, 장영(張詠)에겐 ‘계민집(戒民集)’이 있고, 오덕수(吳德秀)는 ‘정경(政經)’을 만들고, 호대초(胡大初)는 ‘서언(緖言)’을 만들고 정한봉(鄭漢奉)은 ‘환택편(宦澤篇)’을 지었다. 모두 목민지서(牧民之書)라고 할 수 있다.”

    선대의 슬픔, 후대의 기쁨

    유배지에서 ‘목민심서’를 집필할 때의 심경과 선배들이 지은 저서를 열거한 문장은, 사마천이 울분을 참으며 선배들의 저서를 생각한 것과 닮았다.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현실의 곤궁함과 괴로움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빈고(貧苦)하고 곤궁한 괴로움이 또 그 심지를 단련시켜 지식과 생각을 깊고 넓게 하며, 인정물태(人情物態)의 진실과 거짓된 형상을 두루 알게 해준다.”

    선비로서 매서운 추위를 견뎌야 봄날의 매화향기를 품을 수 있다는 전언은, 이제 수세기를 지나 우리에게까지 왔다. 정약용의 뒤를 잇는 후학들은 이를 명심하며 공부하고 집필했다.

    우리에겐 덜 알려졌지만, 다산의 형인 정약종은 당대 가톨릭 교리를 깊게 연구했다. 천주교가 박해받을 당시 형제와 친구들이 다 배교할 때도 끝까지 신앙을 지킨 인물이다. ‘주교요지’라는 저서를 남기고 전도하는 데 최선을 다하다 1801년 대역 죄인으로 참수됐다.

    다산은 형들을 모두 잃고 유배지에 남겨진다. 이보다 더한 슬픔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우리는 다산의 슬픔보다는 그가 남긴 저서를 통해 선조의 위대한 뜻을 이어간다. 이보다 기쁜 일이 또 어디 있을 것인가.

    사마천의 사기는 중국 역사책인 이른바 ‘정사(正史)’의 원형이다. ‘사기’는 기전체(紀傳體)로 씌어졌다. 기전체에서 기(紀)는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제왕 황제로부터 한나라의 무제에 이르는 역대 왕조에 대한 기록이고, 전(傳)은 각 시대를 풍미했던 다양한 인물에 대한 기록이다. 기와 전 외에 세가(世家)는 황제를 떠받드는 여러 제후국의 역사이며, 표(表)는 연표이고, 서(書)는 경제 법률 등 각 분야의 제도를 기록한 책이다.

    ‘나의 고통이 그리 심한가?’

    기는 본기(本紀), 전은 열전(列傳)이다. 본기 12권, 표 10권, 서 8권, 세가 30권, 열전 70권으로 이루어져 모두 130권이다. ‘사기’의 구성은 이후 중국 역사 서술의 표준이 되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사기’ 이후에 저술된 ‘한서’에서부터 ‘청사고(淸史稿)’에 이르는 중국 역대 왕조 정사의 원형을 창조했던 것이다.

    ② 태사공자서
    원재훈

    1961년 서울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대학원 졸업

    1988년 ‘세계의 문학’에 시 ‘공룡시대’로 등단

    저서 : 시집 ‘딸기’, 소설 ‘바다와 커피’, 산문집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 ‘불경이야기’ 등


    사마천은 중국의 역사의식이 어떻게 발현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본보기이기도 하다. ‘사기’와 비교할 만한 서양 고대 역사서로 헤로도투스의 ‘페르시아 전사’, 투키디데스의 ‘필로폰네소스 전쟁사’가 언급되는데, 그 내용은 비교할 만한 것이 못된다. 헤로도투스의 역사나 투키디데스의 역사는 일종의 견문기이기 때문이다.

    한 권의 책은 바로 그 사람이다. ‘사기’를 읽는다는 건, 사마천을 읽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어떤 역경이 있을 수 있다. 궁형을 받은 사마천의 심경을 떠올린다면 나의 고통이 그리 대단한 것일까? 설령 그와 견줄 만한 고통이라 하더라도, 주저앉기보다는 ‘사기’보다 더 위대한 저서를 남기거나, 그게 아니라면,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될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 다음 회 예고

    다음달에는 ‘화식열전(貨殖列傳)’을 이야기합니다. 고대 중국인들의 돈 버는 이야기입니다. 춘추 말부터 한나라 초까지 상공업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당대의 가치관은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비천하게 여긴 중농억상(重農抑商)이었지요. 이러한 전통적인 가치관을 부정한 사마천은 철저하게 현실을 중요시했습니다. 경제생활이 어렵다는 요즘, 고대 중국의 부자 이야기를 통해 사마천과 교감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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